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18-23(설교: 정말 주 예수를 믿는가)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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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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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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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구세주 예수[1:18-23]
앞(1:15-17)에서 그리스도와 우주의 관계를 논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음으로 구속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관계에 대해 【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스(ἐκκλησίας)로서 바울 서신에 60회 정도 나온다(W. Barclay).① 이 낱말의 히브리어적 배경으로 ‘카아할, ghl’(창 49:6, 출 12:6, 민 14:5, 신 5:22, 겔 23:24 등)과 에에다(ēdhh’가 있다. 전자는 ‘부름을 받은 모임’, 후자는 ‘지명된 모임’의 뜻으로 다 같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 또는 선민 자체를 가리켰다.
신약성경에서 그 낱말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소환된 사람들의 모임, 특수 지역의 거주민들로부터 모집된 믿는 자들의 공동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P. S. Minear).②
바울이 교회를 몸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비유한 것은 우주와 새 창조인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의미하는 것이다(엡 1:22). 우주를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야말로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최고 최대의 은사이다. 따라서,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롬 5:17, 계 20:4, 6. 참조: 창 1:26-28). 이 점에 대해 {스코트(E. F. Scott)는 “교회란 그리스도께서 우주적 능력을 행하시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의 절대성은 교회 안에서 보이는 독특한 양식으로 나타난다.”라고 하였다}(엡 1:22의 주석).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라고 한 것은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기적 연합이라는 특수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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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Barclay,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기산 역(서울: 기독교문사, 1973), p. 262.
2) P. S. Minear, “Church, Idea of” in the IDB, Vol. 1(New York: Abingdon Press, 1962), pp. 608-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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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엡 2:16, 4:4, 12, 16, 5:30, 롬 12:5, 고전 10:17, 12:27, 골 1:24, 2:19). 이 연합은 머리가 몸의 모든 지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배에 의해 움직여지는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의 연합이다. 또한, 머리의 지배를 받는 지체가 제 기능을 잘 발휘하도록 다른 지체도 덩달아 보조 역할을 하는 것처럼, 교회도 어떤 기관과 부서가 각자의 기능을 잘 발휘하도록 다른 부서와 기관 역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보조 역할을 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일반 단체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분여받은 지체로서(고후 4:10, 갈 2:20, 골 3:3, 요일 5:11-12) 그리스도의 지배에 의해 움직이는 산 공동체라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대해서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설명하였다.
근본이란 아르케(ἀρχή)로서 시간이나 공간 또는 연속의 ‘처음’, ‘통치’, ‘탁월’, ‘수위’(首位), ‘주권’ 등을 의미한다(요 1:1, 벧후 3:4, 계 3:14, 21:6, 22:13). 특히, 이 낱말은 “기원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처음’을 뜻한다. 즉, 무엇인가가 발생하는 근원이고,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이다”(W. Barclay).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 즉 창조 행위와 새 피조물인 교회의 아르케이다. “그리스도는 권위와 능력의 근원이시며, 우주의 질서를 세우시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계획된 모든 것을 시작하신다”(A. Barnes).
헬라어 본문에서 아르케(근본)란 낱말과 동격으로 쓰이고 있는 먼저 나신 자(1:15의 주석을 보라.)라는 말이 바울이 의미한 것을 더욱 정확하게 알려 준다(C. Vaughan).
모든 것의 근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시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과 초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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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모든 사상과 모든 신앙과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된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소산이며 하나님의 손의 행위이었다. 부활은 사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으며 절대로 패배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권능의 완전하고도 결정적이며 논박할 수 없는 표명이었다.”③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빌립보서 3:10의 주석을 보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근본이 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가 되신 목적에 대해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참조: 히 1:4)라고 설명하였다. 이 표현은 넓은 의미에서 15-17절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헬라어 문장에서는 인칭에 따른 어미 변화 속에 그 뜻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아위토스, αὐτὸς)라는 대명사가 잘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으뜸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독점적 특권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자신’ 또는 ‘오직 그만이’라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해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1:21-22)④라고 하였다.
교회의 머리로서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관해 논한 바울은, 그 이유(원문에는 19절 맨 앞에 호티<ὅτι, 왜냐하면>가 있다.)에 대해 【19】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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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 Barclay, op. cit., p. 130.
4) 저자의 에베소서 1:21-22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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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은 플레로마(πλήρωμα)로서 ‘가득하게 하는 것’, ‘완성하는 것’, ‘고루 퍼지는 것’, ‘성취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시 24:1, 고전 10:26). 세속 문헌에서는 승무원을 가득 태운 배에 대해서 사용되었다(Liddel, E. F. Scott).⑤ 영지주의에서는 이 낱말을 인간과 절대자 사이를 매개하는 권세들, 방사물들(유출물들), 에온들(Aeons), 또는 초인적 계급들에 사용된 모든 이름들의 총체로서 사용하였다. 본문의 의미로 쓰인 곳은 에베소서 1:23, 3:19, 4:13, 골 2:9 등이다.
