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께.
현재 ‘감리회소식’이 ‘자유게시판’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표명이나 감리회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의 글은 ‘자유게시판’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논쟁'성소수자문제' /박충구:여성구목사

작성자
장병선
작성일
2021-02-10 18:40
조회
749
“여성구 목사의 반론에 대하여 답함”
1. 부족한 글에 대하여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목회자의 입장에서 논평해 주신 것에 대하여 일단 감사드린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이해하고 쓴 논평이 아니라 반대하기 위해 쓴 논평으로서의 허위의식이 너무 노골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의 글이 여 목사의 입장을 바꿀 정도의 설득력이 없다는 이유를 밝히기 위하여 여 목사께서는 여기저기서 동성애 혐오자들의 글과 논리를 끌어와 편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리한 주장은 두 가지 문제를 가지게 된다. 첫째는 사실에 적합하지 않는 주장을 하게 된다. 동성애자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나의 글을 분석하는 방법에서도 사실에 적합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둘째, 여 목사께서 이미 외삽법적으로 나의 논의의 맥락과 관계없이 자기주장을 덧 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썼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동성애와 관련하여 다양한 자료와 학술적 논문이나 책을 읽지도 않은 사람이 제기하는 이런 류의 편파적 비판에 대해 윤리 학자의 입장에서 응답하는 글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논의가 동성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여 마음 편하게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평신도 지도자 혹은 목회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여 응답 글을 드린다.
2. 나는 동성애와 관련하여 미국교회의 입장, 유럽, 특히 독일 교회의 입장, 카톨릭 교회의 입장, 그리고 세계 정신의학회와 심리학회의 입장을 살피면서 1995년에 동성애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나의 책 “한국사회와 기독교 윤리”에 실려 있고, 이에 앞서 기독교 사상지에 편집진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기상 편집진은 동성애에 관한 한국 교회의 부정적 기류가 필자인 내게 위해를 끼칠 것을 염려하여 나의 이름으로 논문을 내지 않고 기상 편집진의 이름으로 논문을 게재했다.)
하여 동성애에 대한 나의 견해는 나의 사견이라기보다 세계 교회의 입장 변화의 추이를 살피고, 그러한 입장 변화에 내 자신이 설득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성애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심각한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주제가 된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다. 나에게도 그랬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동성애자가 문제인가 아니면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문화에 젖어 있는 이들이 문제인가 양단간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후자의 문제라고 보는 입장에 서있다. 내가 나의 앞선 글 말미에 밝혔듯이 인간에게는 “인간을 혐오하고 미워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3. 동성애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는 “존재와 행위“에 관한 이해에 있다. 동성애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동성애 이해의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며, 대부분의 비판자들은 존재의 문제를 간과하고 행위의 문제를 비열하게 들추는 방식을 택한다. 나는 이런 태도는 정말 문제라고 보고 있다. 이성애는 하나님의 질서고, 동성애는 하나님의 질서가 아니라고 했던 과거의 자연신학적인 입장이나, 자녀 산출의 법이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의 목적이라고 해석했던 기능주의적 성 이해는 이미 인간의 성(sexuality)이 다양하고, 신체적 조건 역시 소수자들로 인하여 다양하다는 사실 앞에서 합리적인 이성애자들도 정직하게 버린 주장이다.
성은 동성애나 이성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이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지지하거나 반대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동성애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존재하는 것을 인정할 뿐이고, 동성애자를 한 인간으로 대하려는 것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과거에 형성된 편견은 소수자의 존재를 존중하는 오늘의 사회 윤리, 법적 기준에 미달하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의 전통을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가겠다고 고집하는 이는 반사회주의자이거나 바보다.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동성애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성은 이성애라는 하나의 기준만을 가지고 다른 모든 양태의 성을 비정상이라고 규정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과거의 편견을 유통하며 자기 자신이 편협한 혐오주의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문제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해를 받아들인 이들이 문제라고 아우성 친다. 물리학자 길원평 교수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물리학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동성애 혐오주의자다. 혐오주의를 경건한 신자의 삶이라고 가르치는 기이한 사람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던 옛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혐오주의 집단으로 전락한다. 여 목사께서는 이런 부류의 추종자일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동성애자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함으로써 그들을 혐오하고 끝없이 괴롭히는 목사인 셈이다. 그들이 여 목사에게 무슨 해를 끼쳤는지 나는 모르겠다. 왜 동성애자 존재를 부인하며, 그렇게 증오하는가? 무슨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4. 여 목사는 나열한 바 동성애가 비성경, 비자연, 부도덕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길원평씨의 주장을 또 인용했다. 유전론은 일종의 과학주의적 증거를 요구하는 것인데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유전자가 있건 없건 동성애자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애 유전자는 찾아 봤는가? 유전자 결정론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한 발 나가면 문화적 영향을 의미하는 밈(Meme)이론도 있다. 유전자 결정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어서 나온 이론이다.
이 모든 이론은 가설적으로 추정하고 그 가설을 입증하려는 시도들이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입증되든지 안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 갑돌이와 갑순이가 사랑을 하는 데 그 이유가 유전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를 밝혀 인정하겠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동성애자의 빈도는 유럽기준 남성 인구의 약 2.5%, 여성은 그 절반 정도 된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실적 사실, 존재 자체를 인정하기가 쑥스러운지 혐오주의자들은 거듭 동성애자의 행위를 아주 야만적으로, 유치하게 벌거벗긴다?
