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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성이다

작성자
이주익
작성일
2021-01-26 19:41
조회
839
1. 들어가는 말.

땅의 권세와 질서가 별다른 저항 없이 해체되는 때에, 방향과 궤도와 공감을 제시(提示)해주는 벡터 리더십(Vector Leadership)이 나오지 않아 곳곳에서 아우성이다.

이 같은 탄식(歎息)이 개신교 공동체에서 더욱 윙윙대지만 바루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

지도력(指導力)이란, 조직체 안에서 개인 대 구성원 간에 활력 있게 행해지는 인격적인 관계로, 쌍방의 전이적(轉移的)인 특성이 포함되는 행위이다.

2. 본 말.

이제부터, 우리 삶의 모범이 되시고 최선의 지도적 역량을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솔법(統率法) 가운데 긍휼(Compassion)에 관련한 리더십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문으로 긍휼(矜恤)이란, ‘자랑할 긍(矜)’=(불쌍히 여김, 아끼다)에 ‘구휼(救恤)할 휼(恤)’=(불쌍히 여기다, 사랑하다) 인즉, ‘불쌍히 여겨 도움’이라고 정의된다.

히브리어로 긍휼은, ‘라함'인데 동정을 베푸는 것, 인정이 많은 것, 용서하는 정신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태하는 것이란 뜻이 있다.

구약 성경에서는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에 대한 사랑의 태도, 어버이의 사랑, 혹은 골육 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헬라어로 긍휼은, ‘ἔλεος’(엘레오스)인데 자비 동정심, 은혜, 친절이란 의미를 갖는다.

긍휼(慈悲)은 타인의 고통과 상처와 슬픔을 내 심령 속에서 느끼는 유기체적 자각이고, 행동 이전에 내 속에서 느끼는 마음의 움직임인 즉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근거이다.

하나님은 신실함(言約)과 자비로운 도우심을 뜻하는 인애(仁愛) = 친절, 인자, 자비, 자애, 어진 마음으로 남을 끝까지 사랑하고 기다리는 마음 = 라는 확고한 사랑(자비와 심판)으로, 이 언약을 유지시켜 나가셨다.

성경에서의 긍휼은, 자애(慈愛, Loving kindness)와 통하는 인품으로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이며,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통솔력으로, 그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긍휼은 결코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지 않으셨다. 그분은 개인과 청중을 가리지 않고 어진 성품(性品)에서 한결같이 긍휼을 베푸셨다.

그리스도는 무거운 짐에 억눌린 자, 병든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잃은 양을 사랑하며 찾아 나섰고, 그 딱한 사정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고 느끼는 지도력에 탁월하셨다.

그분은 불신자를 포함하여 모든 대중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영적인 굶주림까지 채워주셨다.

그분은 민중을 볼 때에 목자 없는 양같이 쇠잔(衰殘)한 모습으로 보셨다.

그리스도의 지도력은 철저히 사랑의 리더십이었다. 그분은, 화평과 기쁨과 사랑을 사용하셨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근본 하나님의 본체(本體)이시나, 그의 권한을 육적(肉的)인 목적을 위하여 단 한 번도 남용(濫用)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오직 사랑과 인내로써 수척해진 인생들을 아껴주셨고 살려주셨다. 그리하여 최후에 승리(勝利)하셨다.

3. 나오는 말.

긍휼을 목표로 삼고 즐거운 심정으로 시행하면, 내 영혼(靈魂)이 이롭고 하나님 앞에 값지다.

우리는 그날에 그리스도의 긍휼을 얻기 위해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의 형제, 위험에 처한 이웃, 가난하고 빈궁한 자들,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와 같은 사람들, 여호와의 규례를 행하는 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동물(動物)의 생명(生命)도 돌볼 수 있는 긍휼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도우심의 은혜가 독자들에게 가득하길 축원한다.


2021년 1월 26일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



전체 4

  • 2021-01-26 22:24

    후학이 이주익 목사님의 글에 대해서 늘 놀라운 것은 한자실력이 우선입니다. 또한 한국교회사가 포월된 한국감리교회사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깊은 통찰을 제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주익 목사님의 글은 자주 접하지는 못하지만 감리교소식란의 보석이라고 봅니다. 타자를 하시면서 일일이 한자키를 누르시고 검색하시면서 하나씩 올려주시는 그 귀한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의 감신의 스승분들이 존경스럽고 그래서 이주익 목사님과 함께 감신에서 부름받아나선이몸을 부르면서 치열하게 신학도의 삶을 채우셨던 분들이 부럽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제 변선환학장님의 신학은 시나브로 접어두고 해천 윤성범 학장님의 성의 신학를 비롯한 텍스트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윤성범 학장님이 강의는 평범하게 하셨지만 책은 참 깊이있고 철철하게 쓰셨습니다. 한문실력도 높으셨지만 저는 이분이 독일어 뿐만 아니라 불어도 자유자재로 활용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저는 한국신학계에서 윤성범학장님의 최고의 반열에 오를만한 천재셨다고 봅니다. 귀한 글을 읽으면 후학이 감동해서 몇자 남깁니다. 앞으로도 꾸준하게 강건하시고 건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 2021-01-27 19:06

    장운양 전도사님. 안녕하세요?
    장 전도사님이 둘러보고 조사에 나타난 수집력 위에 뛰어난 판직의 발본이 효력을 발휘하는 바 지대하오나, 다양한 성질이 발산되는 흡역린이 촉발될 수 있고, 노심에 메일 가능성이 있는 글들은 털어내는 처세가 유약이 되리라 생각되어 파전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승을 빕니다.


  • 2021-01-27 20:12

    이주익 목사님의 귀한 권면에 경의를 표합니다. 최근에 저를 아껴오셨던 분들의 권면에 이제 저도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스면서 노심에 메일 가능성이 있는 글들을 털어내는 처세가 유약이 되리라 생각되어 파전하는 충고의 말씀을 귀하게 듣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런 귀한 권면을 통해서 그동안의 글쓰기를 뒤돌아 보고 이주익 목사님이 제시하시는 올곳으면서 포월하는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워밍업 중입니다. 직타로 가기보다는 이심전심의 소통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귀한 권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ㄱ꾸벅 ^^


  • 2021-01-29 10:27

    1세기 랍비들이 남긴(Talmud Babli, shabbath 133b) 고전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아버지께서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시듯이 “너희들도” 그를 닮아 자비롭고 긍휼이 많아라.
    보냄을 받은 자의 신앙은, 이와 같이 “보내신 이를 본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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