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2:12-17(설교: 복음으로 이기자)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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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작성일
2024-10-1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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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에 대한 주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자신이 계획을 바꾼 것이 경솔하거나 변덕을 부리거나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증거를 더욱 자세하게 제시한다. 【12】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의 복음은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으로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에게 준 보상(Homer, W. Hendriksen, 마경일)과 전쟁에서의 좋은 소식(E. Schweizer)을 뜻하였고, 여기서 왕자의 출생이나 황제의 즉위의 고지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의 경우에는 하나님에게서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시된 인류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원뿐만 아니라, 그분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도 포함되는 것이다.}(막 1:1의 주석).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죄와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철학 체계,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 그리고 어떤 생활 양식의 형태에 대한 훌륭한 충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C. R. Erdman) }(갈 1:6의 주석).
{휴스(P. E. Hughes)는 “구약성경의 약속과 신약성경의 ‘복음’ 사이에는 참된 동질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를 내다보고 있었고, 후자는 약속된 것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을 선포하고 있다.”라고 하였다.}(히 4:2의 주석).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그리스도 자신이 그 핵심 내용이시자 선포자이시라는 뜻이다.
드로아(Τρωάδα)의 완전한 지명은 알렉산드리아 드로아스(Alexandria Troas)이며,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도시였던 트로이(Troy) 주변의 지역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무시아(Mysia) 만에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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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한 하나의 항구 도시였던 이 곳은, 원래 알렉산더 대제의 후계자인 안티고누스(Antigonus)가 건립하여 안티고니아 드로아스(Antigonia Troas)로 명명하였으나, 주전 300년에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재건하여 알렉산더를 위해 알렉산드리아 드로아로 개명하였다. 주전 133년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가 된 이래 마게도냐 및 헬라의 여러 도시들과 상업적인 관계를 계속함으로써 매우 중요한 위치가 되었다. 현대의 지명은 에스키 스탄불(Eski-Stamboul)이며, 고대의 번영을 잘 말해 주는 유적들이 남아 있다.①
주 안에서는 1:20의 주석을 보라.
문이 내게 열렸으되는 ‘바울에게 복음 전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라는 뜻이다(참조: 행 14:27, 고전 16:9, 골 4:3).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로아에 도착했을 때, 주 안에서 전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참조: 2:14)(Schlatter).②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보냈던 디도를 만나지 못해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 사실에 대해, 바울은 【13】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라고 하였다.
형제는 1:1의 주석을 보라.
디도(Τίτον)는 헬라인(갈 2:3)으로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바울의 훌륭한 동역자가 되었다(7:6, 13, 14, 8:6, 16). 바울은 디도를 가리켜,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8:23. 참조: 12:18)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딛 1:4)이라고 부를 정도로 디도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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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A. Plummer, C. Hodge, F. W. Farrar, P. E. Hughes, V. P. Furnish, pp. 168-169.
2) in C. K. Ba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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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탐(R. T. Stamm)도 “디도는 바울의 동반자요 동역자이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려운 일을 맡길 만한 판단과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다.”라고 하였다.}(갈 2:1의 주석). 실상, 디도는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를 수습하는 임무를 비교적 잘 감당하여 그 교회의 상황을 상당히 호전시켰다. 특히, 가짜 사도들 및 가짜 교사들에 미혹되어 바울과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오해하고 비난하던 일부 고린도 교인들을 잘 설득하여, 다시금 바울에 대한 바른 이해와 호감을 갖도록 하였다(참조: 2:13).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에 디도를 동반한 것은 특별히 의미 깊은 일이다(행 15장). 디도는 이방인이었다. 디도는 유대교의 율례를 도무지 복종하지 않고, 모세 율법을 지킬 필요 없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가 바울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사실은, 이방인 신자들과 모세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것을 강조하며 분명한 초점을 보여줄 것이다”(C. R. Erdman).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위대한 용기를 보게 된다. 즉, “결정적인 본보기로서 무할례자이며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디도를 동반함으로써, 유대주의적인 신자들의 교훈이나 관습이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M. Henry).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에 디도를 동반했다는 것은 할례를 받아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며, 또한 사도들이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3절)과 “그를 형제로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J. Calvin)는 점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공적인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갈 2:1의 주석).
바울은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나서 고린도 교회의 그 동안의 사정을 알려고 했지만,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심령이 편치 못하]였다.
심령 곧 영은 프뉴마티(πνεύματί)로서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의미하며(롬 8:9, 고전 2:11),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구속받은 인간을 지시한다.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라 하여, 신자의 내적 인간의 존재 형식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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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같음을 보여 주고 있다”(C. H. Dodd).③ 이러한 존재 형식을 갖는 인간은 영으로 성령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며(롬 8:16),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고전 14:2), 영으로 기도하며(고전 14:14), 영으로 찬미한다(고전 14:15). 또한, 영이란 사고하고(롬 8:6), 인식하며(롬 8:16, 고전 2:11), 의지하고(롬 8:4-5), 판단하는 기능이 있다(고전 5:3). {영의 지배를 받는 영의 도구가 곧 마음이다(C. R. Erdman, 이상근)}(엡 4:23의 주석).
여기서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깊은 내적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디도를 만나지 못하여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알지 못한 바울은, 디도의 신변에 대한 걱정과 고린도 교회의 사정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심령이 불편하였다. 그래서 그는 될 수 있는 한 빨리(R. C. H. Lenski, R. V. G. Tasker) 저희 곧 드로아의 형제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 아마 디도는 고린도를 출발하여 마게도냐를 거쳐서 드로아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바울이 드로아에 남아 있고 싶어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가게 했다고 생각하였고, 데오도레트(Theodoret)는 사도가 동역자가 없이는 혼자서 선교 활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④라고 하지만, 그럴 듯한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마게도냐(Μακεδονίαν)는 알렉산더 대왕의 본고장이었으나, 마게도냐의 마지막 왕 페르세우스(Perseus)가 로마의 집정관인 바울루스 에밀리우스(Paulus Aemilius)에게 패했기 때문에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주전 146년에 마게도냐주가 설립되었다. 바울 당시의 마게도냐주는 그리스의 북부 지방들 전체가 포함되었다. 그 지역에 있던 교회들로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와 베뢰아 교회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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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 H. Dodd, The Meaning of Paul for Today(London: Collins Clear Type Press, 1971), p. 60.