존재는 인정하지만 존재해서는 안 될 무리라는 주장이다. 어폐가 있지 않은가?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지워 버리나? 혐오주의자들은 여기서 히틀러가 했던 방식을 사용한다. 악의를 가지가 참소하는 것이다. 혐오주의자의 사고방식과 좌표는 바로 여기 히틀러 주변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이 혐오를 받을 이유가 충분히 있는가? 혐오주의자들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성애자들은 혐오를 받을 이유가 없는가? 조두순은 이성애자, 자기 딸을 68차례나 강간한 강간범도 이성애자다. 이 세상의 성범죄의 99.9%가 모두 이성애자가 저지르는 범죄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내가 이성애자를 혐오하자고 한다면 나에게 동의하겠는가? 범죄와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야만적 편견을 가지고 동성애자를 참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 짓이 아니다. 성경대로라면 “참소하는 자“나 할 짓이다. 참소하는 자는 누구인지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이성애자 중에 범죄자가 있듯이 동성애자 중에도 범죄자가 있다. 이성애자 중에 애널섹스를 하는 자도 있지만 모든 동성애자가 에널섹스를 하는 것은 아니다. 레즈비안도 있지 않은가? 특수와 보편이라는 기본적인 개념도 정리하지 못하고 종과 속을 나누지 못하는 대충 하는 사고로 특정 행위를 일반화하여 범죄 행위와 동성애 행위를 동일시하는 것은 내가 보기엔 악의가 앞선 판단이다.
5. 여 목사께서는 자기 아내와 성행위를 어떻게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른 사람의 성행위를 함부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떠들어 대는 행위는 누가 보아도 품위가 없는 짓이다. 혐오주의자들은 교양을 주장하고 윤리와 도덕을 주장하지만 유독 동성애자를 향한 혐오감을 부추기기 위하여 동성애자들의 성애적 행위를 매우 추하게 설명하려 든다. 여기에 항상 동원하는 것이 에이즈 전파설이다. 여기 더해 애널 섹스, 리밍 행위를 매우 혐오스럽게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여 목사께서 평소 나름대로 교양 있게 살아가시는 분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여 목사의 생각과 달리 최근 보고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리밍은 동성애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애자들도 사랑하는 행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청교도들은 사랑의 행위도 가부장적 남성 상위 체위, 혹은 미셔나리 포지션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던 때도 있었다. 여 목사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 그런 수준에서 성을 이해하고 계시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건강상의 문제를 염려한다면 건강위생을 가르치자고 하면 될 일이다. 민감한 성기를 물리적으로 해하는 성행위는 동성애자만이 아니라 이성애자에게도 문제가 된다. 이성애자 조두순이 한 짓을 생각해 보시라. 더구나 동성애자들 모두 마약을 하는 듯이 주장하는 것을 보니 특수와 보편을 헤아리기를 아예 포기한 논리라는 생각이 든다. 동성애자들이 마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나 이성애자 가리지 않고 정신적으로 약해진 “인간이” 하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동성애자가 완전 무구한 인간이라든지 천사라는 주장이 아니라 동성애자도 하나님이 내신 이성애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한 인간이라는 주장이다. 동성애를 혐오하기 위하여 온갖 몹쓸 이야기를 가져오는 그 방법을 이성애를 혐오하기 위해 사용해 보시라. 데이터 상 이성애자들이 더 많이 마약하고, 더 많이 에이즈를 퍼뜨리고, 더욱 폭력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짓을 많이 한다. 이런 짓을 하는 이성애자를 앞에 두고 유전설이니 후천설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짓인가? 그런 주장은 보편적 합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그런 논의에 참여하지 않는다.
6. 경건하다고 스스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은 매우 쉽게 성경을 인용하면서 동성애자를 정죄하려 든다. 여 목사께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여 목사가 정말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성경에서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뺏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구절들이 현행 실정법에서 무효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 구절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모든 것이 다 옳은 아주 특수한 (독일어로는 이런 것을 기독교에만 아주 특수한 것, Sondergut 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평신도 수준이라면 용서가 되지만 기초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 나는 신학을 잘못 배운 이가 악의적 풍설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동성애 행위자를 포함하여 28가지 항목에서 “죽이라“고 명하고 있다. 28가지 항목을 들어 사형에 처할 죄라고 보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구절이야말로 과거의 종교 사회적 배경에서 형성된 매우 잘못된 유산이라고 본다. 나는 내 자식이 내 말을 안 듣는다 하여 성경에서 명하는 대로 죽일 생각이 없다.
이런 성서 구절을 들이대며 혐오를 발산하는 나쁜 습성, 기독교인들이 쉽게 걸리는 병이다. 예수는 혐오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셨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그러하듯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먼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 이성애자 기준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동성애를 잘 모르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경험적으로 동성애자를 만나 보기도 쉽지 않아서 그들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여 동성애 혐오자들로부터 혐오의 원리를 수입하여 유포하는 짓은 신실한 목사가 할 짓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7. 나는 여 목사께서 죄와 범죄를 나누어 생각하기를 권한다. 성경은 동성애 행위를 죄 정도가 아니라 죽여야 할 범죄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범죄적 동성애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범죄적 동성애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폭력 특별법을 가지고 이성애자들이 범죄적 이성애를 했을 경우에 처벌하듯이 범죄적 동성애는 법적 처벌의 대상이다. 나는 이런 처벌을 반대하지 않는다. 성경이 동성애를 언급할 경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동성애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과거로 돌아가면 갈수록 인간의 생명은 값싸게 처리되었다. 과거엔 권력자 마음에 안 든다고 하여 마구 죽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과거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면 안 된다. 오늘날 인간의 생명은 이전에 비하여 고귀한 가치를 가진다. 그래서 인권 선언문이 나오고, 인권 사상이 펼쳐졌으며, 인간을 함부로 처리하지 못하도록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법이 생기고, 사회 구성원이 법을 따라 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도대체 뭔데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인권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지 말라고 주장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조금도 이해가 안 간다.
