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4:8-18(설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주경신학적 연구
Author
최세창
Date
2025-04-0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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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의 이고니온 선교에 대해 기록해 온 누가는, 이어서 그들의 루스드라 선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로 시작된다.
루스드라는 14:6의 주석을 보라.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앉은뱅이로 태어나서 걸어 본 적이 없는 불쌍한 사람이다.
이하의 이야기는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선천적인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의 기사(3:1-10)를 연상케 해 준다. 두 이야기는 바울이 사도 베드로와 대등한 사도임을 보여 주고, 주님의 기적의 은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베풀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앉은뱅이와 바울의 영적 교감에 대해, 누가는 【9】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하였다.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은 바울이 사람들에게 당시의 통용어인 코이네 헬라어로 복음 설교를 하는 것을 그 앉은뱅이가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복음 설교를 하던 바울은, 듣고 있던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아테니사스, ἀτενίσας: 1:10의 주석을 보라.) 구원받을 만한 ‘믿음’(피스틴, πίστιν: 6:5의 주석을 보라.)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다. 바울이 영안으로 식별한 것은 그에게 “영혼의 구원과 아울러 육체의 병으로부터 구출되는”(黑崎幸吉) 믿음이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서도 믿음은 기적의 치유의 한 요소로 나타난다(3:16, 마 9:22, 막 5:34, 9:21-22, 28-29, 10:52, 눅 5:20, 7:50, 8:48, 17:19, 18:42).
그 바울이 한 일에 대해, 누가는 【10】큰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라고 하였다.
D 사본에는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에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말한다”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① 이 문장은 3:6의 주석을 보라.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는 3:8의 주석을 보라.
물론, 이 기적의 치유는 주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고, 바울은 그 주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뛰어 걷는 모습을 본 무리의 반응에 대해, 누가는 【11】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라고 하였다.
대단히 놀라운 기적을 보고 흥분한 그 무리는 자신들의 언어인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루가오니아의 언어를 몰랐던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오해를 즉시 풀어 주지 못했다.
로마의 시인인 오비디우스(Ovidius: 주전 43-주후 17)는 자신의 저서 「Metamorphoses」(「변신보」)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하였다. 이 땅에 쓰스 신과 허메 신이 여행자의 모습으로 찾아왔는데, 시민들이 아주 냉담해서 일박 일식(一泊 一食)의 온정조차 거부했지만, 빌레몬(Philemon)과 바우기스(Baucis) 부부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재워 주었다. 그 신들은 냉대한 시민들에게 진노하여 홍수로 성읍을 멸망시키고, 다만 빌레몬과 바우기스 부부만을 구원하였다.②
이 고사(故事) 때문인지 루스드라 시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그 신들의 화신으로 착각한 것에 대해, 누가는 【12】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라고 하였다.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의 쓰스(Δία)는 헬라의 주신(主神)인 제우스(Zeus)이며, 로마의 최고신(最高神)인 쥬피터(Jupiter: ‘木星’, ‘빛’, ‘빛나다’)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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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E. Haenchen.
2) 참조: W. M. Calder, “Lystra” in ISBE, Vol. III, p. 1944. M. J. Mellink, “Lystra” in IDB, Vol. 3, pp. 194-195. E. Haen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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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스는 을림푸스(Olympus: 헬라 북부의 높은 산이며, 그 꼭대기에 헬라의 여러 신들이 살고 있다.)의 신들의 최고신(最高神)이며, 태양을 비추고, 비를 오게 하고, 뇌성을 울리는 등 자연 현상을 주장하는 천공(天空)의 주재자로 알려져 있다. 이 쓰스는 올림푸스 산 위에서 세상을 분담하여 지배하는 신들과 세상 사람들의 아버지로 불리고, 국가와 민족의 평화와 질서의 지배자였다. 이 쓰스의 엽색(獵色) 행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쓰스는 헬라와 로마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널리 예배되고, 헬레니즘적 혼합주의에서는 각 나라의 지고신(至高神)으로 동일시되었다.