4) in A. Pl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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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알려고 한 계획이 무산되어 심령의 불편함을 토로한 바울은, 갑자기 그러한 인간적 약점들을 지닌 그들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상기하며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14】그러나(원문의 첫 부분에는 데, δὲ가 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1:20의 주석을 보라.) 이기게 하시고에 대해 (1) 동사(트리암뷰온티, θριαμβεύοτι)가 ‘이기다’, ‘승리하다’(골 2:15)를 뜻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로 이해하는 설,⑤ (2) 앞과 같은 근거에서 ‘항상 우리(개선 장병들로서)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로 이해하는 설,⑥ (3)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로 이해하는 설(V. P. Furnish, p. 174), (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로 이해하는 설⑦ 등이 있다.
(1)설에 대해, 핫지(C. Hodge)는 “우리의 염려를 무색하게 하시고, 우리의 불안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의미인데, 이는 너무 억지스런 감이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낮추어
말한다거나 자신을 피정복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2)설에 대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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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eyer”(in C. Hodge), “Zahn, Bernard”(이상근), F. W. Farrar.
6) J. Calvin, E. H. Plumptre, J. A. Bengel, H. Alford, “De Wette”(in 이상근), C. K. Barett, C. R. Erdman, “de Boor”(in V. P. Furnish, p. 174), R. V. G. Tasker, F. V. Filson, M. J. Harris, P. E. Hughes, W. Broomall, 이상근.
7) M. Henry, A. Clarke, C. Hodge, A. Barnes, F. J. Dake, 米田豊, 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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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으로는 적합하지만 해당 단어의 용법과는 일치되지 않는다. 단어의 본래적 의미는 ‘이긴다’는 뜻이지, 승리에 가담시킨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반대하였다. (3)설은 해당 낱말의 용법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핫지(C. Hodge)는 (4)설 역시 해당 낱말의 용법상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표준 헬라어에서는 자동사로 사용되는 많은 동사들이 헬라어 방언에서는 사역형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사실(Winer, p. 304)을 들어 (4)설을 취하였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알려고 한 계획이 무산됨으로써 생긴 심령의 불편함과 디도 등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그리고 모든 핍박과 환난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감사한다는 뜻이다.
여기의 아는(γνώσεως: ‘지식’)은 ‘초경험적으로 알다’, ‘관념적으로 알다’, ‘영감으로 알다’를 뜻하는 오이다(οἶδα)와 달리, ‘체득하다’, ‘체험적으로 알다’를 의미한다.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생활을 통하여 얻는 영적인 진리 또는 영적인 사실을 안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자연적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을 순종하고 복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요 7:17).
냄새는 오스멘(ὀσμὴν)으로서 여기서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통해 주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사방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드러내신다. 따라서 우리는 곳곳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강력하게 연합된 성도의 내적 나약함이나 외적 환난은 하나님의 승리를 드러낼 좋은 기회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널리 알릴 좋은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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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새로운 비유를 구사한 데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관례적으로 승리의 행진에서나, 혹은 승리에 준하는 행진에서는 왕궁에서 행해질 경우이든 종교적 행사이든 간에 향을 피웠다는 것이다(Windisch & Lietzmann. 참조: Knox, p. 6, 129와 중요한 참고 문헌들)”(C. K. Barett).
바울은 앞 구절의 이유(원문의 첫머리에 호티, ὁτι가 있다.)에 대해, 【15】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의 {양쪽의 시제가 다 현재 분사형인 것은 하나의 공리적인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김용옥). 이 말은 “종국적 멸망을 기대하는 것(Meyer)도,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는 것(Theodoret, Beza)”⑧도 아니라, 멸망 상태에 있는 자들과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자들을 대조한 것이다.⑨ 모리스(L. Morris)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은 구원받은 자의 부류에 속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멸망당한 자의 부류에 속한다. 다른 부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 멸망과 구원의 상태(참조: 롬 1:16, 18)는 마지막 날에 완성되는 것이다(롬 8:11, 9:22).
바클레이(W. Barclay)는 “교양 있는 헬라인들과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기독교가 말한 이야기는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들렸다.”라고 하였다. 헬라인은 인간의 이성 및 지성을 숭상하는 인간을 대표하고, 유대인은 종교적 행위나 인간의 힘에 의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결국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고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들의 손에 의해 중죄인이 처형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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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in 이상근.
9) L. Morris, A. Robertson and A. Plummer, “Godet, Findlay”(in 이상근), C. K. Bar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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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형틀에 달려 운명했다는 말은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 죽음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는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소리이다. 따라서 인간 본위의 생각을 하는 자들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을 리 없으므로 여전히 멸망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결코 미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영원한 사랑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고전 1:18의 주석).
구원의 {“기본적 사상은 생명에 대한 위협적인 위험을 제거하여 그 생명을 자유롭고도 건전한 발전에 유리한 조건 속에 두는 것이다. ······(1) 구약성경의 초기 책들에서 구원은 단순히 신체적 위험으로부터의 해방이다(삿 15:18, 삼상 11:9, 13 등). (2) 그러나 이 낱말은 더욱더 민족의 대 구출, 또는 해방에서 적합해지는 경향을 갖는다(출 14:13, 15:2, 사 45:17, 46:13, 52:10). (3) 자연적 변화에 의해 그 낱말은 메사아적 구원 또는 해방과 결합되었다(하급 형태의 유대적 메시아 대망과 보다 더 높은 형태의 기독교적 소망<행 4:12, 13:26 등>). 기독교적 의미에서 구원은 메시아적 해방의 전 영역, 즉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온 세상이 놓여 있는 진노로부터의 구조(롬 1:18-)와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영생을 부여하는 것(막 10:30, 요 3:15, 16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양편은 이미 최초의 현존하는 서신에서 결합되어 있다(살전 5:9, 10)”(W. Sanday & A. C. Headlam).}(롬 1:16의 주석).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원이란 말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역설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즉, 죄와 죽음의 운명에서 이미 해방되었지만(롬 6:7, 18, 고후 6:2, 갈 1:4, 엡 2:5, 8), 죽음 이후 또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뤄질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롬 5:9, 고전 3:15). 미래에 성취될 구원, 즉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고전 15장)은 현재의 영적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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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갖는다. 지금 여기서 신자는 영적 생명을 맛보며 사는 것이다(요 3:36, 5:24, 6:51, 17:3, 딤전 1:16, 6:12, 요일 5:13).