본문의 플레로마에 대해 (1) 하나님의 존엄, 권위, 권능, 도덕적 탁월이라는 설(A. Barnes), (2) 의와 지혜와 권능 그리고 모든 축복의 충만이라는 설(J. Calvin), (3) 은혜의 충만 곧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모든 부요함이라는 설(요 1:14, 16),⑥ (4) 하나님의 온전하신 본성(Phillips)⑦ 또는 본질(J. Wesley, 宇田 進), (5) 신적 대권, 주권, 본질, 영광이라는 설(W. Hendriksen), (6) 하나님의 존엄성과 권능과 선이라는 설(A. Clarke), (7) 진, 선, 미라는 설(內村鑑三), (8) 모든 덕이라는 설(黑崎幸吉, 米田豊), (9) 신격이라는 설(J. B. Nielson), (10) 하나님의 권능과 속성의 총체라는 설⑧ 등이 있다.
어느 설을 취사선택하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모든 것이다”(C. E. D. Moule).⑨ 베어(F. W. Beare)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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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in J. B. Nielson.
6) M. Henry, H. Alford, “Peake, H. A. W. Meyer, Eadie”(in C. Vaughan), G. A. Turner. 특히, 피크는 “본절은 독생자를 성육케 하신 것과 관련이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은총’으로 그를 보내신 것을 기뻐하셨다.”라고 해석한다.
7) in C. Vaughan.
8) “J. B. Lightfoot”(in C. Vaughan), C. H. Dodd, E. E. Ellis, C. R. Erdman, J. I. Jones, E. R. Roustio.
9) in C. Vau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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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하게 하시고는 카토이케사이(κατοικήσαι)로서 단순히 일시적인 체류가 아니라, 영구적인 또는 정착된 거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라이트후트(J. B. Lightfoot)는 “이단 교사들이 플레로마(신적 충만)가 단순히 부분적이며 일시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합된 것으로 주장했다.”⑩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반하여 바울은 플레로마가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거하고 있음을 단언하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모든 충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거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⑪라고 하였다.
화평을 이루사는 에이레노포이에사스(εἰρηνοποιήσας: 부정 과거형)로서 ‘화평을 만들어 내다’를 의미한다. 이 낱말과 동의어라 할 수 있는 화목케 되기란 아포카탈락사이(ἀποκατλλάξαι)로서 근본적인 면에서 ‘변화하다’(적대적 상태에서 우호적 상태로)를 의미한다(C. Vaughan). 이 낱말은 보통 카탈라스소(καταλλάσσω)인데, 여기에 아포(ἀπό)를 덧붙여 강조한 것이다(22절, 엡 2:16).
“유대인들은 죄와 율법으로 인해 비롯된 담을 깨어 화해하기 위하여 화목제물을 드렸다. 이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회복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우정을 표시한 것이다.”⑫ 그러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던 바울은(갈 1:14, 빌 3:6) 경험에 의해서 짐승의 희생으로는 죄책감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W. Barclay).⑬ 그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죄악으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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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in T. K. Abott.
11) 원문에는 19절 전반에 있다.
12) 유형기편, 성서 사전(서울: 한국기독교문화원 1974, 8판), p. 732.
13) W. Barclay,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기산 역,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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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즉 속죄의 죽음에 의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롬 5:10, 골 1:21-22, 히 9:22. 참조: 요일 4:10). 이 화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에 의한 것이며, 인간은 다만 화해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혹은 그 안에서 인간과 화해하신 것이다(롬 3:25, 고후 5:18, 19).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화목은 인간 상호간의 화목을 포함하며, 또한 그것을 요건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은 그로 ‘말미암아’(디아, διὰ),⑭ 즉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셨는데, 그 대상은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1:16의 주석을 보라.)이다. 한 마디로 말해, 영적 세계의 모든 존재와 물질(육적) 세계의 모든 존재를 지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엡 1:10).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울이 지옥의 거주자들, 즉 타락한 천사들이나, 혹은 그 곳에 있는 악한 자들의 영들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A. Barnes).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본절을 악마와 그의 사자(천사)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한 보편구원론자인 오리겐”(W. Barclay)의 잘못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본래 심히 좋은 것으로서(창 1:31)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늘의 천사 하나가 하나님을 번역하고, 다음에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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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0절에만 세 번씩이나 중복되어(א, A, C, Dbc, K, P 사본들)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중보자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말미암아”(διὰ)가 쓰인 곳은 다음과 같다. (1) 그로 말미암아 만물을 화목케……, (2)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3) 그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들이나……,(T. K. Abott,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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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저주받았으며(창 2장), 그 결과로 우주 만물이 하나님과 조화를 잃고 저주 아래 신음하게 되었다(롬 8:18-23).
