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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교회가 치러야 할 대가 / 김준우 박사"님 글을 공유합니다.

작성자
김경환
작성일
2021-06-03 15:46
조회
896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감리회 모임에서 신학자, 목회자 분들께서 기독교계 언론에 기고해 주신 귀한 글을 공유합니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교회가 치러야 할 대가

김준우 박사 (무지개신학연구소 소장)

1.

한국 개신교회는 동성애자들을 비롯한 성소수자들에 대한 태도에 따라 둘로 찢겨졌다.

우선 성소수자들은 우리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성의 신비이며, 성경이 정죄하는 것은 성소수자들이 아니라 성폭행과 성적 착취이며, 또한 성 정체성과 젠더 정체성 때문에 가정과 사회에서 차별당하고 폭력의 대상이 되는 성소수자들에게 교회는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신비주의-포용주의 입장이 한국 교회 안에서는 아직 소수의견이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배운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비록 자신이 소속한 교단의 반지성주의와 일방적인 마녀사냥 분위기 때문에 공개적인 입장표명은 하지 않더라도, 이런 신비주의-포용주의 입장을 신학적으로 지지할 것으로 예상한다.

반면에 성소수자들에 대해 성경문자주의에 근거해서 정죄하는 대다수 보수적인 한국 개신교회 권력자들은 “반동성애 운동”에 올인하면서 가짜뉴스의 원천이 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지배이념이 친미반공주의와 시장자본주의였다는 점에서, 교회 세습과 같은 내부의 모순을 덮고 동시에 일사불란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빨갱이(종북) 사냥”을 하곤 했었다. 정치적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더 이상 그런 “빨갱이 사냥”이 효과가 없자, 몇 년 전부터는 일치단결해서 “반동성애 운동”이라는 배타주의와 희생양 찾기에 올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1) 성소수자들에 대한 성경해석에 기초한 이런 분열에서 과연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가, 그리고 (2) 한국 개신교 대다수가 벌이는 반동성애 운동은 한국 교회 역사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과거에 교회는 노예제도와 여성 안수와 같은 문제를 놓고도 성경해석을 근거로 해서 분열되었던 경험이 있으며, 또한 신비주의-포용주의 입장과 문자주의-배타주의 입장 가운데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는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35억 년의 생명의 기나긴 역사도 생명체들 사이의 배제와 독존이 아니라 차이를 포용하고 협동하는 것이 결국에는 생존경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한국 개신교회 대다수가 반대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늦어도 10여 년 후에는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게 될 때 교회가 큰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성소수자들이 누구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성소수자들을 보내주신 진정한 이유가 무엇일지 헤아려 볼 필요가 있겠다.



2.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생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기독교 신학은 어떻게 생태문명으로 전환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던 사람이 2017년 9월에 서둘러 “무지개신학연구소”를 세운 이유는 한국의 거의 모든 개신교단이 동성애 반대 운동을 벌이는 상황에서 성소수자들에 대한 성서적-신학적-목회적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무지개신학 시리즈”로 이제까지 여섯 권을 출판했다(<동성애와 기독교 신앙>, <동성애와 성경의 진실>, <트랜스젠더와 기독교 신앙>, <무지개신학>, <급진적인 사랑: 퀴어신학 개론>, <죄로부터 놀라운 은혜로: 퀴어 그리스도를 찾아서> 등).

