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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3:18(…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0-10-24 09:56
조회
127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고 말한 베드로는 그 까닭(원문의 18절 초두에는 호티, ὅτι가 있다.)에 대해, 【18】[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ὅτι καὶ χριστὸς ἅπαξ περὶ ἁμαρτιών ἀπέθανεν)는 p72, א, A, Cvid, Ψ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B, K, P 사본 등에는 [죽으사](아페타넨, ἀπέθανεν) 대신에 “고난을 받으사”(에파텐, ἔπαθεν)로 되어 있다.① 대체로 신약성경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그분의 죽음을 포함시키므로, 어느 쪽을 취하나 의미상에 별 차이는 없으나 후반부의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를 보아 개역 한글판 성경처럼 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한 번]은 하팍쓰(ἅπαξ)로서 ‘단 한 번’, ‘단번에’, ‘결정적인 한 번’, ‘비길 데 없는 한 번’, ‘모든 것을 위하여 한꺼번에’ 등을 의미한다(롬 6:10, 히 7:27, 9:12, 26, 28, 10:10).
[죄를 위하여 죽으사]의 [죄를 위하여](페리 하마르티온, περὶ ἁμαρτιών:죄에 대하여)는 속죄제를 표현하는 통례적인 구절이다(레 5:6, 7, 6:24, 30, 겔 43:21).
여기의 {“죄에 대하여”는 그리스도 자신의 죄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인류의 죄를 상대하여 완전히 청산하신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후서 5:21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였다. 도드(C. H. Dodd)는 “결정적인 싸움에서의 죄의 완전한 참패이다.”라고 하였다. 그 방법이 곧 십자가에 달려 단 한 번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레위적 희생 제사와의 중대한 대조점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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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K. Aland, et al.,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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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속죄법에 의하면, 죄인은 소와 양 등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침으로써 사함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속죄 제물은 죄를 범했을 때마다 바쳐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 속죄 제사는 속죄의 효력이 없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의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이다. 따라서 그를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율법이 규정하는 제사법 아래 매이지 않는 것이다(참조: 히 7:27, 9:12, 26, 28, 10:10)}(롬 6:10의 주석).
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것이다. 이 말은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행 3:14, 7:52, 22:14)께서 인간의 죄와 죄로 말미암은 고난 그리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속하신 사실을 설명한 2:21-24의 인용문을 함축한 것이다(2:21-24의 주석을 보라).②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고난과 죽으심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인 것이다.
[우리를](헤마스, ἡμάς)은 אc, A, C, K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p72, B, P, Ψ 사본 등에는 “너희를”(휘마스, ὑμάς)로 되어 있고; א*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사본의 가치상 개역 한글판 성경처럼 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인도하려]는 프로사가게(προσαγάγῃ)로서 유대와 헬라의 배경을 가진 말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모세가 제사장이 될 아론과 그 아들들을 하나님께 데리고 오는 것에 사용되었고(출 29:4), 또 제물을 하나님 앞에 끌고 오는 것에 사용되었다(레 3:12).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모든 사람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되어 주셨으므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이다(롬 12:1).
헬라어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말이다. “왕궁에는 프로사고게우스(Prosagõgeus), 즉 ‘안내자’, ‘면회 허용자’(the giver of access)라고 불리는 관직이 있었다. 그의 임무는 왕 앞에 가까이 가도 좋은 사람과 가까이 가서는 안 될 사람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그는 소위 접견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행한 일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며, 하나님께 접근시키며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W. Barc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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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자의 로마서 5:6-10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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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토양 위에서 자란, 헬라어 사용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동사인 ‘인도한다’(프로사게인, προσάγειν)에는 풍부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TWNT Ⅰ. 131-34를 참조하라). 그것은 사람을 법관석 앞으로 데려오거나, 그를 궁전으로 배알케 함을 의미할 수 있었으며, 혹은(고전 헬라어나 칠십인역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사람들의 헌신(예: 출 29:4, 8, 40:12, 레 8:24, 민 8:9)을 의미할 수 있었다. 전자의 경우(법관석 앞으로 데려옴)는 본절의 문맥상 부적절하게 보이지만, 저자는 봉헌과 희생의 이미지를 의중에 두었을지 모른다”(J. N. D. Kelly).
신약성경의 용례를 들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다고 하고(롬 5:2),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다고 하며(엡 2:18), 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다고 한 구절(엡 3:12) 등이 있다.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요(요 14:6) 문이시다(요 10:9).③
그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육체로는](μὲν σαρκί)의 [육체]는 1:24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및 인간으로서의 존재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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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 N. D. Kelly: 이러한 비유적인 표현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편집자들은 구원자인 신(savior-god)이 죽음을 통과하여 입회자들의 손을 잡고 지고의 하나님 존전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신비종교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본 서신의 저자의 사고 세계(thought-world)와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그러한 종교에 호소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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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는](τῷ πνεύματι)의 [영]에 대해서는 (1)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성(이상근) 또는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설,④ (2) 그리스도의 영 또는 정신이라는 설(C. Bigg),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 또는 신성이라는 설(A. Barnes, “Greijdanus”,⑤ R. C. H. Lenski), (4) 부활하신 생명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라는 설(E. A. Blum), (5) 그리스도의 신적인 권능과 성령의 능력이라는 설(J. Wesley), (6) 신적인 생명 원리라는 설(A. M. Hunter, “H. R. Mackintosh”⑥), (7)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간적인 영이라는 설(B. C. Caffin, A. M. Stibbs), (8) 성령이라는 설⑦ 등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본서는 물론, 신약성경 특히 바울 서신에서는 영과 육의 구분이 전적으로 구약성경적이며, 영과 육에 대한 헬라적인(궁극적으로는 플라톤적인) 이분법과는 상관없다는 점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이지(1:3), 어느 한 부분은 죽고 다른 한 부분은 죽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1:3의 주석을 보라). 그러한 점들과 다음 구절을 보아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성령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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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M. Henry, H. Alford, “Thayer”(in A. T. Robertson), A. T. Robertson, C. R. Erdman, J. N. D. Kelly.
5) in 박윤선.
6) in A. M. Hunter.
7) J. Calvin, A. Clarke, A. R. C. Leaney, F. J. Dake, A. Mason, M. Bentley, S. W. Paine, J. N. D. Kelly, B. C. Chapman, I. H. Marshall, L. Goppelt, 박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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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야고보서․베드로전후서(서울: 글벗사, 2001, 3판 1쇄), pp. 446-450.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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