이러한 불화의 관계를 해소하고 화목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고(요 1:29, 고후 5:21) 죽음의 형벌을 받게 하셨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속죄의 죽음)은 화평을 만들어 낸 것인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만물 그리고 만물 상호간에 완전한 화목을 이룬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하나님의 화해 사건은 범우주적인 것이다. 따라서, 만물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화목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5)라고 하였다.
화목에 관한 바울의 견해는 당시의 이단이었던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영지’에 의한 화목이나, 가현설(Docetism)이 내세우는 비역사적인 사건이라는 주장을 배격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견해는 당시의 이단의 주장과는 달리, “천사적 중개자들은 화해의 역사에 있어서 전혀 분담한 것이 없고, 오히려 그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역사의 혜택을 입는다는 것이다”(T. K. Abott).
바울에 의하면 피조물인 천사들도 타락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하나님과 화목케 될 필요가 있고,⑮ 또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천사와 인간 사이에도 불화했었기 때문에 화목케 될 필요가 있었다(Theodoret, Chrysostom, Augustine)⑯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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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Alexander, Davenant”(in T. K. Abott), J. Calvin, “Peake”(R. C. H. Lenski). 참조: 욥 4:18, 5:15.
16)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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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울은 범위를 좁혀 골로새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와 그 목적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골로새 교인들의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에 대해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참조: 엡 2:1-3, 11-12)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악한 행실로(ἐν τοίς ἔργοις τοίς πονηροίς)는 10절의 “주께 합당히 행하여”라는 표현과 현저하게 대조되는 것이다.
멀리 떠나는 아펠로트리오메누스(ἀπηλλοτριωμένους)로서 ‘그러한 상태가 고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 표현에 대한 좋은 주석은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참조: 엡 2:1-3, 11, 4:18, 5:5-8, 롬 6:21, 벧전 4:3)이다.
“악한 행실”의 내적 원인인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ἐχθροὺς τῇ διανοίᾳ)에 대해 마이어(H. A. W. Meyer)는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는 이곳의 상황이나 다른 곳에서의 그 낱말의 용법에 의해서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롬 5:10, 8:7. T. K. Abott). 오히려 원수가 된 것은 인간의 마음에 의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라이트후트(J. B. Lightfoot)는 “변화를 받아야만 하고, 재연합이 이뤄져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다.”⑰라고 설명하였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신 것은 세상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이다(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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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in T. K. Ab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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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디아노이아(διανοίᾳ)로서 {대개 좋은 뜻으로 사용되나(벧전 1:13, 벧후 3:1, 요일 5:20), 여기서는 나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폴크스(F. Foulkes)는 “사상, 목적, 지성, 사고력 등을 의미하는 디아노이아는 인간의 악과 이기성의 결과가 정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성과 추리 과정을 포함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의미해 주고 있다.”라고 설명한다}(엡 2:3의 주석).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구원받은 상태에 대해,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⑱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는 20절과 같은 뜻이다. 특히, “그의 십자가의 피로”라고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육적인 실재를 강조하여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ἐν τῷ σώματι τής σαρκὸς αὐτού: 직역하면 ‘그의 육체의 몸의 죽음으로’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 (1) 18절의 “몸”인 교회와 “육의 몸”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J. A. Bengel, “Olshausen, J. B. Lightfoot”⑲), (2) 가현설(Docetism)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Beza”,⑳ A. M. Hunter, A. Barry),㉑ (3) 육체의 몸이 없는 천사들이 화해의 역사를 도왔다고 하는 그릇된 교사들의 견해를 의식한 언급이라는 설,㉒ (4)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인간성(J. Wesley), 또는 육성(인간의 연약성이니,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와 같이 부패성을 포함하는 의미의 것은 아님)을 말살하신 것(박윤선)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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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R. C. H. Lenski: Westcott 와 Hort는 22절을 하나의 삽입구로 보는데, 이것은 오히려 이 구절의 구조를 더 어렵게 만들어 버리고 있다.
19) in T. K. Abott.
20) 상동.
21) 상동.
22) H. Alford, A. Barry, “H. A. W. Meyer, Soden”(in T. K. Abott), C. Vaughan, p. 144, T. K. Abott,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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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화목케 하신 목적에 대해,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설명하였다. 물론, 이 말은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다(마 25장, 계 7장). 각 사람의 현세의 생활에 대한 심판이라는 의미에서 각 사람에게는 죽음의 때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참조: 히 9:27).
거룩하고는 하기우스(ἁγίους)로서 {‘다르다’, ‘분리되다’를 뜻한다. 성전은 다른 건물과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 제사장은 다른 보통의 인간들과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 희생제물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하다. 안식일은 다른 날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다른 인간들과 다르게 하기 위해서 그를 선택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구별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나오게 하는 구별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의 구별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즉, 기독교인은 인간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살고 일하며 행동한다는 것이다(W. Barclay. 참조: Taylor)}(엡 1:4의 주석).
관념적으로는 ‘인격적인 거룩’, 즉 도덕적 순결을 의미하기도 한다(본절, 레 11:44, 19:2, 고전 7:34, 벧전 1:16).
