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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 시비거는? 장병선씨의 궁색한 댓글에 대한 답변

작성자
장운양
작성일
2021-01-26 11:36
조회
627
장병선 목사 잘들으시오. 내가 선택하고 가족과 합의해서 결정한 경기도 이천 오천감리교회 고 장영애 권사님의 성(張)을 따르는 것에 당신이 뭐 아는 맥락이라도 있으시오? 음험하게 눈팅하면서 감리교소식에 접속해서 단다는 글이 그 모양이오? 제발 정신차리시오. 남는 시간이 있으면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선배님이 직접 번역하신 성 프란체코의 존재감에 대해서 제대로 숙독하시오. 다음은 당신의 꺼리도 안되는 시비에 대한 답변이오. 제대로 읽으시오



이경남2019-09-12 22:49

박운양과 장운양은 어떻게 다른거요?



윤법규2019-10-02 06:18

장운양님 안녕하십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비슷한 이름이어서 제가 처음으로 님의 글에 덧글을 올려봅니다.

그런데 님께서 올리시는 글이 예전 비슷한 이름을 가지신 분과 좀 엇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예전의 그분은 아니시지요. 댓글 실명제를 실시하는 감게에서 다른 이름으로 세탁해서 글을 쓰는것은 이곳에서 불가능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님의 글을 쭈욱 읽어보면 몇년전에 강릉에서 목회하고 계신 어느분께 권투시합을 하자고 제안했던 그분과 좀 많이 유사하다는 느낌은 지울수가 없네요.

제가 잘못 생각한거라면 죄송합니다.






장운양

2019-10-03 06:09

먼저 윤법규 권사님 이름 불러 봅니다. 무지 반갑습니다. 사실 08년 9월 가처분 이후 현재까지 기감은 헤메이고 있지만 진영논리를 떠나서 저는 변재문(집사?)님^^ 아마도 현재는 권사님 아니 장로님(?)과 윤법규 권사님을 종종 떠올릴 때가 많습니다. 주마등이 파도치듯이 스쳐가는 일련의 기감사태에서 제게 또렷한 상을 눈가입혀주신 분들이지요. 변재문 권사님 아니 장로님(?)은 디테일한 맥락들에 대한 이해가 엇갈리면 서로 대립이 초래되었지만 멋진 사나이로서 존경하는 마음이 큰 분이시고 윤법규 권사님은 성실하고 꼼꼼하시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성실하게 섬기시는 분으로 늘 기억됩니다.

먼저 생물학적으로 장운양과 박운양은 동일인이 맞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 자신에게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감옥에서의 3년 세월의 심연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전신이 영등포 교도소였던 현 서울남부교도소와 남한판 아오지 탄광이라는 별칭으로 악명높은 청송교도소에서 쉽지않은 천일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아버님 박한규 장로님-경기도 이천시 오천감리교회-이 제 아버님이시고 하나님이 너무 아끼셔서 너무일찍 오이밭 양수기 펌프 전기시설에서 감전사로 하늘로 끌어올리셨던 고 장영애 권사님이 제 어머님이십니다. 두분 모두 제게는 그 이상을 갈수 없을 만큼 훌륭한 분들이셨고 무엇보다도 제게 어머니는 순교자의 결기를 물려주셨고 아버님은 늘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탁월한 책들을 참고하고 다시 현실을 마주칠 수 있는 지혜와 품성을 물려주셨습니다.

저는 2015년 6월 부터 수감생활을 시작하면서 곪아 터지게 저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다시 복기하면서 내가 왜? 결국은 감옥소안에 갇히고야 만 것일까? 무참한 시간동안 자맥질학 자맥질하면서 버티어 냈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무엇보다 내가 남성이라는 한계에 갇혀있었던 사고와 행태들의 한계와 직면할 수 밖에 없었고 적어도 내 안에 흐르는 어머님 고 장영애 권사님이 제게 물려주신 유산을 다시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의 부재와 그 계속해서 반복되는 그리움이 제게 무척 깊은 심연의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상력을 동원해서 대한민국을 모계사회로 상정해 보았고 당연히 어머니의 성씨를 자손들이 따르는 전제를 상정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꺼꾸로 보기를 하면서 저는 맥락이 모두 딱딱 드러맞는 것은 아니였지만, 이제 앞으로 허락될 삶은 좀 더 어머님의 성정으로 살아가 보자는 결심이 섰고 그것이 바울이 말한 제 가시인 지병을 다스리는 데에도 적합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지요.

