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나지 않으면 감당 못할 靈域이 있다.

작성자
오재영
작성일
2021-02-02 19:16
조회
350
헨리의 이야기...
외국영화에 낯이 익은 해리슨 포드의 주연으로 1992년도에 등장한〈헨리의 이야기〉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영화다. 특히 소재가 제작자들이 지어낸 완전픽션이 아닌, 그 당시 미국 최상류층에 속해 있던 ‘헨리터너’(Henry Turner)라는 실제인물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명법조인 아버지의 배경과 아름다운 아내, 사랑스러운 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인의 탁월함과 스펙, 뉴욕의 거대로펌(law firm)에서 인정받는 변호사다. 그는 일단 자신에게 수임된 사건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쓰든지 이기는 법을 알고 있는 한마디로 패소(敗訴)를 모르는 사람이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 올백(all back)으로 넘긴 준수한 외모와 함께 철저히 준비한 내용으로(물론거짓이지만)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결국에는 성공으로 승소(勝訴)시킨다.

영화의 화면은 그가 의뢰받은 대형병원의 의료사고를 가해자 측 병원에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판결로 인해 가난한 매슈스부부는 전혀 보상을 받아낼 수 없는 입장에 놓인다. 오로지 자신의 출세와 승리만을 향하여 질주하는 그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주변인들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는 ‘파쇼적’존재다. 바쁘게 뛰어가듯 걷는 그를 쩔쩔매며 뒤따르면서 지시를 받아 적는 나이든 여비서의 손에 자신이 피우던 담배꽁초까지 건네면서 처리케 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가정에까지 이어진다. 딸과 아내에게도 그의 가부장적 행태는 계속된다.

대형병원의 소송에서 승소한 날,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주변 동료들에게 자신의 삶을 과시할 파티준비를 위하여 새로 주문한 식탁이 자기취향에 맞지 않게 배달되었다며 트집을 잡는 그는 지독한 니코틴 중독자로 담배가 떨어진 것을 알고는 편의점으로 담배를 사러간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권총을 겨누며 지갑을 내놓으라는 강도의 요구에도 그는 특유의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로 강도의 말을 우습게 여긴다. 강도는 총을 발사하고 머리와 가슴에 총상을 입은 그는 뇌 손상으로 사경에서 깨어나지만, 과거의 기억을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할 수 없는 백치(白痴)상태가 된다. 강도의 총탄으로 리셋(reset)된 그의 삶, 영화는 역설적으로 그때부터 그가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된다.

뇌(腦)에 손상을 입은 그는 말하고, 걷고, 읽는,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배운다. 그를 쓰러뜨린 총탄은 과거에 그가 지녔던 헤게모니적 오만함까지 제거 했고 이제 그는 새로운 눈으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눈(眼)으로 자기 앞에 다가오는 사람들과 세상을 대하게 된다. 지난 날 딸에게 냉담하게 대했던 그는 작은 일상의 삶에서부터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친밀한 사이로 진행된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며 거부하던 그는 지난 날 자신이 딸에게 가르쳤던 운동화 끈 매는 방법을 배우는 그 과정에서 집에 깔렸던 회색 양탄자를 기억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집 문에 들어서면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트집을 잡으며 분노했던 식탁까지도 멋있다는 탄성과 함께 지난날 본인이 살았던 집안을 둘러보며 경탄해 마지않는다.

식탁에서 식사 중에 딸이 실수로 주스를 엎지르자 그는 “나는 맨 날 그래”(i do that all the time)라면서 일부러 자신의 주스를 엎지른다. 불과 얼마 전에 피아노에 주스사건으로 딸을 윽박지르며 혼냈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지난 날 애완견을 싫어했지만 이제는 직접 강아지를 사가지고 들어오고, 딸의 도서관에 따라가 장난을 치는 중에 책을 읽으라는 딸에게 자신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며 그토록 권위와 체면을 중요시하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자상한 아빠와 남편이 된다. 지난날 권위적으로 대하던 가사도우미 로젤라에게 사고가 나기 전에 자기는 집에 와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 로젤라는 집에 와서도 “일”만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날의 그는 일만 했을 뿐 그에게 가정과 가족은 없었다.