자신의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 때문에 가족들과 사회로부터 혐오와 차별을 겪는 성소수자들은 결코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성의 신비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차이는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움이지 결코 혐오와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온갖 이유로 고통당하며 눈물짓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성경이나 교리를 잣대로 정죄하는 대신에,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차별적이며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며 축복하신 분이기 때문에, 성경과 교리를 내세워 성소수자들을 정죄하는 행위는 율법주의적인 반복음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소한 인간의 기본권, 과학, 상식을 부정한 채, 성소수자들을 혐오하고 정죄하는 것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교회의 몰락을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아픈 손가락에 자꾸만 신경이 가듯이, 하나님의 눈길은 항상 세상의 주변부 밑바닥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지만, 정치종교 당국자들이 종종 중심부 기득권자들의 이해관계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역설과 허위는 하나님의 은총에 맞서 헛발질하는 반기독교적 행동일 따름이라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처럼 철저하게 소외되고 따돌림 당하는 존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두고 찾아나서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라고 가르치신 예수님(마태 18:12-14),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외면한 채 예언자들을 죽이던 예루살렘의 종교 당국자들을 향해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들을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 23:37)라고 탄식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삼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차별과 폭력과 죽임이 더욱 만연해질수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어떤 명분으로든 차별과 폭력과 죽임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명령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 초반의 경제공황이 히틀러를 선출하도록 만들었고 혐오와 종족학살의 재앙을 몰고 왔던 것처럼, 현재 나날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경제적 양극화와 생태위기로 인해 20년 후 봉착하게 될 동시다발적인 식량폭동과 온갖 재앙은 또 다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속죄양 찾기에서 비롯되는 엄청난 증오의 쓰나미를 몰고 올 것이며 그 첫 번째 희생양이 이주노동자들과 성소수자들이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교회는 지금부터 철저하게 사랑과 연대의 방파제를 쌓아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거의 모두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들로 이루어졌던 나치 친위대와 서북청년단의 끔찍한 악몽이 또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막기 위한 내 나름의 영적인 무기가 “무지개신학시리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3.

성소수자들에 대해서 특히 기독교인 이성애자들이 갖는 혐오감, 무의식적인 우월감, 그리고 그들을 “죄인들”로 낙인찍고, 또한 그들이 회개하여 성소수자라는 정체성과 행동을 버리고 자신과 똑같은 이성애자들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그들 모두 “지옥불 속에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외치는 기독교인들의 저주는 성소수자들을 직접 만나지 못한 경험의 한계를 드러낼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억압된 히스테리,” 그 바리새파적인 자기 의로움과 강력한 분노라는 “종교적 방어기제”가 표출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논쟁을 통해 바뀌기보다는 먼저 이 세상에서 성소수자들이 겪는 “숨 막히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 마음을 열어야만 바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자녀들이나 손주들 가운데 아직까지 성소수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함부로 저주해서 더욱 상처를 주는 것은 인간적으로 매우 잔인한 짓일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나오는 “목이 곧은” 요나처럼, 인간의 협소한 잣대로 하나님의 우주적인 뜻과 보편적인 사랑을 정반대로 왜곡하는 짓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한,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성경 문자에 대한 절대적인 집착과 잘못된 해석은 그 확신과 열정이 넘칠수록 그리스도까지 살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당시 내노라 하던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달려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을 공모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매우 큰 역설이며, 이런 비극적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적 확신과 강렬한 열정이 때로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 큰 역설의 뿌리는 우리의 에고 중심적인 잣대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면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신비를 외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최선은 어떤 확신도 결여하고 있지만, 최악은 강렬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확신”과 “강렬한 열정”은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탈레반과 ISIS 같은 폭력적 원리주의자들처럼 수많은 정치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을 낳았으며, 또한 그들로 인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비롯해서 얼마나 끔찍한 잔혹행위들이 초래되었는지를 꿰뚫어 본 통찰이다.



4.

나이가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신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을 점점 더 깨닫게 된다. 한 예를 들자면, 꼬리비녀 극락조 수컷의 현란한 색과 아름다운 구애 춤은 정말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정도로 신묘막측할 뿐이다. 또한 여름철에 우리를 성가시게 만드는 파리 종류가 85종만 된다고 해도 우리 생각에는 엄청 많은 것이지만,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파리 종자를 8만 5천 종이나 지으셨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창조의 다양성의 신비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나 여자, 둘 중 하나로 만드셨다고 단순하게 믿었지만, 간성(intersex)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생식기, 생식샘, 성 호르몬, 염색체 구조와 같은 신체적 특성이 남자나 여자라는 이분법적 구조에 들어맞지 않는 간성의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난소와 고환을 한 몸에 지니고 태어나는 아기들도 있으며, 생식기를 포함해서 외모는 여자인데 염색체는 XY라는 남성 염색체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다. 더군다나 염색체들의 조합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유엔에 따르면, 이처럼 특이한 간성의 사람들은 전 세계 인구의 0.05〜1.7%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간성의 엄연한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들의 존재 자체는 “하나님의 실수”라고 치부한다면, 그 “실수”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인데, 이런 신학적 입장이 과연 그들의 삶을 위해서나 교회 목회를 위해서 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러나 간성의 존재는 우리가 단순히 생식기를 기준으로 성별을 남녀 이분법으로 단순하게 구분해왔던 전통적인 방법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간성의 사람들을 남자나 여자로 바꾸는 수술을 한다고 해도 유익함보다는 해로움이 더 많다고 한다. 따라서 간성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와 구원의 신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몰타, 캘리포니아, 뉴욕 등지에서는 이런 간성의 사람들이 정부 공식문서에 엄연히 “제3의 성”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경향신문 2019/1/11).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창 2:22)는 말씀을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믿지 않고, 오히려 인류의 첫 조상은 여자였다는 고인류학자들의 DNA 분석에 따른 합의를 받아들이듯이,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7)는 말씀을 이제는 “여자와 남자와 간성으로 창조하셨다”로 재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신비를 더욱 잘 받아들이는 고백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간성의 사람들을 창조하신 계획을 달리 어떻게 인정하겠는가?



