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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목사 회심 282주년 기념주일설교-웨슬리 목사의 생애와 신앙과 뿌리/5월24일주/주님승천주/강단백색

작성자
박영규
작성일
2020-05-22 14:18
조회
1459
www.seouljejach.co.kr
blog.naver.com/amenpark
웨슬리목사 회심 282주년 기념주일설교-웨슬리 목사의 생애와 신앙과 뿌리

성경-로마서 1:17절

*김진두 교수님의 책 존 웨슬리의 생애에 대해서.

책을 읽고 제가 내용을 간추려 보았습니다.

김진두 교수님은 존 웨슬리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대로 묘사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생애를 통해서 메도디스트 역사와 신앙 전통과 신학사상을 엿볼 수 있게 기술하였습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재미있게 썼습니다.

존 웨슬리는 단순히 18세기 부흥운동을 이끈 전도자나 메도디스트 교회의 창시자만이 아니라 그는 오고가는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인류를 위한 진리의 사도요 성결과 사랑의 성자요 행복의 교사입니다.

제 1부 엡웟에서 옥스퍼드까지(1703-1735년)

1.영원한 고향 엡웟-어린시절(1703-1711)

1)명문가에서 출생한 존 웨슬리.

존 웨슬리는 명문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존 웨슬리 선조들의 고향인 영국 남부지방의 교회 기록이나 향토사에는 웨슬리 가가 기사도의 가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존 웨슬리의 선조들은 신앙과 경건과 학문과 시와 음악과 도덕과 충성심으로 교회와 나라를 지키며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명문가였습니다. 존 웨슬리의 선조들은 돈과 부에서 가난했으며 세속적인 명예와 권력에도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과 고독과 박해와 고난 속에서 오히려 경건과 학문과 성직을 온전히 지켰으며 후손에게 거룩한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실로 존 웨슬리는 우리 모두가 흠모할만하며 교회사에 빛나는 명문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문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인류의 사도인 존 웨슬리의 탄생을 예비하셨습니다.

2)아름다운 전원에서 자라난 존 웨슬리

존 웨슬리는 1703년 잉글랜드 북부의 링컨 주에 있는 시골마을인 엡웟에서 영국 국교회 목사인 사무엘 웨슬리와 수산나 웨슬리 사이의 19자녀 중 15번째 아이로 태어낫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엡웟 교구의 담임목사였습니다. 엡웟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네였습니다.

3)불 속에서 꺼낸 타다 남은 막대기.

1709년 엡웟 목사관에서 존 웨슬리 6세 때 불이 났는데

불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어 그의 생애와 메도디스트 역사에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4)규칙적인 생활로 훈련받은 존 웨슬리.

존의 아버지 사무엘은 영국 국교회의 목사였고 어머니 수산나는 당대 영국 청교도의 대부로 존경받고 있던 아네슬리 박사의 25번째 막내딸이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는 엄격한 규칙을 만들고 규칙대로 자녀들을 교육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어머니가 정하신 규칙에 따라서 생활하는 훈련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그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일성수

부모님께 순종

거짓말 안하기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브라더와 씨스터를 붙이기

남의 소유권 침해 안하기

시간과 약속을 정확히 지키기

회초리를 두려워하기

잘못하고 매 맞고 울 때는 소리 내지 않고 울기

경박한 말이나 장난 안 하기

간식 안 먹기

조용히 말하기

가족 기도회에 철저히 참여하기

음식을 버리거나 남기지 않기

침대보와 이부자리 교체, 옷 입고 벗기 등은 스스로 하기

등입니다.

이러한 규칙을 잘 지키면 상을 주었으며 잘 지키지 않은 때는 벌을 받았습니다.

2.세상에 나온 어린성자-

차터하우스 학교에서(1711-1720)

존 웨슬리는 10세 반이 되었을 때 어머니의 개인 지도학습을 수료하고 1714년 1월 14일 런던에 있는 사립 기숙학교 차터하우스에 버킹검 공작의 추천을 받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차터하우스에서 신학의 기초 과정과 라틴어와 성서 히브리어 성서 그리스어를 철저히 배워 어학에 능통하게 되었습니다.

3.학문과 경건과 낭만의

옥스퍼드 학생 시절(1720-1725)

1)수도원과 옥스퍼드 대학교.