인권법을 반대하면서 기껏 한다는 주장이 여 목사께서 나열한 정도라면 그것은 매우 우스운 일이다. 동성애자를 혐오하다 못해 자의적으로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여 목사 같은 분이,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동성애자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고 싶다고 주장하여도 나는 그런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동성애자와 여 목사, 내가 보기에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다.
만일 여 목사께서 동성애자들이 죄인이므로 우리가 그들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오히려 혐오의 죄를 짓고 있는 여 목사가 동성애자들에 의하여 용서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성애자 앞에서 자신들은 의롭고, 구원의 주체라고 여기는 망상에서 하루 속히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8. 마지막으로 나는 여 목사의 글에서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프레임 덧 씌우는 습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여 목사께서는 나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매우 병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류를 몇 가지만 지적하여 바로 잡아 드린다.
첫째, 여 목사는 마치 내가 “이동환 목사는 차별적 편견의 오류를 인식하고 동성애자를 축복함으로써 동성애자의 진보를 가져왔다며 찬양하고....”라고 주장함으로써 마치 내가 이동환 목사의 행위를 찬양한 것이라 왜곡한다. 나는 이동환 목사를 일면식 대면한 적도 없고 찬양한 사실이 없다!정정해 드린다. 나는 그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목사로서 축도한 행위를 빌미삼아 감리교 일부 세력이 그를 2년 정직에 처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둘째, 여 목사는 나를 “편견과 차별이라는 그물로 반동성애자들을 쌍끌이 해서 잡으려는 우를 범했다”고 고발하면서 슬며시 “박 교수는 사실을 편견으로 호도하여 감리교회를 비판하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내 자신도 속해 있는 감리교회를 비판하지 않았다. 차별주의자들에 의하여 시대착오적인 재판을 벌이는 감리교회의 수준 낮은 자들을 비판한 것이다. 여기서도 여 목사는 특수와 보편에 대한 착각을 자유롭게 오가며 자기 편리한 대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셋째, 나의 앞글에서 나는 누군가의 재현 행위에서 일어나는 지적 왜곡이나 오류에서 차별이나 혐오가 시작된다고 했다. 이것은 내 주장일 뿐만이아니라 편견에 관한 아주 좋은 책을 쓴 알포트의 주장에서 내가 배운 것이다. 이런 재현의 왜곡 현상이 여 목사의 글에서도 여지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확증편향에 빠져 옳음을 몰아내고 그름을 왕좌에 앉히는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여 목사는 마치 내가 확증편향에 빠져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규정하고 있다. 내가 인간을 증오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고 한다면 그것이 확증편향인가? 내가 보기에는 여 목사가 동성애 혐오에 대한 확증편향에 빠져 동성애자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악의와 혐오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혹하게 된다.
넷째, 여 목사의 심각한 오류는 동성애가 자의적 선택이라고 보고, 그 선택 행위가 죄라고 단정하는 데 있다. 나는 이성애자들의 다양한 성행위를 모두 옳다고 보지 않듯이, 동성애자들의 다양한 성행위의 양태를 모두 옳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문명사회에서 인간의 행위는 도덕과 법에 의하여 규제되고 있다. 그런데 여 목사는 종교적 죄의 개념을 들이대며 동성애자를 비하하고, 죄인으로 취급하며, 온갖 악설을 주장하면서 “동성애는 치료 불가능한 유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으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취향”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판단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사실 인류사회는 1970년 대 초까지만 해도 동성애를 치료하거나 바꿀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1973년(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 1975년(American Pschologists Association) 세계 정신의학회와 세계심리학회에서 동성애는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정의하여 정신이나 심리 질병 리스트에서 동성애를 제외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고 있다. 그 대신 길원평 같은 혐오주의자의 주장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교회들이 지난 역사 속에서 ‘고칠 수 있는 취향’ 정도로, 혹은 잘못된 일, 죄악 이라고 줄기차게 보아왔던 견해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을 지나면서부터라는 사실을 아셔야 한다.
다섯째, 여 목사는 온갖 부정적인 편견을 유포하고 나서 이렇게 다른 얼굴을 보인다. “반동성애 진영에서 죄라고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이 바탕이 돼서 나온 행동이다.” 두 얼굴의 목사님이시다. 정말 그럴까? 그런데 동성애자들을 위해 축도한 목사는 2년 정직을 내리고 정당하다고 하는가? 동성애를 혐오하는 부모, 목사, 교인을 만들어 놓고서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집단이 베푸는 긍휼을 동성애자들이 받아들일까? 동성애자를 향해서 ‘차별의 악’을 행한 교회의 지난 역사를 정말 모르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가 비정상으로 여겨 동성애자를 자살로 내몬 역사에 대한 기록을 반드시 찾아 읽어보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최근 리포트된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응답 글을 마친다. 미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성소수자 청소년은 그렇지 않은 청소년보다 자살률이 3.5배, 트렌스젠더는 5.87배, 게이나 레즈비언은 3.71배 높다. 이들이 자살로 내몰리는 원인은 호모포이아를 느끼는 가족 구성원이나 친구, 그리고 교회 멤버들의 냉대와 차별로 인해 삶의 기반과 보호막이 사라져, 거의 적대적 환경에 둘러싸인 홈리스 상태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소수자 청소년의 경우 약 10%가 위협과 폭력에 항상 시달리고, 34%정도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28%가 사이버 괴롭힘을 겪는 것으로, 그리고 23%의 성소수자 청소년이 데이트 성폭력을 겪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나는 이들이 단순히 바꿀 수 있는 성적 취향 때문에 스스로를 자살로 내몰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들을 자살로 내 모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여 목사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는 2020년 11월 9일 교회가 성소수자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며 상처 입혀온 사실을 인정하고 지난 역사에 대하여 엄청난 상처와 아픔을(huge damage and hurt)끼쳐온 것에 대하여 공식 사과했다. 부디 교회 지도자라면 자기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물리학자나 간호사의 소리를 듣지 말고 세계의 교회가 바뀌고 있는 것을 아주 조금 만이라도 이해 했으면 좋겠다.
박충구 교수(원로목사, 전 감리교 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박충구 교수의 주장에 대해 팩트 체크함

