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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위(약 2:14-26의 주경신학적 연구)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1-03-29 16:18
조회
292
I. 서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그 믿음은 행위가 배제되는 것인가 아닌가, 행위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행위는 윤리 도덕 행위나 양심 행위나 율법 행위나 종교 행위인가, 믿음의 행위인가 하는 것은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이 야고보서 2:14-26이다.
야고보서 2:14-26은 루터로 하여금 전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은 것이라고 경시하게 만든 구절이다(E. C. S. Gibson). 실상, 이 본문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난해하지만, 포티트(G. Poteat)가 야고보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다. “야고보가 공격하는 크리스트교의 왜곡된 교훈은, 믿음의 고백이 믿는 자의 행위와 관계없이 구원을 보증한다는 관념이다. 다시 말하면, 신조의 암송이 동료를 향한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런 신앙 지상주의(도덕 폐기론)는 야고보 당시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괴롭혀 온 탈선이다.”

II. 본론

야고보는 이 부분을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운받은 사람들이다.
[믿음](피스틴, πίστιν)에 대해, 홍현설 박사는 “신조나 신앙 고백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적 행위에 대한 신뢰와 확고 또는 심리학적 의미의 내적 신념이 아니다.”①라고 한 다음에, “새로운 창조의 주도자이시며 세계의 화해자이시며 모든 정의의 근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에 결코 인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즉 신의 믿음직함(信實性)에 대한 우리의 신뢰, 이것이 바로 구원의 방편이 되는 신앙이다.”②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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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홍현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서울: 기독교 대한 감리회 총리원, 1968), pp. 20-26.
2) Ibid.,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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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K. Barth)는 “신앙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근거지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삶, 사고, 의지 및 감정의 전체에 관계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가 거기에 매어 달리는 한 가닥의 끈이며, 그것으로서 우리가 영양을 받는 유일한 음식이다.”③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 곧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행위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엡 2:8, 마 16:17) 성령의 은사(고전 12:9)로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인간의 전 인격적인 응답이다. 전 인격적인 응답이란 인간의 삶, 즉 사고와 의지와 감정 및 행위의 전체가 하나님께 대해 복종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연합하며 사는 생활이다. 이러한 관계를 맺는 “믿음의 결단은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재 은혜에 근거된 것이므로”(J. Wesley),④ 인간이 믿는 것은 인간의 공로일 수 없으며, 반면에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 믿음은 또한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얻기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방편이기도 하다(벧전 1:5).
윌리암즈(R. R. Williams)와 박윤선 님은 “크리스트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는 한 주제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야고보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함으로써, 고백뿐인 믿음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J. Calvin)은 “야고보는 여기서 거짓된 고백에 관해 말하고 있다.…그는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면’이 아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로 자기의 말을 시작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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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 Ibid., p. 31.
4) 박장균, “웨슬레의 恩寵論” in 神學과 宣敎(서울신학대학, 1972),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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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뿐인 믿음이란 사실상 참 믿음이 아니다. 그 곳에는 [행함]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위는 구분은 할 수 있어도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R. A. Ward, 박윤선). 어드만(C. R. Erdman)과 와드(R. A. Ward)의 말대로 진정한 믿음이라면 그것이 행위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믿음에 따르는 행위란 사랑이 그 원리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도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라고 하였다.
사랑의 행위가 없는 고백뿐인 믿음은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야고보는 아주 단호하게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그 믿음]은 믿음도 아니라는 강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다.
이상근 님은 “믿음이란 머리나 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으로 불신앙의 생활을 뉘우치며 자기의 혀를 자복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행위는 자연히 따라오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의 증거는 순종의 행위이다”(G. R. Berry).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그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黑崎幸吉은 이 구원을 가리켜, “세상 끝 날 심판 때에 받는 구원을 의미한다.”라고 하지만, 꼭 미래적인 의미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신약 성경에서 [구원]이란 현재적인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 모두를 내포하고 있다.
야고보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고백뿐인 믿음이 무익하고, 구원 능력이 없다는 점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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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崎幸吉은 “신앙을 머릿속에서만 이해할 뿐, 신앙이 새 생명의 원천이 되지 못하는 자는 같은 믿음의 식구인 형제자매(타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의 고난을 보고도 사랑심이 동하지 않고 동정이 앞서지 않는다. 다만 헛된 이론과 설명으로써 그들을 만족시키려고 하나 그러한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말로만 동정하고”(W. Barclay, 박윤선, 이상근), “말로만 사랑한다”(C. R. Erdman)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 동정도 사랑도 아니므로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태도는 “가난한 자에 대한 조롱이다”(J. Calvin).
바클레이(W. Barclay)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구제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의는 곧 구제를 의미한다. 구제는 사람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에, 그 사람의 방파제가 된다고 생각되었다.”라고 하였다. 벤 시락(Ben Sirach)은 “물은 뜨거운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서 3:30)라고 하였고, 토빗서(4:8-11)에는 “구제하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나는 구제로 인하여 당신의 낯을 보게 되리라.’라고 씌어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야고보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구제 행위로 의나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어디까지나 믿음에 따르는 행위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원리로 하는 구제 행위이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반드시 복음의 정신을 현실 속에 구체화시키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라고 하였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을 의식하여, 【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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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난해구 중의 하나이다. 문제는 [혹이]가 누구를 지시하는가에 열쇠가 있다. 이스톤(B. S. Easton)은 야고보가 바울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이 행함 없는 믿음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워 그 반대자(혹이)를 바울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포티트(G. Poteat)는 자신이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떤 주석가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즉, 야고보가 행함 없는 믿음을 주장한 바울의 교훈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논지는 야고보가 바울을 오해했었다는 것이다. 이스톤(B. S. Easton)은 “야고보는 후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오해한 것처럼 바울을 오해하였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실제적으로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에는 행위가 배제되어 있지 않은데, 야고보는 바울이 행함이 없는 믿음만을 주장하는 것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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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10

