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1:12-17(설교:직분에 대한 바울 사도...)의 주경신학적 연구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4-12-2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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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의의와 한계 그리고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에 대해서 논해 온 바울은, 이제 자신이 그 영광의 복음의 일꾼이 된 사실에 대해 【12】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원문에는 내가 감사함은(카린 에코, χάριν ἔχω)이 첫머리에 있어 강조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어구는 바울 서신에서는 이곳과 디모데후서 1:3에만 사용되었는데, 대개의 경우에는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를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 사용된 카린(χάριν)은 문자적으로는 기뻐하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보다 더 강한 말이다. 따라서, ‘내가 기쁨에 넘쳐 감사함은’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나를 능하게 하신은 빌립보서 4:13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를 회상한 것 같다(딤후 2:1, 4:17, 행 9:22). 여기서의 기본적인 사고는 ‘사도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위한 능력을 주신’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결코 사도로서 행한 모든 능력을 자신의 인격이나 지혜나 노력의 소산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나를 능하게 하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1:2의 주석을 보라.)라고 밝혀 주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모든 능력을 자랑의 수단으로 삼는 대신에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는 감사하는 이유에 대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란 사실상 충성스럽지도 않고 신실하지도 못한 자신을 황공하게도 주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셨다는 뜻이다. 충성되지 않다고 하는 자를 충성되게 여기시고, 충성되다고 자처하는 자는 충성되지 않다고 하시며(마 25:21, 23), 또한 할 수 있다고 나설 때는 물리치시고, 할 수 없다고 물러설 때는 붙잡아 쓰시는 데(출 3장)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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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란 하나님께서 충성되게 여겨 주신 결과이다. 바울은 스스로 직분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직분을 맡겨 주신 주님께 그토록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한 사람 중에 바울만큼 자신의 직분에 대한 소명 의식이 투철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서신 첫머리에 자신이 하나님의 뜻, 또는 명령에 의해 사도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골 1:1, 딤전 1:1, 딤후 1:1. 단순히 사도나 종이라고 언급한 곳: 빌 1:1, 딛 1:1). 특히,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1:15-16)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핍박하던 시절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실상, 그의 출생과 성장 환경과 교육 등이 유대와 헬라 세계 양쪽에 다 익숙할 수 있었던 특이한 것이었는데, 이는 이방 사도의 사명을 맡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 수 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과오나 죄를 저지른 사람을 용서는 해도, 그의 과거의 죄나 과오 때문에 그에게 책임 있는 일을 맡기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을 용서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완성하도록 바울을 신임하여 직분을 맡기시기까지 하셨다.”라고 하였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는데, 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 자신의 인격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을 일꾼 되기에 충분케 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열정적인 사랑과 충성 때문이다.
직분은 디아코니안(διακονίαν)으로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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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자’, ‘일꾼’, ‘사자’, ‘사역자’(4:6, 마 20:26, 23:11, 막 10:43, 요 12:26, 롬 13:4, 16:1, 고전 3:5, 고후 3:6, 6:4, 11:15, 23, 엡 3:7, 6:21, 골 1:7, 23, 25, 4:7), ‘종’, ‘사환’, ‘하인’(마 22:13, 요 2:5, 9), ‘집사’(3:8, 12, 13, 빌 1:1) 등을 의미한다. 즉, 바울은 자신이 명예나 권위 또는 특권이 있는 직위로 임명되었다고 하는 대신에,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에게서 직분을 맡게 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자세로 일하였다.
(1) 자신의 직분을 자신의 능력에 따른 응분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2)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도구가 되도록 항상 노력하였다.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참조: 벧전 4:11)라고 했고,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고 하였다.
(3)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는 옥중에서도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라고 했고, 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라고 하였다.
