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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글

작성자
이경남
작성일
2020-06-12 21:03
조회
504
1.
학살의 현장에 피어난 진실의 꽃
오선우 기자 전남일보 2020-05-24 14:29:28


총검과 곤봉으로 무장한 채 항쟁의 현장에서 시민들을 진압했던 '가해자'. 당시 광주에 있었던 2만여 명에 달했던 군인들 중에는 극히 적은 수나마 죄책감과 그 날의 악몽에 수십년을 시달려 오다 진실을 고백한 이들이 있다.
지난 1999년 '5월의 회고-어느 특전병사의 기록'이라는 수기를 통해 진압군으로서는 최초로 5·18의 진실을 알린 이경남(64) 평택효덕교회 목사. 그는 "곤봉에 맞아 머리가 터진 시민들,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현장이 아직도 머리 속에 생생하다"고 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5월19일 진압군으로서 광주에 투입된 제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소속 이경남 일병.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던 90년대의 끝자락에서 비난과 '배신자' 소리를 무릅쓰고 양심을 고백한 그는 가만히 40년 전 그 날을 회상했다.

●신학도에서 계엄군으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평택에서 목회 활동에 전념해 온 부친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인 70년대 초 개신교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민족·민주화운동을 접했다. 목사의 아들로서 신학 공부를 했던 잡지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 선생의 글을 읽고 감명 받아 1975년 목원대 신학과에 진학했다.
"굳이 목사가 되겠다는 마음보다는 당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기치를 들었던 개신교 인사들의 활동과 그들의 사회 의식에 영향을 받아 신학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 목사는 1979년 5월 군에 입대했다. 특전사로서 공수 교육, 대북 침투 특수전 교육 등을 받고 같은 해 9월 말께 11공수여단에 배치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앞날에 어떤 사태가 도사리고 있는 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국방의 의무에 충실했다.
이윽고 한 달 후인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숨지고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특전사는 국군이 아닌 소위 전두환의 '사병'으로 전락했다. 이듬해 5월, 이 목사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은 사태가 벌어졌다.

●잔혹한 진압에 끝없이 고뇌하다

11공수여단은 1980년 5월19일 새벽 3시께 광주에 도착했다. 조선대학교에 집결한 병사들은 완전무장한 채 트럭을 타고 시내를 돌며 무력시위를 전개했다. 대학생 수백명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시위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신군부로부터 세뇌 당한 공수부대원들은 총검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이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군복을 입고 있지 않으면 모두 '폭도'로 규정하고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앞서 7공수의 만행을 목격한 시민들조차 이날 우리 부대의 무차별 진압에 경악하며 혼비백산했습니다. 남녀노소 장애인 가릴 것 없었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꿈꾸던 젊은 신학대생 이경남 일병은 자신의 눈 앞에 벌어진 학살의 현장에 거대한 충격을 받고 무기력해졌다. 부마항쟁을 진압했던 한 대대장이 주입한 "총검과 곤봉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다뤄라"라는 말에 눈 앞에 보이는 시민을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동료를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진압에 겁먹어 시위대가 해산할 것으로 생각했던 신군부의 예측과 달리 시민들은 분기탱천해 수가 점점 불어났다. 결국 20일 도청을 제외한 광주 시내는 시위대에 장악됐다. 숙영지인 조선대로 복귀하던 중 차량 시위대와 조우한 11공수는 잡혀간 이들을 풀어달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해산을 시도했다.
"밤 9시쯤이었습니다. 어두운 상황에서 돌이 날아오니 동료들은 더욱 잔혹하게 시민들을 진압했습니다. 한 중년 남성이 곤봉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자 나도 모르게 그를 들쳐매고 근처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도청 앞 집단발포 현장에 서다