  • 2021-03-29 16:20

    (본 글의 계속 2)

    그러나 정말 야고보가 바울을 왜곡한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엄밀히 말해서, 바울이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할 때(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거듭 강조)의 행위란, 믿음에 따르는 행위가 아닌 율법적인 의미의 행위나 윤리․도덕적인 의미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 역시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위, 즉 믿음에 따르는 행위를 똑같이 강조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포티트(G. Poteat)가 잘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믿음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선포하고 명백히 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순수한 태도로서의 인격적 응답이다. 그것은 신뢰, 충성, 감사 그리고 사랑이다.”라고 하여 믿음에 행위가 동반됨을 보여 주고 있다(갈 5:6). 윌리암즈(R. R. Williams)도 “바울은 죄에서 자유로운 자들이(믿음에 의해) 죄의 삶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을 논박하였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그는 믿음이란 사랑에 의해 역사해야만 하고, 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라고 하여 믿음에는 사랑의 행위가 동반됨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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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바울과 야고보에 있어서 신앙의 증거는 사랑의 행위의 삶에서 명백해진다는 것이다”(G. Poteat: 고전 13장 또는 롬 12장).
    그러므로 [혹이]를 바울 또는 바울주의자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黑崎幸吉은 [혹이]를 가리켜 “14절의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와 대조하여 다른 한 사람을 가정하여 이를 반박하는 것, 즉 너의 믿음은 행위 없는 믿음이고 나의 행위는 믿음에서 난 행위다.”라고 하지만, 오히려 야고보에 반대하여 어떤 이는 믿음만을 어떤 이는 행위만을 별도로 소유할 있다고 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는 그러한 반대자의 공격에 대해 믿음과 행위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논박하고 있는 것이다(R. R. Williams, W. Barclay, 이상근). 한 마디로 말해, 야고보가 강조하는 핵심은 보이지 않는 믿음이란 그에 따르는 행위로만 입증된다는 것이다.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믿는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그의 믿음은 이미 믿음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야고보는 행함 없는 믿음, 고백뿐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결정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黑崎幸吉은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것과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주 다르다. 전자는 단순한 지식이요 이해이며 후자는 산 믿음이다. 본래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하는 것은 유대인의 기초 신조이었다(신 6:4-9. shema 참조).
    야고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라고 한 것에 대해, 칼빈(Calvin)은 신조를 되풀이하는 신앙이나 단순한 지적 이해 또는 관념적 인식으로서의 신앙을 다소 비꼬는 어조라고 하지만, 알포드(H. Alford)는 그렇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다소 비꼬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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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J. Calvin, R. R. Williams, C. R. Erdma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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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적 이해나 관념적 인식 또는 지적 승인으로서의 믿음이란,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구원을 얻을 수 없다(마 7:21, 12:50). 오히려 귀신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여 떠는 것처럼, 그런 류의 믿음을 가진 자들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米田豊이 잘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라든가 그 유일하심을 믿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거나 구원 얻는다고 할 수 없다. 그것만이라면 사단도 믿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여 두려워 떠는 것이다. 이 악령적 신앙은, 요컨대, 지식 뿐의 신앙, 단순히 교리 또는 신앙 개조의 신앙으로 회개와 복종이 따르지 않는 신앙이다.”
    헨리(M. Henry)도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신조를 되풀이하는 것은, 우리가 귀신들이 하지 않고, 할 수 없는바 복음이 지시하는 대로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시키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스스로 기뻐하고, 그분을 섬기지 않는 한, 귀신들로부터 우리를 구별해 주지 않는다.”라고 하여, 참 믿음과 사단적인 믿음(거짓된 믿음)의 차이가 행함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자에게 그러한 믿음이 헛것임을 일깨워 주기 위해 아브라함과 라합을 실례로 들고 있다.
