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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계준목사(연세대 명예교수)

작성자
유삼봉
작성일
2021-04-25 18:37
조회
585
2021. 4. 25. (신반포감리교회 창립 39주년 기념 설교)
시편 118:22-24, 에베소서 2:11-22

오늘 우리는 교회창립 39주년을 맞이하여 하느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21세기를 지향하며 개척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와 세계는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외적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 교회가 계속 발전해 온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교우 여러분들의 헌신의 결과인 줄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올해 창립 주일을 지키는 소감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온라인 예배와 함께 우리가 존경하던 김수경 장로께서 영원한 나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와 친교를 온라인으로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 장로님과 영적 온라인으로 친교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하느님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이었던 에베소 교우들에게 교회의 본질에 대해 매우 긴요한 원리를 전하는 대목입니다. 이 말씀이 창립 주일과 함께 뉴노멀 시대를 맞이한 우리에게 어떤 함의가 있는지 같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2장 20절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퉁잇돌이 되시고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성전이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전의 세 가지 구성 요소를 말하면서 성전의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기초는 카리스마 곧 영적 은사를 받은 사도와 예언자들이며 이 모퉁잇돌과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 우리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교회란 말 대신에 성전이라고 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 ekklesia의 본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이지만 우리는 흔히 제도나 조직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전이란 모세의 법궤와 하느님이 계시는 지성소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뜻하는 데 바울은 '우리가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자각한 거룩한 존재라는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그리스도이신 머릿돌, 사도와 예언자들의 기초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자각한 백성, 이 세 가지 요소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크리스천은 성전의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와 부활이 드러낸 하느님의 구원을 주축으로 삼고 이에 대한 사도와 예언자들의 증언을 따르는 거룩한 무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39년을 회고할 때 우리 교회는 위에서 말씀드린 성전의 세 가지 원리를 충족시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믿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전의 모퉁이돌과 기초를 망각하므로 성전을 손상시키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자랑할 것도 없지만 그리스도의 초석과 사도와 예언자들의 증거를 바탕으로 하여 21세기를 위한 복음 선교를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성전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하느님의 은혜와 우리 교회 개척자들의 공헌이라고 믿습니다. 개척한다는 것은 최전방에서 적군과 싸우는 것과 같이 자기의 존재와 소유까지 바치는 헌신적 신앙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개척자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성전임을 자각했기 때문에 자기희생을 통해 우리 공동체를 모퉁잇돌과 증언 위에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교회의 실정을 눈여겨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개척자들의 뒤를 따라 하느님의 성전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교회가 온라인으로 인해 영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우리 작은 공동체가 순항한다는 것은 교우 한분 한분이 모두 튼실한 하느님의 성전으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이러한 개척정신의 유산이 계속 유지되고 성장하므로 개인의 성전과 함께 공동체의 성전이 완전에 이르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 2장 21절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자라서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성전을 살아있는 유기체로써 영적 관계와 진화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구성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친교를 통해 이루어지고 자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서 성장하므로 사람을 한자로 人間 곧 사람은 사람 사이라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대인 철학자 M. 부버도 "Between Man and Man"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을 지으신 것도 인간의 관계성을 뜻하는 것으로 봅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제도적 교회에 목을 매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 안에서 교제할 때 거룩한 모습 곧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바울은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고전 3:6-7)고 했습니다.
미국의 영성 신학자 R. 로어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진화하도록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물들이 줄곧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발전시키며 더 잘 성장하고 변화하도록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체 안에 영적 기(氣) 곧 "새 사람"으로 진화하는 잠재력의 소유자로 창조하신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동안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와 친교에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영혼의 맑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기도는 이웃의 고통과 나라의 위기에 대한 애절한 간구이었고 교우들 간의 친교는 실로 순수한 사랑으로 아름답게 영근 열매와 같았습니다. 피차 이해와 관용, 위로와 격려는 영적으로 성숙한 인격의 극히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어른인 부모가 자기희생을 통해 가정을 꾸리듯이 여러분은 하느님의 가정인 신앙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헌신을 아끼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성전이 된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를 사회-역사 속에서 구현하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진일보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이시고 사랑과 정의는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사랑이 개인적 가치라면 정의는 사회적 가치인 것입니다. 오늘날 하느님의 정의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훼손되어 도덕적 혼란과 민생의 위협을 초래되었습니다. 이제 정의와 공정이 회복되고 상식과 윤리가 살아나서 우리 사회가 하느님 나라로 변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2장 22절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워져서 하느님이 성령으로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개인적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이것을 공유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이란 영적으로 각성된 성도들의 집단적 실체라고 이해해서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독자적 인격이지만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할 때 개별적인 영적 존재는 영적 공동체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성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하나 되고 융합되므로 보다 온전한 성전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집은 설계도에 따라 수백 종류의 자재가 서로 연결되어 제 모습을 드러내듯 하느님의 성전도 각자 성도의 특성과 잠재력의 합작으로 완성되는 작품입니다.
이렇듯 성전의 공동체 개념은 개인주의 혹은 개체주의가 편만한 현대사회에서는 일종의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빈부와 계층의 괴리로 인해 붕괴되는 현대사회는 개체주의와 해체주의에서 공동체주의로 변하지 않는 한 사람 사는 세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이 공동체 회복의 불씨인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한 기자와의 대담에서 오늘의 현실을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에서 육체만 보존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고 영혼을 보존하는 것은 도외시하고 있다. 따라서 영혼이 병들어 우울증이 많아지고 독신 젊은이들의 자살율도 높아지고 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현상과는 달리 우리 교우들은 개인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기 영적으로 더 똘똘해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얽히고 뭉치면서 서로 버팀목이 되므로 보다 온전한 성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하느님의 현존의식이 심화되고 헌신의 열정이 상승함으로써 하느님의 성전 완성을 위해 힘쓰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크리스천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동시에 우리가 뭉쳐서 성전 공동체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결승점에 이를 때까지 겸손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의 순례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개척에 참여한 목회자로서 우리가 바라던 교회 상을 어느 정도 이루었는지 성찰하면서 때로는 만족하고 때로는 실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의 은총과 교우 여러분의 헌신으로 우리가 각기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모두의 합작으로 건설하는 하느님의 성전이 완성을 향해 계속 진화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와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과 여러분의 신실함과 헌신이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기를 기원하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전체 10