그리스도의 향기의 향기는 앞 구절의 냄새(오스멘, ὀσμὴν)와 다른 유오디아(εὑωδία)로서 ‘기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칠십인역에서(창 8:21, 출 29:18, 레 1:9, 13, 17, 민 15:3, 겔 6:13, 20:41. cf. 집회서 24:15, 39:14의 ‘제물의 향기’)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향기를 의미하였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제물(엡 5:2)이나 주님의 종을 섬기는 헌금(빌 4:18)을 의미하는 은유로 사용되었다.
향기로운 제물이란 구약성경에서 화제를 말하는데, 이 제사는 자의의 제사이다. 희생의 제물이 제단 위에서 봉헌될 때, 제물인 고기를 태우는 향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그 희생을 받는 신이 그 향기를 흠향하신다고 생각하였다. 향기로운 냄새를 가진 제물은, 그 제물을 받는 신으로 하여금 매우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시도록 하는 제물이었다. 특히, 에베소서 5:2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그 몸을 바쳐 제물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멸망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나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란, 복음 전도자인 바울 자신과 바울의 복음적 설교가 믿어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나 거절하여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이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설교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핫지(C. Hodge)는 “예컨대 옷에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그 향수 냄새를 퍼뜨리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어디를 가더라도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향기를 퍼뜨린 것이며, 또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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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인 자신과 복음적 설교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양면성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 즐겨 쓰는 표현 형식을 좇아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악취(냄새 : 오스메, ὀσμὴ)가 되어 죽음과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고, 믿어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사망과 반대되는 생명은 조엔(ζωήν)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새사람의 “참 생명”(T. K. Abott)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구원받은 자의 생명은 과거와는 달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골 3:3. 참조: 요일 5:11-13). 다시 말하면, “그 생명은 실제적이고도 심오한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C. Vaughan, p. 172, A. Clarke).}(골 3:3의 주석).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의 구원과 관련되는 모든 것인 기쁨, 평화, 능력, 성장, 도덕적 승리 등은 생명이란 말에 포함된다.”⑩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 이후의 영역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지금 누리는 생명은 영원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J. S. Stewart).⑪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이란 이 생명으로 사는바(롬 6:4) 영적 지각과 영적 지식, 영적 판단과 영적 갈망, 영적 기쁨과 영적 능력 등을 소유한 자로서 성령을 좇아 영적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갈 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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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J. S. Stewart, op. cit., p. 192.
11) Ibid., p.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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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기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빌 3:20). 시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초월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으나 신령한 삶을 살며,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보존되어 있는 참 그리스도인을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생명은 장차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되어 누릴 영원한 생명이므로(딤전 6:19), 세상에서 이 생명의 은혜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 생명을 부여하고(요 6:33-, 8:12, 20:31), 또 누리게 하시는 분은 절대적인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다(요 1:4, 14:6, 행 3:15). 바울은 이 생명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빌 3:20)이며,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롬 6:4) 새로운 피조물이며(고후 5:17),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자(갈 2:20)라고 하였다.
베드로전서 2:7-8에는 복음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잇돌이요 우리의 보배이시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이 되실 뿐이라고 하였다⑫ 또, 요한복음 3:18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믿지 않으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⑬ 또한, 누가복음 2:34에는 아기 예수에 대해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시는 분이라고 하였다(참조: 마 21:44, 요 9:39).⑭
칼빈(J. Calvin)은 “복음은 결코 헛되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효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분이 운명하신 것으로만 알므로 그들 자신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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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저자의 베드로전서 2:7-8의 주석을 보라.
13) 저자의 요한복음 3:18의 주석을 보라.
14) 저자의 누가복음 2:34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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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인 바울은 치유할 수도 있는 동시에 해가 될 수도 있는 메시지에 대한 개념에 익숙해 있었다. 여러 문헌들은 율법에 대해서 그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Deuteronomy Robbah 1:6에서는(맨슨은 1:6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1:5에도 나온다.) 신명기의 맨 첫 부분에 나오는 말(“이것은 ~한 말들이다” llh hade barim)을 가지고 언어 유희를 한다. 즉, 꿀벌(deborah)이 주인을 위해서는 꿀을 간직하나, 다른 사람에게는 침을 간직하듯이; 토라[율법]의 말들은 이스라엘에게는 생명의 약이고, 세상 민족들에게는 죽게 하는 독약이다.⑮ 라바는 자기의 오른편에 행하는 자들에게 율법은 살게 하는 약이라고 말하고,왼편에 행하는 자들에게는 죽게 하는 약이라고 말했다(‘Shabbath’, f. 88, 2, ‘Yoma’, f. 72, 2).⑯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의 원문에는 문장 초두에 카이(καὶ: ‘그리고’)가 있어 앞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이 “카이(καὶ: ‘그리고’)가 질문에 앞서 사용될 때에는, 흔히 앞 부분의 결과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흔히 ‘그런즉’이라고 번역된다(막 10:26, 눅 20:44). 그러므로 여기서도 ‘그런즉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이다”(C. Hodge).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토록 엄청난 일이라면, 즉 복음을 전하는 일로 말미암아 듣는 사람의 영원한 멸망이나 영원한 생명이 결정된다면,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당연한 대답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들어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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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in C. K. Barett.
16) in F. W. Far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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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5-6)라고 하였고, 또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하였다.
바울은 인간에게 구원 혹은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일인 복음 전파의 일을 하나님에 의해 감당하고 있다고 한 이유(원문의 17절 첫 부분에는 가르<γάρ>가 있다.)에 대해, 【17】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이란 바울과 바울의 동역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2:14 이하의 “우리”는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나, 바울의 동역자들을 포함시켜도 무방하다.
수다한 사람들(οἱ πολλοί)은 א, A, B, C, K, P, Ψ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P46, Dgr, Ggr 사본 등에는 “그 나머지 사람들”(οἱ λοιποί)로 되어 있다.⑰ 사본의 가치상으로나, 바울이 자신만이 참 전도자라고 주장할 리가 없다는 점을 미루어 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수다한 사람에 정관사(오히, οἱ)가 있기 때문에 (1) 1세기의 순회 교사들과 철학자들로 이해하는 설(M. J. Harris), (2)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가짜 교사들로 이해하는 설,⑱ (3)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가짜 교사들을 비롯한 모든 바울의 대적자들(11:4, 13)로 이해하는 설⑲ 등이 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아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대적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였다. 이 동사(카페류온테스, καπηλεύοντες)의 본래적인 뜻은 ‘상인이 되다’, ‘상인처럼 행동하다’, ‘행상인이 되다’이다. 고전 헬라어에서 이 낱말은 ‘무엇을 섞어서 팔거나, 무엇을 팔아서 이익을 보다’라는 뜻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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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in K. Aland, et al., ed.
