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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로마서 12:1-2)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0-04-01 12:38
조회
1221
바울은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한다.
“그러므로”(운, οὖν)에 대해 (1) 11:36을 받는 것이라는 설(Tholuck, H. A. W. Meyer),① (2) 로마서에서 지금까지 논해 온 교리 전부를 받는 것이라는 설,② (3) 양편을 다 받는 것이라는 설③ 등이 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가 1-12장의 요약이라 할 수 있으므로 대다수 학자들처럼 (2)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들(οἰκτιρμών τού θεού)이란 영원 불변한 사랑의 본질을 지니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과 성령의 능력으로 성결의 삶을 누리게 된 것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후사로서 영화가 보장된 사실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골 3:12).
“너희를 권하노니”의 “너희”는 앞의 형제들, 즉 로마 교회의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권하노니”는 파라칼로(παρακαλώ)로서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 위해 부른다는 뜻인데, 특히 그에게 도움이 되도록 말하고 권고하고 훈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R. C. H. Lenski). 따라서, 이 낱말은 강권적인 명령이라기보다 간청 또는 탄원의 의미가 강하다}(엡 4:1의 주석).
밤비(J. Barmby)는 “바울은 모세가 율법 안에서 한 것처럼 명령하지 않는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같은 종으로서 권면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벤겔(J. A. Bengel)은 더욱 간결하게 모세는 명령했고, 바울은 권면한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얕은 지식이나 한계적 경험을 근거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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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in 김선운.
2) J. Calvin, J. A. Bengel, J. Wesley, W. Sanday & A. C. Headlam, “De Wette, Philippi, Hodge”(in 김선운), H. Alford, “Godet, Dennt”(in 이상근), A. Barnes, K. Barth, W. M. Greathouse, C. R. Erdman, J. Knox, E. F. Harrison, W. T. Dayton, 泉田 昭, 黑崎幸吉, 조선출.
3) “Olshausen, Liddon, Gifford”(in 김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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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책임한 권면을 일삼는 것과 달리, 바울은 많은 영적 지식이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여 권면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최대의 유익이 되는 권면은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권면이다.
“너희 몸”(τὰ σώματα ὑμών)에 대해 “마음”과 대조되는 것으로서의 몸이라는 설④과 마음을 포함한 인격이라는 설⑤이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라고 한 것을 보아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인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마음이 포함되지 않는 예배 곧 예배자 자신이 드려지지 않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받으실 리가 없다.
“몸”은 1:24의 주석을 보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의 “거룩한”은 하기안(ἁγίαν)으로서 ‘순결한’, ‘순수한’, ‘거룩한’, ‘흠이 없는’ 등을 뜻한다. 이는 이교의 제물과 대조하여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산 제사”는 투시안 조산(θυσίαν ζώσαν)으로서 구약성경의 죽은 제물, 즉 율법의 규례에 맞춰 제단에서 죽여 바친 제물과 대조되는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몸이 어떻게 제물이 될 수 있겠는가? 눈으로는 악한 것을 바라보지 말라. 그리하면 제물이 될 것이다. 혀로는 수치스러운 말을 하지 않도록 하자. 그리하면 제물이 될 것이다. 손으로는 불법한 일을 행치 않도록 하자. 그리하면 번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선을 능동적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손을 펴서 구제해야 하고, 입은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야 하며, 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물은 부정한 것이 없으므로 제물은 다른 것들의 첫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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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Olshausen, Liddon, H. A. W. Meyer, Moule”(in 김선운), W. Sanday & A. C. Headlam, J. A. Bengel, 黑崎幸吉.
5) J. Calvin, “Beza, De wette, Philippi, Stuart, Hodge, Shedd”(in 김선운), A. Barnes, W. M. Greathouse, J. Wesley, F. F. Bruce, H. Alford, E. Best, J. Barmby, M. Henry, J. Knox, A. Clarke, W. T. Dayton, W. M. Kroll, E. F. Harrison “Barret, Beet”(in W. M. Greathouse), K. Barth, R. C. H. Lenski, 泉田 昭, 조선출, 전경연, 박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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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손과 발과 입 그리고 우리의 모든 지체를 하나님께 첫 열매로 드리도록 하자.⑥
기독교는 죽음 또는 무활동의 예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의 생동적이고 능동적 힘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매일매일의 생활 그대로가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롬 6:13).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거룩한 곳에서 거룩한 때에 그리고 거룩한 행위로써 행해지는 것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Schlatter).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속된 영역에서 육신적 실존을 바치는 것이다. 끊임없이 요구되는 일로서의 예배는 일상생활 안에서 일어나며, 여기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제물이요 사제이다. 여기서 모든 믿는 자의 보편적 사제직이 선포되는데, 이에 관해서 베드로전서 2:8은 심지어 성결 법전에서 취한 술어로 말할 수 있었다”(E. Ksemann).
그러한 의미에서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를 따르는 거룩한 생활보다 더 귀한 예배는 없다(고전 3:16-17, 6:19). 그러나 이 말은 회중이 모여 드리는 예배 의식의 중요성을 배제 또는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특징이 있다. 의식을 따른 공동 예배와 생활의 에배는 구분될 뿐이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참된 예배자는 살아 있는 순교자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바울 자신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⑦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빌립보 교인들의 선행에 대해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9)라고 하였다.
