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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4:1-6(고난당하신 주를 본받으라)의 주경신학적 연구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4-12-02 20:38
조회
662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육하시기 전에도 성령으로서 전파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영적 존재들의 순복의 대상이 되셨다고 한 베드로는, 그 고난당하신 주님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먼저, 베드로는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하였다.
원문의 첫 부분에는 οὖν(운:‘그렇다면’, ‘그런즉’)이 있어서 3:18-22의 중요한 교훈을 소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C. Bigg).
육체(사르키, σαρκί)는 1:24의 주석을 보라.
고난을 받으셨으니(파톤토스, παθόντος)는 p72, B, C, Ψ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אc, A, K, P 사본 등에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παθόντος ὑπὲρ ἡμών)로 되어 있고; א 사본에는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παθόντος ὑπὲρ ὑμών)로 되어 있다.① 어느 것을 취하든 의미상의 차이는 없으나, 개역한글판 성경처럼 처음 것을 취하는 것이 보다 적합하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은 2:21-24과 3:18의 주석을 보라.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마음은 엔노이안(ἔννοιαν)으로서 ‘생각’, ‘사고방식’을 뜻하고(히 4:12);갑옷을 삼으라는 호플리사스테(ὁπλίσασθε)로서 고난에 임할 무장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받으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을 정신 무장을 하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싸움에 비유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장을 권하는 것은 바울 서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롬 6:13, 13:12, 고후 6:7, 10:4, 엡 6:11-17, 살전 5:8, 골 3:12 등).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에 대한 해석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육체의 고난이 영혼을 정련한다는 것이다(에녹 1서 67:9, 마카비 2서 6:12-16, 바룩 2서 13:10, 78:6). 이러한 해석은 죄가 육체에 자리잡고 있으며, 육체가 고난을 받을 때 죄는 점진적으로 정복되며, 그 결과 육체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죄를 그치게 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Archbishop”,② A. M. Hunter, 黑崎幸吉).
이 견해에 대해 켈리(J. N. D. Kelly)는 세 가지 점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첫째, 헬라어 본문에서 고난을 받은(파톤, παθὼν)은 상반절에서와 같이 부정 과거 분사로 쓰였으며, 그쳤음이니(페파위타이, πέπαυται)는 완료 시제이다. 그러므로 이 두 낱말은 과거의 명백한 경험과 그로부터 비롯된 상태를 가리키며, 일반적인 격언을 나타내는 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둘째, 이 견해에 따른 고난에 대한 과장된 주장들은 실로 지나친 것인데, 이는 고난이 사람을 연단시키고 그의 인격을 향상시킬 수는 있지만(고난은 물론 사람의 인격을 망쳐 놓을 수도 있다.) 죄를 제거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예증을 위해 인용된 본문들 중 어느 것도 이러한 해석에 근접한 아무 사실도 말하지 않는다. 실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효력을 발휘하는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것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다. 셋째, 만일 상반절의 고난받으셨으니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미한다면, 하반절의 고난받은도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 서신 어디에서도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실지로 순교에 직면하고 있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본절에 나타난 그들의 유일한 고난은 비방이다. 넷째, 하반절에서 언급되는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그리스도의 경험간에는 유사점이 있는 것이 틀림없지만, 여기서 저자가 의도하는 바가 그리스도께서도 수난에 의해 인격이 순화되셨다고 말하는 것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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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K. Aland, et al., ed.
2) in A. M. H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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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셋째 항의 “그러나 본 서신 어디에서도……유일한 고난은 비방이다.”라는 내용만은 적절하지 못하다.
렌스키(R. C. H. Lenski)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악한 사람들까지도 고난에 의해 죄를 범하는 짓을 그친다고 말해지는 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다.