  • 2021-04-25 19:17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1-04-25 21:04

      유 목사님, 제가 이계준 교수님께 학창시절에
      선교학을 배웠는데 오늘 에크레시아에 대해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1-04-25 23:06

    왜 하나님을
    하느님이라고 하시나요?
    제게 신앙을 지도하신 목사님들께서
    하나님을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분들을
    경계하라고 배워서요...ㅎ

    하늘에는 여러가지가 섞여 있지요
    해, 달, 별, 구름...
    그리고 요즘에는 드론까지...
    땅에는 지하여장군, 천하대장군, 산신령 등이 득시글하고요
    사람들은 그것들을
    땅님이라고 부르던데요

    하늘님>하느님 VS 땅님>따님?

    평신도들은
    목사님들의 이런 글에
    오늘도 또 헷갈립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로 되어 있습니다.


  • 2021-04-25 23:07

    신반포 감리교회 39주년을 축하합니다
    이계준 목사님의 귀한 설교말씀 감사합니다
    故 김수경 장로님의 소천 소식에 유족 여러분께
    성령님의 위로하심을 기도합니다


  • 2021-04-26 02:19

    존경하는 박영규목사님, 감사합니다.


  • 2021-04-26 09:53

    하느님은 종교 통합주의자들의 생각이며 더불어 케톨릭을 포함한 타종교들과의 연합체를 염두해 둔 포석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하느님이라 고집하는 분들의 특징은 기독교라는 교회는 세상에 속한 제도적인 교회 즉 인간이 만든 교회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줌으로써 제도적인 교회를 뛰어 넘는 거룩한 영적 교회를 이루자는 아주 그럴싸한 명분을 제시합니다.
    위 원 글에서도 그와 같은 표현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데..

    "우리 크리스천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제도적 교회에 목을 매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 안에서 교제할 때 거룩한 모습 곧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바울은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고전 3:6-7)고 했습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1. 세상에 존재하는 제도적인 교회는 인간이 만든 제도적인 (유형)교회로 하나님이 이루신 거룩한 (무형) 교회와 대조되어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 즉 육에 속한 것이라 주장을 합니다. 이것은 종교통합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되며 세상에 존재하는 제도적 유형의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무형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고 반역하는 세속적으로 타락한 교회라는 이미지를 심어 줍니다.

    결국 이러한 구조는 영은 거룩하고 육은 악하다. 영은 진짜이고 육은 거짓이다. 영은 온전하나 육은 타락한 것으로 반드시 멸망 받을 존재임을 부각시키는 영지주의적인 지식(영적인 가치)만을 공유케 하려 하는 신영지주의자의 주장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2. 신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지식의 진보를 의미하며, 신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의 신지식이라 할 수 있는 진화론을 새로운 영적 지식으로 수용하여 이성주의화 합리주의 바탕을 둔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론이기에 진화론을 자연스럽게 끌어다 사용을 합니다.

