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께.
현재 ‘감리회소식’이 ‘자유게시판’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표명이나 감리회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의 글은 ‘자유게시판’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제중원과 에비슨 그리고 최초의 의사 7인

작성자
이경남
작성일
2021-02-09 17:26
조회
274
제중원과 에비슨 그리고 최초의 의사 7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 병원은 1885년 4월 고종에 의해 설립된 제중원(광혜원)이다.
중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다 우리나라에 와 미국 영사관 담당 의사로 일하던 알렌이 초대 의사였고 같은 해 미 감리교 의료 선교사로 파송된 스크랜튼이 시병원을 개설하기까지 함께 일한바 있다.
1887년 알렌(H. N. Allen·1858~1932)이 본국으로 귀국한 후 제 2대 책임자로 부임한 이가 헤론(J.W. Heron·1856·1890) 선교사인데 열정적으로 환자들을 진료하던 그는 1890년 그만 이질에 걸려 순교하고 만다.
그 후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의 기독청년회에서 빈튼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관리들의 무능과 전횡 그리고 재정 상의 문제등으로 병원 경영이 어려웠다.
1893년 의료 선교사로 내한, 제중원의 책임을 맡아 크게 발전시킨 이가 토론토 의과 대학 교수였던 에비슨(O.R.Avison.1860-1956) 박사이다.
그는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할 것을 요청하였고 고종의 승낙을 받으며 본격적인 의료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또한 그는 구호적인 진료를 넘어 조선인들에 의한 조선인 치료를 목적으로 1899년 제중원 내에 의학교를 개설한다.
조선에서 서양식 의학교의 설립은 알렌도 시도한 바 있으나 도중에 중단되어 열매를 맺지 못하였는데 이제 에비슨에 의해 본격적으로 의학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넘어야할 난제들이 참 많았다.
미 북장로교 선교부의 지원 하에 무료 교육으로 시작하였으나 학생 모으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또한 학생들에게 영어를 비롯한 기초 학문을 가르쳐야 했고 또 그들을 통해 서양 의학 서적들을 번역해 내는 일은 그야말로 집중적인 노력과 지속적인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에비슨의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08년 6월, 제중원 의학교를 시작한지 10년, 알렌이 처음 의학 교육을 시도한지 22년 만에 7명의 졸업생을 내게 된다.
에비슨은 미국의 부호 세브란스
씨로부터 거금 35000 달러의 선교 후원을 받아 제중원을 서양식 병원으로 신축하고 병원명을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하였는데(1904.9) 여기에서 열린 졸업식은 조선의 통감인 이토오와 조선의 대신을 비롯하여 10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하는 성대한 행사였다.
여기에서 미 감리교 의료 선교사인 스크랜튼은 “한국의 서양 의학 출현과 발전에 대한 요약”이라는 길고도 중요한 연설을 한다.

“나는 이 새로운 개업의들과 한국의 첫 의대 졸업생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며 당신들에게 엄숙한 책임이 있음을 일깨워 주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을 맡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당신들에게 주어진 직업의 윤리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을 위해 봉사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삶에 얽매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나라에서 개척자가 되었으며 한국민과 그 후손들을 위해 의술을 다져나가는 것이 여러분의 의무임을 일깨워 주려 합니다.
의학은 한국에서 수행해야할 거대한 임무가 있으며 이 일을 수행해야할 사람들은 한국인 의사들입니다.
이곳의 외국인 의사들은 잠시 머물고 곧 떠날 테지만 여러분은 그들이 가르쳤던 것을 계승하고 그것을 당신들의 민족과 당신들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분의 직무를 위하며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교수들의 높은 이상들을 가지고 여러분의 직업(무)와 여러분의 스승과 여러분을 계승할 학생들의 영광과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십시오.
이 영광을 안은 일곱 명의 젊은이의 이름은 홍종은,김필순,홍석후,박서양,김희영,주현칙,신창희입니다" (1908년 6월 3일 W.B.스크랜튼)

그리고 이렇게 배출된 우리 나라 최초의 의사 7인은 이런 삶을 산다

1.김필순(1878.6.25-1919.9.1)
황해도 장연(長淵) 사람이다. 만주와 몽고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1908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를 번갈아 왕래하면서 구국운동가로 활동하였다. 도산 안창호(安昌浩)와 결의형제를 맺고 1907년 신민회가 조직될 때, 그 회원이 되었다. 한편 1900년대 세브란스 병원에 재직하면서 자신의 집을 독립 운동가들의 협의장소로 제공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전 국민은 무장 세력의 양성과 군비를 갖추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전제 아래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필순은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동녕(李東寧)·전병현(全秉鉉)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썼다. 그후 내몽고 치치하얼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이곳에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후방 기지로 개척하고자 하였다. 그는 의료업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중, 1919년 9월 1일 일본인 조수가 주는 우유를 먹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김희영(1879.12.7-1920.11.7)
경기도 경성부에서 태어나 배재 학당을 졸업하였다.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후 1년 동안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에서 약물학을 강의하였다.
이후 평안북도 용천군 양시에서 2-3년 동안 개업하였으며 독일 의사로부터 외과술을 사사하여 빼어난 수술의로 명성을 얻었다. 1914년 춘천 예수 병원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함남 원산의 구세 병원으로 파송되었다.
1919년에는 충남 직산의 금광병원장으로 임명되어 한국인 광부들과 미국인들을 치료하며 교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는데 그만 폐결핵에 걸려 1920년 11월 7일 사망한다.
9일 제중원 예배당에서 영결식을 하고 고양군 연희면 세교리에 안장되었다.

