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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들(신학자, 신학교 교수, 교역자, 교인들)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0-10-21 13:55
조회
550
<마가복음 14:66-72>

66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67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 쌔 69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70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71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닭이 곧 두 번 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1. 시작하는 말

각 분야의 고위층 중에는, 힘들여 얻은 자리를 비리나 뇌물수수나 부정축재의 자리로 이용하다가 옥살이를 한 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노름하는 자리에 잠깐 앉아 보기만 한다고 했다가 결국 자동차를 날려 버리고, 되찾겠다고 하다가 집까지 날려 버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도 계속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권사님은 교회보다도 노름하는 자리에 더 많이 앉곤 했는데, 허리통증으로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후, 입원 중이던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지는 바람에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놀랍게도 노름하는 자리에 또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교직에 있어야 할 사람이 벼슬자리에 있는 바람에, 자신도 국가도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와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제 자리에 없던 베드로의 예수 부인과 구원의 말씀

예수님이 체포되고,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집에서 불법 재판을 받으실 때의 일입니다. 도망쳤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잡혀가시는 예수님을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의 아래 뜰에 있었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불법 재판에 의해 무고한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고, 수모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서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처했더라도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궁지에 몰리신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예배를 받으시겠다고 하시는 중요한 시간에도, 교회의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는 교인들은 더더욱 베드로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용기라는 게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깨닫고, 언제나 자기가 아닌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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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있던 자리는,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둘러서서 불을 쬐고 있는 뜰이었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을 유일무이한 구주로 믿고 변호하거나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형당해 마땅한 메시아 사칭 죄인이라고 비방하며 조롱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는 베드로와 같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예수님의 기적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과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시고, 외롭게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며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주 예수님이 계신 자리에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한 나뭇가지가 다른 나무에 접목되어 그 나무로부터 영양분과 수분 등을 공급받아 살면서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주 예수님 안에 연합하여 살면서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떠난 자리는 아무리 좋은 자리라 하더라도, 사단의 시험과 공격의 좋은 표적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사단의 시험과 공격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의 조건이 갖춰진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 그것도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따먹게 한 사단을 이길 인간은 없습니다.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를 주목하던 대제사장의 한 하녀가,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도저히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침묵하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고비를 넘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비겁하게 부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라고 하면서 앞뜰로 피했습니다. 입으로 주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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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31을 보면, 바로 그 입으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큰소리를 쳤었습니다. 그런데 위기에 처한 자신만 생각하느라, 큰소리친 사실을 하루도 안 되어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때 그는 주 예수님을 망각했습니다. 마가복음 14:30의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경고의 말씀도 망각했습니다. 눈앞에서 주 예수님이 부당한 불법 재판을 받고 계셨지만, 수제자인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주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펜실바니아 주의 강물을 막고 있는 댐을 조사한 기술진들은 그 댐이 안전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주민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다음 해에도 조사반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여러 차례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위험이 아니냐? 작년에도 경고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지 않냐?” 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경고가 있은 지 보름도 못 되는 1889년 5월 31일에, 그 거대한 댐은 결국 장맛비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2200명의 주민이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전문가들의 경고를 묵살하는 것도 그토록 끔찍한 재앙을 초래하는데, 전지전능하신 주 예수님의 경고를 묵살하거나 망각한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그 실례로, 하나님의 경고를 묵살한 사람들이 겪은 홍수 심판과 소돔‧고모라 성의 불 심판을 들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궁지에 몰린 바람에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오늘날 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제일 먼저 부인되는 것이 누군지 압니까? 무엇인지 압니까? 바로 주 예수님이시고, 바로 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평일은 그만두고, 주님께 예배드리는 날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과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 교회에 가는 것과 생신 등의 행사에 참가하는 것,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친목회원들과 여행, 주님께 바치는 헌금과 돈 버는 일, 주님과 영적으로 친교하는 일과 유력한 인사들과 어울리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어느 쪽을 부인합니까? 마음은 다른 자리에 있으면서 예배하는 교인도 있고, 마음은 다른 자리에 있으면서 설교하는 설교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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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평소에는 전지전능하시고, 해결 못하실 것이 없는 주님이시라고 하다가도, 막상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가장 먼저 부인되는 것이 그 주님이요, 그 주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잘 알지 않습니까? 옆에서 보면 애가 탈 지경인데도, 정작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당사자는 기도도 하지 않고, 경고의 말씀조차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늘 주님과 함께하시고, 주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피했지만, 시험은 계속됐습니다. 하녀가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그 당이라”라고 했습니다. 또 베드로가 부인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됐습니다. 이번에는 곁에 있던 사람들까지, 갈릴리 사람인 걸 보니 진짜 예수의 당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베드로는 사면초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 예수님의 제자임을 당당하게 고백하고 나설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한때 자신의 입으로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던 대상인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뗐습니다.
저도 신학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한동안 시험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라는데 말이 되는 소리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고 하는데 정말일까? 다른 종교를 믿거나, 양심대로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교회에 다니던 나를 놀리면서 한 중‧고등학교의 친구들의 말이 맞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고학하면서까지 신학대학을 다닐 필요가 있을까? 자퇴를 할까? 휴학을 할까?‘ 심각한 고민 중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대 성인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을 추종하는 사람들처럼, 예수를 단순한 성인이요 위대한 스승으로 여겨 추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고, 유일한 구주로서의 예수를 부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3을 보면, 주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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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자 베드로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베드로의 가장 강력한 세 번째의 부인이 끝나자마자 주님의 말씀대로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누가복음 22:61을 보면, 그때에 주님이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주님의 시선을 받는 순간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시험에 완전히 걸려 넘어진 다음에 비로소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양심을 붙잡고 괴로워하다가 자살로 멸망한 가룟 유다와 달리, 주님의 말씀을 붙잡은 덕에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 수제자로서의 명예 회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3.. 맺음말

디도서 1:16을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나, 행위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고, 심지어 교역자들과 신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도 가정생활과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수없이 주님을 부인하고 있다면,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과 자리를 같이하고, 주님을 시인하는 언행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잠언 3:6을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설교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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