안티오커스 Ⅳ세 에피파네스(Antiochus Ⅳ Epiphanes)는 주전 168년에, 예루살렘 성전에 쓰스의 제단을 세웠다(마카비 후서 6:2).③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의 허메(Ἑρμήν)는 헬라의 올림포스 산 위의 열 두 신들 중 하나(Hermes)로 쓰스의 막내아들이자 대변자이다. 로마의 상업신 머큐리(Mercury: ‘水星’, ‘웅변가‧장인‧상인‧도둑의 수호신’)와 동일시된다. 이 허메는 신들의 사자이며, 그 기능은 복합적이다. 동물 세계의 번식을 주장하고, 부‧통상‧여행‧웅변‧음악‧경기를 수호하였다.
허메가 소아시아에서 숭배되고 있었던 것은 사르디스(Sardis) 출토의 고린도식 기둥의 머리에 새겨진 상에 의하여 알려진다.④
바나바를 쓰스라고 한 것에 대해 그의 풍채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Chrysostom, Zahn).⑤ 金喆孫 님(p. 136)은 “시민들이 바나바를 제우스 신[쓰스]으로 생각한 것은 얼핏 볼 때 바나바가 바울보다 더 나이도 많고 용모나 인품이 준수하고 잘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을 허메라고 한 것은 그의 외모는 별 볼 일 없기 때문이다(고후 10:1, 10, 11:1). 그러나 그는 말을 잘하기 때문에 제우스의 대변자로 알았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바울이 설교했기 때문에 쓰스의 대변자인 허메라고 하였고, 나머지 한 사람인 바나바를 쓰스라고 한 것 같다.
바나바를 쓰스의 화신으로, 바울을 허메의 화신으로 착각한 그들의 다음 행동에 대해, 누가는 【13】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라고 하였다.
“이곳의 쓰스 신당과 신상은 성문 바로 밖에 있었다”(J. Wesley, A. C. Hervey). 그 신당의 제사장이 ‘소’(타위루스, ταύρους: 황소)와 ‘화관들’(스템마타, στέμματα: ‘화환’, ‘꽃줄’)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고자 하였다. 황소는 쓰스에게 바칠 제물이고, “화관은 그 황소에게 걸거나 예배자들이 장식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Lumby).⑥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바나바를 쓰스로, 바울을 허메로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믿는 무리의 뜻을 거역하기보다는 그들의 신심을 고취하는 것이 제사장인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 무리와 함께 제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대문 앞에에 대해 (1) 신당의 대문 앞이라는 설(“Ramsay”,⑦ 黑崎幸吉, “F. F. Bruce”⑧), (2) 성문 앞이라는 설,⑨ (3) 바울과 바나바가 있던 집의 대문 앞이라는 설(H. Alford, “Lumby”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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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조: S. Angus, “Zeus” in ISBE, Vol. V, p. 3148. R. C. H. Lenski, E. Haenchen, F. W. Beare, “Zeus” in IDB, Vol. 4, p. 956. W. Barclay, S. D. Toussaint, I. H. Marshall,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4) 참조: F. W. Beare, “Hermes” in IDB, Vol. 2, pp. 584-585. 黑崎幸吉, M.. O. Evans, “Mercury” in ISBE, Vol. III, p. 2035. E. Haenchen, R. C. H. Lenski, S. D. Toussaint, W. Barclay, I. H. Marshall, 박윤선, 이상근.
5) “Chrysostom, Zahn”(in E. Haenchen), S. D. Toussaint, 이상근.
6) in R. Earle. 비교: S. D. Toussaint는 화관은 희생 동물들 위에 놓는 양털로 만든 화환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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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현현이라는 특별한 경우에 갑자기 제사하는 것이라는 점과 신당의 제단이 아닌 대문 앞에 와서라고 한 점과 다음 구절을 미루어 보아 신들의 화신으로 오인된 바울과 바나바가 있던 집의 대문 앞이라는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놀란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에 대해, 누가는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라고 하였다.
옷을 찢고는 불경하거나 신성을 더럽히는 짓을 보거나 듣는 슬픔과 고통을 상징하였다(R. C. H. Lenski).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제사하러 온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지른 것에 대해, 누가는 【15】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라고 하였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는, 두 사도를 신들의 화신으로 오인하여 제사하려고 하는 불경한 일을 두 사도가 제지하는 말이다.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베드로가 엎드려 절하는 고넬료 백부장에게 한 말과 같다(10:26의 주석을 보라).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단자들과 달리, 사람들의 숭배를 받지 않았고, 무리가 신들로 오인한 점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두 사도는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해도,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았다.