3.박서양(1885.9.30-1940)
백정 박성춘의 아들이다.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의료선교사 에비슨과 친분이 있던 아버지를 통해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을 가르쳤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1917년 만주 용정으로 이주해 구세의원을 세워 의료 활동을 하고 숭신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교육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에 의해 일시 폐교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후에는 독립운동 단체였던 대한국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에서 군의관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숭신학교가 폐교되고 독립운동 기반이 무너지자 1936년 귀국하여 고향인 황해도 연안에서 병원을 운영하다가 1940년 지병으로 인해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0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4.신창희(1877.5.21-1926;2;28)
경기도 경성부에서 태어나 1904년 5월 21일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하였다.
백범 김구의 손위 동서였다.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후 1년 동안 간호원 양성소에서 강의하였고 1909년에는 신의주에서 개업하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어 국권을 잃자 이를 통분히 여겨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점점 압박을 가해오자 동몽골 지방에 정착하여 동몽골 교회에 나가며 많은 동포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불행히 1926년 2월 28일 교회에서 상찬식 기도 중 사망하였다.
동몽골 교회 성도들은 기금 80원을 모아 교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유해는 몽골 사막에 매장하였다.

5.주현칙(1883.7.7-1942.3.25)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양기탁・안창호・전덕기등을 중심으로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의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저지하고 신민회를 해체시키기 위하여 일제가 「데라우찌 총독 암살 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이란 것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전국에 검거할 때에 주현칙도 1911년 9월에 체포되어, 1912년 9월 1심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으며, 1913년 7월의 2심 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일제에게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 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평안북도 조사원에 임명되고,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와 대한적십자회 회원으로 활약했다. 상해의 대한청년독립단과 상해거류민단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2년에 상해 국민대표회기성회에 가입하여 안창호・여운형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개조와 국민대표대회의 개최를 주장했다.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여 1926년까지 상해에서 활동했다. 그 후 귀국하여 국내의 흥사단 운동에 진력하다가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41년 10월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의 언도를 받았으며 공소심에서는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6.홍석후(1883.4.9-1940)
조선 후기 의사‧교수. 호는 금파이다. 본관은 남양이다.
부친 홍준과 모친 김사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은 우리나라 서양 음악의 선구자인 난파 홍영후)이다.
일찍이 개화의 뜻이 있던 부친이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지도한 인연으로, 배제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당시 배제학당 동기로는 신흥우,‧이승만등이 있다.
한때 자혜의원을 개업하여 일하였고, 1906년 에비슨에게 부탁하여 세브란스의학교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한국 최초의 의사면허인 의술개업인허장 제3호를 받았다. 1912년 부임한 안과와 이비인후과 전문의 보우만교수의 조수로 활동하다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의 안과‧이비인후과 전문의인 매타넬 박사의 병원에서 머물다가 캔사스시 치과대학의 해부학교수 마이어스에게 두경부해부학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뉴욕의과대학원에서 전공 연구에 몰두하였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여 주로 이비인후과를 맡았다.
1929년 세브란스 의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였는데, 1931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종로에 안과‧이비인후과 병원을 개설하여 야간진료를 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전문의 병원이라고 불린다.

7.홍종은
황해도 장연군 출신이며, 홍순각이 조카, 김명선이 조카사위이다. 그는 1906년 홍석후와 함께 관립의학교를 3회로 졸업하였으나 진료나 질병치료를 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에비슨에게 아무리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할지라도 마칠 때까지 남아있겠다고 하면서 세브란스의학교에 편입하였다.
에비슨은 그가 의학용어집을 준비하는 극히 중요한 일을 도와줄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김필순과 함께 우리말 의학교과서의 편찬에 힘써 ‘피부병 진단치료법 단’(1907), ‘무씨 산과학’(1908)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동시에 그는 관립의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여러 임상실기를 배울 수 있었다.
한편, 홍종은은 의학교 졸업생으로서 당시의 관례대로 1905년 12월 15일 판임관 8급의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3월 5일 3등 군의로 임명되었다가 9월 3일 면관되었다. 이런 형식적인 직책을 가진 상태에서 홍종은은 제중원 의학교에서 에비슨의 지도하에 임상실기를 배우면서 의학서적을 번역하고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홍종은은 모교에 남았는데 1908~1909년에 간호원 양성소에서 ‘증상의 관찰’ 및 ‘음식물투여’ 등의 강의를 하였다. 이후 홍종은은 모교를 떠나 1909년 동기생 신창희와 함께 의주부 남문 바깥의 구세병원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홍종은은 1910년 2월 최시준 등이 의주에 설립한 강습소에서 명예 강사로서 약물학, 물리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폐결핵에 걸려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대체로 191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들이 당신들에게 주어진 직업의 윤리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을 위해 봉사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삶에 얽매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스크랜튼의 당부처럼 이들도 "자기의 삶에 얽매이지 않고 일한 의료 선교사들“,그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계승자가 된 것이다.



전체 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4.10.22 64114
공지사항 관리자 2010.12.29 62174
13687 홍일기 2023.11.18 264
13686 최세창 2023.11.17 175
13685 박영규 2023.11.16 199
13684 박영규 2023.11.16 177
13683 송상현 2023.11.15 390
13682 홍일기 2023.11.13 310
13681 홍일기 2023.11.12 272
13680 박영규 2023.11.09 206
13679 장병선 2023.11.09 1032
13678 홍일기 2023.11.08 318
13677 홍일기 2023.11.08 266
13676 최세창 2023.11.06 223
13675 홍일기 2023.11.06 265
13674 함창석 2023.11.04 266
13673 장병선 2023.11.03 1072
13672 홍일기 2023.11.03 300
13671 박영규 2023.11.02 205
13670 엄재규 2023.11.02 427
13669 홍석민 2023.11.01 453
13668 최세창 2023.11.01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