동성애는 질병이고, 치료가 가능하다.

박충구 전(前) 감신대 기독교 윤리학 교수(이하 박 교수)의 ‘차별의 악:선한 차별주의자는 없다’라는 글에 대해, 필자는 ‘편견이 아니라 사실이고, 혐오가 아니라 긍휼이다.’라고 반박한 데 대해, 박 교수는 ‘여성구 목사의 반론에 대하여 답함’이라는 글을 당당뉴스 2021년 2월 3일 자에 실으셨다. 필자의 부족한 글을 답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박 교수께서 동성애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평신도들과 목회자들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생각해 답글을 주셨듯이, 필자도 박 교수께서 제시한 몇 가지 주장에 대해 ‘팩트 체크(fact-check)’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이다 보니 사실이라고 굳게 믿었던 정보들이 어떤 경우는 일부 또는 전부가 잘못된 사실로 인해 생긴 가짜뉴스(fake news)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박 교수께 아무런 나쁜 감정도 없으며,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말꼬리를 잡으려는 의도도 전혀 없습니다. 다만 박 교수가 근거로 제시한 내용 중에 동성애를 지탱하는 중요 기둥이 있어, 필자는 진실 검증을 통해 그것이 부정직한 결과임을 밝혀, 오늘도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는 동성애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동성애를 탈출하라고 촉구(促求)하려 합니다.


박 교수의 답변에 대한 문제 제기

박 교수 말씀처럼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없다면, 박 교수께서도 그에 해당합니다. 박 교수는 편파적 비판을 거부하셨는데, 세계적 석학 중에도 반동성애자가 많으니 그들을 폄하하지 마십시오(1단원). 박 교수는 동성애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섭렵하신 듯하나, 사실은 찬성하는 입장에 서셨습니다. 반대도 그렇지만 찬성도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박 교수는 학자 이전에 감리교회 원로 목사십니다(2단원). 박 교수는 동성애자가 이미 존재한다고 하셨으나, 성경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왜곡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3단원). 박 교수는 동성애 혐오를 인종 혐오와 동일시했습니다. 동성애를 당연시하는 것은 그들의 방종을 부추기는 행위입니다(4단원). 동성애는 에이즈의 주요인인데, 박 교수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이 극단적인 사례로 물타기 하였습니다(5단원). 박 교수는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언급하며 동성애자들을 정죄한다 하셨는데, 이것은 박 교수께서 기독교인들을 대하는 혐오이며 정죄입니다(6단원).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모두 구원이 필요한 죄인입니다. 박 교수는 동성애자들을 보호하는 영웅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영웅은 죄인을 구하는 사람입니다(7단원).


동성애는 질병일까? 아닐까?

박 교수는 8단원에서 필자의 오류를 일일이 지적했습니다. 네 번째에 필자가 동성애는 치료 불가능한 유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의지적인 결단으로 고칠 수 있는 성적 취향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박 교수는 ‘이런 판단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라고 일축했습니다. 박 교수는 ‘1973년과 1975년에 세계 정신의학회와 세계심리학회에서 동성애는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정의하고, 정신이나 심리 질병 리스트에서 동성애를 제외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박 교수 말처럼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면 고칠 수도 없으며, 동성애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편견이 분명합니다. 반대로 동성애가 질병이라면 고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자, 그럼 첫 번째 팩트 체크를 해 보겠습니다. 박 교수 주장처럼 1973년에 세계 정신의학회에서 동성애는 고칠 수 없는 질병이라고 선언했습니다. 1973년은 동성애자들에게는 역사적인 해였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쾌재를 불렀고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강압에 의한 결정이었다면 권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자백 배제의 법칙‘이 있습니다.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이나 폭행이나 협박이나 구속에 의한 진술이라면 그것을 통해 얻은 정보는 증거능력이 없다는 법칙입니다. 모든 일은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합니다. 과정이 공정해야 결과도 존중되고, 승리자도 자랑할 만하고 패배자도 수긍하게 됩니다.