21일 오전 이 목사는 도청 인근 전일빌딩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했다. 오후가 되자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며 차량을 이용해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해 후퇴하던 군 장갑차에 군인이 깔려 피를 토했다.
"권 일병이 깔리는 걸 본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이내 벼락 같은 총성 한 발이 들려왔습니다. 건물 옥상의 저격수들을 시작으로 무차별 발포와 조준 사격이 이뤄졌습니다. 저는 충격에 빠져 하사관들의 손에 이끌려 도청 지하실로 들어갔습니다."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시민들은 분노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11공수는 도청을 버리고 주남마을로 들어가 실탄 등 물자를 충당했으며, 일부 끌려온 시위대는 이 곳에서 총살 당해 암매장됐다.
이 목사는 24일 주남마을을 떠나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군인들은 차량을 타고 가면서도 눈에 보이는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 목사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눈에 보이는 이들을 총으로 쏴죽이는 만행에 치가 떨렸음에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1공수는 송암동 마을에서 별안간 포탄 세례를 받게 된다. 매복한 광주보병학교 소속 1개 중대가 11공수를 시위대로 오인해 공격한 것이다. 이 목사는 "이대로 죽겠구나 생각하던 순간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나보니 주변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병원에 이송된 이들 중 2명이 더 죽었다. 대대장은 팔이 잘렸다"고 했다.
이 목사를 포함한 군인 40여 명도 중경상을 입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가면서 일주일간의 악몽은 끝이 났다.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일어서다

억겁처럼 길었던 80년 5월의 일주일은 이 목사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여전히 잊히지 않고 있다. 82년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한 이 목사는 본격적인 목회 활동에 전념하면서도 5·18 당시 직접 보고 느꼈던 것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을 단호히 처벌했어야 하는데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여론에 못 이겨 이들을 사면하고 말았습니다. 떳떳하게 얼굴을 쳐드는 이들을 두고만 볼 수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의 글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어느 언론사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마침 국가폭력 특집을 기획하던 '당대비평'에 원고를 보내 글을 실었고, 2000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언론에 알려지게 됐다.
"4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5·18은 미완의 과제이며 광주는 그 아픔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진실은 밝혀진 게 없고 책임자 처벌은 요원하며 실종자들은 어딘지 모를 차가운 지하에 방치돼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하루빨리 진상규명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당사자 중심 조사 철저히 이뤄져야

수많은 기록들이 왜곡·은폐된 5·18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모든 것을 기획한 수뇌부와 현장에서 활동했던 실행자들을 파헤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목사의 주장이다.
"5·18진상규명의 핵심 쟁점으로 거론되는 발포명령자는 결국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발포 명령은 기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구두로 행해지는 것이며, 5·18과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문서 형태로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21일 오후 12시30분께 11공수 63대대 권 모 병장이 무전으로 발포 명령을 받았고, 차 모 대위가 실행에 옮겼으나 이들이 24일 송암동 교전에서 사망하면서 진실은 진흙 속에 파묻혔다. 설령 기록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보안사에 의해 이미 폐기됐을 것으로 이 목사는 보고 있다.
"다만 21일 오전 10시50분께 전두환, 노태우, 이희성 등 신군부 실세가 국방부장관실에서 모여 연 군 수뇌부회의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결정된 자위권 발동 명령이 사실상 발포 명령이므로, 이들을 조사해 내막을 밝혀내야 합니다."
이 목사는 실종자 문제 규명에 있어서도 특수임무를 맡았던 보안사 인물들을 강제로라도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수부대는 원래 광주에 주둔하는 부대도 아니라서 현장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5·18 기간 내내 진압작전을 펼치느라 다른 활동을 할 여력도 장비도 없었습니다. 정보 수집과 사건 조작, 시신 수습 등 특수 임무 지휘를 위해 광주로 내려온 보안사 기획처장 등 5명의 보안사 인물들에 대한 강제 조사만이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상조사위 '기대 반 걱정 반'