18) H. Alford, A. Barnes, F. V. Filson, C. K. Barett, W. Broomall, F. W. Farrar, C. Hodge, A. Plummer.
19) J. Calvin, “Meyer, Bernard”(in 이상근), R. C. H. Lenski, P. E. Hughes,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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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본래의 것에 다른 것을 섞는 것과 그것을 팔아서 이익을 보는 것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다 포함되어 있다.⑳
플라톤의 글(Plato, Protagoras 313 DE)에는, “지식은 영혼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수사학의 교사들이 몸의 양식을 파는 상인과 행상인처럼, 파는 지식을 칭찬할 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그 까닭은 상인과 행상인이 파는 양식이 사람의 몸에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면서 칭찬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식으로, 어떤 종목의 지식을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팔려고, 심지어 소리쳐 팔려고 돌아다니는 자들도, 또 고객들도 그 지식이 영혼에 효력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칭찬한다.”㉑라는 문장이 있다. 루키안(Lucian)은 도붓장수들이 상품에 물을 섞어 품질을 나쁘게 하고, 또 양을 속여서 파는 것처럼,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식들을 제멋대로 처리한다고 말하고 있다(Hermotimus, 59).㉒ 이사야 1:22(칠십인역)에는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라고 하였고, 외경(Ecclus.) 26:29에는 “도붓장수는 죄가 없다고 판단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탈무드는 도붓장수들을 장사에 강도질을 포함시키는 자로 간주하였다.㉓
바울의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4:2, 고전 14:36, 딤후 2:9) 곧 “구약에서 반포된 새 종교의 내용인 복음”(A. Plummer)에 율법주의나 다른 종교의 교리 또는 철학, 그 밖의 어떤 지식 및 사상을 섞은 것을 참된 진리인 양 칭찬하여 전하면서 보수를 요구하고 다녔다. 이러한 행동은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에게서 혼합된 것을 받은 사람들까지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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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C. Hodge, R. C. H. Lenski, C. K. Barett, P. E. Hughes, V. P. Furnish, p. 178. 비교: J. Calvin, H. Alford, A. Plummer 등은 우유, 포도주, 술 등에 물을 섞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21) 참조: A. Plummer, C. K. Barett, P. E. Hughes. P. E. Hughes는 소크라테스가 경고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22) in A. Plummer, in C. K. Barett.
23) in A. Pl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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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의 종들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설교에 대해 중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들어야만 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는 데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사람들에게서 인기와 존경과 많은 보수를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영합하는 설교 아닌 설교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미 이러한 이들에 대해, 에스겔은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겔 13:3)라고 경고하였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가짜 교사들이 주님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어도 율법을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침으로써 교인들의 환심을 사고 있는 사실을 의식하여,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㉔라고 분명하게 설교자로서의 자신의 자세를 밝히고 있다.
소극적으로 다른 가짜 교사들처럼 말씀을 평가 절하하거나 변질시키지 않는다고 한 바울은, 적극적으로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라고 하였다.
곧(알라, ἀλλ’)은 ‘오히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순전함(에일리크리네이아스, εἰλικρινείας: 1:12의 “진실함”의 주석을 보라.)으로는 바울의 설교의 내적 동기를,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는 외적 근거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즉 하나님을 증인이요 법관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1:20의 주석을 보라.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답게 진실한 동기에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하나님을 증인이요 법관 삼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설교하였다. 그는 모든 교역자들의 사표이며, 그의 설교는 모든 설교자가 추구해야 할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죄의 세상에서 진리는 종종 소수이다.”라고 한 렌스키(R. C. H. Lenski)의 말은, 듣는 사람들의 구원 또는 멸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설교를 맡은 교역자들의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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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저자의 갈라디아서 1:10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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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습니다.
※ 파란색 글자는 주석에 해당되는 성구입니다.
출처: 최세창, 고린도후서(서울: 글벗사, 2002, 3판 1쇄), pp. 129-143.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의 복음은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으로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에게 준 보상(Homer, W. Hendriksen, 마경일)과 전쟁에서의 좋은 소식(E. Schweizer)을 뜻하였고, 여기서 왕자의 출생이나 황제의 즉위의 고지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의 경우에는 하나님에게서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시된 인류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원뿐만 아니라, 그분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도 포함되는 것이다.}(막 1:1의 주석).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죄와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철학 체계,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 그리고 어떤 생활 양식의 형태에 대한 훌륭한 충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C. R. Erdman) }(갈 1:6의 주석).
{휴스(P. E. Hughes)는 “구약성경의 약속과 신약성경의 ‘복음’ 사이에는 참된 동질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를 내다보고 있었고, 후자는 약속된 것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을 선포하고 있다.”라고 하였다.}(히 4:2의 주석).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그리스도 자신이 그 핵심 내용이시자 선포자이시라는 뜻이다.
드로아(Τρωάδα)의 완전한 지명은 알렉산드리아 드로아스(Alexandria Troas)이며,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도시였던 트로이(Troy) 주변의 지역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무시아(Mysia) 만에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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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한 하나의 항구 도시였던 이 곳은, 원래 알렉산더 대제의 후계자인 안티고누스(Antigonus)가 건립하여 안티고니아 드로아스(Antigonia Troas)로 명명하였으나, 주전 300년에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재건하여 알렉산더를 위해 알렉산드리아 드로아로 개명하였다. 주전 133년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가 된 이래 마게도냐 및 헬라의 여러 도시들과 상업적인 관계를 계속함으로써 매우 중요한 위치가 되었다. 현대의 지명은 에스키 스탄불(Eski-Stamboul)이며, 고대의 번영을 잘 말해 주는 유적들이 남아 있다.①
주 안에서는 1:20의 주석을 보라.
문이 내게 열렸으되는 ‘바울에게 복음 전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라는 뜻이다(참조: 행 14:27, 고전 16:9, 골 4:3).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로아에 도착했을 때, 주 안에서 전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참조: 2:14)(Schlatter).②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보냈던 디도를 만나지 못해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 사실에 대해, 바울은 【13】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라고 하였다.