박 교수는 필자의 짜깁기를 비판했는데, 필자는 박 교수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을 정도로 지적 격차가 있는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2, 3차 자료를 언급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곽혜원 박사(크리스천 투데이, 2021년 1월 24일)는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APA)가 정신질환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하기로 했는데, 이것은 의학적 논의의 결과가 아니었고 고위층을 점유한 동성애 옹호 세력의 강력한 로비와 정신의학과 의사들에게 가해진 정치적 협박으로 말미암은 일이었다.”라고 과정을 소상히 설명하였습니다. 곽 박사는 “전국 게이 특별팀”이 동성애를 정신장애에서 삭제하기 위해 폭력과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고 부연 설명하였습니다. 곽 박사는 아울러 “동성애 옹호 세력은 정신과 의사들에 대한 엄청난 협박과 폭력을 철저히 은폐하면서 이를 APA의 과학적 승리로 선전하지만, 역사는 이 사건을 ‘과학이 사회적 이슈에 굴복당한 정치적 사건’으로 평가한다.”라고 일갈했습니다. 곽 박사는 “이로부터 17년 후 세계보건기구(WHO)가 APA의 결정을 채택함으로써, 오늘날에는 동성애가 ‘자연적 변이’로 간주하는, 그야말로 인류 문명의 흑역사가 열리게 되었다.”라고 한탄하였습니다. 박 교수 주장하듯이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라는 결정은, 의학적으로 동의를 얻지 못한 협박에 굴종한 결정이었습니다. 전혀 공감을 얻지도 정당성을 부여받지도 못한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박 교수는 아무리 올바른 최신효과라도 처음에 알려진 초두효과를 대치하지 못한다는 걸 알 것입니다. 그만큼 처음 발표된 내용이 인간의 뇌리에 깊이 똬리를 틉니다. 박 교수는 지적인 교만을 버리고, 다른 분야 전문가의 말을 귀담아듣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박 교수를 편견이라는 구덩이에서 건질 유일한 밧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박 교수가 인용한 주장처럼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면 치료 효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치료 효과가 있다면 질병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고두현 한국 성 과학 연구협회 학술연구팀장(내과 전문의, 크리스천 투데이, 2020년 1월 19일)은 “현재 미국 16개 주에서 동성애 커플에 대한 전환 치료 및 회복 치료를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성애를 질병 분류에서 제외하는 데 가장 큰 업적을 냈던 ‘스피처’는 그 스스로 종교적 기관과 동성애 연구 및 치료를 위한 전미 협회와 기타 치료기관에서 5년간의 변화를 관찰하고 ‘전환 치료’가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낸 바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고 팀장은 “이에 따르면 치료군이 대조군보다 평균 79% 증상이 호전됐으며 이는 우울증, 불안과 같은 다른 정신질환의 치료율과 비슷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동성애나 양성애를 가진 이들을 이성애로 바꾸는 치료를 전환 치료(conversion therapy)라고 하는데, 효과가 있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고 팀장은 계속해서 “법조계에서도 종교적, 도덕적 가치에 의해 치료받는 것을 막는 일은 자기 결정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비판을 한 바 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박 교수는 동성애는 치료할 수 없다는 잘못된 초두효과에 사로잡혀, 치료가 가능하다는 최신효과는 흘려버렸을 것입니다. 한번 확증편향에 빠지면 자기가 믿는 신념에만 주목하고 다른 주장들을 무시하기 마련입니다. 동성애 옹호 세력의 주장처럼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면 동성애 커플에 대해 전환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지만, 치료 효과가 나타난다 하니, 동성애자들을 보호한다는 그럴듯한 미명(美名)으로 치료를 받지 못하게 막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동성애자들에게 의료 혜택을 받지 못 하게 하는 자기 결정권 침해입니다. 박 교수는 치료의 문으로 들어서려는 동성애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거짓이라는 방패로 원천봉쇄하지 말고, 구급차가 지날 때 자동차가 비켜주듯이 전환 치료를 받으라고 길을 터주기를 바랍니다. 동성애자들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새 사람(new humanity)입니다. 전환 치료를 막는 스크럼(scrum)을 풀어주기를 바랍니다.


동성애자들은 혐오 때문에 자살할까? 다른 요인일까?