이 말은 ‘제사장’(21:6-7), ‘땅의 십분의 일’(레 27:30), ‘하나님의 집의 거룩한 장소’, 즉 ‘성소’(왕상 8:10. 비교: 히 9:2), 지성소(출 26:33. 비교: 9:3), ‘다른 민족들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봉헌된 이스라엘 백성’(출 19:6, 신 7:6, 단 7:22, 2 에스드라서 8:28), ‘기독교인’(행 9:13, 32, 41, 롬 1:7, 고전 6:1, 2, 벧전 2:9) 등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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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말은 ‘하나님’(삼상 6:20, 요 17:11, 벧전 1:15), ‘하나님의 성령’(행 2:33, 38, 롬 5:5), ‘하나님의 율법’(롬 7:12), ‘그리스도’(행 3:14), ‘천사’(시 89:5, 단 4:13, 슥 14:5), ‘세례 요한’(막 6:20) 등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흠 없고는 아모무스(ἀμώμους)로서 {희생 제사와 관련된 용어이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제물로 바칠 짐승은 먼저 검사를 받아야 한다. 만일 어떤 결점이 발견되면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거절당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전혀 결점이 없어야만 되었다.
아모무스라는 말은 모든 생명과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드릴 제물로 생각하고 한 말이다(W. Barclay).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 바쳐질 만한 인격을 갖추어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하나님께서 화목케 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이렇다 할 결점 없이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도덕적 완전을 뜻하기(J. A. Bengel, H. Alford, Chrysostom)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H. A. W. Meyer, Zahn, 黑崎幸吉}(엡 1:4의 주석).
책망할 것이 없는이란 아넹클레투스(ἀνεγκλήτους)로서 전혀 책망할 것이 없음을 뜻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 원수에게 책잡힐 조건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슥 3:1, 고전 1:8, 딤전 4:14). 사실상 마음과 행위에 있어서 완전무결한 기독교인이란 없었고, 또 없을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끊임없는 성결의 삶을 추구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고후 4:16).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책망할 것이 없이 설 수 있는 조건에 대해, 【23】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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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또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골로새 교인들이 천성을 향해 가는 데 따를 위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들은 아직도 이단의 속임수에 걸려 다시금 하나님을 떠나 멸망당할 위험이 있었다.
믿음(1:4의 주석을 보라.)에 거하고의 거하고는 에피메네테(ἐπιμένετε)로서 ‘머물다’, ‘체류하다’, ‘남다’, ‘살다’, ‘지키다’, ‘지속하다’ 등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 날에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에 대해서 평생토록 “믿음을 지켰느니”(딤후 4:7)라고 하였다. “어제의 믿음을 가지고 오늘의 구원을 논하거나 얻을 수는 없다. 순간 순간에 가지는 믿음을 계속적으로 굳게 붙잡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박창환).
터 위에 굳게 서서(τεθεμελιωμένοι καὶ ἑδραίοι)로서 전자는 확고한 근거 또는 기초가 튼튼한 것(엡 3:17)을 뜻하고, 후자는 건물이나 조직의 견고함을 뜻하는 말이다. 벤겔(J. A. Bengel)은 “전자는 비유적이고, 후자는 더 문자적이다. 전자는 믿는 자가 공급을 받는 기초를 말하고, 후자는 그들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힘을 가리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의도는 “믿음을 가지되 튼튼히 터를 닦고, 그 위에 서 있는 돌집과도 같이 견고하라는 것이다”(박창환).
이어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에바브라를 통해 듣고 믿은 복음(1:5의 주석을 보라.)의 ‘소망’(1:5의 주석을 보라.), 즉 복음에 속한 소망에서(비교: 엡 1:18, 4:4)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라고 하여 이단의 위험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이 듣고 믿은 영원한 소망이 내포된 복음을 가리켜, 바울은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하여 복음의 보편타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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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만민에게(ἐν πάσῃ τῇ㉓κτίσειτῇ ὑπὸ τὸν οὐρανόν)는 ‘모든 창조물에게’, 또는 ‘모든 피조물 사이에’ 등을 의미한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취할 것이 아니라, 복음이 매우 광범위하게 전파된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파된 바요는 부정 과거형인 케뤼크텐토스(κηρυχθέντος)로서 ‘이미 널리 전파된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복음이란 세상의 눈을 피하여 비밀리에 전수되는 비열한 어떤 종교적 교리가 아니며, 또한 일부 지역과 인종에게만 적용되는 한정된 진리가 아니라, 버젓하게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보편타당성을 가진 구원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자랑스럽게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1:7의 주석을 보라.)이 되었노라(참조: 1:1의 주석.)고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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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T. K. Abott: τῇ가 있는 사본은 אc C, Dc, K, L, P 등이고, 없는 사본은 א*, A, B, C, D*, G, 17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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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서울: 글벗사, 1999, 2판 1쇄), pp. 272-283.