사랑하는 두 딸들이 이젠 제법 커서 어른이 되어 가고 있지만, 저는 두 딸들이 예쁘고 보람찬 모습을 보일 때마다 고 장영애 권사님이 할머니로서 이 두 손녀들을 지켜보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늘 저를 불편하게 하곤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죽음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이해를 일산의 스승이신 김준우 교수님이 꾸준하게 보내주신 기사연의 저작들을 통해서 깨칠 수 있었고 매일 2시 가량 드리는 관상기도를 통해서 깊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이점에서는 기감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제시하는 정말 탁월한 朋友 사이이신 이민재 목사님과 김기석 목사님을 통해서 집중수련을 받고 체득하게 된 관상기도는 감옥소에서의 3년의 시간동안 제가 흐트러지지 않고 잡아주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서 저는 장운양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졌습니다. 물론 이미 제 페이스북 계정은 40이 넘어가면서부터 장운양이였기도 했지요. 2018년 2월 감옥소에서 나오고 나서 저는 새로운 마음으로 연대 앞 창천감리교회에서 새신자교육을 이수했습니다. 이 때 다시 글을 써봐야 겠다는 마음으로 로그인을 할 수 있는 작성란을 채웠고 시스템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기에 그대로 전화통화에서 기감의 세례교인이고 창천감리교회 소속이라고 밝히며 승인을 받았습니다.

물론 실명제가 맞지만, 이제 아는 분들은 대부분 윤법규 권사님처럼 귀엽게 눙치시는 문체로 은근모드로 옆구리를 찌르시지 않아도 ^^ 장운양이라는 필명이 이전에 박운양전도사로 불렸던 이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계시지요. 이미 윤권사님이 댓글은 그 함의의 전제를 귀엽게 깔면서 쓰신 얄밉기도 하고 예쁘기도 한 글이라 여겨집니다. ㅋㅋㅋ 나중에 관리자 조병철 목사님과 통화하면서 그냥 한바탕 서로 웃고 사정을 말하고 이미 기입되어져 있으니 그리 해보는 것으로 일단 가보도록 하십시다. 나중에 문제를 누군가 정식으로 제기한다면 이것이 이전의 장병선목사님과 원형수목사님의 어설픈 산행으로 인한 최정규(?)라는 애매한 위장필명과는 다른 차원임을 명확히 밝힌다면 저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봤고 19개월만에 이렇게 귀엽게 딴지를 걸어주시는 윤법규 권사님외에는 특별한 언급도 없었지요.


장운양

2019-10-03 06:25

강릉예향교회 김명섭 목사님과 저는 매우 많은 재미나고 기가막힌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먼저 제가 2006년부터 2010년간 감신에서 녹색살림배움터 예산을 의도적으로 무산시키기 전까지 녹색살림배움터는 서대문 지역에서 감신의 신학도들에게 자랑스럽게 학교를 소개할 수 있는 귀한 야학공간이였습니다. 저는 감신의 대선배 제가 참 존경하는 민관기 목사님이 전문가이신 심훈의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 본명 최용신 선배님을 모범을 따라서 이렇게 5년간 밤마다 7시에서 10시까지 5년 동안 방학기간 외에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학원갈 형편이 되지 않지만 성실하게 공부하려는 의지가 담임선생님께 인정받고 있던 감신앞 동명여중 1학년 학생들을 위한 국영수사과와 연극 기타 풍물 플릇 등의 특별활동까지 감당하는 [청소년 교실]과 서대문 지역 어르신 중에서 생활영어를 배우고 싶어하시는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어르신 영어교실]을 감당했습니다. 제게는 정말 가슴벅찬 귀한 시간이였고 감신과 서강대 성균관대등의 학생들도 야학교사로 함께 했어지요.