“드리라”는 파라스테사이(παραστήσαι)로서 ‘제시하다’, ‘바치다’, ‘양도하다’, ‘굴복하여 따르다’ 등을 뜻한다. 특히, 이 낱말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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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in H. Alford.
7) 저자의 고린도전서 15:31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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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처분대로, 또는 죄의 처분대로 자신의 몸을 내어놓는다는 사상을 표현할 때 쓰인다(참조: 고후 4:14, 11:2, 엡 5:27, 골 1:22, 28).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τὴν λογικὴν λατρείαν ὑμών)는 글자 그대로 ‘합당한 예배’ 또는 ‘합리적인 예배’라는 뜻이다.⑧ 신령한 자들이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인 “거룩한 산 제사”란 곧 영적 예배인 것이다.
“예배”(라트레이안, λατρείαν)는 9:4의 주석을 보라.
이어서 바울은 【2】또(원문 초두에는 카이, καὶ가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 세대”(τῷ αἰώνι τούτῳ)의 {“세대는 아이온(αἰών)으로서 원래 세대 또는 시기 등 시간적인 세계를 가리켰으나, 여기서는 단순히 현세를 뜻한다”(E. Huxtable). “이 말은 또한 ‘무한히 긴 시간’, ‘일생’, ‘영원’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R. T. Stamm).
“이 세대”(눅 16:8, 고전 1:20, 딤전 2:8, 6:17)는 또한 “이 세상의 세대”(엡 2:2), “현 세대”(딤전 9:7), “이 악한 세대”(갈 1:4)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저 세상”(눅 20:35) 또는 “내세”(히 6:5)와 구분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랍비의 두 세대, 즉 악한 현 세대 또는 악한 로마 제국 아래 있는 현 세대와 하나님의 의로운 메시아의 지배 아래 있는 하나님의 황금 시대인 ‘다가올 세대’라는 견해를 따른 것이다”(R. T. Stamm, C. R. Erdman).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의 시대에 대한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 시대를 뜻한다. 이와 같은 두 세대의 구분은 “시간적 구별이라기보다 오히려 영적 구별이 그 본체를 이루는 것이다”(黑崎幸吉). 다시 말하면, 내세는 영원하고 완전한 축복의 세대이며, 반면에 이 세대는 일시적인 것으로 악한 세상, 악한 체계 또는 하나님과 대립되는 생활 방식(본절, 갈 4:3)을 의미하는 것이다.
루터(M. Luther)와 헨리(M. Henry)는 이 세대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사단의 악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악한 세대라고 일컫는다고 하였다}(갈 1:4의 주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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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J. Calvin, J. A. Bengel, H. Alford, W. Sanday & A. C. Headlam, J. Barmby, W. M. Kroll, W. Barclay, 黑崎幸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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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므로(갈 1:4),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본받지 말고”는 메 쉰스케마티제스테(μὴ συνσχηματίζεσθε)⑨로서 ‘모양을 같이 하지 말라’, ‘가변적인 외형을 함께 취하지 말라’, ‘본받지 말라’ 등을 뜻한다.
결국 외적이며 지나가는 이 악한 세상의 관습이나 유행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소극적인 명령에 이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적극적인 명령을 한다. 보다 더 정확한 번역은 “오직 마음의 새로움(새로운 마음)에 의해 변화를 받아”이다.
“마음”(누스, νοὸς)은 1:28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인격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의해 새로운 마음 곧 새로운 인격을 얻은 자(고후 5:17)라 하더라도, 완전한 변화는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고후 4:16). 이것이 바로 성화 또는 성결의 과정이다.
“변화를 받아”는 메타모르푸스테(μεταμορφούσθε)⑩로서 본질 또는 내적 본성에 변화를 받으라는 뜻이다(참조: 빌 2:6). 이 변화의 주체는 내주(內主)의 성령이시다(딛 3:5, 엡 5:26, 27).
우리는 옛사람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갈 5:24), 내주하신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세상을 본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끊임없는 내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위와 같은 명령을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시고’(아가톤, ἀγατὸν: 2:7의 주석을 보라.)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텔레마, θέλημα: 1:10의 주석을 보라.)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 표현되었다.
“분별하도록 하라”는 도키마제인(δοκιμάζειν)으로서 {금속의 순수성을 시험해 보고 동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리고 충분한 함량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 낱말은 세 단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시험과 시험에 의한 증명 그리고 시험의 결과로서의 인정이다}(딤전 3:10의 “시험하여 보고”의 주석). 여기서는 세 단계가 모두 내포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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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P46, א, B*, L, P 사본 등을 따른 것(명령)이고; A, D, G 사본 등에는 메 쉰 스케마티제스타이(μὴ συνσχηματίζεσθαι: 권면)로 되어 있다”(김선운). 사본의 가치상 전자를 취한다.
10) 사본의 문제는 앞의 “본받지 말고”와 같다.

출처: 출처: 최세창, 로마서(서울: 글벗사, 2000년 2판 1쇄), pp. 441-446.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전체 주석/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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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6

  • 2020-04-01 13:17

    #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주 예수님은 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를 중시하여 참석하셨다.
    # 주님이 머리이신 하나님의 교회에 모여 예배드릴 때에는, 코로나19의 감염과 감염원이 되지 않도록 서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 2020-04-01 13:41

    처음에는 모세가 세운 장막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당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
    그리고 교회


    • 2020-04-01 14:20

      필자의 주석에 관심을 보이시고, 관련하여 의견을 표하셔서 감사합니다.


  • 2020-04-01 14:44

    어떤 이들은 초대 교회 때에는 가정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데, 실상 그 예배는 가족이 모여서 가정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믿음이 좋은 교인이 예배처로 제공한 집에서 교인들이 주기적으로 함께 모여서 드린 공중 예배이었다. 그 교회를 '집 교회'(house-church)라고 한다.


  • 2020-04-01 21:37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
    주신말씀 감사합니다


    • 2020-04-03 11:17

      필자의 주석에 공감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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