존 웨슬리는 차터하우스에서 6년간의 과정을 우등생으로 마친 후 1720년 옥스퍼드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크라이스트처치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1,000권 이상의 책을 읽었으며 명랑하고 쾌활한 대학생이었습니다. 몸이 약한 존 웨슬리는 건강 규칙을 정하고 지켰으며

가난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1724년 가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고 문학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 계속 대학에 머물러 연구하여 1727년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펠로우가 되었는데 펠로우는 학자나 정교수가 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 중에서 최고로 우수한 학생이 임명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1751년 결혼할 때까지 펠로우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1726년 펠로우로 임명받던 해부터 1735년 미국 조지아로 선교사로 떠날 때까지 펠로우로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존 웨슬리가 가르친 과목은 고전 문학과 논리학 신약성서 그리스어 그리고 철학이었습니다.

2)아버지의 부목사-첫 목회.

존 웨슬리는 1727년부터 1729년 사이에 대부분의 시간을 엡웟과 루트에서 아버지의 부목사로 지냈습니다.

4.규칙이 없이는 좋은 크리스찬이 될 수 없다.

신성회 이야기(1729-1735)

1)정확하고 엄격한 옥스퍼드 메도디스트의 탄생.

옥스퍼드의 메도디스트들의 모임인 신성회는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시작하였으며 신성회는 존 웨슬리의 영적 학문적 지도력에 의해 가장 건전하고 강한 영향력을 지닌 경건 훈련 모임으로 발전하고 후에 위대한 메도디스트 운동을 낳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3-4명이 출발하였는데 1735년에는 40명까지 되었습니다.

메도디스트라는 이름은 신성회 회원들을 조롱하여 일컫는 별명으로 옥스퍼드 대학 전체로 알려졌습니다.

존 웨슬리는 이 별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 신성회의 규칙과 활동.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자기 성찰과 기도

영적 독서

영적 일기를 매일 쓰기

영국 국교회의 예배와 기도회에 참석하기

매주일과 가능한 기회에 성찬을 받음

영국국교회의 모든 법과 규칙을 지킴

매일 한 시간씩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권면함

매일 9시 오후 3시 6시에 매일 기도를 드림

모든 대화에 논쟁을 피하고 성결을 실천하였음

매주 수요일 금요일은 금식을 하되 오후 3시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음

중보기도를 하되 주일에는 동료를 위해 월요일은 학생들을 위해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드림

감옥의 죄수들을 방문하여 도움

매주 정기적으로 병든 사람을 방문하여 돌봄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돌봄

가난한 집 어린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설립하여 가르침

수입 중에서 필수적인 생활비를 제하고는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썼음.

존 웨슬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인생 목표로 정한 완전한 성결의 이상을 신성회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보려는 희망을 갖고 거룩한 시험을 한 것입니다.

신성회는 교회사적으로 이상적인 소 공동체 영성훈련의 모범입니다. 신성회는 세속 속의 수도원이었으며 신성회의 규칙과 생활은 이후에 생겨난 모든 메도디스트 경건생활에 그대로 적용 되었으며 경건과 학문과 사랑의 실천이

이상적으로 결합되고 개인적 경건과 사회적 경건이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신앙 공동체이며 현대교회의 교회 갱신의 이상적인 모델이며 메도디즘 탄생의 1단계 였습니다.

제 2부 옥스퍼드에서 올더스게이트까지(1735-1738)

1.죽음을 두렵지 않은 사람들을 만남

존 웨슬리 형제는 1735년 10월 14일

미국 조지아주 선교를 가기 위해 시몬즈 호를 타고 그레이브센드 항을 출발해서 대서양을 57일간 항해를 하면서 10월 25일 12시간 동안 폭풍을 만났을 때 존 웨슬리는 불안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는데 함께 배를 탄 독일의 보헤미아 지방에서 온 26명의 모라비아 교도들은

두려운 기색이 없이 저녁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존 웨슬리는 눈 여겨 보았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존 웨슬 리가 모라비아 교도에게 두렵지 않으냐고 물었는데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경건의 규칙과 의식을 중요시하는 외면적 신앙만 가지고는 참다운 신자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신앙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경험하였습니다.