5.

트랜스젠더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신비로 받아들인다. 태어날 때의 생물학적인 성별에 따라 자신의 젠더(성별 정체성)를 갖게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생물학적 성별과는 반대로 자신의 내적인 젠더 정체성을 갖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서, 남자의 몸 안에 여자의 영혼이 들어가 있거나, 여자의 몸 안에 남자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상태의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런 트랜스젠더들의 젠더 정체성을 부인하거나 그들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실수”라고 말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 신앙적으로 온당한 일일까? 트랜스젠더들은 생물학적 성별과 자신의 젠더 정체성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특히 사춘기를 전후하여 심각한 위화감을 갖게 되어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아빠는 사내아이답게 태권도를 가르치려 하지만, 아이는 태권도 같은 것은 전혀 하고 싶지 않아서, 아빠가 아무리 때리면서 가르치려 해도 실패한 경우도 나는 보았다.

트랜스젠더들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지, 또한 가정이나 학교에서 얼마나 조롱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고려대 김승섭 교수팀이 트랜스젠더 282명의 건강연구를 조사한 결과, “40%가 넘는 이들이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오롯한 당신』, 2018, 46). 세상에 어느 청소년 집단도 이처럼 높은 비율로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집단은 결코 없다. 미국에서 30년 넘게 트랜스젠더들을 상담한 의사에 따르면, 부모가 지지하지 않는 십대 트랜스젠더들의 자살 시도는 57%인 반면에, 부모가 지지하는 경우는 4%였다(TED 강연, Dr. Margaret Nichols). 부모나 교회의 지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다. 또한 2008년 이후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살인 사건 통계를 발표하는 단체에 따르면, 2019년에만 전 세계에서 331명의 트랜스젠더들이 살해당했다. 미국의 트랜스젠더들 가운데 50%는 심한 괴롭힘을 당하며, 26%는 직장에서 쫓겨났고, 20%는 부모의 거절로 인해서 노숙자가 되었다(TED 강연, Katina Sawyer, Sunny Miller). 이처럼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본의 아니게 큰 고통을 당하는 트랜스젠더들이 안전한 세상에서 자신의 진정한 젠더 정체성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 이유가 아니겠는가?



6.