박 교수는 8단원 여섯 번째에서 언제 조사인지 출처가 어디인지 언급도 하지 않고 ‘미국 청소년들의 자살률은 일반 청소년들보다 높으며 이는 호모포비아로 인한 적대적인 환경 때문이다’라고 인용하였습니다. 동성애 형제들과 자매들이 자살하는 것 그것도 꽃도 피어 보지 못하고 꿈도 펼쳐보지 못한 청소년과 청소녀들이 자살한다는 것은 여간 가슴 아픈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살하는 것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감정을 말하는 동성애 혐오(Homophobia)와 그로 인한 적대적인 환경 때문이라고 단정을 짓기엔 무언가 석연찮습니다. 미국은 2015년에 연방대법원에서 동성혼 찬성 5, 반대 4로 합법화되었습니다(한국일보, 2018년 6월 24일). 미국은 동성혼을 인정하기 때문에 광범위한 혐오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차별금지법으로 체포됩니다. 동성애자들은 1973년에 협박으로 동성애를 질병에서 제외했고, 1990년대에 표본을 조작해 동성애 유전자가 있는 것처럼 선전했습니다. 자, 그럼 두 번째 팩트 체크를 해 보겠습니다. 박 교수 주장처럼 동성애자들은 정신질환, 특히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장애와 자살 충동이 높을 뿐 아니라 실제로 자살률이 이성애자들보다 월등히 높은 게 사실입니다. 필자도 동성애자들의 신체와 정신건강을 우려하였습니다. 곽 박사는 남성 동성애자들은 주로 40세 이전에 무수히 많은 파트너와 복수 연애하면서 성적으로 방종한 삶을 살다가, 40~50대 이후가 되면 그로 말미암은 각종 신체적 질병으로 인해 파트너들에게서 버림받고 실직하고 파탄 난 인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곽 박사의 앞의 신문 참조). 박 교수 주장처럼 동성애 혐오로 인한 적대적인 환경이 자살 원인이라면 대부분 공통된 연구조사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박 교수는 미국 청소년의 자살을 동성애 혐오로 특정(特定)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요? 우리나라 청소년의 최근 10년간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섣부르게 예단하지 마십시오. 우리나라는 특히 청소녀들의 자살률이 매우 높은 게 특징입니다. 홍현주 한림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울증과 같은 정신병리가 많이 작용하며, 가정 스트레스라든지, 학업 스트레스라든지, 대인관계라든지, 이런 부분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인터뷰했습니다(YTN 라디오, 2019년 12월 2일). 필자는 우리나라 청소년과 청소녀들이 자살하는 원인은 동성애 혐오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만의 학업 스트레스와 왕따 문화와 기타 정신질환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살로 내몰린다고 봅니다. 사춘기 청소녀들은 감정 기복의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자살률이 더 높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진단해 봤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2019년에도 인구당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단연 1위를 차지했습니다. 20년 이상 OECD 국가의 평균 자살률보다 높은 자살률을 보였습니다(파이낸셜뉴스, 2021년 1월 6일).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정부,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교회가 나서서 예방 교육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특히 동성애를 혐오하고 차별해서 자살하는 것일까요? 2018년에 국회 보건복지 위원회 소속 민주평화당 김광수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살 사유별 자살통계자료’를 보면, 지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정신과적 원인으로 자살한 인원이 약 2만 700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이어 경제생활 문제 약 1만 4,500명, 육체적 질병 약 1만 4,000명 등이었습니다. 또한 김광수 의원이 보건복지부에서 제출받은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공황장애, 불안장애 등의 5대 정신질환 환자 현황’ 자료를 보면, 정신질환으로 진료를 받은 환자는 5년간 약 750만 명에 달하며 매년 증가하는 추세라고 집계했습니다(가톨릭 뉴스, 2018년 10월 15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살하는 원인은 ‘기독교의 일그러진 얼굴’ 때문이 아니라, 정신질환으로 인해 자살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많이 갖고 있는데, 동성애 혐오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과 조현병에 걸린 사람들이 동성애를 유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국민일보, 2021년 1월 29일). 우리나라는 정신질환자들이 급격히 늘면서 동성애자들도 늘고 자살자들도 느는 게 아닌가 우려됩니다. 박 교수는 이런 통계들을 참고해, 혐오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다른 요인이 작용하는지 자세히 연구해 보기 바랍니다. 필자는 반동성애자들은 동성애 혐오를 통해 동성애자들을 죽게 만드는 ‘살인 교사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오히려 친동성애자들이 이것은 없는 용어이지만 ‘치료방해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비유이지 ‘죄인 만들기’가 아닙니다. 동성애자들의 자살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이 제일 요인으로 작용해 부정적으로 나타난 불행한 결과입니다. 기독교가 할 일은 묵인하고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돌아오라고 외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박 교수께 부탁함

필자는 박 교수께 다시 요청합니다. 이제는 거짓된 가르침으로 후배들과 감리교회를 미혹하지 마십시오. 박 교수의 말 한마디가 동성애자들의 치료 기회를 사전에 박탈하고, 동성애자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핑곗거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박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신학의 수원지(水源池)는 과연 어디여야 하는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적어도 신학대학 교수 출신이라면 성경에서 생수(生水)를 길어와야 할 텐데, 박 교수는 다른 데서 우물을 길어오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합니다. 박 교수가 속죄(贖罪)하는 길은 자존심을 꺾고 과감하게 펜을 내려놓던지, 아니면 동성애 형제들과 자매들을 도울 수 있는 기독교 윤리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라 사려(思慮)됩니다. 박 교수의 단순한 날갯짓이 감리교회를 흑암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여담(餘談)이지만, 필자가 목회하는 지역은 보수적이고 감리교회 약세이다 보니, 박 교수처럼 튀는 언동(言動)을 할 때면 어김없이 ‘감리교회는 이단’이라는 말을 들먹입니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있습니다. 그들은 무식(無識)하면서도 무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합니다. 제발 전도를 방해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삼남연회 경북동지방 창대교회 여성구 목사



전체 9

  • 2021-02-14 22:09

    요즘 감게를 통해 나타나는 동성애 지지자(장병선)들과 반대자들의 논쟁과 다툼 그리고 갈등이 진정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동성애 지지자들은 진정 동성애자들을 위해 이처럼 분란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제 눈엔 그리 보이지 않는군요. 또 다른 이권 쟁취를 위한 정치적 활동처럼 보일 뿐입니다.