1736년 1월 5일 오후에 조지아 주의 사반나 항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한 후로 인디언 선교의 실패 애인의 배신과 애인의 주변 사람들의 중상모략으로 1737년 12월 2일 밤중에 몰래 찰스타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조지아를 떠나며 해야 할 일을 다 못하였지만 할 수 있는 한 복음을 전하고 발에 먼지를 털고 조지아를 떠난다고 일기에

기록하였습니다.

조지아 선교의 의미와 성과는 존 웨슬리의 충성되고 창의적인 목회로 사반나의 영국인 교회가 부흥 되었으며 조지아 선교에서 가장 큰 소득은 모라비아 교인들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2.올더스게이트의 회심(1738년)

1)마음이 뜨거워지는 회심의 체험.

1738년 5월24일 저녁 8시 45분쯤에 존 웨슬리는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네틀톤 코트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신도의 기도회에 참석하여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는 중에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하였습니다.

존 웨슬리의 회심은 메도디스트 역사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 중에서...
루터는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동반된다. 오! 믿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얼마나 생생하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인지, 믿음은 내내 좋은 것 외에 다른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믿음은 결코 행해야 할 선행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질문이 던져지기 전에 선행을 이미 행하고 계속해서 선행을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무엇에 내몰려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며 자기에게 그러한 은혜를 보여주었던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곤경을 겪고자 한다. 실제로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출처-네이버 임진남목사.

제 3부

올더스게이트에서 온 나라로(1738-1791)

1.불타는 가슴-부흥운동의 발발(1738-1791)

당시 대부분의 영국 국교회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강단을 내어주지 않고 접근을 금지 시켰고 존 웨슬리도

모라비아교인들과 깊이 교제하며 확신의 교리와 회심의

체험을 설교함으로써 복음주의자로 인식되어 1738년 말에는 영국 국교회의 강단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존 웨슬리는 거리의 전도자가 되어 야외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의 중심 내용은 칭의, 신생, 성화였습니다.

존 웨슬리의 거리 설교를 듣고 병자들이 낫고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으며 온 영국으로 부흥운동이 퍼져나갔습니다. 존 웨슬리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디든 간다며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주장하며 거리에서 설교를 할 때 진동, 넘어짐, 경련, 방언, 환상, 꿈, 예언, 입신, 신유, 귀신추방 등 신비한 현상과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2.고난과 영광(1738-1791)

존 웨슬리가 미쳤다고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와 메도디스트는 미치광이라는 세상의 비난과 핍박이 있었고 폭도들이 만행을 저질렀으나 존 웨슬리의 사랑으로 폭도들이 무릎 꿇고 회개를 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52년 간 18마리의 말을 부렸으며 말 위에서 책을 읽어 감리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770년 이후에는 메도디스트들의 선한 생활이 영국사회에 인식되면서 비로소 존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이 환영과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술주정뱅이와 수많은 어린이들과 노동자, 죄수, 군인들이 회심하여 영국 사회가 변화 되었습니다.

1)속회 탄생

속회는 1742년 브리스톨 신도회에서 처음 생겨났으며

존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야외설교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니콜라스 신도회와 볼드윈 신도회가 부흥되는 것을 보고 이들이 모일 수 있는 집을 건축하고 뉴 룸(New Room)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집은 최초의 메도디스트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1명이 성도 11명을 돌보고 존 웨슬리에게 보고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속회로 발전하게 되어 존 웨슬리가 신도회를 돌보고 지도하는 목회적 제도로 채택하여 이 제도를 속회라 하고 지도자를 속장이라고 불렀습니다. 1742년 말에 이르러서 속회는 메도디스트 신앙과 생활훈련을 위한 핵심기구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속회는 모든 신도의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신앙훈련 기구였습니다.

제 4부 온 나라에서 온 세계로(1738-1791)

1)존 웨슬리도 예정론을 믿었는데 창세전 이중 예정론은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인 만인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적 예정 즉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도록 인류 구원의 계획을 예정하셨다고 믿는

성경적 예정론을 믿었으며 구원사업을 위한 섭리 적 예언

즉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민족이나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다고 믿었습니다.

2)48세 노총각과 41세 과부의 위험한 결혼.

그레이스를 잃은 지 18개월 만에 3명의 자녀를 둔 41세의 과부 여인 메리 바질과 결혼을 하여 불행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존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로 사랑의 성자로

선을 행하며 기독교의 진리를 실천하며 복음과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는 라틴어로 대화를 할 정도로 어학에 능통하였으며 1,000권 이상의 책을 읽어 넓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391권의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살아있는 사도 요한으로 맑고 소박하고

경건한 얼굴과 정확하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며 어린이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88세까지 장수하며 순회하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복음의 사도이며 사랑의 성자 행복한 교사였습니다.