그런데, 이 매트릭스를 먼저 짜준 설계자가 바로 예향교회 김명섭 목사님의 석사학위 논문이였습니다. 이 논문은 내용 그 자체도 알토란같이 꽉차 있었지만, 매우 구체적인 적용이 가능한 논문이여서 저는 이 논문을 2005년 사랑의 조직신학회 멤버들과 같이 읽고서 이전의 서강대시절 국어 미술 야학교사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감신에서도 야학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구체적인 자신감을 얻었고 그 것이 동력이 되어서 결국은 5년동안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지요.

야학이 문을 열고 당시 최우성 목사님과 김명섭목사님과 감신 근처에서 밤을 세우며 이야기를 나웠고 정겨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후 김명섭 목사님과 가까운 사이로 지냈지요. 특히 2009년 제가 감신 방송국 후배들이 좀더 분발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좀 거친 방식으로 감신방송국 현판을 착탈해서 창문 아래로 던져 버렸습니다. 이 현판을 찾아가면 감신방송국은 살아있는 것이고 이 현판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거나 찾아내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미 2008년 9월 기감 가처분 사태가 소용돌이 칠때 감신학보 후배들이 너무 한심해서 학보사 현판을 착탈해서 제 야학교무실 마루밑에 넣어 두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절망적이게도 감신학보 후배들은 아예 현판을 잃어버린 것도 모르는지 찾지도 않고 그냥 세월 속에 뭍혀버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내는 것을 보고서 절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현판은 옛 녹색살림배움터 마루밑에 그대로 있을 겁니다. ㅠㅠ

이때 엄청난 대립이 일어났고 방송국친구들이 뭉치기 시작했고 선배들에게 알렸고 저는 있는 그대로는 당시 감게에 적었지요. 거이 현장중계수준이였습니다. 일련에 제가 2000년 11년 인생후배들과 감신 신학과 새내기로 출발해서 인연이 있었던 선배(00학번 이전)감신의 감신방송국 선배분들이 제 야학교무실에 집단적으로 찾아와서 매우 심한 대립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후 대자보 논쟁이 있었고 교착상태로 시간이 가고 있을 때, 감신방송국 후배들의 대선배가 바로 김명섭목사님이 셨습니다. 이미 제가 업로드한 글에서 유투브영상을 통해서 보시면 아시듯이 김명섭목사님은 탁월한 방송진행자이고 유투버이시기도 합니다. 그전에 탁월한 설교가이시기도 하고 생명나무(?) 출판사에서 펴내신 인문학적 성찰과 신학적 인싸이트 그리고 평신도의 눈높이의 성숙을 위해서 참 잘쓰신 책의 저술가이시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코 과찬이 아니고 이미 아시는 기감의 목사님들은 김명섭 목사님이 기감 미래의 훌륭한 대안이 되고도 남을 것을 확신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당시 김명섭 목사님은 양쪽진영을 오가시면서 너무 훌륭하게 타협점을 찾으셨고 서로 같은 날 공개사과문을 감신공동체 앞으로 올리는 형식의 대자보로 깔쌈하게 마무리하게 되었고 이후 감신방송국 후배들과는 서로 크고 작은 행사를 함께 협력하면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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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양

2019-10-03 06:42

그런데, 2013년 원형수 목사님발 해괴한 태풍이 호선부터 몰아치기 시작하면서 ....











윤법규

2019-10-03 10:10

박운양 전도사님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박 전도사님이 그동안 감게에 안보이셨던 이유도 위와 같은 이유가 있었던거군요.
제가 박 전도사님과는 감게에서 거의 말을 섞은적이 없다보니 그다지 생각나는 추억이 없군요.
그래도 제 질문에 답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민관기

2019-10-03 19:14

장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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