두 사도는 그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에 대해 이 헛된 일인 우상 숭배를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 즉 창조주이시며 사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임을 밝혔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선포했고(13:33-34), 이 이방인들에게는 만유의 창조주이신 유일신 하나님을 믿도록 선포한 것이다. 바울은 전도 대상에 따라 유효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와 하나님을 떠난 생활에 대한 바울의 설명에 대해, 누가는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라고 하였다.
지나간 세대에는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 전을 뜻한다.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는, 유대인들을 비롯한 모든 이방인들로 하여금 율법주의나 우상 숭배 등 하나님과 무관한 생활을 하도록 묵인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분명히 17:30에서처럼 이방인들을 변호하는 해명일 수 있지만”(E. Haenchen),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을 변호하는 해명이지, 그들의 우상 숭배 및 불신앙의 생활을 옳거나 구원받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있었다고 한 바울에 대해, 누가는 【17】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건인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서 당신을 계시하신 것 이외에 역사(왕상, 왕하, 대상, 대하)와 자연을 통해서도 당신을 계시하셨다(롬 1:19-20. 참조: 행 17:27). 즉,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바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케 하셨다는 것이다(참조: 마 5:45).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하셨으므로, 사람들은 우상 숭배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생활에 대해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⑪ 모든 족속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비롯한 그들 나름의 길을 가도록 묵인하신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그들에 대한 방치이며 심판이다(롬 1:28-32.⑫ 참조: 롬 1:21-27).
끝내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은 두 사도에 대해, 누가는 【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라고 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신 유일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자라는 점과 신들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면서 제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진실한 바울과 바나바를 존경하지도 않았고, 깨우쳐 준 그들에게 감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쓰스와 허메가 아니라는 점과 뭔가를 기대하며 하려던 제사를 못하게 된 점 때문에 낙심하며 분개하였다(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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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in 黑崎幸吉.
8) F. F. Bruce, The Book of Acts.
9) A. Barnes, A. C. Hervey, G. H. C. Macgregor, W. Neil, R. R. Williams.
10) in 이상근.
11) 저자의 로마서 1:20의 주석을 보라.
12) 저자의 로마서 1:28-32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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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 출처: 최세창, 사도행전(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403-409.
루스드라는 14:6의 주석을 보라.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앉은뱅이로 태어나서 걸어 본 적이 없는 불쌍한 사람이다.
이하의 이야기는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선천적인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의 기사(3:1-10)를 연상케 해 준다. 두 이야기는 바울이 사도 베드로와 대등한 사도임을 보여 주고, 주님의 기적의 은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베풀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앉은뱅이와 바울의 영적 교감에 대해, 누가는 【9】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하였다.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은 바울이 사람들에게 당시의 통용어인 코이네 헬라어로 복음 설교를 하는 것을 그 앉은뱅이가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복음 설교를 하던 바울은, 듣고 있던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아테니사스, ἀτενίσας: 1:10의 주석을 보라.) 구원받을 만한 ‘믿음’(피스틴, πίστιν: 6:5의 주석을 보라.)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다. 바울이 영안으로 식별한 것은 그에게 “영혼의 구원과 아울러 육체의 병으로부터 구출되는”(黑崎幸吉) 믿음이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서도 믿음은 기적의 치유의 한 요소로 나타난다(3:16, 마 9:22, 막 5:34, 9:21-22, 28-29, 10:52, 눅 5:20, 7:50, 8:48, 17:19, 18:42).
그 바울이 한 일에 대해, 누가는 【10】큰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라고 하였다.
D 사본에는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에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말한다”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① 이 문장은 3:6의 주석을 보라.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는 3:8의 주석을 보라.
물론, 이 기적의 치유는 주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고, 바울은 그 주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뛰어 걷는 모습을 본 무리의 반응에 대해, 누가는 【11】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라고 하였다.
대단히 놀라운 기적을 보고 흥분한 그 무리는 자신들의 언어인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루가오니아의 언어를 몰랐던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오해를 즉시 풀어 주지 못했다.