존 웨슬리가 세상을 떠난 해 1791년도에 메도디스트 신도 수는 30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미국의 메도디스트 선교의 시작은 1735년 존 웨슬리 형제에 의해 시작이 되었으며 1760년 최초로 미국에서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조직된 것은 영국에서 이민 간 평신도 메도디스트에 의해서였습니다. 이들은 신도회를 조직하고 속회를 만들어 부흥이 일어나자 존 웨슬리에게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호소하여 조셉 필모어와 리처드 보드만을 평신도 설교자로 파송하였습니다. 이들은 존 웨슬리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서 말을 타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순회 전도를 하여 영국에서 일어나는 부흥운동이 미국에서도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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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두 교수님의 웨슬리의 뿌리 책을 읽고서

중세부터 끊이지 않고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문을 이어 내려온 웨슬리 가문은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에 충성한 선조들에게서 웨슬리 형제가 나왔다는 사실은 아주 감동적입니다.

선조들과 부모인 사무엘과 수산나를 통해 신앙의 영향을 받아 존 웨슬리 형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교육에 의한 것이라는

존 웨슬리의 말이 사실로 입증되었으며 어머니 수산나가 메도디즘의 어머니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웨슬리의 선조들은 5세기 초 영국에 정착한 색슨족이라고 하며 원래 웨슬리 선조의 고향은 영국 남부의 서섹스 주였는데 1066년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16세 이상 남자는 모두 전사하여 이 때 웨슬리가의 한 과부가 아들 딸들을 데리고 서머세트주 지방의 작은 마을로 도망하여 숨어 지내며 자녀들을 키웠는데 그 마을 이름이 웰스웨인데 이 마을 이름이 웨슬 리가 이름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1539년부터 웰슬리라고 부르다가 웨슬 리가 된 것입니다. 웨슬리의 선조들은 중세부터 존경받는 기사 가문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의 고조부 허버트 경은 경건과 학식과 덕망으로

당대에 존경 받는 인물이었으며 증조부 바톨로뮤는 국교회 성직자요 의사였으며 조부 존은 옥스퍼드를 나왔으며

성직자로 개혁자로 비국교도 목사였으며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옥스퍼드대를 나와 성직자, 신학자, 시인, 국교회 목사였으며 존 웨슬리도 옥스퍼드를 나와 국교회 성직자

신학자, 옥스퍼드 대학 교수 , 메도디즘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외조부 사무엘 아네슬리는 청교도의 대부였습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아네슬리는 1669년

1월 20일 런던에서 태어낫는데 아버지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첫 부인이 아기를 낳다가 죽어 두 번째 결혼하여 두 번째 부인이 2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수산나는 막내로 태어낫습니다. 수산나가 19명의 아이를 낳은 것은 어머니의 다산의 실력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아네슬리가 24명 만 낳았다면 수산나도 존 웨슬리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산나는 책을 많이 읽었으며

13세에 비국교도에서 국교도가 되었으며 수산나는 외모와 내면이 모두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1688년 사무엘과 결혼하여 1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청교도 신앙으로 자녀들을 훈련 시켰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을 엄격하게 규칙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가족 기도회를 드렸으며 자녀들과

상담을 하고 편지로 자녀들과 소통하였습니다.

수산나는 자녀들에게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가르치고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성찰하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수산나는 여성 최초의 설교가라 불릴 정도로 설교를 잘 하였으며 존 웨슬리의 신성회를 위해 웨슬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편지로 격려하였습니다.

수산나는 1735년 65세에 과부가 되어 자녀들의 효도를 받으며 살다가 1742년 7월 23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742년 8월1일 존 웨슬리는 어머니 장례식을 직접 주례하며 요한 계시록 20:11-12절 말씀을 설교하였습니다. 수산나는 진정한 청교도의 딸이었으며 그리고 진정한 메도디즘의 어머니 였습니다.

*서울제자교회 담임목사 박 영 규
*동대문교회 남은자들 지도목사
*한국 위안부 소녀기념교회 설립추진목사
추진위원 서부연회 총무 배성기 목사/전 민주연구원장 김민석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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