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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전과 후의 므낫세 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1-01-07 12:29
조회
401
(설교 동영상: 유튜브)

<역대하 33:10-17>

10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저희가 듣지 아니한 고로 11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장관들로 와서 치게 하시매 저희가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간지라 12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13기도한 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14그 후에 다윗 성 밖 기혼 서편 골짜기 안에 외성을 쌓되 생선문 어귀까지 이르러 오벨을 둘러 심히 높이 쌓고 또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 장관을 두며 15이방 신들과 여호와의 전의 우상을 제하며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산에와 예루살렘에 쌓은 모든 단을 다 성 밖에 던지고 16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그 단 위에 드리고 유다를 명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하매 17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께만 제사를 드렸으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더라

1. 시작하는 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원치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 감사하며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남들보다 더 풍족해지고, 남들보다 더 출세하고, 남들보다 더 유명해지고, 남들의 인정을 받고, 남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 은혜와 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생활을 하든지 안 하든지, 책임을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은혜와 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왕만 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다른 은혜와 복을 받은 통치자인 왕이 충성스레 섬겨야 할 국민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은혜와 복에 따르는 사랑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이 따르는 것입니다.

2. 환난 전의 므낫세 왕과 환난 후의 므낫세 왕

나라 전체에서 단 한 사람만 받는 복이자 종합적인 복인 왕이 된 므낫세는 12살부터 55년간 통치하면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의 악행과 우상 숭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외국산 명품 우상이란 우상은 다 수입해서는 앞장서서 숭배했습니다. 역대하 33:1 이하에 보면, 므낫세 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부왕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웠습니다. 음란과 직결되는 농사 신 바알을 위해 단을 쌓았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고, 일월성신을 숭배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안에 우상들의 단들을 쌓았고, 직접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세웠고, 힌놈의 골짜기에서 종교 의식을 좇아 왕자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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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 왕의 다양한 우상 숭배 편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점을 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그들의 말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은 버렸습니다. 게다가 므낫세 왕의 악행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할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열왕기하 21:16에 보면, 므낫세는 공산 독재자들과 기타 독재자들처럼,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했습니다.
남 왕국 유다에서 제일 많은 은혜와 복을 받은 므낫세 왕이 그모양이니 백성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역대하 33:9을 보면,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므낫세 왕이나 백성들은, 다른 나라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한 원인인 우상 숭배와 악행을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한술 더 떴다는 것입니다.
모닥불에 앞 다투어 가서 타 죽는 불나방들을 보면서도, 불나방들이 불빛에 현혹되어 계속 달려들어 타 죽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죄악의 낙과 황홀한 신비와 목전의 이익이라는 사단의 유혹에 현혹되어 둘째 사망인 불못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복을 받은 므낫세 왕이 그에 따른 책임을 다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마귀의 종노릇을 다한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마귀가 좋아할 언행을 하는 지도층이 있습니다. 그런 권세가들, 그런 부자들, 그런 교사들, 그런 사상가들, 그런 종교가들, 그런 예술가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는 온 인류 가운데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라는 가장 영광스럽고 고귀하고 신령한 복을 받고는, 그 직분을 이용해서 주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 가룟 유다에 대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6:24입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구세주의 제자라는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주님을 팔아넘기는 배신을 할 것이었더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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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여러 가지의 복을 받아 누리고, 주님의 몸인 교회의 신령한 직분까지 받은 우리에 대해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고린도후서 6:1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므낫세 왕은 하나님을 버리고 배신했지만, 하나님은 므낫세 왕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왕과 백성에게 경고하셨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극심한 우상 숭배와 죄악이 그들의 영의 귀를 막아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므낫세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장관들로 유다를 치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주전 680년에서 647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앗수르가 유다를 침략한 사건입니다. 승리한 앗수르군은 므낫세 왕을 사로잡아 쇠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왕과 같은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따르지 않으면, 한순간에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마귀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욥기 4:8을 보면,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국가나 개인의 모든 현실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현실은 영적인 것의 반영이나 결과입니다.
포로 신세라는 극심한 치욕과 고통이라는 환난을 당하던 므낫세는 비로소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했고, 열조의 하나님 앞에 아주 겸비하여 기도했습니다. 정말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재앙을 당하는 순간에도, 심지어 지옥에 떨어지는 죽음의 순간에도 깨닫지 못하고 겸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고난을 싫어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므낫세처럼, 환난과 치욕이 사랑이며 복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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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에 실린 간증입니다.
결혼한 지 7년쯤 됐을 때, 밥상에 앉아 아내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게 된 김 목사님은, 분노가 치밀어 식탁 위에 있는 그릇들을 한 손으로 쓸어 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결혼 후 벌써 서너 번째였습니다. 그때마다 사모님은 기가 죽어 한 쪽으로 피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습니다. 갑자기 사모님이 목사님의 행동을 보고는 식탁을 뒤엎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그릇이며 수저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목사님이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이상하고 낯선 느낌이 가슴 깊은 곳을 스쳤다. 그때 그런 느낌이 든 것은 보지도 못했고, 보고 싶지도 않던 내 어두운 모습을 아내를 통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해서라도 내 어두운 면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사형통만이 복이 아닙니다. 만사 불통이 복인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 대해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관용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분별없는 인내와 관용은 죄악을 묵인하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만사 불통인 포로가 되어 피눈물을 뿌리면서 아주 겸비하게 드린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므낫세는 다시 왕위에 앉게 되었고, 비로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됐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환난의 은혜로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 므낫세 왕은 변화됐습니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다윗 성 밖 시혼 서편 골짜기 안에다 생선문 어귀까지 이르러 둔덕을 둘러 높은 외성을 쌓았고,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 장관을 두었고, 성전 안팎의 모든 우상들을 제거했고, 모든 단들을 다 내다 버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낡은 단은 중수한 후에 화목제와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또한, 백성들에게도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명했고, 백성들은 거의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환난의 은혜로 변화된 므낫세 왕은, 사회 개혁과 종교 개혁의 주체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므낫에 왕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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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개혁이란 의도와 구호와 패거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변화로 되는 것입니다. 부패의 개혁은 주체가 깨끗할 때만 가능한 것이고, 어둠의 개혁은 주체가 빛을 발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입각한 개혁에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요 자기 개혁입니다.

