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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6-17의 주경신학적 연구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4-11-20 14:42
조회
447
앞 구절(15절)의 이유(16절의 원문 첫 부분에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바울은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복음(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 1:1의 주석을 보라.)은 A, B, C, D, E, G, 17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K, L, P 사본 등에는 “그리스도의”(τού Χριστού)가 첨가되었으나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바울의 설명은 로마 또는 로마 교회를 비롯하여 어떤 상대에 대해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 점과 관련하여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①라고 하였고, 더욱 간결하면서도 단호하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②라고 하였다. 실제로 그는 왕이나 총독은 물론, 어느 누구 앞에서나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다(행 26:24-).
그는 그 이유(원문에는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믿는 자에게라고 한 것은 복음이 모든 인류에게 차별 없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긴 하나, 그 구원의 능력은 믿는 자에게만 소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3:16, 엡 2:8, 살후 2:13, 벧전 1:5).
그러므로 “믿음(1:5의 주석을 보라.)은 복음의 조건이요”(J. A. Bengel) “요구이다”(K. Barth).
구원은 소테리안(σωτηρίαν)으로서 “그 기본적 사상은 생명에 대한 위협적인 위험을 제거하여 그 생명을 자유롭고도 건전한 발전에 유리한 조건 속에 두는 것이다.……(1) 구약성경의 초기 책들에서 구원은 단순히 신체적 위험으로부터의 해방이다(삿 15:18, 삼상 11:9, 13 등). (2) 그러나 이 낱말은 더욱더 민족의 대 구출 또는 해방에서 적합해지는 경향을 갖는다(출 14:13, 15:2, 사 45:17, 46:13, 52:10). (3) 자연적 변화에 의해 그 낱말은 메시아적 구원 또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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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의 고린도전서 1:22-24의 주석을 보라.
2) 저자의 고린도전서 1:1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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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결합되었다(하급 형태의 유대적 메시아 대망과 보다 더 높은 형태의 기독교적 소망<행 4:12, 13:26 등>). 기독교적 의미에서 구원은 메시아적 해방의 전 영역, 즉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온 세상이 놓여 있는 진노로부터의 구조(롬 1:18-)와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영생을 부여하는 것(막 10:30, 요 3:15, 16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양편은 이미 최초의 현존하는 서신에서 결합되어 있다(살전 5:9, 10)”(W. Sanday & A. C. Headlam).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원이란 말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역설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즉, 죄와 죽음의 운명에서 이미 해방되었지만(롬 6:7, 18, 고후 6:2, 갈 1:4, 엡 2:5, 8), 죽음 이후 또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뤄질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롬 5:9, 고전 3:15). 미래에 성취될 구원, 즉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고전 15장)은 현재의 영적 구원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갖는다. 지금 여기서 신자는 영적 생명을 맛보며 사는 것이다(요 3:36, 5:24, 6:51, 17:3, 딤전 1:16, 6:12, 요일 5:13).
하나님의 능력능력은 뒤나미스(δύναμις)로서 고전 헬라어에서는 ‘자연적 힘’을 의미하였고,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또는 ‘속성으로서의 힘’(본절, 눅 1:17, 행 3:12, 고전 1:18), ‘능력 있는 행위’, ‘이적’(마 11:20) 등을 의미한다.
여기의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영원한 능력을 의미한다. 그 능력은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고, 귀로 듣지 못한 것이며, 또한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복음을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K. Barth).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복음이 미치는 순서와 중요성에 대해, 바울은 ‘첫째는’③(1:8의 주석을 보라.)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하였다. 복음이 우선적으로 유대인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다음에 이방인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은 성경 곳곳에서 주장되었다(행 1:8, 눅 24:47, 요 4:22 등). 특히, “바울로는 구원 계획의 연속성 때문에 유다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하였다”(E. Ksemann).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구속사의 질서이다”(전경연).
아무튼,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배척하였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현대 교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아닌게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헛된 것이 되게 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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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א, A, C, D, K, L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B, G 사본 등에는 ‘첫째는’(πρώτον)이 없다”(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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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1:17을 추가합니다.

