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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종(두 사람이 동성애자라고 왜곡)을 고치신 예수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1-05-28 17:39
조회
504
<누가복음 7:1-10>

1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1. 시작하는 말

같은 민족이라도 분단국이 된 경우에, 군사력이 약한 쪽에서 평화를 원해서 평화가 이뤄진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국가나 침략 전쟁이 아니라, 안녕과 복지 향상, 자유와 인권 신장,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군대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거의 들을 수 없었던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그 소리는 국가 안보와 애국과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 그리고 군복무를 마친 선배들에게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국방 의무를 한 사람과 현역병들을 비양심적 병역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양심적인 군인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교독한 본문에는, 정말 양심적이며 모범적인 군인이 등장되고 있습니다.

2. 병들어 죽게 된 백부장의 종과 훌륭한 백부장

그 군인이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할 때에,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당시의 가버나움은 동서 교통의 요충지로 인구가 조밀하였고, 어업이 왕성하여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그 지역에도 아주 불쌍한 인생이 있었는데, 그는 종인데다가 죽을병까지 들었습니다. 대개 종이란 주인집의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죽도록 주인집의 일을 위해 중노동을 하는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을병을 앓는 종에게는 행복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만남의 복입니다. 그 종의 만남의 복인 주인은 선한 양심과 놀라운 사랑이 있는 군인이요, 주 예수님을 확고히 믿는 군인이었습니다. 그 주인은, 헤롯 안티파스의 용병으로서 백 명의 부하를 지휘하는 백부장이었습니다. 사람이나 동식물이나 만남의 복은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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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라도 만남의 복을 받은 개는 부럽지 않습니까? 머리엔 예쁜 머리핀과 리본, 네 발엔 네 켤레의 양말이나 신발, 여름엔 배꼽티, 겨울엔 코트까지 입지 않습니까? 물론, 춘추복도 있습니다. 게다가 자가용까지 밀어 주는 사람인 아빠와 엄마, 언니나 누나, 오빠나 형도 있지 않습니까? 주인을 잘 만나서 만남의 복을 누리는 개들도 있지만, 주인을 잘못 만나서 유기견 신세가 되는 개들도 있고, 초복이나 중복이나 말복에 유명을 달리하는 개들도 있습니다.
만남의 복을 받은 종이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어떤 인생에나 불행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번영의 때에 기고만장하는 대신에, 겸허하게 불행의 때를 위해 저금하는 심정으로 사랑하고 돕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19:17을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불행을 맞게 되면,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왜 내게 이런 불행이 잇따르지!”라고 탄식하기도 하고, “왜 나만 불행하지!”라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이런 탄식과 생각은 불행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잃은 것만 신경 쓰거나, 실패한 것만 신경 쓰다 보면, 더 많이 남아 있는 좋은 것들까지 잃어버리게 되고, 울화병을 만들게 되고, 목숨까지 버리게 됩니다.
불행을 만나면, 남아 있는 행복을 찾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남아 있는 행복을 굳게 붙잡는 것이 불행을 견디는 실마리가 되고, 불행을 극복하는 힘이 되고,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병들어 죽게 된 종에게, 주인인 백부장은 얼마나 중요한 만남의 복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 종은 불행의 때에 도움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그 종은 주인인 백부장에게 아주 충성스럽고, 사랑스러운 종노릇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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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만남의 복인 주인답게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의 장로 몇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했습니다. 주인인 백부장의 처사는 갑작스러운 동정심의 발로가 아닙니다. 사람은 생긴 대로 하는 겁니다. 그 백부장은 평소에도 그 종을 귀히 여겨 사랑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서로 개라고 하면서 경멸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유대 민족을 사랑했고,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도록 회당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의 지도층인 장로들이 점령국에 속한 백부장의 심부름을 한 것입니다.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백부장의 심부름을 한 장로들은 마치 자기들의 일인 양 성심성의를 다해 예수님께 백부장의 종의 죽을병을 고쳐 주시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시는 것이, 평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덕을 쌓은 백부장에게 합당하다고 거들기까지 했습니다. 결코 힘 있는 자에 대한 아부와 아첨이 아닙니다. 평소에 알고 있던 사실 그대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해 회당을 지었나이다.”
그 백부장은 종이 죽을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쓸모없고 무익한데도 평소와 다름없는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병이 들었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하며, 종의 죽을병을 고쳐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사랑은 신분과 지위와 종족을 초월하는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평소의 예배 태도가 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기에 합당합니까? 평소의 가정생활이 가정의 문제를 해결 받고, 더 나아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누리는 복을 받기에 합당합니까? 평소의 대인 관계가 만남의 복을 받기에 합당합니까? 평소의 인격과 생활이 직장과 사업의 복을 받기에 합당합니까? 세상을 이기고,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복을 받기에 합당할 만큼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합니까? 얼마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일을 하고, 언행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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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은, 담임 교역자가 하나님께 “이 교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이 이 교인에게는 합당하니이다.”라고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얼마나 기도하고, 매일 얼마나 성경을 읽습니까? 매일 얼마나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합니까?
병들어 죽게 된 종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백부장의 간청을 몇 장로들에게서 전해 들으신 주 예수님은, 함께 백부장의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백부장의 집이 멀지 않은 곳까지 가셨을 때에, 백부장이 또 벗들을 보내어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주 예수님을 대하는 백부장의 지극히 겸손한 태도와 자기 부족에 대한 인식과 믿음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주 예수님께 대한 존경심이 지극한 나머지, 자기 집은 초라해서 모실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3:16을 보면, 세례 요한도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민중의 인기와 존경과 환호의 대상인 세례 요한이, 주 예수님에 비하면 자기는 종의 신분도 못 된다는 고백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백부장은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겸손하나 대단히 놀라운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라면 종의 죽을병을 고치시기 위해서 직접 손을 대거나, 안수 기도를 하거나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은 일이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시라면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죽을병이 충분히 치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신앙 고백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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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이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 자신도 상관이 있고, 부하가 있어서 명령하는 대로 복종하고, 또 상전으로서 종에게 명령하는 대로 종이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인적이며 초자연적인 메시아적 권위를 지니신 주 예수님의 명령에, 죽을병도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지혜로운 믿음입니까? 성경에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유대인들에게 이 이방인 백부장을 공공연히 칭찬하신 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야 할 유대인들의 불신을 책망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백부장의 심부름을 했던 장로들과 친구들이 백부장의 집으로 돌아가 보니까, 백부장의 종이 죽을병에서 치유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건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시편 33:9을 보면,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07:19 이하에는,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3. 맺음말