    더불어 동성애를 반대하는 분들 또한 그와 같습니다. 누구를 위해 동성애를 반대하십니까? 감리회를 위해서인가요? 장정을 바로 세우기 위함인가요? 그런데 어찌 그 책임이 교권을 향하고 있음인지요? 실 책임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들일텐데 말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의 행보가 교권을 뒤흔들기 위함처럼 보여지니 이 또한 정치적 이권다툼으로 보일 뿐입니다.


  • 2021-02-11 07:41

    예수의 눈으로 본 성소수자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한인철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1970년대 중반 이래 조직신학에 관심해온 신학도였으나, 1995년부터 지난 26년 동안은 주로 역사적 예수에 깊이 관심해왔다. 기독교의 출발점은 역사적 예수인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 예수를 잊고 있거나 잃어버렸다는 자각 때문이다.

    최근 성소수자 이슈가 사회와 교회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급기야 성소수자를 축복했던 한 젊은 교역자가 징계를 받는 일이 발생했다. 역사적 예수에 오래 관심해 온 신학도로서, 예수의 시각에서 성소수자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말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

    성소수자 이슈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이는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가 지금 관심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교회의 시각은 과연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다.

    2. 성소수자와 차별

    세상에는 이성애자만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정체성이 다양하다. 여성 동성애자(Lesbian), 남성 동성애자(Gay),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 간성(間性, Inter-sex), 그 밖에도 다양한 성정체성이 존재한다.

    오늘날 성소수자는 일부 극단적인 이성애자들에 의해 철저히 억압당하고 있다. 이성애자의 시각에서 볼 때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이성애자로 살지 않는 한, 가정, 학교, 직장, 교회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이 세상 안에서는 편히 발붙일 곳이 없다.

    최근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와 ‘성적지향ㆍ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가 발표한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 조사'에 따르면, 설문조사에 응한 성소수자 가운데 42%가 '직장이나 가족에게 직접 차별이나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개한 경우 74%가 차별과 폭력을 경험했고, 응답자의 28%는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피해는 더 심각하다. 설문에 응한 청소년 성소수자 중 자살 시도율은 46%에 이른다고 한다.

    3. 성소수자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이처럼 가정, 학교, 직장 등 가까운 주변 지인들로부터 성소수자들이 차별받고 배척당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들을 차별 없이 똑같은 한 인간으로 존중해주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따뜻하게 맞아줄 수 있는 곳은 없을까? 그곳이 교회일 수는 없을까?

    그러나 교회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대표적인 사례로, 성소수자의 편에 서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앞장 선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임보라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을 비롯한 8개 교단으로부터 2017년 이단이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교단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단 산하의 상당수 교회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 심지어는 교인들조차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교회가 취해야 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개신교 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에 앞장서는 것이 그 증거이다.

    4. 성소수자는 우리 가운데 있다.

    우리는 흔히 성소수자는 우리와 상관없이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성소수자를 둔 가정이 분명 존재한다. 내가 성소수자가 아니고, 가족 중에 성소수자가 없다고 하여, 성소수자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은 아니다.

    내키지 않더라도, 당신 가족 중에 성소수자가 있다고 가정해보라. 지금 내 집에 없다고 하여 부질없는 가정이라고 단정치 말라. 성소수자 자녀를 둔 다른 집 부모도 자신의 집에 성소수자가 있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당신 집에 성소수자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녀를 강제로 정신병동에 입원시키거나 수술하게 만들거나 전환치료를 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안 되면 집안에서 쫓아낼 것인가? 그것도 안 되면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달라고 종용할 것인가?

    목회자의 교회 안에 성소수자가 있다면 또한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의 교회 안에는 없다고 장담하지 말라. 성정체성을 노출시키지 못할 뿐, 성소수자는 나의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다. 수도권의 경우, 1~2% 정도의 성소수자가 있다는 통계는 그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발 더 나아가, 목회자인 당신이 성소수자라고 가정해보라. 세계적으로 성소수자 목회자는 도처에 있다. 만약 당신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교회를 떠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가 용납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당신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어느 누군가가 이성애자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서도 아니고, 영원 전에 예정된 것도 아니고, 단지 우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군가가 성소수자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저주를 받아서도 아니고, 영원 전에 예정된 것도 아니고, 단지 우연일 뿐이다.
    내가 성소수자를 선호하지 않는 것과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오늘날과 같이 성소수자가 철저히 차별받는 세상에서 성소수자가 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성소수자는 이성애자와 다를 뿐이지, 차별해도 되는 사람은 아니

    5. 예수 시대의 차별주의와 예수의 대응

    예수 시대에도 차별은 존재했고, 차별은 가장 큰 사회적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비유대인, 비셈족, 여성, 가난한 사람, 불치병 환자, 장애인, 범법자, 어린아이, 성매매여성, 세리 등이 차별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예수 당시에 존재했던 차별받는 사람들의 사례이다.