로마의 시인인 오비디우스(Ovidius: 주전 43-주후 17)는 자신의 저서 「Metamorphoses」(「변신보」)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하였다. 이 땅에 쓰스 신과 허메 신이 여행자의 모습으로 찾아왔는데, 시민들이 아주 냉담해서 일박 일식(一泊 一食)의 온정조차 거부했지만, 빌레몬(Philemon)과 바우기스(Baucis) 부부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재워 주었다. 그 신들은 냉대한 시민들에게 진노하여 홍수로 성읍을 멸망시키고, 다만 빌레몬과 바우기스 부부만을 구원하였다.②
이 고사(故事) 때문인지 루스드라 시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그 신들의 화신으로 착각한 것에 대해, 누가는 【12】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라고 하였다.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의 쓰스(Δία)는 헬라의 주신(主神)인 제우스(Zeus)이며, 로마의 최고신(最高神)인 쥬피터(Jupiter: ‘木星’, ‘빛’, ‘빛나다’)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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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E. Haenchen.
2) 참조: W. M. Calder, “Lystra” in ISBE, Vol. III, p. 1944. M. J. Mellink, “Lystra” in IDB, Vol. 3, pp. 194-195. E. Haen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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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스는 을림푸스(Olympus: 헬라 북부의 높은 산이며, 그 꼭대기에 헬라의 여러 신들이 살고 있다.)의 신들의 최고신(最高神)이며, 태양을 비추고, 비를 오게 하고, 뇌성을 울리는 등 자연 현상을 주장하는 천공(天空)의 주재자로 알려져 있다. 이 쓰스는 올림푸스 산 위에서 세상을 분담하여 지배하는 신들과 세상 사람들의 아버지로 불리고, 국가와 민족의 평화와 질서의 지배자였다. 이 쓰스의 엽색(獵色) 행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쓰스는 헬라와 로마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널리 예배되고, 헬레니즘적 혼합주의에서는 각 나라의 지고신(至高神)으로 동일시되었다.
안티오커스 Ⅳ세 에피파네스(Antiochus Ⅳ Epiphanes)는 주전 168년에, 예루살렘 성전에 쓰스의 제단을 세웠다(마카비 후서 6:2).③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의 허메(Ἑρμήν)는 헬라의 올림포스 산 위의 열 두 신들 중 하나(Hermes)로 쓰스의 막내아들이자 대변자이다. 로마의 상업신 머큐리(Mercury: ‘水星’, ‘웅변가‧장인‧상인‧도둑의 수호신’)와 동일시된다. 이 허메는 신들의 사자이며, 그 기능은 복합적이다. 동물 세계의 번식을 주장하고, 부‧통상‧여행‧웅변‧음악‧경기를 수호하였다.
허메가 소아시아에서 숭배되고 있었던 것은 사르디스(Sardis) 출토의 고린도식 기둥의 머리에 새겨진 상에 의하여 알려진다.④
바나바를 쓰스라고 한 것에 대해 그의 풍채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Chrysostom, Zahn).⑤ 金喆孫 님(p. 136)은 “시민들이 바나바를 제우스 신[쓰스]으로 생각한 것은 얼핏 볼 때 바나바가 바울보다 더 나이도 많고 용모나 인품이 준수하고 잘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을 허메라고 한 것은 그의 외모는 별 볼 일 없기 때문이다(고후 10:1, 10, 11:1). 그러나 그는 말을 잘하기 때문에 제우스의 대변자로 알았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바울이 설교했기 때문에 쓰스의 대변자인 허메라고 하였고, 나머지 한 사람인 바나바를 쓰스라고 한 것 같다.
바나바를 쓰스의 화신으로, 바울을 허메의 화신으로 착각한 그들의 다음 행동에 대해, 누가는 【13】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라고 하였다.