앞(1:15-17)에서 그리스도와 우주의 관계를 논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음으로 구속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관계에 대해 【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스(ἐκκλησίας)로서 바울 서신에 60회 정도 나온다(W. Barclay).① 이 낱말의 히브리어적 배경으로 ‘카아할, ghl’(창 49:6, 출 12:6, 민 14:5, 신 5:22, 겔 23:24 등)과 에에다(ēdhh’가 있다. 전자는 ‘부름을 받은 모임’, 후자는 ‘지명된 모임’의 뜻으로 다 같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 또는 선민 자체를 가리켰다.
신약성경에서 그 낱말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소환된 사람들의 모임, 특수 지역의 거주민들로부터 모집된 믿는 자들의 공동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P. S. Minear).②
바울이 교회를 몸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비유한 것은 우주와 새 창조인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의미하는 것이다(엡 1:22). 우주를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야말로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최고 최대의 은사이다. 따라서,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롬 5:17, 계 20:4, 6. 참조: 창 1:26-28). 이 점에 대해 {스코트(E. F. Scott)는 “교회란 그리스도께서 우주적 능력을 행하시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의 절대성은 교회 안에서 보이는 독특한 양식으로 나타난다.”라고 하였다}(엡 1:22의 주석).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라고 한 것은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기적 연합이라는 특수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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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Barclay,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기산 역(서울: 기독교문사, 1973), p. 262.
2) P. S. Minear, “Church, Idea of” in the IDB, Vol. 1(New York: Abingdon Press, 1962), pp. 608-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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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엡 2:16, 4:4, 12, 16, 5:30, 롬 12:5, 고전 10:17, 12:27, 골 1:24, 2:19). 이 연합은 머리가 몸의 모든 지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배에 의해 움직여지는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의 연합이다. 또한, 머리의 지배를 받는 지체가 제 기능을 잘 발휘하도록 다른 지체도 덩달아 보조 역할을 하는 것처럼, 교회도 어떤 기관과 부서가 각자의 기능을 잘 발휘하도록 다른 부서와 기관 역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보조 역할을 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일반 단체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분여받은 지체로서(고후 4:10, 갈 2:20, 골 3:3, 요일 5:11-12) 그리스도의 지배에 의해 움직이는 산 공동체라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대해서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설명하였다.
근본이란 아르케(ἀρχή)로서 시간이나 공간 또는 연속의 ‘처음’, ‘통치’, ‘탁월’, ‘수위’(首位), ‘주권’ 등을 의미한다(요 1:1, 벧후 3:4, 계 3:14, 21:6, 22:13). 특히, 이 낱말은 “기원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처음’을 뜻한다. 즉, 무엇인가가 발생하는 근원이고,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이다”(W. Barclay).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 즉 창조 행위와 새 피조물인 교회의 아르케이다. “그리스도는 권위와 능력의 근원이시며, 우주의 질서를 세우시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계획된 모든 것을 시작하신다”(A. Barnes).
헬라어 본문에서 아르케(근본)란 낱말과 동격으로 쓰이고 있는 먼저 나신 자(1:15의 주석을 보라.)라는 말이 바울이 의미한 것을 더욱 정확하게 알려 준다(C. Vaughan).
모든 것의 근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시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과 초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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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모든 사상과 모든 신앙과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된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소산이며 하나님의 손의 행위이었다. 부활은 사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으며 절대로 패배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권능의 완전하고도 결정적이며 논박할 수 없는 표명이었다.”③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빌립보서 3:10의 주석을 보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근본이 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가 되신 목적에 대해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참조: 히 1:4)라고 설명하였다. 이 표현은 넓은 의미에서 15-17절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헬라어 문장에서는 인칭에 따른 어미 변화 속에 그 뜻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아위토스, αὐτὸς)라는 대명사가 잘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으뜸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독점적 특권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자신’ 또는 ‘오직 그만이’라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해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1:21-22)④라고 하였다.
교회의 머리로서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관해 논한 바울은, 그 이유(원문에는 19절 맨 앞에 호티<ὅτι, 왜냐하면>가 있다.)에 대해 【19】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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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 Barclay, op. cit., p. 130.
4) 저자의 에베소서 1:21-22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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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은 플레로마(πλήρωμα)로서 ‘가득하게 하는 것’, ‘완성하는 것’, ‘고루 퍼지는 것’, ‘성취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시 24:1, 고전 10:26). 세속 문헌에서는 승무원을 가득 태운 배에 대해서 사용되었다(Liddel, E. F. Scott).⑤ 영지주의에서는 이 낱말을 인간과 절대자 사이를 매개하는 권세들, 방사물들(유출물들), 에온들(Aeons), 또는 초인적 계급들에 사용된 모든 이름들의 총체로서 사용하였다. 본문의 의미로 쓰인 곳은 에베소서 1:23, 3:19, 4:13, 골 2:9 등이다.