    "우리 교우들이 개척자들의 뒤를 따라 하느님의 성전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바울은 성전을 살아있는 유기체로써 영적 관계와 진화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2. 신영지주의자들은 신계몽주의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진보(화)된 영적 신계몽이야 말로 인간의 위대한 개척정신(영적지식) 임을 강조하며 그에 대한 완성적 모델을 하느님의 교회라 구별하여 사용을 합니다.

    "이러한 개척정신의 유산이 계속 유지되고 성장하므로 개인의 성전과 함께 공동체의 성전이 완전에 이르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미국의 영성 신학자 R. 로어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진화하도록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신영지주의자들은 기존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다르게 영성(영적지식)을 강조하며 진화론을 신영지주의자들의 영적 지식으로 소개를 합니다.
    "사물들이 줄곧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발전시키며 더 잘 성장하고 변화하도록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진화론을 매개체로 삼고 영적 지식의 진보(화)를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과 영적 지식을 자연스럽게 연계함으로써 현대 사회에 적용 가능한 새로운 신학적 모델로 '하느님의 교회'를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체 안에 영적 기(氣) 곧 "새 사람"으로 진화하는 잠재력의 소유자(하느님의 성전)로 창조하신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3. 이*준 목사는 원 글에서 "하느님의 성전이란 영적으로 각성된 성도들의 집단적 실체라고 이해해서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각성된 성도들의 집단적 실체'라 함으로써 이것은 신영지주의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신영지주의자들의 연합체가(하느님의 교회) 보다 진보(화)된 하느님이 세우신 영적 교회로서 인간(하나님의 성전)의 노력으로 형성된 제도적 교회인 '하나님의 교회'와 영적 진보된 지식으로 각성된 이(하느님의 성전)들로 하여금 보다 더 나은 영적 실체로서의 진(진화)보된 '하느님의 교회' 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빈부와 계층의 괴리로 인해 붕괴되는 현대사회는 개체주의와 해체주의에서 공동체주의로 변하지 않는 한 사람 사는 세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이 공동체 회복의 불씨인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이*준 목사는 이러한 영적 진화를 이루고자 하는 이들인 신영지주의를 추구하는 이들(하느님의 성전이 되고자 하는 이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권면을 합니다.

    "크리스천의 궁극적(영적) 목적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신영지주의자)이 되는 동시에 우리가 뭉쳐서 성전 공동체(하느님의 교회)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은총(영적 지식)과 교우 여러분(신영지주의자)의 헌신으로 우리가 각기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모두의 합작으로 건설하는 하느님의 성전이 완성(하느님의 교회)을 향해 계속 (새 영적 지식을 따라) 진화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와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 글러브 입니다.


    • 2021-04-27 10:55

      내용에 대한 적절한 지직이고, 제대로 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 2021-04-26 17:17

    하느님과 하나님

    하느님은 일반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이다.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각각의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불가사의한 능력으로써 선악을 판단하고 길흉화복을 인간에게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톨릭에서, 신봉하는 유일신이다. 천지의 창조주이며 전지전능하고 영원한 존재로서, 우주 만물을 섭리로 다스린다. 그리스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일부 분파에서 이르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상제, 상주, 주, 천공, 천제, 천주, 현제, 황천, 상천 등이 있다.