“이곳의 쓰스 신당과 신상은 성문 바로 밖에 있었다”(J. Wesley, A. C. Hervey). 그 신당의 제사장이 ‘소’(타위루스, ταύρους: 황소)와 ‘화관들’(스템마타, στέμματα: ‘화환’, ‘꽃줄’)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고자 하였다. 황소는 쓰스에게 바칠 제물이고, “화관은 그 황소에게 걸거나 예배자들이 장식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Lumby).⑥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바나바를 쓰스로, 바울을 허메로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믿는 무리의 뜻을 거역하기보다는 그들의 신심을 고취하는 것이 제사장인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 무리와 함께 제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대문 앞에에 대해 (1) 신당의 대문 앞이라는 설(“Ramsay”,⑦ 黑崎幸吉, “F. F. Bruce”⑧), (2) 성문 앞이라는 설,⑨ (3) 바울과 바나바가 있던 집의 대문 앞이라는 설(H. Alford, “Lumby”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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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조: S. Angus, “Zeus” in ISBE, Vol. V, p. 3148. R. C. H. Lenski, E. Haenchen, F. W. Beare, “Zeus” in IDB, Vol. 4, p. 956. W. Barclay, S. D. Toussaint, I. H. Marshall,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4) 참조: F. W. Beare, “Hermes” in IDB, Vol. 2, pp. 584-585. 黑崎幸吉, M.. O. Evans, “Mercury” in ISBE, Vol. III, p. 2035. E. Haenchen, R. C. H. Lenski, S. D. Toussaint, W. Barclay, I. H. Marshall, 박윤선, 이상근.
5) “Chrysostom, Zahn”(in E. Haenchen), S. D. Toussaint, 이상근.
6) in R. Earle. 비교: S. D. Toussaint는 화관은 희생 동물들 위에 놓는 양털로 만든 화환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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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현현이라는 특별한 경우에 갑자기 제사하는 것이라는 점과 신당의 제단이 아닌 대문 앞에 와서라고 한 점과 다음 구절을 미루어 보아 신들의 화신으로 오인된 바울과 바나바가 있던 집의 대문 앞이라는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놀란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에 대해, 누가는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라고 하였다.
옷을 찢고는 불경하거나 신성을 더럽히는 짓을 보거나 듣는 슬픔과 고통을 상징하였다(R. C. H. Lenski).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제사하러 온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지른 것에 대해, 누가는 【15】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라고 하였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는, 두 사도를 신들의 화신으로 오인하여 제사하려고 하는 불경한 일을 두 사도가 제지하는 말이다.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베드로가 엎드려 절하는 고넬료 백부장에게 한 말과 같다(10:26의 주석을 보라).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단자들과 달리, 사람들의 숭배를 받지 않았고, 무리가 신들로 오인한 점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두 사도는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해도,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았다.
두 사도는 그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에 대해 이 헛된 일인 우상 숭배를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 즉 창조주이시며 사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임을 밝혔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선포했고(13:33-34), 이 이방인들에게는 만유의 창조주이신 유일신 하나님을 믿도록 선포한 것이다. 바울은 전도 대상에 따라 유효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와 하나님을 떠난 생활에 대한 바울의 설명에 대해, 누가는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라고 하였다.
지나간 세대에는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 전을 뜻한다.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는, 유대인들을 비롯한 모든 이방인들로 하여금 율법주의나 우상 숭배 등 하나님과 무관한 생활을 하도록 묵인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분명히 17:30에서처럼 이방인들을 변호하는 해명일 수 있지만”(E. Haenchen),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을 변호하는 해명이지, 그들의 우상 숭배 및 불신앙의 생활을 옳거나 구원받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있었다고 한 바울에 대해, 누가는 【17】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건인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서 당신을 계시하신 것 이외에 역사(왕상, 왕하, 대상, 대하)와 자연을 통해서도 당신을 계시하셨다(롬 1:19-20. 참조: 행 17:27). 즉,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바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케 하셨다는 것이다(참조: 마 5:45).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하셨으므로, 사람들은 우상 숭배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생활에 대해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⑪ 모든 족속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비롯한 그들 나름의 길을 가도록 묵인하신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그들에 대한 방치이며 심판이다(롬 1:28-32.⑫ 참조: 롬 1:21-27).
끝내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은 두 사도에 대해, 누가는 【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라고 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신 유일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자라는 점과 신들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면서 제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진실한 바울과 바나바를 존경하지도 않았고, 깨우쳐 준 그들에게 감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쓰스와 허메가 아니라는 점과 뭔가를 기대하며 하려던 제사를 못하게 된 점 때문에 낙심하며 분개하였다(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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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in 黑崎幸吉.
8) F. F. Bruce, The Book of Acts.
9) A. Barnes, A. C. Hervey, G. H. C. Macgregor, W. Neil, R. R. Williams.
10) in 이상근.
11) 저자의 로마서 1:20의 주석을 보라.
12) 저자의 로마서 1:28-32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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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 출처: 최세창, 사도행전(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403-409.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주경신학적 연구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