5·18 40주년을 맞아 올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대한 이 목사의 솔직한 심정에는 '올해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와 '수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뒤섞여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상규명에 대한 전 국민적인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조사위의 활동 여건도 좋아지면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감은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남겨진 기록 찾기에만 매몰돼 조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전 6번의 조사와 차별되는 성과를 남기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추천 진상조사위 상임위원 6명이 모두 광주 출신인 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물론 광주 지역에서 5·18을 경험했고 또 오랜 기간 연구해 온 이들이 조사 활동에 적합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전국화·세계화를 지향하는 5·18의 진상을 규명하는 중요한 작업에 위원장을 비롯해 광주 출신으로만 채워 놓는다면 조사 결과에 대해 과연 모두가 수긍할 지 걱정입니다."
조사위에 강제 조사권 등을 부여해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도 내비쳤다.
"40년이나 지나 관계자들은 많이 죽기도 했고, 이제 와서 처벌과 용서를 전제한다고 해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만행을 숨기려는 이들의 양심고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수뇌부와 5·18 당시 광주 현장에서 직접 활동했던 이들을 직접 조사하는 것만이 진상규명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2.
통복동 엘레지(블랙 시위 기념 축시)

이곳 평택 통복동에는
역사 깊은 집창촌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 시대 경부 철도가 이곳을 지나며
집창촌이 들어서고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꽤나 유명한 성매매 지역이다
지금도 어둠이 내리면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로 우편으론
유혹의 붉은등이 켜지며
탕아들의 발길과
가난에 못이겨
그녀의 몸을 파는
오늘의 정신대 우리들의 위안부
이 땅의 가난한 소녀들의 슬픈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곳 통복동에 그 추한 욕망의 흔적을
남긴 이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2020.4.15.
문재인도 이낙연도 이해찬도 이곳 통복동에
그 더럽고 추한 욕망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다
이곳 통복동의 총인구는 4,139명
여기서 선거권이 없는 18세 이하를 빼면
유권자는 3000명이나 될까?
그런데 정작 선관위 선거인수는 4,314명이고
실제 투표자는 2,811명 거의 100 %의 투표율을 보였다
한국 사정에 어둔 중국 공산당 프로그래머들이 조작을 하다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흔적을 남긴거다
그래 보다못해
이건 완전 조작이고 무효야
여기가 중공 러시아 북한도 아니고
이게 말이 돼 하면
사방에서 발길질이 시작된다
왜 개비시도 엠빙신도 주차장 로맨스도
하다못해 조중동도 가만있는데 떠드냐며
두뇌가 반쪽입네
시비하는 바보들이 나타난다
이런 멍텅구리들에게 나는 묻는다
아니
니들은 아직도 밀림 속을 배회하는 유인원이냐?
이런 걸 보고도 해독을 못하느냐?
선관위가 발표한 21대 총선 통계표는
벨사살에게 나타난 벽의 글씨처럼
청와대 민주당의 종말을 알리는
오늘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다
그래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조삼모사 도토리 몇알에 속는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해
follow the party가 아니라
follow the liberty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다

*광주민주화 운동 40주년의 해애 다시 이런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일어날 줄을 누가 알았는가? 2020년 5월의 대한민국은 1980년 5월의 대한민국보다 더 위험하고 사악하다 여기에 내 마음의 번민과 고통이 있다



전체 4

  • 2020-06-12 21:20

    늘 궁금하던 차에, 제가 잘 몰라서 여쭙습니다. 실례가 안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글 쓰신 분이, '5월의 회고-어느 특전병사의 기록'을 쓰신 이경남 목사님이십니까? 동명이인이십니까?


    • 2020-06-12 21:23

      동일인입니다


  • 2020-06-13 11:58

    이런 글도 삭제가 안 되는데 아니 못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관리자는 사람이 아니고 인공지능(a.i.)이 맞나보다


  • 2020-06-13 13:20

    이경남 목사님, 사실은 제가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의 인생에서 목원대, 광주는 제 인생을 변화시키는 키워드 중의 하나였기때문에, 목사님은 당연히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목사님의 존함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제 바램은 목사님의 노년이, 많은 후배 목회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이현석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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