    옛말 ‘하님’ 우리말 바로쓰기

    질문: '하느님'과 '하나님' 중에 어떤 것이 표준어에 해당되나요? '하느님'은 가톨릭에서 일컫는 신이고 '하나님'은 가톨릭과 같은 신을 개신교에서 일컫는 말 아닌가요? 그렇다면 둘 다 표준어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알기론 '하나님'도 표준어 개정 이후 표준어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표준어로 규정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하느님'과 '하나님'은 모두 표준어로 그 의미에 따라 쓸 수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하나님'은 '하느님'을 개신교에서 이르는 말로,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 가톨릭에서 신봉하는 유일 신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질문: 하느님의 어원은 어떻게 됩니까? 에 대하여 자세한 답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하느님'의 어원 정보를 보기에 제시하오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보기> '하느님'의 어원: '하느님'은 '하늘'과 '님'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단어이다. '하늘'이 본디 '하날['날'의 모음은 아래아(ㆍ)]'이어서, 국어의 변화에 따라 '하늘'로 되기도 하고 '하날'로 읽힌 적도 있어서, '하느님'과 '하나님'의 두 형태가 현대에 정착되었다. '하느님'은 일반적인 의미의 '신'을 가리키고, '하나님'은 특정 종교에서 신봉하는 유일신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므로, 결국 '하느님'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국어의 발달에서 이러한 의미의 분화는 언어 변화의 논리에 의한 것은 아니다. '하날(모음은 아래아)님'에서는 '하느님'도, '하나님'도 모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17세기 편지글에서 '하나(모음은 아래아)님'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 형태는 '하날(모음은 아래아)+-님'의 결합에서 'ㄴ' 앞의 'ㄹ'이 탈락된 결과이다. 물론 이 글에서 '하나(모음은 아래아)님'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의 '하늘에 계신 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편지글이 아닌 문헌자료에서는 18세기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19세기에는 '하날(모음은 아래아)님'으로부터 '한우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데, '하님'은 원래의 구성인 '하날(모음은 아래아)+-님'을 의식하여 적은 것이며, '한우님'은 '하느님'의 모음이 전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그 원래 구성인 '하날(모음은 아래아)님'에서 현재의 '하느님'에 이르기까지 의미상의 큰 변화를 입지는 않았다. 다만, 종교 단체에 의한 의미의 전용이 있어, 해당 종교에서 특수한 의미를 갖는 말로 구별하기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여 쓰고 있다고 생각된다.
    (출처: 21세기 세종계획 누리집, 한민족 언어 정보, 국어 어휘의 역사.)

    韓(대한민국 한)+ 我(나 아, 우리 아)+ 任(책임질 임=님, 임금 임=님)=한아임, 님(한아님이 연철되어 하나님, 한우리님이 축약되어 한울님) 한자어로 생각해보는 하나님에 대한 어원이다.


    • 2021-04-26 21:48

      하나님이 하느님에서 하느님은 하늘님에서 왔다는 주장은 케톨릭 신학자들과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느님과 하나님은 그 의미 자체가 매우 다름니다. 하느님은 범신론적인 표현으로 케톨릭의 종교통합적 선교관에 의해 정해진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유일신의 개념에 가까와 오직 기독교만이 참 신 즉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 의해 타 종교들과의 차별점과 분별을 위한 거룩한 창조주에 대한 한국 개신교식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하나님이라 표현하는 개신교 안에서 부득불 하느님이라 표현을 하는 이들은 일부 자유주의(토착화, 민중) 신학자들과 종교통합적인 신학과 더불어 에큐메니칼 운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포괄주의적 신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하느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도 하느님이 될 수 있으며, 공자와 노자도 하느님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 지식을 소유한 이들이라면 누구든 성인의 반열을 뛰어넘는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신교 특별히 감리회 안에서 하느님이라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자체로 조심해야 할 주의의 대상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영(가르침, 주장, 신학, 가설, 교훈 등등)을 믿지 말고 시험하여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1서 4:1)


  • 2021-04-27 00:47

    함창석 장로님의 퍼 온 글을 인용한 설명글과
    노재신 목사님의 감리교 목회자로서의 견해를 피력한
    두 개의 답글을 보면서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함장로님의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저와 감리회 성도들 신앙의 나침반은
    노재신 목사님의 견해 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단(異端)의 일렁이는 파도와,
    사설(邪說)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어두운 밤바다같은
    암울한 영적인 시대에
    이를 헤쳐나아가야 하는 기독성도들에게는
    저멀리 보이는 한 줄기 불빛이
    안전한 뱃길을 인도하는 등대의 불빛인지
    아니면 암초와 얕은 수심으로
    우리의 생명과 신앙을 한 번에 앗아갈 수도 있는
    마귀사탄의 간교한 등불인지 어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영적으로 저를 지도해주신 목사님들의
    말씀과 가르침은
    제 신앙의 근거와 토대를 분명히 해주셨는데...
    이와같이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을 부르는 명칭조차도
    헷갈리고 있는 현실을 보면
    정말로 우리는 영적인 혼란과 미혹의 파도 앞에
    바른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성령께 답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해야합니다.
    그에 대한 해답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2)
    라고 성경에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 모두가 '하느님'이라고 말한다 할찌라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 분은 하늘에 계시지만
    전지전능 하시고 무소부재 하시며 완전한 분으로서
    인격적이시고 유일(唯一)한 신(神) 중의 신이시며
    만유를 창조하신 왕 중의 왕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야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엉뚱한 비유이겠지만
    목회를 해야 하는 그 분들을 목사님이라고 해야지,
    잘 잡숫는다고 먹사님이라고 하면 안 되쟎아요.
    목사님을 먹사님으로 불러서야 되겠습니까?...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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