형제는 1:1의 주석을 보라.
디도(Τίτον)는 헬라인(갈 2:3)으로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바울의 훌륭한 동역자가 되었다(7:6, 13, 14, 8:6, 16). 바울은 디도를 가리켜,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8:23. 참조: 12:18)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딛 1:4)이라고 부를 정도로 디도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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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A. Plummer, C. Hodge, F. W. Farrar, P. E. Hughes, V. P. Furnish, pp. 168-169.
2) in C. K. Ba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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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탐(R. T. Stamm)도 “디도는 바울의 동반자요 동역자이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려운 일을 맡길 만한 판단과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다.”라고 하였다.}(갈 2:1의 주석). 실상, 디도는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를 수습하는 임무를 비교적 잘 감당하여 그 교회의 상황을 상당히 호전시켰다. 특히, 가짜 사도들 및 가짜 교사들에 미혹되어 바울과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오해하고 비난하던 일부 고린도 교인들을 잘 설득하여, 다시금 바울에 대한 바른 이해와 호감을 갖도록 하였다(참조: 2:13).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에 디도를 동반한 것은 특별히 의미 깊은 일이다(행 15장). 디도는 이방인이었다. 디도는 유대교의 율례를 도무지 복종하지 않고, 모세 율법을 지킬 필요 없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가 바울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사실은, 이방인 신자들과 모세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것을 강조하며 분명한 초점을 보여줄 것이다”(C. R. Erdman).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위대한 용기를 보게 된다. 즉, “결정적인 본보기로서 무할례자이며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디도를 동반함으로써, 유대주의적인 신자들의 교훈이나 관습이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M. Henry).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에 디도를 동반했다는 것은 할례를 받아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며, 또한 사도들이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3절)과 “그를 형제로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J. Calvin)는 점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공적인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갈 2:1의 주석).
바울은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나서 고린도 교회의 그 동안의 사정을 알려고 했지만,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심령이 편치 못하]였다.
심령 곧 영은 프뉴마티(πνεύματί)로서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의미하며(롬 8:9, 고전 2:11),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구속받은 인간을 지시한다.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라 하여, 신자의 내적 인간의 존재 형식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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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같음을 보여 주고 있다”(C. H. Dodd).③ 이러한 존재 형식을 갖는 인간은 영으로 성령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며(롬 8:16),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고전 14:2), 영으로 기도하며(고전 14:14), 영으로 찬미한다(고전 14:15). 또한, 영이란 사고하고(롬 8:6), 인식하며(롬 8:16, 고전 2:11), 의지하고(롬 8:4-5), 판단하는 기능이 있다(고전 5:3). {영의 지배를 받는 영의 도구가 곧 마음이다(C. R. Erdman, 이상근)}(엡 4:23의 주석).
여기서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깊은 내적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디도를 만나지 못하여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알지 못한 바울은, 디도의 신변에 대한 걱정과 고린도 교회의 사정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심령이 불편하였다. 그래서 그는 될 수 있는 한 빨리(R. C. H. Lenski, R. V. G. Tasker) 저희 곧 드로아의 형제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 아마 디도는 고린도를 출발하여 마게도냐를 거쳐서 드로아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바울이 드로아에 남아 있고 싶어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가게 했다고 생각하였고, 데오도레트(Theodoret)는 사도가 동역자가 없이는 혼자서 선교 활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④라고 하지만, 그럴 듯한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마게도냐(Μακεδονίαν)는 알렉산더 대왕의 본고장이었으나, 마게도냐의 마지막 왕 페르세우스(Perseus)가 로마의 집정관인 바울루스 에밀리우스(Paulus Aemilius)에게 패했기 때문에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주전 146년에 마게도냐주가 설립되었다. 바울 당시의 마게도냐주는 그리스의 북부 지방들 전체가 포함되었다. 그 지역에 있던 교회들로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와 베뢰아 교회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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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 H. Dodd, The Meaning of Paul for Today(London: Collins Clear Type Press, 1971), p. 60.
4) in A. Pl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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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알려고 한 계획이 무산되어 심령의 불편함을 토로한 바울은, 갑자기 그러한 인간적 약점들을 지닌 그들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상기하며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14】그러나(원문의 첫 부분에는 데, δὲ가 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1:20의 주석을 보라.) 이기게 하시고에 대해 (1) 동사(트리암뷰온티, θριαμβεύοτι)가 ‘이기다’, ‘승리하다’(골 2:15)를 뜻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로 이해하는 설,⑤ (2) 앞과 같은 근거에서 ‘항상 우리(개선 장병들로서)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로 이해하는 설,⑥ (3)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로 이해하는 설(V. P. Furnish, p. 174), (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로 이해하는 설⑦ 등이 있다.
(1)설에 대해, 핫지(C. Hodge)는 “우리의 염려를 무색하게 하시고, 우리의 불안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의미인데, 이는 너무 억지스런 감이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낮추어
말한다거나 자신을 피정복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2)설에 대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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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eyer”(in C. Hodge), “Zahn, Bernard”(이상근), F. W. Farrar.
6) J. Calvin, E. H. Plumptre, J. A. Bengel, H. Alford, “De Wette”(in 이상근), C. K. Barett, C. R. Erdman, “de Boor”(in V. P. Furnish, p. 174), R. V. G. Tasker, F. V. Filson, M. J. Harris, P. E. Hughes, W. Broomall, 이상근.
7) M. Henry, A. Clarke, C. Hodge, A. Barnes, F. J. Dake, 米田豊, 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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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으로는 적합하지만 해당 단어의 용법과는 일치되지 않는다. 단어의 본래적 의미는 ‘이긴다’는 뜻이지, 승리에 가담시킨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반대하였다. (3)설은 해당 낱말의 용법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핫지(C. Hodge)는 (4)설 역시 해당 낱말의 용법상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표준 헬라어에서는 자동사로 사용되는 많은 동사들이 헬라어 방언에서는 사역형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사실(Winer, p. 304)을 들어 (4)설을 취하였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알려고 한 계획이 무산됨으로써 생긴 심령의 불편함과 디도 등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그리고 모든 핍박과 환난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감사한다는 뜻이다.