본문의 플레로마에 대해 (1) 하나님의 존엄, 권위, 권능, 도덕적 탁월이라는 설(A. Barnes), (2) 의와 지혜와 권능 그리고 모든 축복의 충만이라는 설(J. Calvin), (3) 은혜의 충만 곧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모든 부요함이라는 설(요 1:14, 16),⑥ (4) 하나님의 온전하신 본성(Phillips)⑦ 또는 본질(J. Wesley, 宇田 進), (5) 신적 대권, 주권, 본질, 영광이라는 설(W. Hendriksen), (6) 하나님의 존엄성과 권능과 선이라는 설(A. Clarke), (7) 진, 선, 미라는 설(內村鑑三), (8) 모든 덕이라는 설(黑崎幸吉, 米田豊), (9) 신격이라는 설(J. B. Nielson), (10) 하나님의 권능과 속성의 총체라는 설⑧ 등이 있다.
어느 설을 취사선택하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모든 것이다”(C. E. D. Moule).⑨ 베어(F. W. Beare)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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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in J. B. Nielson.
6) M. Henry, H. Alford, “Peake, H. A. W. Meyer, Eadie”(in C. Vaughan), G. A. Turner. 특히, 피크는 “본절은 독생자를 성육케 하신 것과 관련이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은총’으로 그를 보내신 것을 기뻐하셨다.”라고 해석한다.
7) in C. Vaughan.
8) “J. B. Lightfoot”(in C. Vaughan), C. H. Dodd, E. E. Ellis, C. R. Erdman, J. I. Jones, E. R. Roustio.
9) in C. Vau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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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하게 하시고는 카토이케사이(κατοικήσαι)로서 단순히 일시적인 체류가 아니라, 영구적인 또는 정착된 거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라이트후트(J. B. Lightfoot)는 “이단 교사들이 플레로마(신적 충만)가 단순히 부분적이며 일시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합된 것으로 주장했다.”⑩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반하여 바울은 플레로마가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거하고 있음을 단언하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모든 충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거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⑪라고 하였다.
화평을 이루사는 에이레노포이에사스(εἰρηνοποιήσας: 부정 과거형)로서 ‘화평을 만들어 내다’를 의미한다. 이 낱말과 동의어라 할 수 있는 화목케 되기란 아포카탈락사이(ἀποκατλλάξαι)로서 근본적인 면에서 ‘변화하다’(적대적 상태에서 우호적 상태로)를 의미한다(C. Vaughan). 이 낱말은 보통 카탈라스소(καταλλάσσω)인데, 여기에 아포(ἀπό)를 덧붙여 강조한 것이다(22절, 엡 2:16).
“유대인들은 죄와 율법으로 인해 비롯된 담을 깨어 화해하기 위하여 화목제물을 드렸다. 이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회복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우정을 표시한 것이다.”⑫ 그러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던 바울은(갈 1:14, 빌 3:6) 경험에 의해서 짐승의 희생으로는 죄책감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W. Barclay).⑬ 그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죄악으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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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in T. K. Abott.
11) 원문에는 19절 전반에 있다.
12) 유형기편, 성서 사전(서울: 한국기독교문화원 1974, 8판), p. 732.
13) W. Barclay,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기산 역,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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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즉 속죄의 죽음에 의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롬 5:10, 골 1:21-22, 히 9:22. 참조: 요일 4:10). 이 화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에 의한 것이며, 인간은 다만 화해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혹은 그 안에서 인간과 화해하신 것이다(롬 3:25, 고후 5:18, 19).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화목은 인간 상호간의 화목을 포함하며, 또한 그것을 요건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은 그로 ‘말미암아’(디아, διὰ),⑭ 즉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셨는데, 그 대상은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1:16의 주석을 보라.)이다. 한 마디로 말해, 영적 세계의 모든 존재와 물질(육적) 세계의 모든 존재를 지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엡 1:10).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울이 지옥의 거주자들, 즉 타락한 천사들이나, 혹은 그 곳에 있는 악한 자들의 영들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A. Barnes).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본절을 악마와 그의 사자(천사)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한 보편구원론자인 오리겐”(W. Barclay)의 잘못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본래 심히 좋은 것으로서(창 1:31)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늘의 천사 하나가 하나님을 번역하고, 다음에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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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0절에만 세 번씩이나 중복되어(א, A, C, Dbc, K, P 사본들)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중보자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말미암아”(διὰ)가 쓰인 곳은 다음과 같다. (1) 그로 말미암아 만물을 화목케……, (2)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3) 그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들이나……,(T. K. Abott,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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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저주받았으며(창 2장), 그 결과로 우주 만물이 하나님과 조화를 잃고 저주 아래 신음하게 되었다(롬 8:18-23).
이러한 불화의 관계를 해소하고 화목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고(요 1:29, 고후 5:21) 죽음의 형벌을 받게 하셨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속죄의 죽음)은 화평을 만들어 낸 것인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만물 그리고 만물 상호간에 완전한 화목을 이룬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하나님의 화해 사건은 범우주적인 것이다. 따라서, 만물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화목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5)라고 하였다.