    혹자는 예수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성소수자는 없기 때문에, 성소수자 문제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예수 시대에 성소수자들이 존재했고, 예수가 이들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면, 예수는 과연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세계적인 대가 중 한 사람인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예수 사역의 근본적인 영성은 ‘철저한 평등주의’(radical equalitarianism)라고 했다. 하나님은 선악의 구분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햇볕을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철저한 평등주의’라는 말은 이 세상에 어떠한 사람도 차별하지 않는 것이 예수 사역의 기본 정신이라는 뜻이다. 이성애자라고 해서 더 높게 우대하지도 않고, 성소수자라고 해서 더 낮게 차별하지도 않는 것이 사람을 대하는 예수의 기본적인 태도라는 말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또 다른 학자 보그(Marcus Borg)는 사람을 대하는 예수의 기본적인 마음은 ‘함께 아파하는 마음’(compassion)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자궁 속 태아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듯,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공감의 감수성을 일컫는다.

    예수께서 지금 한국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면, 성소수자에 대해 어떤 자세로 임했을까? 오늘날 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와 교회로부터 소외시키고, 차별하고, 배척하고, 징계하고, 폭력적인 언사를 일삼았을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6. 예수와 기독교의 권위근거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신학자나 목회자 중에는 성서를 인용하여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 중에는 구약성서나 바울서신을 근거로 삼는 이들이 다수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약성서나 바울사상을 기초로 하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를 기초로 한 종교이다.
    기독교인에게 예수는, 경전과 관련하여 말하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의 제일의적인 권위근거이고, 종교와 관련하여 말하면, 기독교의 제일의적 권위근거이고, 교회와 관련하여 말하면, 목회자의 제1의적 권위근거이다. 예수는 경전 속의 경전이다.(Canon in c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과 삶,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과 삶이 올바른 것인지는 철저하게 예수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더 말할 것이 없다. 목회자의 가르침과 삶이 올바른 것인지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근거로 판단되어야 한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했던 게임 중 ‘예수 가라사대’라는 게임이 있다. ‘예수 가라사대’라는 말이 들어가면, 손을 올리거나 내리는 것이고, ‘예수 가라사대’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손을 올리거나 내리라고 해도, 그 지시를 따르면 안 되는 게임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간혹 교단이나 목회자, 평신도 지도자나 평신도들이 예수 위에 올라서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무시하고, 때로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반대되는 입장에서, 기독교와 교회를 대변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들은 과연 기독교인인가?

    7. 나가는 말

    연세대학교 학생 100여 명에게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하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모두 틀렸다는 ‘배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는 믿되, 예수를 살지는 않는 ‘삶의 결핍’이라 했다.

    매우 시의적절한 대답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적 입장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은, 그가 다른 종교인이든, 기독교 신학자이든, 교회 목회자이든, 평신도 지도자이든,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예수의 태도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삶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하다.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천당 가는 것은 좋지만, 예수 믿고 예수처럼 살라는 말은 악담에 속한다. 생각해보라. 예수를 믿기만 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지 않는 기독교인을 과연 기독교이라 할 수 있는가?

    지금 한국 기독교는 중대 기로에 서 있다. 예수의 길을 따라 참된 기독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길을 버리고 거짓 기독교의 길로 갈 것인가? 현금의 성소수자 문제는 한국 기독교가 과연 어느 길을 가는지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 2021-02-11 12:38

    한인철 명예 교수님,
    마태복음 5:28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짝 지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성육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기 다양한 대상에게 음욕을 품는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나 소아 성애자나 진짜 성소수자인 수간자 등에 대해서도 옹호하시거나 지지하시거나 장려하실 리가 없습니다. 해당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그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 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치유하시던 예수님을 본받아 치료해야 할 경우에는 치료도하거나, 치료도 받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 2021-02-11 13:09

    한인철 명예 교수님,
    구약성경과 바울 서신 등의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기조로 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 구약성경과 바울 서신 및 복음서 등등의 신약성경이 없으면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 2021-02-11 13:44

    최세창 목사님, 성경 문구중 남색외에, 여자 동성애에 관련 성구가 있나요?
    제가 알기엔 없는 것 같은데, 단기간 안에 일독은 어려워서ㅎㅎ 목사님께 여쭤봐요..


    • 2021-02-11 16:35

      이현석 목사님, 여자 동성애에 관한 말씀입니다.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 2021-02-11 23:35

        저의 질문에 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답을 들으니, 예전에 제가 작성한 글 롬1:26-27中 “natural relations + lust = unnatural relations”이 생각납니다.


  • 2021-02-11 19:31


    • 2021-02-12 15:29

      감상 잘했습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4.10.22 66710
공지사항 관리자 2010.12.29 64820
13686 박영규 2023.12.08 181
13685 김정하 2023.12.06 299
13684 박영규 2023.12.01 172
13683 홍일기 2023.11.27 244
13682 장병선 2023.11.26 314
13681 박영규 2023.11.24 177
13680 함창석 2023.11.24 228
13679 장병선 2023.11.23 517
13678 홍일기 2023.11.23 289
13677 홍일기 2023.11.23 277
13676 최세창 2023.11.22 260
13675 장병선 2023.11.22 318
13674 이현석 2023.11.21 489
13673 장병선 2023.11.21 636
13672 함창석 2023.11.20 269
13671 홍일기 2023.11.20 288
13670 홍일기 2023.11.19 304
13669 홍일기 2023.11.18 287
13668 함창석 2023.11.18 316
13667 홍일기 2023.11.18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