공부하는 학생의 좋은 결과가 평소의 복습과 예습에 달려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에도 은혜롭고 복된 결과는 평소의 기도와 말씀의 복습과 예습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생사화복과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거나,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행을 막거나, 닥친 불행을 극복하거나, 전화위복을 이루는 데에 평소의 행복한 신앙생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신분과 종족을 초월하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자신을 부인하고 주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겸손한 믿음으로 누구에게나 만남의 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설교집 28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전체 3

  • 2021-05-29 09:48

    누가복음 7:2의 “사랑하는”의 원어인 헬라어는 엔티모스(ἔντιμος)이며 ‘가치 있는’, ‘귀한’, ‘값진’(벧전 2:4, 5), ‘존경하는’(14:8, 빌 2:29) 등을 의미한다.


  • 2021-05-29 09:50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마태복음 8:5 이하에도 있는데. 번역된 한글 성경에는 없는 동성애자라는 용어가 헬라어 성경 본문에는 있다. 그 용어는 ὁ παῖς(마 8:6. 8, 13)이다. 호 파이스(ὁ παῖς)는 ‘아들’, ‘소년(소녀)’, ‘노예’, ‘동성애자’, ‘동성 연인’을 의미하는 말이다. 동성애 지지자들이 이 말(호 파이스, ὁ παῖς)을 내세워 백부장과 종을 동성 연인인 동성애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성애 지지자들은 당시의 로마에 흔했던 동성애를 들어, 백부장을 동성애자라고 주장하기 위해 로마의 군인이라고 왜곡하기도 한다.)


  • 2021-05-29 09:50

    일반적인 이해나 주경신학적 이해나 성서해석학적 이해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대개 용어의 뜻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용어를 사용한 사람이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하는 개념 파악을 해야 하고, 그 전후 문맥의 의미와 해당되는 문단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물론, 그 해당 성경(예를 들면,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전체적인 내용과 성경 저자의 신앙관과 신학도 알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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