    먼저, 그는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자를 가리켜 [허탄한 사람]이라고 일컫고, 또한 그러한 믿음을 가리켜 헛것이라고 단정한다.
    [허탄한]은 케네(κενέ)이며 내용이 없이 텅 빈 것(G. R. Berry, 黑崎幸吉),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M. Henry). 또, 이 낱말은 ‘열매 없는’, ‘효력 없는’ 등의 뜻을 갖고 있다(G. R. Berry). 이로 미루어 [허탄한 사람]이란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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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것]은 아르게(ἀργή)로서 쓸모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黑崎幸吉).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쓸모없는 믿음이며, 따라서 없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이어서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명백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의 대표적 인물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구절은 창세기 22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黑崎幸吉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유무를 시험하시어(창 22:1)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보시고 이를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로 삼아 기뻐하시고(창 26:5) 이 행위로써 그를 의로운 자라고 선언하셨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행위가 믿음의 증거라는 점이다(C. R. Erdman, W. Barclay).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데(창 15:6), 그 믿음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는 행위로 입증되었다. 따라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근 님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바치신 속죄의 그림자라고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의 시험으로서의 요구에 대한 복종이었지, 속죄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은 아니다.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할 때, 그 행위는 결코 율법적인 의미에서의 행위나 일반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행위가 아니다. 그 행위는 어디까지나 믿음에 근거한 행위이며, 믿음에 따르는 행위이다. 이 사실은 야고보 자신의 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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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M. Henry)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이었고, 행위를 초래했으며, 그리고 행함으로 완전해졌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근 님은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하여야 한다. 또한 그가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에서 난 것이지 단지 율법적이나 수양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는데, 아직 행위로 나타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지, 즉 믿음 자체가 이미 행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박윤선), 아니면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행위가 따라나오게 되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 黑崎幸吉이 잘 설명하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하여 진정한 마음에서 나고, 믿음에서 나는 행위는 마음에서 밖으로 역사한다. 참 믿음은 반드시 이 두 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아직 행위로밖에 나타나지 않은 믿음이(이것과 행위로 나타날 수 없는 죽은 믿음<17절>과는 천양지차다. 이 차이에 주의하라.) 믿음의 본질로서 불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사람이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롬 3:28). 그러나 이 믿음이 그 역사를 나타냄으로써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며(곧 온전케 되다.), 본질과 활동을 갖춘 뜻에서의 완전한 것이 된다.”
    칼빈(J. Calvin)도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이 행위들로부터 그의 온전을 끌어오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들이 믿음의 참된 특질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부름 받기 이전에 윤이 났다.…야고보는 다만 아브라함의 온전함이 그의 믿음의 현저한 결실이 드러난 그 행위 안에서 확실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여 같은 의미의 해석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믿음에 행위가 따름으로써 그 믿음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야고보는【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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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은 창세기 15:6(LXX)을 인용한 것이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는 역대하 20:7과 이사야 41:8을 인용한 것이다.