여기의 아는(γνώσεως: ‘지식’)은 ‘초경험적으로 알다’, ‘관념적으로 알다’, ‘영감으로 알다’를 뜻하는 오이다(οἶδα)와 달리, ‘체득하다’, ‘체험적으로 알다’를 의미한다.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생활을 통하여 얻는 영적인 진리 또는 영적인 사실을 안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자연적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을 순종하고 복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요 7:17).
냄새는 오스멘(ὀσμὴν)으로서 여기서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통해 주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사방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드러내신다. 따라서 우리는 곳곳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강력하게 연합된 성도의 내적 나약함이나 외적 환난은 하나님의 승리를 드러낼 좋은 기회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널리 알릴 좋은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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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새로운 비유를 구사한 데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관례적으로 승리의 행진에서나, 혹은 승리에 준하는 행진에서는 왕궁에서 행해질 경우이든 종교적 행사이든 간에 향을 피웠다는 것이다(Windisch & Lietzmann. 참조: Knox, p. 6, 129와 중요한 참고 문헌들)”(C. K. Barett).
바울은 앞 구절의 이유(원문의 첫머리에 호티, ὁτι가 있다.)에 대해, 【15】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의 {양쪽의 시제가 다 현재 분사형인 것은 하나의 공리적인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김용옥). 이 말은 “종국적 멸망을 기대하는 것(Meyer)도,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는 것(Theodoret, Beza)”⑧도 아니라, 멸망 상태에 있는 자들과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자들을 대조한 것이다.⑨ 모리스(L. Morris)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은 구원받은 자의 부류에 속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멸망당한 자의 부류에 속한다. 다른 부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 멸망과 구원의 상태(참조: 롬 1:16, 18)는 마지막 날에 완성되는 것이다(롬 8:11, 9:22).
바클레이(W. Barclay)는 “교양 있는 헬라인들과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기독교가 말한 이야기는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들렸다.”라고 하였다. 헬라인은 인간의 이성 및 지성을 숭상하는 인간을 대표하고, 유대인은 종교적 행위나 인간의 힘에 의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결국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고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들의 손에 의해 중죄인이 처형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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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in 이상근.
9) L. Morris, A. Robertson and A. Plummer, “Godet, Findlay”(in 이상근), C. K. Bar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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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형틀에 달려 운명했다는 말은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 죽음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는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소리이다. 따라서 인간 본위의 생각을 하는 자들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을 리 없으므로 여전히 멸망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결코 미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영원한 사랑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고전 1:18의 주석).
구원의 {“기본적 사상은 생명에 대한 위협적인 위험을 제거하여 그 생명을 자유롭고도 건전한 발전에 유리한 조건 속에 두는 것이다. ······(1) 구약성경의 초기 책들에서 구원은 단순히 신체적 위험으로부터의 해방이다(삿 15:18, 삼상 11:9, 13 등). (2) 그러나 이 낱말은 더욱더 민족의 대 구출, 또는 해방에서 적합해지는 경향을 갖는다(출 14:13, 15:2, 사 45:17, 46:13, 52:10). (3) 자연적 변화에 의해 그 낱말은 메사아적 구원 또는 해방과 결합되었다(하급 형태의 유대적 메시아 대망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원이란 말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역설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즉, 죄와 죽음의 운명에서 이미 해방되었지만(롬 6:7, 18, 고후 6:2, 갈 1:4, 엡 2:5, 8), 죽음 이후 또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뤄질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롬 5:9, 고전 3:15). 미래에 성취될 구원, 즉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고전 15장)은 현재의 영적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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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갖는다. 지금 여기서 신자는 영적 생명을 맛보며 사는 것이다(요 3:36, 5:24, 6:51, 17:3, 딤전 1:16, 6:12, 요일 5:13).
그리스도의 향기의 향기는 앞 구절의 냄새(오스멘, ὀσμὴν)와 다른 유오디아(εὑωδία)로서 ‘기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칠십인역에서(창 8:21, 출 29:18, 레 1:9, 13, 17, 민 15:3, 겔 6:13, 20:41. cf. 집회서 24:15, 39:14의 ‘제물의 향기’)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향기를 의미하였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제물(엡 5:2)이나 주님의 종을 섬기는 헌금(빌 4:18)을 의미하는 은유로 사용되었다.
향기로운 제물이란 구약성경에서 화제를 말하는데, 이 제사는 자의의 제사이다. 희생의 제물이 제단 위에서 봉헌될 때, 제물인 고기를 태우는 향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그 희생을 받는 신이 그 향기를 흠향하신다고 생각하였다. 향기로운 냄새를 가진 제물은, 그 제물을 받는 신으로 하여금 매우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시도록 하는 제물이었다. 특히, 에베소서 5:2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그 몸을 바쳐 제물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멸망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나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란, 복음 전도자인 바울 자신과 바울의 복음적 설교가 믿어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나 거절하여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이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설교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핫지(C. Hodge)는 “예컨대 옷에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그 향수 냄새를 퍼뜨리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어디를 가더라도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향기를 퍼뜨린 것이며, 또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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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인 자신과 복음적 설교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양면성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 즐겨 쓰는 표현 형식을 좇아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악취(냄새 : 오스메, ὀσμὴ)가 되어 죽음과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고, 믿어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사망과 반대되는 생명은 조엔(ζωήν)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새사람의 “참 생명”(T. K. Abott)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구원받은 자의 생명은 과거와는 달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골 3:3. 참조: 요일 5:11-13). 다시 말하면, “그 생명은 실제적이고도 심오한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C. Vaughan, p. 172, A. Clarke).}(골 3:3의 주석).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의 구원과 관련되는 모든 것인 기쁨, 평화, 능력, 성장, 도덕적 승리 등은 생명이란 말에 포함된다.”⑩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 이후의 영역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지금 누리는 생명은 영원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J. S. Stewart).⑪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이란 이 생명으로 사는바(롬 6:4) 영적 지각과 영적 지식, 영적 판단과 영적 갈망, 영적 기쁨과 영적 능력 등을 소유한 자로서 성령을 좇아 영적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갈 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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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J. S. Stewart, op. cit., p. 192.
