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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위상을 추락시키는 사람들...

작성자
오재영
작성일
2020-11-03 15:56
조회
985
눈(眼)을 잃은 이들...

내게“물을 좀 달라”(요4:47)시는 주님께 물을 드려야 할 때, 오히려 자신의 구습(舊習)의 갈증부터 해소시켜달라며 주님께 조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진실은 주님께서 우리를 만족시켜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쏟아 붓고도 마지막까지 다 드리는 것이다. “너희는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신 말씀도. 시행하는 과정에 주님께 투정하거나 다른 것과 타협 없이 중심의 순수한 동기로 헌신하는 삶을 의미한다. 즉, 나의 기대와 달리 주님께서 어디로 가라시든 그곳에서 주님만족하시면 더 바랄 것 없다는 고백이 우리의 삶 이어야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길에서 우리의 충성을 가로막는 것들마다 주의해야 한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을 갉아먹는 가장 위험한 치명적 경쟁상대는 그가 주님을 위한다고 하는 ‘봉사’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벗어난 피상적인 약점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희생하는 것보다는 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이들의 눈에 보이도록 ‘봉사’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평가는 스스로 누리는 만족이 아닌 하나님의 만족이시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를 위해 뭔가를 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을 위해 싸우라고 보내신 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전쟁터에서 그에 합당한도구가 되라고 부르신 것이다.

살같이 빠른 세월, 각자 참담한 꼴로 후회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 스스로 묻고 헤아려야 한다.
“진실로 自我가 죽어 예수그리스도께 헌신했는가? 아니면 살아있는 自我로 주를 위한다는 명분의 자기스스로 설정한 쉽고 편안한 어떤 ‘봉사’에 마음을 드리고 있는가?”

이제는 부끄러움도 잊어버린 사람들...

도대체 이들의 종착점은 어디까지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가련하고 한심하다.
등장하는 이들마다 지뢰 묻힌 땅에서 위험감지 못하고 걷는 모습들이다. 이들 등장인들 중에는 아직 목회가 뭔지도 모를 신학생을 비롯하여, 牧會의 시작도 못한 이들, 구령의 열정까지도 바닥을 친 중진목사들과, 한동안 자주색 가운을 입고 ‘동분서주’하든 이들까지 다양하다. 이제는 자신의 명예를 심각히 훼손당했다며 소송장 들고 등장하는 이들도 있다. 도대체 그동안 본인들이 교단을 위하여 무슨 대단한 일들을 했다고 이 난리들인가? 본인들이 말하는 명예(名譽)란 어디에 근거한 명예인가? 無知의 탓인지 모르나 내보기에는 본인들이야말로 교단과 소속된 이들의 명예를 훼손했으면 훼손했지 훼손당했다는 말이 이해가되지 않는다. 이미 본래의 자리에 돌아오기 쉽지 않겠으나 주변과 이교도들의 냉소적 시선들을 의식함으로 자중들 하라. 그것이 본인이 사는 길이다.

우리 교단의 고질적인 병폐중 하나가 무슨 중책을 맡은 이들마다 뒤끝이 깨끗지 못한 것이다. 맡은 자리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하여 섬기고 마치고 나면 자주색(紫朱色)가운을 벗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그동안 떠났던 자리에서 겸손히 섬겨야하건만, 자리에 있을 때에도 갖은 구설(口舌)에 올라 교단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나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미련을 갖고 있는지 그 끈들을 정리하지 못한다. 우리와 함께 공존하나 내세를 모르는 이교도들도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마다 상식적인 일상의 규범들은 지키고 있다. 이를 따르고 순응함이 자신이 약해지는 것도, 비굴해지는 것도 아닌 오히려 이것을 무시함이 본인에게 해로움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기의지와 자존심을 내세워도 당장 문 앞에 나서면 교통신호를 따른다. 붉은 신호에는 서야하고, 푸른 신호 들어올 때 까지 기다려야한다. 자기 급하다하여 이 질서를 거스르면 본인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는다. 목사 세계에서 20세기 위대한 선교지도자로 기억되는 프레드 미첼(Fred Mit-chell), 하나님께 부름 받은 지도자의 자질론 을 “남에게 깔려 있는 것을 견디고, 그 충격을 흡수하고, 완충 역할을 감당하며, 심한 괴로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다.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예상 못한 소모와 계속되는 알력과 시련조차도 최대의 성품 테스트다" 했다. 그러므로 한사람의 성품의 평가는 그가 불가능한 순간에 어떻게 반응 하는가 에서 드러난다.

사단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

많은 사역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탁월한 설교자 알렉산더 화이트, 그가 담임하고 있던 에딘버러 교회에서, 어느 주일 아침 한 집사가 그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전날 그 교회에서 설교한 선교사에 대해 말하려고 온 것이다. “화이트 목사님, 그 사람은 로버트 후드 윌슨이 신실한 신자가 아니라고 하던데요,” 로버트 후드 윌슨은 그 당시 버클리교회의 목사이자 화이트의 친구였다. 화이트는 그런 그릇된 비난에 마구 화를 냈다. 몇 분 동안 그는 목회자로서 윌슨이 영적인 생활을 얼마나 잘 영위하고 있는가를 말하며 변호해 주었다.

그가 말을 끝냈을 때, 집사가 말했다. “목사님, 그 선교사는 목사님께 대해서도 신실한 신자가 아니라고 했는데요,” 다음순간 그의 들끓던 분노가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 집사에게, “형제여, 나를 혼자 있게 해 주게나. 내 영혼을 검사해 봐야겠네.” 이것이 각각 다른 순간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행동의 규율을 가진 이들의 정상적이고 바른 반응이다. 한 형제가 정당치 못하게 비난당할 때는 금세 변호에 나섰으나, 그 비난이 본인을 향할 때에는 입을 다물고 어쩌면 그런 부당하고 몰인정한 발언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핵심을 찾는 세밀함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약2:12에 있는 말씀대로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하고 행하기도 하라” 공의의 심판을 염두에 둔 ‘언행 심사’ 를 깨우치는 말씀이다,

글을 마치며...

옛 말 에 귀신 듣는데서 떡 소리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처럼, 혹여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편리대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까 한편으로는 염려도 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목사든 성도들이든 우리는 모두가 공동운명체들이다. 이교도들은 우리들 개인이 아무리 탁월해도 개인으로 평하지 않고 모두어말하기 때문이다. “교인들, 목사들”로 평하기에 좀 더 시세(時勢)에 밝은이들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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