  • 2021-03-29 16:21

    (본 글의 계속 3)

    [의로 여기셨다]의 [여기셨다]는 엘로기스테(ἐλογίσθη)로서 ‘간주하다’, ‘주의 깊게 생각하다’, ‘헤아리다’, ‘계산하다’, ‘논하다’, ‘추론하다’, ‘결론짓다’, ‘생각하다’ 등을 의미한다(롬 4:5, 고전 4:1, 고후 3:5, 10:2, 12:6).
    마이어(Meyer)는 “야고보는 여기서 [의로 여기셨다]와 [의롭다 하심을 받고]를 정도 차이로 구별하여, 전자는 아직 행위로 나타나지 않은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이를 의로 돌리는 것인데 비해, 후자는 실제로 의롭다고 선고를 받아 심판을 면케 되는 것이다. 전자가 성취되어 후자가 되는 것이 마치 예언이나 약속이 이루어짐과 같다고 해석하고 있다.”⑥라고 설명하고 있다.
    깁손(E. C. S. Gibson)과 이상근 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인정되었는데, 그 의가 창세기 22장의 행함에서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야고보의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야고보나 바울은 의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23절과 롬 4:3, 갈 3:6은 모두 창 15:6을 인용한 것).
    또한, 믿음으로 얻은 의가 불완전한 것이었는데, 행함으로 완전한 의가 되었다고 하는 주장도 그 두 사도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칼빈(J. Calvin)도 “아브라함이 의로워진 것이 그의 행위의 덕택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은, 야고보가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의로 여긴바 된 것은(창 15:6) 확실히 이삭이 태어나기 15년 전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한 것인데, 이것은 그의 희생 제사의 효력이라고 하기가 어렵다.”라고 주목할 만한 설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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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in 黑崎幸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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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과 같이 야고보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주장을 한다고 할 때,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은 야고보 자신이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바울이나(엡 2:8-9, 롬 1:17) 개혁가인 루터의 ‘오직 믿음’(sola fide)의 기치와 배치된다. 그러나 그 배치는 외관상 그런 것이지, 내용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야고보가 여기에 언급한 [믿음이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는 고백뿐인 믿음(14절), 신조를 승인하는 것에 불과한 사단적 믿음(19절), 행함이 따르지 않는 죽은 믿음(17절) 등이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 같으면서 믿음이 아닌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반면에, 여기에 언급한 [행함]이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참 믿음에서 비롯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의 행위란 믿음을 입증하는바 믿음에 따르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믿음이란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따른 행위 또는 삶이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하나님의 의에 따른 행위이며 삶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 의가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는 순종의 행위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바울과 야고보에게서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면, 바울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을 강조한 반면에, 야고보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에 따르는 행위를 강조한 것이다.
    순종의 행위로 믿음으로 얻은 의를 입증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 요즈음에도 아랍 족속들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하나님의 벗]이라고 한다(E. C. S. Gibso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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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을 들어 자기 주장을 논증한 야고보는, 또 하나의 예로 이방 기생인 라합을 들고 있다.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2:4 이하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라합의 이야기 속에서 이제까지 논증해 온바 믿음에 따르는 행위가 믿음의 입증이며, 믿음에 의한 의의 증거임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야고보가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했을 때, 그는 이미 [라합]의 믿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라합이 하나님의 사자인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피신시켜 준 행위는 율법적인 행위나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믿음에서 비롯된 행위이다.⑦ 윌리암즈(R. R. Williams)는 “그녀(라합)는 자신의 삶의 길에 관한 한 칭찬들을 것이 없다(기생). 그러나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동족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식별했으며, 또한 협력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믿음의 본이 되었고, 히브리서 11:3에서처럼 인용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포티트(G. Poteat)도 간단하지만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야고보와 히브리서 저자는 라합에게서 신앙의 여걸을 본다.” 어드만(C. R. Erdman)은 “이 라합의 믿음이 얼마나 신실한 것이었는가는 그녀의 행위로 입증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가 잘 설명하고 있다. “라합은 이스라엘에게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 들은 보고를 믿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이 신실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은 그녀의 생의 위기에 사자들을 받아들여 다른 길로 가게 한 것이다.”
    따라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라합이 믿음으로 얻은 의에 대한 확증이 곧 그녀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만일 라합이 정탐꾼을 돕기 위하여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쓸 용의가 없었다면, 그녀의 신앙은 무익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W. Barclay). 이러한 의미에서 야고보는 믿음에 따르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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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J. Wesley, B. S. Easton,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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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믿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한 믿음인가는 우리의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 이 행위란 곧 현실 속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이다.
    야고보가 기생 라합을 예로 든 데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즉, 어떠한 죄인이나 버림받은 자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으로서 사랑의 행위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교회들은 죄인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거부하고 있다. 포티트(G. Poteat)는 “예수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을 자신의 은혜의 영역 안에 모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속물 근성 때문에 교회에서 소외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잘못과 편견 내지는 아집을 버리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인이 없으며, 또한 용납하지 못할 인간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고보는 이제까지의 논의의 결과로,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이 비유에서 [믿음은 몸]으로, [행함]을 [영혼]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야고보가 의도하는 것은 어느 것이 영혼, 어느 것이 몸을 가리키느냐 함이 아니라, 영혼과 몸의 결합이다. 이 둘이 합하여 생명체가 되는 것처럼, 산 믿음에는 행위가 동반되는 것이다.