동성애자들 역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신비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미국에만 동성애자들이 천백만 명이 넘는데, 이들의 엄연한 성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실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먼저 분명히 할 것은 동성애를 전쟁포로들이나 노예들에 대한 성폭행이나 성적인 착취, 또는 성적인 방종과 혼돈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이 금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성폭행과 특히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매우 흔했던 “소년애”와 같은 성적인 착취라는 것은 이미 많은 성서학자들이 밝힌 사실이다. 동성애는 이성애처럼 사랑과 헌신의 상호책임적인 관계이지, 동성 간의 성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도대체 왜 동성애자들이 태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의사들이나 과학자들조차 그 신비를 전부 해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미 굴 속 깊은 곳에 누워있는 여왕개미가 왜 어느 때는 일개미 알들만 낳다가, 왜 어느 때는 병정개미 알들만 낳는지, 어떻게 여왕개미 한 마리 안에서 그런 생리학적 변화가 일어나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다만 그 개미 “집단”의 생존을 위한 본능이 신비하게 작용한 때문일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의사들 역시 한 가족 안에 동성애자가 태어나는 이유는 그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예컨대 부분적(약 30%)으로는 임신 중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엄마의 심리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동성애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산모의 몸이 신비하게 알아차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한평생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숨 막히는 고통스러운 일인데, 자발적으로 동성애자가 되는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이 팔십이 넘어서도 커밍아웃하는 노인들의 경우처럼,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일은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과 주체성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그 개인에게는 평생 동안 매우 중대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은 소위 성적인 변태들로서 스스로 선택한 가증한 존재들이라는 주장은 마치 성경 문자에 근거해서 갈릴레오를 처벌했던 교회처럼 시대착오적이며 비과학적인 주장이다. 편견 없는 의사들과 과학자들 가운데 성소수자들을 질병으로 간주하거나 도덕적 타락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1973년 이후 미국정신의학회, 미국심리학회, 미국정신분석학회, 미국인류학회 등등 모든 과학자들 협회는 성적 지향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비판했다. 심지어 전환치료를 금지해야 하는 이유는 성적 지향을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전환치료는 오히려 죄책감과 자살충동을 유발하기 때문이다(잭 로저스, 조경희 역, <예수 성경 동성애>, 197-201). 또한 탈동성애 전환치료 운동을 벌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기극이라는 것이 이미 여러 차례 밝혀졌다(Justin Lee, Torn: Rescuing the Gospel from the Gays-vs.-Christian Debate, Jericho Books, 2012, 제6장). 그래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인권이 확립된 북미와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아시아의 타이완뿐만 아니라 남미의 아르헨티나, 멕시코, 브라질, 에콰도르, 우루과이, 코스타리카 등 전 세계 29개 국가에서 동성결혼이 이미 합법화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성소수자 청소년들 가운데 67%는 주로 가족들로부터 성적 지향이나 젠더 정체성을 바꾸기 위한 전환치료를 요구받고 있는 현실이지만, 전환치료를 받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자살률이 전환치료를 받지 않는 청소년들보다 2배나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래서 미국의 75개 도시들과 주정부의 40%는 청소년들에 대한 전환치료를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으며, 캐나다는 가장 포괄적인 전환치료 금지법을 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LGBTQ Nation, Aug. 27, 2020). 이처럼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고 전환치료를 금지하는 세계적인 추세는 바로 성소수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자신들의 특별한 소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돕는 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7.

결론적으로 성소수자들 문제는 섹스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청소년 성소수자들(13-17세) 가운데 거의 절반이 자살을 고려했으며, 실제로 25% 이상은 자살을 시도했다. 미국에서 십대 게이들은 29%가 자살을 시도했다. 이것은 이성애 청소년들보다 3.5배 이상 많은 것이다. 특히 "종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응답한 청소년 성소수자들 가운데는 38%가 자살을 시도했다(American Journal of Preventive Medicine, Welcoming and Affirming, 2020, 72).

이런 점에서 이 땅의 성소수자들의 생존을 가장 위협하는 집단이 “반동성애 광기”에 사로잡힌 교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는 교회 안의 청소년들을 향해 그들의 성 정체성 자체를 “죄”로 매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인간적 존엄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인간, 하나님, 성경, 복음, 구원, 교회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트랜스남성 목사인 저스틴 타니스 박사의 책 『트랜스젠더와 기독교 신앙』을 읽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새롭게 하게 되었다. 하버드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저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말한 것처럼, ‘성소수자들은 매우 특별한 재능과 특이한 자질들을 지닌 사람들로서 ‘집단’에게 유익을 주려는 자연의 신비이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을 단죄하는 것은 그 사회 자체를 해치는 짓’이다. 또한 아무리 우리 세대가 학교 교육을 통해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성소수자들이 한평생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그 혐오와 차별과 조롱과 폭력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살 시도를 하며 심지어 살인의 대상이 되는 집단인지에 대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을 떠나 최소한 인간적으로 마땅한 태도가 아닐까?

예수님은 온갖 이유들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내세우면서 정죄하기는커녕 그들에 대해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시는 하나님의 무차별적이며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사랑으로 품어 안으셨다. 중심부의 지배자들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차별당하고 짓밟히는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것(마가 8:36)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성소수자들이 평생 동안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에 대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기는커녕 여전히 성경 문자를 잘못 해석해서 그들의 성 정체성 자체를 “죄인들”이라고 낙인을 찍는 일이 과연 “지상의 어머니”인 교회가 감히 할 수 있는 짓일까? 그런 낙인이 정말로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까? “예수는 최고의 진정한 주변부 사람”(이정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 대신에 그분을 “구원의 주님”으로 섬기는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사회의 가장 변두리에서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는 성소수자들을 정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목회자들이 성경 연구를 그만큼 게을리 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자매들인 성소수자들의 특성에 대한 관심과 독서를 그만큼 게을리 한 때문은 아닐까? “반동성애”를 외치는 사람들이 과연 동성애자들에 대한 종교적 편견이 없는 책 한 권만이라도 읽고 그런 주장을 하는지 매우 의문이다.



