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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위치확인 후 뛰어들 일이다...

작성자
오재영
작성일
2021-04-20 09:43
조회
561
목사에게 영혼을 교도하고 돌보며 신탁(神託)을 준행하는 일, 영광이지만...
세월과 함께 사역의 초심을 잃을 때가 있다. 그 즉시 돌아서면 다행이지만 머뭇거리면 한순간에 그는 생을 망친다. 그러므로 목사 된 이들 기억할 것은 개인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사단’과의 생을 건 처절한 영적 전쟁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들을 인도할 허락받음은 은혜의 섭리 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신앙을 빙자하여 철부지처럼 영적 “청맹과니”의 객쩍은 소리로 진리를 호도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의 미래 장담키 어렵다. 본인이 목사라면, ‘에이미 카마이클’의 표현대로“우리는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옷이 벗겨지신 주님을 따른다.” 는 이 사실을 심비에 새기고, 두렵고 떨림으로 다른 이들이 누리지 못한 특권을 누리거나 무언가를 소유할 수 있다는 헛된 욕망에 휩쓸리지 않도록 늘 다짐하여야 한다.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의 말이다.
“목사가 교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건강한 자기 자신이다.” 이 말을 확대 해석하여 적용한다면 온갖 부패 만연한 세상을 향하여 유일하게 교회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그 선물은 무슨 거창한 미담(美談)거리를 양산하는 것이 아닌 교회자체의 건강함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건강해야 본래사명인 온갖 부패 만연한 세상을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부크너’ 라는 영성작가는 이를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을 하였다
급류(急流)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을 때, 의협심(義俠心)이 강한 사람은 어떻게든 물에 뛰어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건지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대개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 죽는다. 그것은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구조하러 나섰다 해도 급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수영을 잘하거나 못하거나 구조에는 아무소용이 없다.”

급류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방법은 달리 있다.

“우선 물 밖에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모든 안전조치를 취해야한다. 한손으로 나무둥치를 잡고 있든지, 아니면 끈으로 허리를 묽어 단단한 곳에 고정해 두든지, 아무튼 자기만은 절대로 급류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한다. 모든 것이 짧은 시간 안에 신속히 이모든 조치를 취해야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안전을 확보한 뒤에 손을 내밀거나 밧줄을 던지면 두 사람모두 살수가 있다”

의미 있는 예화(例話)가 아닌가?
이 말은 타인을 돌볼 수 있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안전하지 않음에도 다른 사람을 건져 낼 사람은 없다. 내가 안전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건져낼 수가 없기에 우선은 내가 튼튼히 서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브크너’는 덧붙이기를, “남을 위하여 피를 흘리되 죽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 주변을 보면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하면서 자기부터 망가지는 이들이 있다.
종국에는 둘 다 죽는 길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순간적이나마 대단히 의롭고 숭고해 보일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원죄의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기에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는 자기 성찰과 말씀에 전념하지 않고 타인의 사연에 무모함으로 등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경박(輕薄)하고 방자(放恣)한 모습을 보노라면 한마디로 가련하고 측은한 마음이 든다.

정상적인 이성을 소유한 사람으로 마음 한편에 타인으로부터 칭찬과 존경과 질투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이 있겠는가? 만일 그 마음 가는대로 내버려 두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또 박수갈채를 받는 일 따위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한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 나의 비판자들의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일 때 내 자아(自我)는 훈련을 받는다. 특별히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 속에 내가 배워야 할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또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이들마다 자기주변에 자신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되받아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소수의 친구들이 있는 이는 축복이다. 그러나 우리가 친구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엡4:15)가능성이 있는이들은 별로 없다. 그러니 때로는 비판자들이 우리 자아를 길들일 수도 있다. 가혹한 말로 우리의 어두운 면과 서툰 결정을 거론하면서 상기시켜 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오만(傲慢)한 사람의 불행...

미국의 명문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이 간디가 이끄는 공동체에 와서 살게 되었다. 공동체에서 그의 보직은 변소 청소였다. 며칠 안 있어 그는 간디에게 항의를 했다. “제가 누군지 안 보이세요? 저는 큰일을 할 수 있다고요.” 간디가 대답했다. “자네가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네, 내가 모르는 건 자네가 작은 일도 잘할 수 있는가 하는 걸세.” 사람의 자아(自我)는 그렇게 훈련 받는 것이다.

목사라면 대부분 기억하는 성 프란체스코, 하나님께서 자신을 놀라운 영성운동의 창시자로 기름 부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주님께서 나의 수고를 축복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 믿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어디에 가면 지구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작고, 가장 비천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던 중 나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야 찾았다. 이 사람은 자만(自慢)하지도 않을 것이고 내 영광을 가로 채지도 않을 것이므로 이 사람을 통해 일해야겠다. 이 사람은 내가 자기를 사용하는 이유가 자기가 작고 보잘 것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글을 마치며...

이런 삶과는 전혀 상반(相反)되는 사람들을 마주 대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서글픈 일인가? 우리 중에 어릴 적부터 일류학교의 실력과 사명감으로 출발한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비천(卑賤)한자 오직 은혜로 존귀한 자리에 세웠건만, 내면의 천박한 습성 버리지 못한 채 주님을 욕되게 하는 그 자리에서 목소리 높이고 있다.(겔16장). 감당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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