점차 잃었던 기억이 회복되면서 지난 날 좋은 친구이며 파트너라고 생각했던 브루스는 자기아내와 내연의 관계에 있었음이 밝혀지고, 자신 또한 같은 로펌의 린다라는 여성과 불륜관계를 이어왔던 기억까지 복구된다. 친한 친구들이 초청한 파티에 참석하지만 그들 부부를 보고 수근 대며 그의 아내가 불쌍하다고까지 말한다. 특히 자신들이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필리스와 대니엘 부부가 헨리 부부를 겉으로는 위하는척하면서 뒤에서는 험담하는 현장을 직접 듣고 실망한 두 부부는 그 연회장을 빠져나온다.

이제 그의 관심은 과거의 부정직했던 흔적을 지우기로 결단한다. 그는 가정부 로젤라와도 친해지고 흑인 재활치료사인 브래들리와도 끈끈한 관계를 이어간다. 사고 나기 전 세간의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고, 그가 마지막으로 승소했던 매슈스 사건의 서류들을 다시 검토한 헨리는 자신이 불의했음을 인정하고 매슈스 부인을 찾아가 서류를 건네주며 그의 변호사에게 전해주라고 한다. 어안이 벙벙해하며 어찌된 일이냐 묻는 매슈스 부인에게 그는 “미안 합니다. 저는 변 했어요”(I am Sorry, I am Changed)라고 자신의 삶의 방식이 변했음을 알린다.

영화의 절정이지만, 이처럼 지난날의 거짓된 삶을 청산하고 변화된 삶을 추구하는 그에게는 내려놓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높은 연봉을 주는 직장, 넓고 큰 집, 그리고 상류층아이들만이 입학이 가능한 딸의 일류기숙학교 등등... 이처럼 큰 희생을 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펌대표에게 그만 두겠다고 말하고, 비서에게도 “이제 충분해요, 그만 할게요”, 집의 아내에게도 이제 변호사일이 싫다고 하면서 “하지만 가족은 잃고 싶지 않아”라며 아내와 함께 딸의 학교에 가서 교장에게도 “딸의 첫 11년을 잃었으나 이제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요.”라며 딸을 데려온다. 비록 물질이 줄 수 있는 혜택은 줄어들었지만 가정의 소중함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끌어내려 지난날 주변인들로부터 받았던 환대를 스스로 포기한다.

헨리이야기 이후의 삶...

많은 이들은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박수를 보낸다. 목사들도 과거와 단절된 이들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며 知的인 목회자의 회개의 說敎 例話에 등장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이어지는 실제적인 삶의 영역이다. 헨리이야기가 영화로 발표된 20여년 후 미국의 한 방송사가 그와 비슷한 사연으로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실제 인물들이 박수갈채 그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는지를 조사하여 방송에 내보낸 적이 있다. 그 내용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결단 당시의 영웅적인 감동과 함께 변화된 모습보다는 그 이후로 낮은 자리, 어려운 환경에서 피폐된 삶으로 고뇌와 좌절가운데 지내고 있음을 보고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헨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다시 태어난 직후에 결심한대로 모든 욕심과 명성에 대한 관심을 다 버리고 끝까지 그 감격을 이어가지를 못했다. 그는 기억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자신의 무능을 탓하게 된다. 많이 절망스러워 하고 결혼생활도 무난하지 못했고 우울한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으로 방송에 소개되었다. 모두가 지난 날 자신이 소유하고 누렸던 명성이 워낙 화려했기에 그때를 그리워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던 그 시간들, 자기가 하고자 하면 모든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었던 부와 명성을 누렸던 그 시간들을 그 것에 대한 아련함과 미련들이 그 마음속에 서서히 젖어들면서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의 그 감격으로 갖게 되었던 가장 정상적인 생각들이 이제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 때문에 침체와 함께 우울증으로 침몰해가고 있었다.