8.

하나님께서 성소수자들을 우리들 가운데 보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특별한 계획을 세우신 때문인데 우리가 그것을 헤아릴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이유가 혹시 우리들로 하여금 창조의 놀라운 다양성 앞에서 하나님의 신비한 경이로움을 배우며, 성소수자들의 잠재력을 잘 북돋아주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밖의 구원 계획 앞에서, 그 옛날 요나처럼 “박 넝쿨 하나”에 목숨을 걸겠다는 식의 에고 중심적인 옹졸한 편견을 버리라는 뜻이 아닐까? 나 이외의 다른 어느 누구도 결코 타자화 하지 말고, 삼라만상 전체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한 피붙이”일 뿐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사람들에 대한 주제 넘는 판단을 중지하도록 요청하시는 것이 아닐까? 특히 주변부 밑바닥에서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함께 기뻐하며 춤추는 세상, 인류사회의 온갖 장벽들을 허물어버리고 진정한 사랑과 정의로 하나된 세상을 만드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거지 나사로를 통해서 부자가 구원받을 기회를 마련해주셨던 것처럼 (누가 16장), 목마른 사람들과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과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마태 25장), 차별당하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최후 심판 기준에 포함되는 것이 아닐까?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월트 휘트먼, 버지니아 울프, 헨리 데이비드 쏘로, 오스카 와일드, 앙드레 지드, 제임스 볼드윈, 쇼팽, 레오나드 번슈타인 등등 수많은 위대한 성소수자 예술가들을 보내신 이유에서 드러나듯이,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소명과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인간 공동체 집단에게 독특한 공헌과 아름다움과 구원의 빛을 비춰주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



9.

또한 국가인권위원회가 6월 23일 공개한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8.5%는 차별 금지를 법제화하는 데 찬성한다고 답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개신교가 공격해온 ‘성적 지향, 정체성’ 항목과 관련해서도 응답자의 73.6%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과 같은 성소수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이처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는 이미 이루어졌다. 모든 종단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지만, 오직 개신교회만 반대하고 있다. 이처럼 개신교회가 인권, 상식, 과학을 거부하면서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고 있으니, 상식이 있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교회 안의 성소수자들, 특히 자신의 성 정체성과 젠더 정체성 때문에 큰 불안을 느끼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절벽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자들이 소위 교회 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이다. 예수님 당시에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죄인들이라고 정죄하고 성전에서 내쫓았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결국 무차별적인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마저 죽이는 데 앞장섰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바빌론 포로생활의 고난을 겪으면서 비로소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과 세상, 심판과 부활과 영생에 대해 새로운 신학적 통찰력을 배우게 되었던 것처럼, 또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천하에 상종 못할 죄인들이라고 멸시했던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 민족 역시 일본, 만주, 중앙아시아, 하와이, 멕시코, 미국 등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의 뼈저린 역사적 경험들을 통해서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혹시 한국 교회가 우물 안 개구리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절호의 기회는 아닐까?



10.

