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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 계시는 하나님

작성자
백승학
작성일
2020-08-04 09:16
조회
450
길 끝에 계시는 하나님
백승학

나는 문화와 교육의 도시이며 또한 도청 소재지이기도 한 청주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교시절 내내 봉사와 구호 등의 활동으로 알려져있는 모 NGO 단체의 도내 고등부 연합 동아리에서 활동을 하였다.
매주 토요일 오후면 도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준 도청 건물의 한 사무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곳에서 우리는 팝송과 포크송을 함께 불렀고 대외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으며 또한 독서 강연회도 자주 열었다.
거기에 참석하는 친구들 중에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보다 훨씬 예쁜 여고생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나는 토요일이면 존 번연의 ‘천로 역정’을 책가방에 꼭 넣고 다녔는데 그녀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틈만 나면 꺼내 읽곤 하였다. 그녀 앞에서 성경을 읽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나의 잔꾀가 금방 들통날 것 같아서 성경 다음으로 유명하다는 천로역정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우연히도 나처럼 가방에 교과서 외에 자신만의 경전 한권을 꼭 넣어가지고 다니는 친구가 몇 명 더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이소룡의 ‘절권도의 길’, 월간 교양잡지 ‘샘터’, 서로 이질적인 이 세 권이 그들 각자의 경전이었다. 그들에게 나처럼 순수하지 못한 어떤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흘러간 어느 훗날에 나는 이들의 소식을 하나씩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항상 책가방에 넣고 다니던 친구는 정치인이 되어 있었고 이소룡의 책을 넣고 다니던 친구는 체육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대학교의 태권도학과를 졸업한 후 체육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민 교양지이던 월간지 ‘샘터’를 들고 다니던 친구는 법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결코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숨긴 채 가식적으로 꺼내 읽곤 하던 나는 어쨌거나 목사가 되었다. 하나님이 나처럼 가식적인 인간에게 속으셨을 리는 없을 터인즉 오히려 목사를 만들어서 가식과 허위와 모든 허영을 다 깨뜨려버리시기로 작정하셨을 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시는 대신에 불쌍히 여기기로 작정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그때 내가 ‘천로역정’을 순수한 마음으로 읽었더라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는 아쉬움이 내게 적잖이 남아있다.
천로역정(天路歷程)이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여정’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뜻을 멀리 벗어나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해버린 소돔 같은 도시에 동화(同化)되거나 매몰(埋沒)되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나라와만 연결된 길을 의연하게 걸어가는 한 순례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는 하나님나라와만 닿아있는 길의 여정에서 허무라든가 낙심이라든가 절망, 태만, 오만 등의 갖은 장애물을 만나고 또 만나지만 끝내 길을 잃지 않는다. 잠시 길을 놓치기도 하지만 끝내는 되돌아온다.
그 중에 한 번은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고 알려져 있는 절망의 성에 갇힌다. 순례자는 절망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 성의 캄캄한 지하 감옥에서 ‘이제는 정말로 끝이구나!’하고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차디찬 바닥에 힘없이 드러눕는다. 슬프고 어두운 감정만 온 가득 밀려오는 시각의 어느 한 지점에서 순례자는 불현듯 이곳으로 오는 길에 스치며 지나치던 누군가가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거라며 목에 무엇인가를 걸어주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아! 분명히 열쇠 모양이었던 것 같아!” 급하게 옷고름을 헤치고 꺼내보니 약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열쇠였다. 그가 자신이 갇혀있는 절망성 지하 감옥의 자물쇠에 열쇠를 넣자 덜컥하고 자물쇠가 열렸다.
오늘 우리는 어둡고 험한 세상의 풍조를 등지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만 닿아있는 길을 걸어가기로 결단하고 기꺼이 나선 자들이다. 길을 놓치거나, 혹여 잠시 놓쳤더라도 다시 돌아와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은 말하기를 이 길 끝에 나를 기다리겠노라고 약속하신 그분이 반드시 서 계신다는 믿음이야말로 길을 잃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다. ‘천로역정’의 존 번연 역시 박해자들에 의해 12년의 긴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길 끝에 서 계신 약속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꿋꿋이 견뎌내며 ‘천로역정’을 집필하였다.
어릴 때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기쁘고 신이 났다. 오늘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비록 자주 지치고 험할지라도 나를 기다리겠노라고 약속하신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에 오히려 기쁘고 신나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하리라.

출처/ 백승학 글모음 블로그 https://greenword.postype.com/series



전체 2

  • 2020-08-05 15:03

    목사님 같으신 유머와 신앙과 성품을 가지신 분이 감리교회 안에 계시다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교회사태를 겪으며 목사님들께 대한 존경심이 거의 다
    고갈되어 가던 상황이기에 정말 그늘이 시원한 샘터를 만난 것 같습니다


    • 2020-08-05 20:27

      제게 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더 많이 자중하며 정진하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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