信念과 信仰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늘도 주변을 보면 신념 있다는 평판을 즐기는 이들이 있다. 글자그대로 信念은 본인이 굳게 믿는 마음과 생각(念)이다. 때로 신념은 없는 것보다는 뚜렷함이 자신과 주변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신념이 아무리 강해도 그 신념이 신앙을 대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聖經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을 신념이라 말씀하신다. 반면에 신앙(信仰)은 다르다. 즉 믿음의 대상을 굳게 믿고 그 가르침을 지키며 따르는 것이다. 전능자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그 가르침대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바른 신앙이고 正道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허락된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분야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힘과 능력을 덧입을 때만이 가능하기에 진정 거듭남이 확실한 이들마다 자기 아닌 하나님께서 그 주체가 되시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따른다. 이처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마다 자신의 마음에 이런 신앙심이 생기도록 겸손히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최근 교단과 교계에 신앙을 빙자한 뜻을 모아 패거리들을 동원하여 성명서를 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염려하는 마음으로 묻고 싶다. 성경에 수도 없이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命令의 말씀,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명령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장1절).

자신들의 모든 행적을 감찰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그 시선 의식하며 행하는가? 받은바 啓示분명치 않으면 자신을 드러내기에 앞서 더욱 깊이 성찰함이 본인과 모두에게 유익하리라는 생각이다. 개인이든 단체든 한 번 허물어진 信賴는 허물기는 쉬워도 다시 세우는 데는 많은 시간과 함께 그에 지불되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時勢 분별하는 겸손함과 현명함을 기도드린다.

전체 4

  • 2021-02-02 20:33
    오재영 목사님 그동안 잘 지셨지요? 여전히 건필하시는 모습을 뵈오니 다행입니다.

    목사님은 신앙과 신념이 다르다 하셨는데 어떤 의미에서 목사님은 신념은 신앙에 비해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계심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신앙(믿음)이 없는 신념이 있을 수 있을까요? 신념이 따르지 않는 신앙을 진정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있을까요?

    목사님께선 "믿음의 대상을 굳게 믿고 그 가르침을 지키며 따르는 것"이라 하셨는데 신앙(신심)과 신념을 혼동 혹은 혼합하여 사용하시며 이것을 신앙(믿음)이라 오해 내지 왜곡하시는 것 같아 여쭙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신앙(신심)은 믿음의 대상(하나님)을 굳게 믿는 것이고, 그 가르침(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따르는 것이 신념이 아닐런지요?

    그래서 사전에선 신심(믿음)을 종교적인 용어로 신념을 철학적인 용어로 구분을 하더군요.
    곧 믿음(신심)은 영(하나님의)적인 영역이며, 신념은 인간적인 영역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신념)을 믿음(신심)이라 할 것이며 보이는 것(믿음)을 신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살아간다 말을 합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본다면 그의 신념으로 살아간다고 할 것이며, 성경의 말씀 중 아는 것(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면 세상 사람들(철학자)은 자신이 믿는 이념(신념)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또 다시 세상 사람들은 제 믿음대로 살아간다 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성경을 인용한다면 모르고 행하는 것(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 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칫 말장난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이 말장난과 같은 주장을 목사님이 먼저 위 본 글을 통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눈에 보이는 형제(인간)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고 분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율법 중에 가장 큰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하나 신념(행함)없이 사는 사람보다 때론 믿음(신앙)이 없다 하나 신념(올바른 행함)으로 사는 사람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할 것입니다.
    이모든 것을 판단하실 이는 오직 주님 뿐이시지만 말입니다.

    오 목사님은 진정 믿음의 대상(하나님)을 굳게 믿고(믿음) 그 가르침을 지키며 올바르게 따르셨다(신념)고 자신 하시는지요?

    • 2021-02-03 08:51
      제 질문이 또 건방졌고 오 목사님의 심기를 건드렸나 봅니다.

      오 목사님의 지혜로 제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 주시면 좋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주 안에서 건필하십시요.

  • 2021-02-03 14:04
    자신들의 모든 행적을 감찰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행하는가? 받은바 啓示분명치 않으면 자신을 드러내기에 앞서 더욱 깊이 성찰함이 본인과 모두에게 유익하리라는 생각이다- 이 말씀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귀한 가르침 소중하게 받겠습니다. ㄱ 꾸벅^^

  • 2021-02-03 15:56
    긴~글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모든분들 하나님과 사람들 에게 더욱 존중히 여김 받기를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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