심지어 이중 예정론을 믿는 미국장로교회(PCUSA)조차 20여 년 동안 치열한 학문적 논의를 거쳐 2015년에 미국 정부의 결정보다 1년 먼저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던 것처럼, 이제는 한국 교회도 성소수자들의 문제에 대해 정죄와 배제, 종교재판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 진지한 학문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다. 칼빈의 이중 예정론에 반대해서 선행은총과 보편적 구원을 가르친 웨슬리 목사의 후예들이 앞장서지 않는다면, 누가 시작하겠는가? 신학의 판단 기준 가운데 성경과 교회 전통과 경험 이외에 이성을 포함시킨 웨슬리 전통을 무시한 채, 성경 문자에만 근거해서 성소수자들을 정죄하는 이들은 감리교 신학이 아니라 침례교 신학에 서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교회는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와 물질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을 억압하고 마지막까지 농노제 폐지를 반대했으며,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을 저지르는 잘못들을 성경의 이름으로 자행해왔었다는 사실이다. 반동성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때문에 교회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외면한 채,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자들의 기득권과 혐오를 성경 문자로 포장하면서 과거와 똑같이 하나님의 역사 발전에 방해가 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를 넘어 인류의 자유와 모든 개인의 인권을 점차 확장시켜 오신 하나님의 기나긴 투쟁 역사를 깨닫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비와 주권과 은총에 맞서 싸우고 있는 반동적인 교회를 등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득권자들의 지배체제에 대한 혁명적인 대안으로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 그 체제변혁적인 운동을 위해 부름 받은 교회가 예수님의 정신을 망각할 때는 흔히, 영화 “미션”이 잘 보여주듯이, 세상 제국들과 기득권자들의 물질적 가치와 지배체제를 옹호함으로써, 교회 당국이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까지 배반하고 스스로 지배체제의 “기생충”으로 전락해버렸다. 심지어 한국의 거의 모든 개신교단들이 지금 성소수자들과 그 지지자들은 “이단자들”이니까 신학교와 교회에서 “나가라!”고 요구하는데, 영화 “미션”이 잘 보여주듯이, 정말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쫓겨나야 할 이단자들이 만일에 있다면, 그 주변부 사람들인 인디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돌보던 성직자들인가, 아니면 그 땅과 자원을 빼앗는 식민지 정복자들에게 빌붙어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외면한 채 그들을 혐오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서 자신들의 중심부적인 지위와 기득권을 유지했던 종교 당국자들인가?



11.

그러나 여성해방, 흑인해방, 제3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 생명계 전체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대열에서 항상 선봉에 서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 한국 교회 역사에서 여전히 성소수자들과 이주민들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서도 앞장서고 계신다고 나는 확신한다. 여성해방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생태신학이 백인 남성 인간 중심의 기독교를 벗어나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새롭게 깨닫게 했던 것처럼, 성소수자들의 퀴어신학은 가부장적 이성애주의 신학을 벗어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역사를 더욱 잘 깨닫게 도와주고 있다.

또한 과거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던 여성억압정책, 노예제도, 인종차별정책들이 결국에는 철폐된 것처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구원과 해방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에 따라 머지않아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후에야 비로소 한국 교회는 성소수자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지지한 것이 얼마나 반민주적이며 반인권적일 뿐만 아니라 반성경적이며 반복음적인 것이었는지를 점차 깨닫게 될 것으로 예상하지만 말이다.

아니,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후에도 대다수 교인들이 성소수자들의 고통에 대해 마음 문이 열리기까지는 성소수자 자신들뿐 아니라 교회 자체 역시 계속해서 얼마나 더 오랫동안 큰 상처들을 받게 되며 찢어지게 될 것인지를 지금 미국연합감리교회(UMC)가 우리 눈앞에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으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연합한 역사를 잘 알고 있는 UMC의 이번 두 번째 분열 위기는 교회가 은총의 도구가 되어 미래를 열어나갈 것인지, 아니면 성경 문자의 노예가 되어 퇴행할 것인지를 선택한 사건이 아닐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크게 웃으시도록 만들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온 세상이 정의와 사랑 가운데 평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한 분 하나님”을 매우 탄식하시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실히 깨닫도록 요청하는 사건은 아닐까?

한국 교회도 이제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 대열의 맨 뒤에 머물러 있은 채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은총의 신비에 맞서 싸우는 헛발질을 계속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헤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신비를 찬미하면서, 생명계 전체가 그 놀라운 창조의 다양성과 상호주체성을 북돋우면서 서로 친밀하게 교제하는 관계를 더욱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한 행진 대열에 발맞추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예수님이 당시의 온갖 종교적 차별과 정치적 폭력에 맞서서 죽기까지 몸소 보여주신 철저한 자기 비움과 이웃 사랑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는 것을 최고의 사명으로 믿는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더욱 더 온갖 차별을 금지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전체 4

  • 2021-06-03 16:12

    귀한은 안쓰는게 더 좋을듯 합니다.
    그리고 퍼오는건 별로 좋은것이 아니라 봅니다.


  • 2021-06-03 20:08

    볼 가치도 없는 글입니다
    무지개연구소장 박사는 무슨 박사입니까?
    동성애 전문박사입니까?
    퀴어 신학의 물들어 예수를 동성애자라고까지하는 이단적인 사상에 물든 자의 말을 들어 뭐합니까?
    하나님을 대적하여 모욕하는 자인데...