11) Ibid., p.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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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기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빌 3:20). 시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초월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으나 신령한 삶을 살며,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보존되어 있는 참 그리스도인을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생명은 장차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되어 누릴 영원한 생명이므로(딤전 6:19), 세상에서 이 생명의 은혜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 생명을 부여하고(요 6:33-, 8:12, 20:31), 또 누리게 하시는 분은 절대적인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다(요 1:4, 14:6, 행 3:15). 바울은 이 생명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빌 3:20)이며,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롬 6:4) 새로운 피조물이며(고후 5:17),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자(갈 2:20)라고 하였다.
베드로전서 2:7-8에는 복음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잇돌이요 우리의 보배이시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이 되실 뿐이라고 하였다⑫ 또, 요한복음 3:18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믿지 않으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⑬ 또한, 누가복음 2:34에는 아기 예수에 대해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시는 분이라고 하였다(참조: 마 21:44, 요 9:39).⑭
칼빈(J. Calvin)은 “복음은 결코 헛되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효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분이 운명하신 것으로만 알므로 그들 자신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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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저자의 베드로전서 2:7-8의 주석을 보라.
13) 저자의 요한복음 3:18의 주석을 보라.
14) 저자의 누가복음 2:34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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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인 바울은 치유할 수도 있는 동시에 해가 될 수도 있는 메시지에 대한 개념에 익숙해 있었다. 여러 문헌들은 율법에 대해서 그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Deuteronomy Robbah 1:6에서는(맨슨은 1:6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1:5에도 나온다.) 신명기의 맨 첫 부분에 나오는 말(“이것은 ~한 말들이다” llh hade barim)을 가지고 언어 유희를 한다. 즉, 꿀벌(deborah)이 주인을 위해서는 꿀을 간직하나, 다른 사람에게는 침을 간직하듯이; 토라[율법]의 말들은 이스라엘에게는 생명의 약이고, 세상 민족들에게는 죽게 하는 독약이다.⑮ 라바는 자기의 오른편에 행하는 자들에게 율법은 살게 하는 약이라고 말하고,왼편에 행하는 자들에게는 죽게 하는 약이라고 말했다(‘Shabbath’, f. 88, 2, ‘Yoma’, f. 72, 2).⑯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의 원문에는 문장 초두에 카이(καὶ: ‘그리고’)가 있어 앞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이 “카이(καὶ: ‘그리고’)가 질문에 앞서 사용될 때에는, 흔히 앞 부분의 결과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흔히 ‘그런즉’이라고 번역된다(막 10:26, 눅 20:44). 그러므로 여기서도 ‘그런즉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이다”(C. Hodge).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토록 엄청난 일이라면, 즉 복음을 전하는 일로 말미암아 듣는 사람의 영원한 멸망이나 영원한 생명이 결정된다면,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당연한 대답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들어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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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in C. K. Barett.
16) in F. W. Far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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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5-6)라고 하였고, 또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하였다.
바울은 인간에게 구원 혹은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일인 복음 전파의 일을 하나님에 의해 감당하고 있다고 한 이유(원문의 17절 첫 부분에는 가르<γάρ>가 있다.)에 대해, 【17】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이란 바울과 바울의 동역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2:14 이하의 “우리”는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나, 바울의 동역자들을 포함시켜도 무방하다.
수다한 사람들(οἱ πολλοί)은 א, A, B, C, K, P, Ψ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P46, Dgr, Ggr 사본 등에는 “그 나머지 사람들”(οἱ λοιποί)로 되어 있다.⑰ 사본의 가치상으로나, 바울이 자신만이 참 전도자라고 주장할 리가 없다는 점을 미루어 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수다한 사람에 정관사(오히, οἱ)가 있기 때문에 (1) 1세기의 순회 교사들과 철학자들로 이해하는 설(M. J. Harris), (2)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가짜 교사들로 이해하는 설,⑱ (3)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가짜 교사들을 비롯한 모든 바울의 대적자들(11:4, 13)로 이해하는 설⑲ 등이 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아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대적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였다. 이 동사(카페류온테스, καπηλεύοντες)의 본래적인 뜻은 ‘상인이 되다’, ‘상인처럼 행동하다’, ‘행상인이 되다’이다. 고전 헬라어에서 이 낱말은 ‘무엇을 섞어서 팔거나, 무엇을 팔아서 이익을 보다’라는 뜻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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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in K. Aland, et al., ed.
18) H. Alford, A. Barnes, F. V. Filson, C. K. Barett, W. Broomall, F. W. Farrar, C. Hodge, A. Plummer.
19) J. Calvin, “Meyer, Bernard”(in 이상근), R. C. H. Lenski, P. E. Hughes,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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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본래의 것에 다른 것을 섞는 것과 그것을 팔아서 이익을 보는 것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다 포함되어 있다.⑳
플라톤의 글(Plato, Protagoras 313 DE)에는, “지식은 영혼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수사학의 교사들이 몸의 양식을 파는 상인과 행상인처럼, 파는 지식을 칭찬할 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그 까닭은 상인과 행상인이 파는 양식이 사람의 몸에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면서 칭찬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식으로, 어떤 종목의 지식을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팔려고, 심지어 소리쳐 팔려고 돌아다니는 자들도, 또 고객들도 그 지식이 영혼에 효력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칭찬한다.”㉑라는 문장이 있다. 루키안(Lucian)은 도붓장수들이 상품에 물을 섞어 품질을 나쁘게 하고, 또 양을 속여서 파는 것처럼,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식들을 제멋대로 처리한다고 말하고 있다(Hermotimus, 59).㉒ 이사야 1:22(칠십인역)에는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라고 하였고, 외경(Ecclus.) 26:29에는 “도붓장수는 죄가 없다고 판단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탈무드는 도붓장수들을 장사에 강도질을 포함시키는 자로 간주하였다.㉓
바울의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4:2, 고전 14:36, 딤후 2:9) 곧 “구약에서 반포된 새 종교의 내용인 복음”(A. Plummer)에 율법주의나 다른 종교의 교리 또는 철학, 그 밖의 어떤 지식 및 사상을 섞은 것을 참된 진리인 양 칭찬하여 전하면서 보수를 요구하고 다녔다. 이러한 행동은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에게서 혼합된 것을 받은 사람들까지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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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C. Hodge, R. C. H. Lenski, C. K. Barett, P. E. Hughes, V. P. Furnish, p. 178. 비교: J. Calvin, H. Alford, A. Plummer 등은 우유, 포도주, 술 등에 물을 섞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21) 참조: A. Plummer, C. K. Barett, P. E. Hughes. P. E. Hughes는 소크라테스가 경고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22) in A. Plummer, in C. K. Barett.