바울은 앞 구절(16절)에 언급된바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17절의 원문 첫 부분에는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서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복음에는은 엔 아위토(ἐν αὐτῷ: 그 안에는)를 의역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디카이오쉬네 테우(δικαιοσύνη θεού)로서 율법 행위나 윤리적 행위 등에 의한 인간의 의와 구별되는 것이다.
여기의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1) 하나님의 본성으로서의 의(롬 10:3, 사 5:16, 45:23, 24, 46:13, 51:5, 신 32:4, 시 71:15-16, 119:142)라는 설(J. Calvin, J. Barmby), (2) 하나님의 본성이 구원에서 나타난 것,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롬 4:13, 10:6, 10, 사 45:25, 51:5, 시 98:2, 빌 3:9, 히 11:7 등)이라는 설① (3) (1)설과 (2)설의 종합, 즉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구원 역사라는 설(롬 3:21, 22, 26, 사 51: 5)② 등이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시 14:1-3과 53:1-3의 인용)는 말씀을 볼 때, 인간을 의롭다고 하실 분은 “영원한 의의 본성”(시 119:142)을 지니신 하나님밖에 없으므로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계속되는 표현으로도 뒷받침된다.
나타나서는 아포칼륍테타이(ἀποκαλύπτεται)로서 ‘둘러씌웠던 보자기를 벗긴다’는 뜻으로 숨겨져 있는 것을 밝히 드러낸다는 말이다. “현재형이 의미가 있다. 말씀의 설교에서 되는 현재적 실현을 지시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의 놀라운 실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사건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이 주어져 있다. 복음 없이는 감춰져 있던 것이 복음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계시되었다”(전경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란 구약 시대의 아브라함과 족장들에 의해 희미하게나마 이해되었다(히 11장).③ 그러나 그 충분한 방법과 방식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뤄지기까지는 계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의 에크(ἐκ)는 대개의 경우에 ‘출처’를, 에이스(εἰς)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믿음에서(으로부터) 믿음으로(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표현에 대해 (1) 구약의 믿음에서 신약의 믿음으로,④ (2) 낮은 믿음에서 높은 믿음으로(M. Luther, “Malancthon, Shaff”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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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 A. W. Meyer, Godet, Zahn”(in 黑崎幸吉), M. Henry, A. Clarke, E. F. Scott, A. B. Mickelsen, W. M. Kroll, A. Barnes, 이상근.
2) “Lietzmann”(in 전경연), J. Wesley, C. R. Erdman, W. Sanday & A. C. Headlam, W. M. Greathouse, W. T. Dayton, 黑崎幸吉, 전경연, 조선출.
3) 저자의 갈라디아서 3:6-9의 주석을 보라.
4) “Tertullian, Origen, Chrysostom”(in 이상근), A. Clarke.
5)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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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음을 받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믿음으로,⑥ (4) 고백하는 믿음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믿음으로(Augustine),⑦ (5)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거기에 응답하는 우리의 믿음으로(“Ambrose”,⑧K. Barth), (6) 믿음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E. F. Harrison, p. 52), (7) 강조적인 의미에서 처음도 그리고 마지막도 믿음뿐, 즉 ‘하나님의 의’에 응답하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⑨ 등의 견해가 있다. 본서나 갈라디아서 등의 바울 서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믿음’의 관계를 보아 (7)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케제만(E. Kseman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표현이 셈어적이요 수사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Lietzmann, J. Weiss, Ridderbos)은 “악에서 악으로”(ἐκ κακών εἰς κακά: 렘 9:3), “죽음에서 죽음으로”(ἐκ θανάτου εἰς θάνατον: 고후 2:16), “영광에서 영광으로”(ἀπό δόξης εἰς δόξαν: 고후 3:18) 등에서 드러난다.……이 어법은 그 위치상 주어는 될 수 없고, 또한 사실상 동사와 연결될 수도 없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앞의 말들과는 다만 간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의 의미에서 ‘깨뜨려지지 않은 연속성’(Fridrihsen)을 분명히 드러낸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새로운 세계의 차원’(Stuhlmacher)을 분명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복음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오직 믿음의 영역에서만 실현된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 바울 자신은 빌립보서 3:9에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라고 설명하였다. 즉, {율법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인격의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비록 의롭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신 것이다”(R. C. H. Lenski). 이것이 바로 칭의이다.
칭의의 사상적 배경은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법적인 의미를 갖는다(출 23:7, 사 5:23). 다이스만(A. Deissmann)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소를 당한 인간에 대한 고소가 취하된다. 그는 정죄가 아니라 자유로 판정된다. 이러한 무죄 석방이 바울의 칭의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칭의란 죄가 없는 자에 대한 무죄 석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으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M. Luther).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이다(롬 3:12, 22, 26). “이것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즉 생명에의 참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J. S. Stewart).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의, 혹은 선포한 의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J. S. Stewart, J. Knox, H. A. A. Kennedy). 이 선물은 과거에 주어진 것이거나 미래에 주어질 것이 아니라 현재에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의롭다는 무죄 선포도 현재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칭의의 완전한 소유는 미래의 영역에 놓여진다. 이 점에 대해서 다이스만(A. Deissmann)은 “우리는 칭의에 관한 바울의 사상에서 현재적 소유의 의식과 미래의 충분한 소유의 기대 사이의 역동적 긴장을 본다.”라고 하였다}(갈 3:6의 주석).
바울은 이제까지 해 온 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하박국 2:4을 인용하여,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였다(참조: 갈 3:8-9). 이 예언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11과 히브리서 10:38에도 인용되었는데, 본래는 이스라엘 민족이 갈대아인들의 침략으로 극심한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근거로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재 확증한 것이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생활의 유일한 원리와 방법은 자신의 의지나 이성이나 감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는 믿음인 것이다.
바울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예언자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대한 진리에 대한 예언을 읽어 낼 줄 아는 영적 지각의 소유자이었다. 즉, 그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말씀에서 보다 깊고 오묘한 영적 의미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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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eophylact, Clement of Alex., Beza, Locke”(in 이상근), J. Calvin.
7) in 이상근.
8) 상동.
9) C. R. Erdman, A. B. Mickelsen, E. Ksemann, 조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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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로마서(서울: 글벗사, 2000, 2판 1쇄), pp. 79-85.



전체 4

  • 2024-11-21 12:24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강조적인 의미에서 처음도 그리고 마지막도 믿음 뿐, 즉 ‘하나님의 의’에 응답하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를 취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에 동의합니다.

    NIV 성경에서도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라고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의한 의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3:28에서도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하여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중간에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거나 그 반대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나니를
    믿어지지 않더라고 무조건 믿으면 믿음을 갖게 된다는 뜻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 2024-11-21 17:33

      필자의 로마서 1:16-17의 주석에 공감하시고, NIV 성경의 해당 말씀과 강 장로님의 견해를 표하서서 감사합니다.


  • 2024-11-21 13:54

    아멘.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 2024-11-21 17:30

      필자의 로마서 1:16-17의 주석을 보시고,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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