  • 2021-06-03 22:56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며 이야기하려니...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어거지를 쓰려니...
    이렇게 길~게 쓰는구나

    그냥 성경말씀에는
    동성애는 죄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둘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생육하며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는데
    이 무슨 X소리인가

    이 잡설을 쓴 사람이 박사란 말인가?
    정체가 무엇인가?
    육지개를 목에 두른 목도리도마뱀인가?
    아예 혐차반모교를 창시하라
    여기 감리회에 X물 튀기지 말고
    항문XX의 짜릿함을 찬미하려거든
    주종하는 LGBTQ 무리들과 나가서
    마음껏 죄의 향연을 즐기라 그리고
    쾌락과 광란의 밤을 지나면 임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의 칼날을 마주치게 될 터이니...
    그 때는 그토록 안타까운 심정으로 권면하고
    돌이키라고 애타게 호소했던 우리들에게
    손을 들어 도와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성소수자?
    그대 말대로 본인이 성소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자 그대로 성소수자라면서 왜 성다수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가?

    성다수자가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말이다.
    당신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악하다
    사람들의 항문을 헐게해서가 아니라
    가정을 해체하고
    사람들 씨를 말리게 하기 때문이다.

    마귀사탄의 인류멸절 전략이
    동성애 찬미이고 성소수자 보호인 것을
    초등학생도 다 알건만
    이도 모르고 날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궤변을 펼치고
    바른 말로 권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니
    이런 이들이 하는 모든 소리를
    가히 X짖는 소리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성도의 본분일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X짖는 소리나 해대는 이단사이비는
    감리회에서 물려가라 !!!


  • 2021-06-04 08:27

    세 가지 질문입니다

    # 첫째 질문: 아래의 성경 말씀들에 대한 해석은?

    (창 19:4)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창 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레 18:22) 너는 여자와 교합[성교]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 20: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성교]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신 23: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ㅡ비역 곧 동성애를 할 때 밑에서 당하는 아이ㅡ이 있지 못할지니
    (왕상 14:24)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왕상 15:12)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
    (왕상 22:46) 저가 그 부친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왕하 23:7) 또 여호와의 전 가운데 미동ㅡ비역 곧 동성애를 할 때 밑에서 당하는 아이ㅡ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이었더라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고전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딤전 1: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유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 1: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요일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일 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둘쩨 질문 : 아래 동성애에 대한 요한 웨슬리의 주장에 대한 해석은?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 1:24 그러므로 ㅡ 죄에 대한 하나의 징벌은 로마서 1:27처럼, 바로 그 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른 징벌은 여기처럼, 보복적인 정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더러움 ㅡ 불경건과 불결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순수가 종종 결합되는 것처럼(살전 4:5), 종종 결합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 ㅡ 하나님의 제지하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내벼려 두신 것이다.

    롬 1:25 진리를 바꾼 자들 ㅡ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예배.
    거짓 것으로 바꾸어 ㅡ 거짓되고 혐오스러운 우상숭배들.
    숭배하였다 ㅡ 내적으로.
    섬겼다 ㅡ 외적으로.

    롬 1:2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정 속에 버려두셨다 ㅡ 당시의 이교도인 로마인들은 극도로 버림받았는데, 로마의 황제들보다 더 심한 사람은 없었다.

    롬 1:27 그들의 잘못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음 ㅡ 그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처벌인 부자연스러운 육욕은, 그들의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되는 것처럼, 몸을 지독하게 모독하는 것이다.

    (고전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 6:9 여기서 우상 숭배는 음행과 간음 사이에 있는데, 이유는 그들은 대개 동반하기 때문이다.
    탐색하는 자 ㅡ 편하고 나태하게 살아간다. 즉, 십자가를 지지 않고, 어려움을 견디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어쩐 일인가? 이런 좋은 무해한 사람들을 우상 숭배자들과 남색하는 자들 사이에 놓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 사실에서 가장 작은 죄들이라고 생각한 죄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큰 죄들로부터도 안전하다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또한 정말로 우리는 모든 죄는 지옥을 향한 발걸음이므로, 어떤 죄도 작은 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출처: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

    ### 가장 궁금한 셋째 질문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는?

    보통 인간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무위도식자라고 하는 이도 있고, 동성애자라고 하는 이도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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