화목에 관한 바울의 견해는 당시의 이단이었던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영지’에 의한 화목이나, 가현설(Docetism)이 내세우는 비역사적인 사건이라는 주장을 배격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견해는 당시의 이단의 주장과는 달리, “천사적 중개자들은 화해의 역사에 있어서 전혀 분담한 것이 없고, 오히려 그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역사의 혜택을 입는다는 것이다”(T. K. Abott).
바울에 의하면 피조물인 천사들도 타락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하나님과 화목케 될 필요가 있고,⑮ 또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천사와 인간 사이에도 불화했었기 때문에 화목케 될 필요가 있었다(Theodoret, Chrysostom, Augustine)⑯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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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Alexander, Davenant”(in T. K. Abott), J. Calvin, “Peake”(R. C. H. Lenski). 참조: 욥 4:18, 5:15.
16)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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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울은 범위를 좁혀 골로새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와 그 목적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골로새 교인들의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에 대해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참조: 엡 2:1-3, 11-12)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악한 행실로(ἐν τοίς ἔργοις τοίς πονηροίς)는 10절의 “주께 합당히 행하여”라는 표현과 현저하게 대조되는 것이다.
멀리 떠나는 아펠로트리오메누스(ἀπηλλοτριωμένους)로서 ‘그러한 상태가 고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 표현에 대한 좋은 주석은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참조: 엡 2:1-3, 11, 4:18, 5:5-8, 롬 6:21, 벧전 4:3)이다.
“악한 행실”의 내적 원인인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ἐχθροὺς τῇ διανοίᾳ)에 대해 마이어(H. A. W. Meyer)는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는 이곳의 상황이나 다른 곳에서의 그 낱말의 용법에 의해서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롬 5:10, 8:7. T. K. Abott). 오히려 원수가 된 것은 인간의 마음에 의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라이트후트(J. B. Lightfoot)는 “변화를 받아야만 하고, 재연합이 이뤄져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다.”⑰라고 설명하였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신 것은 세상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이다(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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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in T. K. Ab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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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디아노이아(διανοίᾳ)로서 {대개 좋은 뜻으로 사용되나(벧전 1:13, 벧후 3:1, 요일 5:20), 여기서는 나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폴크스(F. Foulkes)는 “사상, 목적, 지성, 사고력 등을 의미하는 디아노이아는 인간의 악과 이기성의 결과가 정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성과 추리 과정을 포함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의미해 주고 있다.”라고 설명한다}(엡 2:3의 주석).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구원받은 상태에 대해,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⑱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는 20절과 같은 뜻이다. 특히, “그의 십자가의 피로”라고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육적인 실재를 강조하여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ἐν τῷ σώματι τής σαρκὸς αὐτού: 직역하면 ‘그의 육체의 몸의 죽음으로’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 (1) 18절의 “몸”인 교회와 “육의 몸”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J. A. Bengel, “Olshausen, J. B. Lightfoot”⑲), (2) 가현설(Docetism)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Beza”,⑳ A. M. Hunter, A. Barry),㉑ (3) 육체의 몸이 없는 천사들이 화해의 역사를 도왔다고 하는 그릇된 교사들의 견해를 의식한 언급이라는 설,㉒ (4)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인간성(J. Wesley), 또는 육성(인간의 연약성이니,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와 같이 부패성을 포함하는 의미의 것은 아님)을 말살하신 것(박윤선)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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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R. C. H. Lenski: Westcott 와 Hort는 22절을 하나의 삽입구로 보는데, 이것은 오히려 이 구절의 구조를 더 어렵게 만들어 버리고 있다.
19) in T. K. Abott.
20) 상동.
21) 상동.
22) H. Alford, A. Barry, “H. A. W. Meyer, Soden”(in T. K. Abott), C. Vaughan, p. 144, T. K. Abott,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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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화목케 하신 목적에 대해,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설명하였다. 물론, 이 말은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다(마 25장, 계 7장). 각 사람의 현세의 생활에 대한 심판이라는 의미에서 각 사람에게는 죽음의 때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참조: 히 9:27).
거룩하고는 하기우스(ἁγίους)로서 {‘다르다’, ‘분리되다’를 뜻한다. 성전은 다른 건물과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 제사장은 다른 보통의 인간들과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 희생제물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하다. 안식일은 다른 날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다른 인간들과 다르게 하기 위해서 그를 선택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구별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나오게 하는 구별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의 구별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즉, 기독교인은 인간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살고 일하며 행동한다는 것이다(W. Barclay. 참조: Taylor)}(엡 1:4의 주석).
관념적으로는 ‘인격적인 거룩’, 즉 도덕적 순결을 의미하기도 한다(본절, 레 11:44, 19:2, 고전 7:34, 벧전 1:16).