23) in A. Pl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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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의 종들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설교에 대해 중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들어야만 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는 데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사람들에게서 인기와 존경과 많은 보수를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영합하는 설교 아닌 설교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미 이러한 이들에 대해, 에스겔은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겔 13:3)라고 경고하였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가짜 교사들이 주님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어도 율법을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침으로써 교인들의 환심을 사고 있는 사실을 의식하여,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㉔라고 분명하게 설교자로서의 자신의 자세를 밝히고 있다.
소극적으로 다른 가짜 교사들처럼 말씀을 평가 절하하거나 변질시키지 않는다고 한 바울은, 적극적으로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라고 하였다.
곧(알라, ἀλλ’)은 ‘오히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순전함(에일리크리네이아스, εἰλικρινείας: 1:12의 “진실함”의 주석을 보라.)으로는 바울의 설교의 내적 동기를,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는 외적 근거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즉 하나님을 증인이요 법관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1:20의 주석을 보라.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답게 진실한 동기에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하나님을 증인이요 법관 삼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설교하였다. 그는 모든 교역자들의 사표이며, 그의 설교는 모든 설교자가 추구해야 할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죄의 세상에서 진리는 종종 소수이다.”라고 한 렌스키(R. C. H. Lenski)의 말은, 듣는 사람들의 구원 또는 멸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설교를 맡은 교역자들의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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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저자의 갈라디아서 1:10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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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습니다.
※ 파란색 글자는 주석에 해당되는 성구입니다.
출처: 최세창, 고린도후서(서울: 글벗사, 2002, 3판 1쇄), pp. 129-143.
아멘.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공유합니다.
§고후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 바울은 소아시아(드로아)로 갔다가 다시 다음 선교지 유럽(마게도냐)로 건너 갔다.
<그리스도의 복음> ☞ 복음은 새대적으로 신약적이고, 지역적으로 이방인을 향한다. 성경에 여러 가지, 복음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가운데 하나다.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KJV에서 the gospel of Christ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 [롬15:19] [롬15: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은 KJV에서 ‘the fulness of the blessing of the gospel of Christ 그리스도의 복음의 축복이 충만함’ [고전9:12] [고전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고후4:4] [고후9:13] [고후10:14] [갈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성도들을 교란하는 유사 복음도 있다. [빌1:27] [살전3:2] [살후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으면 ≢ 영원한 형벌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 드로아 선교는 성령에 의해 허락되었으나, 바울은 영에 확신이 없어서 마게도냐로 넘어갔다.
§13 <심령이> 바울의 영이며, 사람에게는 영과 혼과 육이 있다. [창41:1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8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 바로의 마음 spirit에 번민이 있다. ⇒ 편하지 못하다. [삼상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15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 ☞ 악령이 사울을 번민케 [사8: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 친밀한 영 familiar spirits, 점술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 하나님의 영 [눅1:17] ☞ 엘리야의 영이 요한에게 임함 [롬1: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 바울의 영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지혜와 계시의 영이 성도에게 임함 [벧전3:4] ☞ 안정된 심령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거짓 선지자의 영도 있다.
<마게도냐> Macedonia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 하나님과 예수의 영이 유럽에 복음 전도를 허락함,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실 때 이루어진다. [롬15:26,27] ☞ 유럽인과 이스라엘인들이 연보를 나눔…. [고전16:5] [빌4:15,16] [살전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14 <우리를 ∋ ❶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 ❷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 하나님께 감사> ☞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식을 아는 냄새(맛)가 나야 한다.
<냄새를> ☞ KJV에 ‘the savour’로 ‘맛’이고, 고어로 ‘향기’이다. [창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 달콤한 맛(향기) [출29:18 그 숫양 전부를 제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 향기로운 맛 [레1:8,9] [스6:10]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맛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KJV “for thou savourest not the things that be of God”이고 “너는 하나님의 일을 맛보지 아니하느니라” [막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KJV 번역)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맛보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맛보느니라. [눅14: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 맛 ⇒ 향기
★ 성경에 나타난 향 ❶[출30: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36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❷[마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❸[요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그리스도를 아는> KJV는 ‘his knowledge’이고, 이는 성도의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식’이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 자기 지식 ⇒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렘51:17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8 그것들은 헛된 것이요 조롱 거리이니 징벌하시는 때에 멸망할 것이나] ☞ 인간의 지식 없음 [눅1:76,77]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하나님의 지식 [골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 신령한 지혜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그의 지식을 통해
§15 <그리스도의 향기> a sweet savour of Christ [엡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 번제물에 해당, 번죄물을 태울 때 나는 향기
<구원받은 자들…. 망하는 자들> [마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 구원 ≢ 죽음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구원 ≢ 멸망 [살후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구원 ≢ 심판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 이 사람에게 생명의 냄새 ⇒ 맛, ⇒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사망…. 생명> [신30: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 생명 ≢ 사망 [렘21:8]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사망 ⇒ 생명 [롬5:10,17,21]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사망과 생명은 항상 대립 [롬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 죄가 속이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해방, 자유의 선포, 희년 [고후4:11,12] [빌1:20] [ 딤후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 예수 사망에서 건져짐 [히2:15] [요일3:14]
<생명>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가 길, 진리, 생명,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 죄와 사망을 이기는 길이 있다. [요일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부패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 바울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수많은 거짓 신학자와 철학자가 ‘자유주의신학’, ‘성서비평학’, 그리고 ‘xx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하게 한다. 이들의 한결같은 문제점은 인간의 혼적 태도, 즉 생각이나 주장이 하나님의 영을 이기려 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듣거나 보지 못한다. 이때 부패는 순전함과 서로 대립하는 이원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 KJV “corrupt the word of God”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개악)하지 마라”다. 개역 개정은 이를 ‘혼잡’으로 표현했는데, 혼잡과 부패는 다른 표현이다. 성경을 번역할 때 이런 방식의 임의로 하는 삭제, 추가, 변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어렵게 하고, 관련 성경이나 짝 구절을 찾지 못하게 막는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모든 철학과 많은 신학 사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하게 한다.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부패하지 않는 씨로 거듭나야 ⇒ 살아 있고 항상 있는 ⇒ 하나님의 말씀
필자의 고린도후서 2:12-17(설교: 복음으로 이기자)의 주석에 "아멘."으로 화답ㅅ하시고,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