(2)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란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박해나 악평이나 고통을 받고 있는 수신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러한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죄된 행동을 그쳤다는 것이다(참조:3:21, 롬 6:7).③
이 견해에 대해 켈리(J. N. D. Kelly)는 “이러한 주석이 대체로 훌륭한 의미를 나타내긴 하지만, 정관사가 있는 단수 분사(ὁπαθὼν)가 쓰인 점이나, 더욱 난처하게는 세례에 의한 신비스러운 죽음에 대해 육체의 고난을 받았다는 대담한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한두 가지 어색한 면을 지닌다.”라고 반대하고 있다. 이 견해는 또한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죄된 행동을 그치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떠나게 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옳지 않다.
(3) 세례에 관한 이야기로 보는 것이다. 즉,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참예한 자는, 죄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산다고 하는 것이다(참조:롬 6:14).④
이 견해는 본절이 그리스도인들이 정신 무장을 하고 본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과 정관사가 있는 단수 분사(ὁπαθὼν)가 쓰인 점과 죄를 이길 힘을 지니신 이는 그리스도라는 점, 그리고 다음 구절 등을 보아 받아들일 수 없다.
(4)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죄의 세력을 분쇄시킨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는 것이다(W. Schrage, M. Bentley, 박윤선).
이 견해는 바로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점과 헬라어 본문에서 고난을 받은(파톤, παθὼν)이 상반절에서와 같이 부정 과거 분사로 쓰였고, 그쳤음이니(페파위타이, πέπαυται)는 완료 시제로 쓰여 과거의 명백한 경험과 그로부터 비롯된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 등을 미루어 가장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하마르티아스, ἁμαρτίας)는 2:20의 주석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을 지배하는 죄를 분쇄시킨 목적에 대해, 베드로는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후로는 다시(메케티, μηκέτι)란 ‘죄의 지배 아래 사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죄를 그치게 하신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로는 다시’를 뜻하는 것이다.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정욕들은 1:14의 “사욕”의 주석을 보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의 몸(고전 15:44)으로 지상에서 살게 될 남은 기간을 오로지 하나님의 뜻(텔레마티, θελήματι:‘소원’, ‘의지’)을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5)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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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 Wesley, “E. G. Selwyn”(in E. A. Blum), C. Bigg, I. H. Marshall, C. R. Erdman, R. C. H. Lenski, A. M. Stibbs.
4) J. Calvin, M. Henry, A. Barnes, A. J. Mason, B. C. Caffin, J. N. D. Kelly, W. Barclay, L. Goppelt, S. W. Paine, H. Alford, D. H. Whea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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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자신의 취지를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된 독자들이 과거에 사람의 정욕들을 좇아 행한 죄악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3】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음란은 아셀게이아이스(ἀσεγείαις)로서 ‘음탕’(막 7:22), ‘방탕’(엡 4:19), ‘음란’(벧후 2:7, 18), ‘색욕’(유 4), ‘호색’(롬 13:13, 고후 12:21, 벧후 2:2)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말은 ‘굴레 벗은 육욕’, ‘외설’, ‘부도덕’이라는 뜻도 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말은 성적인 불결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순전히 방자한 거만을 뜻한다. 바실(Basil)이 정의한 바와 같이, 이 말은 훈련의 고통을 참을 수 없으며, 또 참으려고도 하지 않는 영혼의 태도를 가리킨다. 이 말은 자제를 모르고, 체면도 의식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는 한 여론과 명예를 아랑곳하지 않는바 감히 제멋대로 변덕을 부리는 방자한 거만이다. 요세푸스(Josephus)는 ‘하나님의 도성 안에 바알의 신전을 지은 이세벨이 그 말에 꼭 맞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이 말은 명예심도 수치심도 없이, 염치없게도 하나님과 인간을 완전히 무시한 채,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제 손에 넣고자 하는 오만한 이기심을 의미하기도 한다.”라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고후 12:21의 주석).
정욕은 1:14의 “사욕”의 주석을 보라.