이 말은 ‘제사장’(21:6-7), ‘땅의 십분의 일’(레 27:30), ‘하나님의 집의 거룩한 장소’, 즉 ‘성소’(왕상 8:10. 비교: 히 9:2), 지성소(출 26:33. 비교: 9:3), ‘다른 민족들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봉헌된 이스라엘 백성’(출 19:6, 신 7:6, 단 7:22, 2 에스드라서 8:28), ‘기독교인’(행 9:13, 32, 41, 롬 1:7, 고전 6:1, 2, 벧전 2:9) 등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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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말은 ‘하나님’(삼상 6:20, 요 17:11, 벧전 1:15), ‘하나님의 성령’(행 2:33, 38, 롬 5:5), ‘하나님의 율법’(롬 7:12), ‘그리스도’(행 3:14), ‘천사’(시 89:5, 단 4:13, 슥 14:5), ‘세례 요한’(막 6:20) 등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흠 없고는 아모무스(ἀμώμους)로서 {희생 제사와 관련된 용어이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제물로 바칠 짐승은 먼저 검사를 받아야 한다. 만일 어떤 결점이 발견되면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거절당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전혀 결점이 없어야만 되었다.
아모무스라는 말은 모든 생명과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드릴 제물로 생각하고 한 말이다(W. Barclay).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 바쳐질 만한 인격을 갖추어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하나님께서 화목케 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이렇다 할 결점 없이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도덕적 완전을 뜻하기(J. A. Bengel, H. Alford, Chrysostom)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H. A. W. Meyer, Zahn, 黑崎幸吉}(엡 1:4의 주석).
책망할 것이 없는이란 아넹클레투스(ἀνεγκλήτους)로서 전혀 책망할 것이 없음을 뜻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 원수에게 책잡힐 조건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슥 3:1, 고전 1:8, 딤전 4:14). 사실상 마음과 행위에 있어서 완전무결한 기독교인이란 없었고, 또 없을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끊임없는 성결의 삶을 추구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고후 4:16).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책망할 것이 없이 설 수 있는 조건에 대해, 【23】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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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또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골로새 교인들이 천성을 향해 가는 데 따를 위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들은 아직도 이단의 속임수에 걸려 다시금 하나님을 떠나 멸망당할 위험이 있었다.
믿음(1:4의 주석을 보라.)에 거하고의 거하고는 에피메네테(ἐπιμένετε)로서 ‘머물다’, ‘체류하다’, ‘남다’, ‘살다’, ‘지키다’, ‘지속하다’ 등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 날에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에 대해서 평생토록 “믿음을 지켰느니”(딤후 4:7)라고 하였다. “어제의 믿음을 가지고 오늘의 구원을 논하거나 얻을 수는 없다. 순간 순간에 가지는 믿음을 계속적으로 굳게 붙잡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박창환).
터 위에 굳게 서서(τεθεμελιωμένοι καὶ ἑδραίοι)로서 전자는 확고한 근거 또는 기초가 튼튼한 것(엡 3:17)을 뜻하고, 후자는 건물이나 조직의 견고함을 뜻하는 말이다. 벤겔(J. A. Bengel)은 “전자는 비유적이고, 후자는 더 문자적이다. 전자는 믿는 자가 공급을 받는 기초를 말하고, 후자는 그들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힘을 가리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의도는 “믿음을 가지되 튼튼히 터를 닦고, 그 위에 서 있는 돌집과도 같이 견고하라는 것이다”(박창환).
이어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에바브라를 통해 듣고 믿은 복음(1:5의 주석을 보라.)의 ‘소망’(1:5의 주석을 보라.), 즉 복음에 속한 소망에서(비교: 엡 1:18, 4:4)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라고 하여 이단의 위험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이 듣고 믿은 영원한 소망이 내포된 복음을 가리켜, 바울은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하여 복음의 보편타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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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만민에게(ἐν πάσῃ τῇ㉓κτίσειτῇ ὑπὸ τὸν οὐρανόν)는 ‘모든 창조물에게’, 또는 ‘모든 피조물 사이에’ 등을 의미한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취할 것이 아니라, 복음이 매우 광범위하게 전파된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파된 바요는 부정 과거형인 케뤼크텐토스(κηρυχθέντος)로서 ‘이미 널리 전파된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복음이란 세상의 눈을 피하여 비밀리에 전수되는 비열한 어떤 종교적 교리가 아니며, 또한 일부 지역과 인종에게만 적용되는 한정된 진리가 아니라, 버젓하게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보편타당성을 가진 구원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자랑스럽게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1:7의 주석을 보라.)이 되었노라(참조: 1:1의 주석.)고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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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T. K. Abott: τῇ가 있는 사본은 אc C, Dc, K, L, P 등이고, 없는 사본은 א*, A, B, C, D*, G, 17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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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서울: 글벗사, 1999, 2판 1쇄), pp. 272-283.
아멘.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골로새서 1:18-23의 주경신학적 연구에 관심을 보이시고, "아멘.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