3. 맺음말

므낫세는 유다의 통치권자인 왕이었을 때, 갖가지 우상 숭배에 앞장서던 자신과 백성에게 이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앗수르 군대의 포로가 되었고, 쇠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비참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 므낫세는 크게 겸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놀라운 은혜를 받은 므낫세 왕은, 그제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성을 높이 쌓고, 견고한 성읍에 군대 장관을 두는 등 안보를 강화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의 우상을 제거하고, 곳곳에 쌓은 모든 단을 던져 버리고, 하나님의 단을 중수하여 화목제와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온 유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개혁의 주체가 된 것입니다.
가정이든 사회이든 종교이든 간에, 개혁이 성공하려면 개혁의 주체가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전체 6

  • 2021-01-07 12:57

    아멘.

    본문과 말씀하신 내용에서, 신앙에서 개혁이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개혁을 한다고 하면서 구호를 내세우거나, 혹은 시민운동에 참여, 혹은 정치적 저항을 주도, 혹은 역사나 인물을 교회사적으로 기록 혹은 회상하는 것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다 헛수고 입니다. 악당 므낫세가 회개/후회를 했을 뿐이며,

    마르틴 루터는 개혁을 했는데, 교회에서는 종교개혁으로 표현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돌아갔을 때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도 변화가 되었으며 이는 '개혁'이 됩니다. 또한 존 훼슬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결과는 교회 뿐 아니라 광산촌에 술집이 없어지고, 거리 폭력배가 사라지는 영국사회의 질적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개혁은 패거리로 모여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바뀌는 혼자 혹은 작은 단위에서 시작됩니다. 모여서 하는 건 정치이고, 한꺼번에 쉽게 몽땅 개혁을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리석은 불가능한 노력이 없는 성과주의이고 땀 없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는 미미하게 차이로 볼수도 있지만 실제 차이는 퍽 큽니다.


    • 2021-01-07 15:25

      필자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신앙 개혁과 사회 개혁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셔서 감사합니다.


  • 2021-01-07 13:42

    최세창 목사님의 글 뒤엔 엄재규장로님이 글을 다셨는데, 두번 안보이셔서, 걱정했습니다.
    저의 의견도 있지만, 다음번에요ㅎㅎ
    눈이 왔으니, 두분 모두 출입을 조심하세요^^


    • 2021-01-07 14:29

      금년 한해 주안에서 편안하시길.....

      얼마전에 길가다가 개에게 물릴 뻔 해서요, ㅎㅎㅎ, 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최 목사님처럼, 성경의 본문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를 인정하고 존경합니다. 대신에 성경 읽고서는 자기철학 혹은 인문학 강좌하고 기도로 마치는 종교의식은 질색입니다. 이는 무속이나 타종교이고요.. 유교 경전에 틀린 얘기는 없습니다. 하나 성경은 인간의 지저분한 속성이 다 들어 있지요...

      최목사님의 "부패의 개혁은 주체가 깨끗할 때만 가능한 것이고, 어둠의 개혁은 주체가 빛을 발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에 입각한 개혁에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요 자기 개혁입니다." 에 저도 전부 공감합니다. 성경 말씀에 대비한 자기회의적 시각과 자기성찰이 없는 개혁구호는 사기입니다. 이런 부류가 너무 많습니다. 개나 소나 다 개혁한다고 하죠.. 그래야 사람들 박수를 받으니, 사람을 볼때 말이 아니라 행동을 분석하면 다 파악됩니다.


      • 2021-01-07 15:47

        개에게 물릴 뻔하셨다니 큰일 날 뻔하셨네요.
        강의실에서나, 진급 과정의 교역자들을 교육할 때나, 교역자 세미나 등에서, 필자는 아무리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라도 설교의 성경 본문의 의미와 상관없거나, 그 본문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설교는 바른 설교가 아니라고 강조하곤 했습니다. 설교자는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속뜻까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 주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속뜻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상황에 대한 이해도 도모해야 합니다.


    • 2021-01-07 15:28

      이현석 목사님, 필자의 설교에 관심을 보여서 감사합니다. 목사님도 눈길 조심하고, 코로나 시대에 더욱 건강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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