술 취함(오이노플뤼기아이스, οἰνοφλγίαις)이란 그 자체가 악은 아니다(딤전 5:23). 그러나 술은 일상생활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며, 특히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장애가 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술 취함을 금하는 것이다(잠 20:1, 23:30, 31, 눅 21:34, 고전 5:11, 6:10, 갈 5:21, 딤전 3:3). 사실상 술로 자기 인생과 남의 인생을 망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방탕은 코모이스(κώμοις)로서 {어떤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수행하고 나선 그의 친구들의 무리를 의미하였다. 그들은 춤을 추고, 웃으며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 말은 또한 술의 신인 바카스의 신봉자들의 무리를 의미하기도 하였다.……그것은 전혀 통제 받지 않은바 자제력을 상실한 환락 또는 방종이라 할 정도의 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E. D. Burton, W. Barclay)}(갈 5:20의 주석).
연락은 포토이스(πότοις)로서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일이다. 여기서는 우상 숭배와 관련되거나 음란과 관련되는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텔레마, θέλημα:‘소원’, ‘의지’)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무법한이란 아테미토이스(ἀθεμίτοις)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와 사도행전 10:28에만 나오는데, 둘 다 베드로가 사용한 것이다. 이 말은 “여기서는 ‘모세의 율법에 금지된’을 의미하는 것 같다. 고전 헬라어에서는 ‘이성과 양심의 자연 법칙에 금지된’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체로 가장 자연스런 추측은 아시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있었고, 따라서 베드로는 때로는 이방 교인들에게, 때로는 유대 교인들에게, 때로는 양자 모두에게 말하였다고 하는 것이다”(C. Bigg). 그렇다면 베드로의 이 말은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의 도우심을 따라 위와 같은 옛 죄악 생활을 그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불신자들의 태도에 대해 베드로는, 【4】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극한 방탕극한은 아나크신(ἀνάχσιν)으로서 ‘쏟아 붓다’, ‘넘쳐흐르다’, ‘유출되다’를 의미한다. 여기서 강이 범람하여 강어귀나 소택 지대와 같은 곳에 물이 넓게 흐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방탕은 아소티아스(ἀσωτίας)로서 ‘낭비’, ‘사치’, ‘저축하지 않는 것’ 등을 뜻했으며, 여기서 ‘방종’, ‘음란’, ‘불량’, ‘방탕’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눅 15:13, 엡 5:18, 딛 1:6).
비방하나는 블라스페문테스(βλασφημούντες)로서 ‘하나님께 대해 불경한 말을 하다’, ‘모독하다’, ‘욕하다’, ‘훼방하다’, ‘악평하다’ 등을 의미한다.
달음질하지란 목표를 향해 전심전력을 다해 뛰어간다는 뜻이다. 즉, 오로지 가지가지의 방탕한 생활에 전심전력을 다해 매진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으레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며 비방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 베드로는 【5】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영적으로 살아 있거나 죽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난 자들과 현재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데(1:17의 주석을 보라. 참조:행 10:42, 롬 14:9, 딤후 4:1), 이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다(마 25:31-46, 눅 21:34-36, 행 10:42, 17:31, 고전 4:4, 딤후 4:1).
직고하리라는 아포도수신 로곤(ἀποδώσουσιν λόγον)으로서 ‘주인이나 판사에게 계산서나 전말서를 제출하는 것’, ‘재판을 받는 것’, ‘심문에 따라 전말을 진술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였다.
원문의 첫 부분에는 가르(γὰρ)가 있어 앞 구절의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근거를 나타내고 있다.
이 구절 또한 난해한 구절로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으나, 3:18-19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는 점과 앞 구절을 보아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복음(1:12의 주석을 보라.)이 전파된 적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육체(사르키, σαρκί: 1:24의 주석을 보라.)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곧 성령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리스도인들(고전 3:16, 6:19, 12:3)이 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지만, 내주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되어(롬 8:11) 영원토록 신령한 삶을 살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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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출처: 최세창, 야고보서․베드로전후서(서울: 글벗사, 2001, 3판 1쇄), pp. 459-466.



전체 2

  • 2024-12-05 08:59

    아멘.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 2024-12-05 19:18

      필자의 베드로전서 4:1-6의 주경신학적 연구에 "아멘."으로 공감하시고,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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