    III. 결론

    2:14-26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고백뿐인 믿음, 신조를 승인하는 믿음이란 사단도 갖는 것으로 아무 유익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한다. 그가 강조하는 행위란 율법이나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믿음에 따르는 행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현된 사랑이 그 원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에 의해 믿음의 신실성이 입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위로 입증되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이다.
    야고보는 그 구체적인 실례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들고 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란 그들의 믿음이 행함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행위가 믿음을 입증한다는 것은 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믿음이란 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란 곧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자의 행위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행위이다.
    바울이나 야고보는 인간이란 율법이나 윤리적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며, 그 믿음(의롭다 함을 말한)은 그에 따르는 행위로 입증된다고 하였다.

    출처: 최세창, 야고보서․베드로전후서(서울: 글벗사, 2001, 3판 1쇄), pp. 152-166.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설교집 28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 2021-03-29 22:21

    목사님! 너무 길어욧!!


    • 2021-03-29 23:56

      필자의 논문(15페이지)에 관심을 보여 감사해요.
      필요한 주제라고 여기는 분들은 읽겠지요. 안 읽어도 그만이고요.


      • 2021-03-30 00:21

        저는 다 읽었습니다. 읽다가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제 소견은, 행위에 대한 동양적사고(수신제가치국)가 행위 자체에 완전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수신의 방향이 자아를 향하는 것(시인 윤동주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과 타자를 향하는 것의 차이도 크고요.
        전자는 비교적 휴머니틱하지만 후자는 훨씬 더 인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저는 “믿음의 결과로서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선물)로서의 믿음”으로 이해합니다.
        아울러, 목사님의 열정이 매우 존경스럽습니다.


        • 2021-03-30 07:41

          두 분 다 아슬 아슬한 글러버님들 이시네요.^^


          • 2021-03-30 10:49

            노재신 목사님, 관심을 보여 감사합니다.


        • 2021-03-30 10:47

          이현석 목사님, 다 읽었다고 해서 감사하고, 관련하여 의견을 표해서 감사합니다.


  • 2021-03-30 13:42

    게시하신 내용에서 잘 배웠습니다. 또 야고보서 2장의 행위 구원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교리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1-03-30 19:18

      필자의 주경신학적 연구 논문에 대해 "게시하신 내용에서 잘 배웠습니다."라고 하시고, 적지 않은 이들이 행위 구원으로 오해하는 야고보서 2장의 구원관(약 2장의 행위는 믿음의 행위, 또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행위)이 맏움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교리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재확인하실 수 있다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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