(4) 상을 받기 위해 일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는 대로 상을 주실 것을 확신하였다(고전 3:8, 빌 3:14, 골 3:24).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곧 바리새인이었던 시절(빌 3:5)에 대해 【13】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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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방자는 블라스페몬(βλάσφημον)으로서 ‘하나님께 불경한 말을 하는 자’, ‘욕하는 자’, ‘악평하는 자’, ‘모독하는 자’ 등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이나 교리를 모독하는 자 곧 불경스런 말을 지껄이는 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얼레(R. Earle, p. 356)는 “아마도 이 말은 그가 새로운 종교 운동을 반대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의 이름을 저주했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제 그는 그것이 신성 모독이었음을 깨달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핍박자는 디오크텐(διώκτην)으로서 ‘각박히 따라가면서 괴롭히는 자’(이상근), ‘격렬하게 박해하는 자’를 뜻한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던 사실을 반복하여 고백하였다(행 22:2-21, 26:4-23, 고전 15:8-10, 갈 1:13, 23). 바리새인이었던 그는 유대교를 보호하려는 열의 때문에 기독교를 없애려고 결심하였던 것이다(빌 3:5, 6).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핍박자가 되도록 부추기기도 하였다(행 26:11).
포행자는 휘브리스텐(ὑβριστήν)으로서 ‘난폭한 자’, ‘거만한 자’를 뜻한다. 이 말의 동사는 악의를 품고 남을 경멸하며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롬 1:30). 바클레이(W. Barclay)는 “그는 거만하고 짐승과 같이 잔인무도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이다.……즉, 사람에게 잔인한 짓을 가해서 그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인간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실상, 바울은 교인들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행 22:4).
벤겔(J. A. Bengel)은 “첫째는 하나님께 대항한 것이고, 둘째는 다른 이들이 회개할까 걱정되어 거룩한 이들을 대항한 것이며, 셋째는 자신의 구원에 대항한 것이다.”라고 설명했지만, 반드시 그렇게 구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바울의 삼단 점층법으로 보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 록(W. Lock)은 “바울 사도가 흔히 사용하는 바와 같이, 이 점층법은 말에서부터 시작하여 율법에 의해 합리화 된 행동으로, 그 다음은 불법적인 폭행으로 진전되어 가는 상승적인 단계를 표현하는 용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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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엘레에텐, ἠλεήθην: 1:2의 주석을 보라.)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하였다. 그는 주님을 믿지 않은 것을 ‘무지’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살전 4:5, 엡 4:18, 행 17:23, 벧전 1:14). 이것은 그 당시의 다른 문헌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①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학문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경험적이거나 직관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다(고전 2:10, 요 14:26, 16:13).
아무튼, “저자가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해서 회심이 가지고 있는 은혜적 성격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바울로는 또한 은혜가 모든 계산과 기대를 초월할 정도로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G. Wetter)②.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14】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주의 은혜란 자기를 용서하시고, 게다가 사도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신의 주님을 향한 믿음(피스테오스, πίστεως: 1:2의 주석을 보라.)과 주님 및 인간을 향한 사랑(아가페스, ἀγάπης: 1:5의 주석을 보라.)에도 지극히 풍성하였다는 것이다.
바울의 독특한 표현인 그리스도 예수 안(ἐν χριστῷ Ἰησού), 또는 ‘그리스도 안’이란 그리스도와 성도의 영적 연합, 즉 신자가 그리스도께 접목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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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istides 17, 3; Justin Ap. Ⅰ. 12, 11; Athenagoras Suppl. 28, 2; Kerrgma Petr. 4; Act. Petr-p. 47, Lipsius.” in M. Dibelius.
2) in M. Dibel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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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바울은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와 함께’, 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A. Schweitzer).③ 또, “이 표현은 ‘성령 안에’와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A. Deissmann).④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며, 또 우리는 그분 안에서 복을 받아 누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안이야말로 신령한 복의 근원이요 통로요 영역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적 생활(지, 정, 의 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바울의 신비주의라고 한다. 그의 신비주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헬라적 신비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이 점에 대해 다이스만(A. Deissmann)이 잘 설명하고 있다.
(1) 전자는 반응 작용으로서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능동적 행위로서의 신비주의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해 오시는 것과 인간이 신에게 접근해 가는 것이다. 전자가 하나님의 선물 혹은 은혜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노력이 주도하는 신비주의이다.⑤
(2) 전자는 신비주의의 목적이 신과의 교제(communio)인 반면에, 후자는 일치(unio)이다. 즉, 하나님의 현존을 통한 인격의 성화와 인격의 상실이다. 전자가 신의 뜻을 향한 인간의 적응인 반면에, 후자는 신화(deification)이다. 사실상, 전자는 윤리적 열정주의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경건적 도취의 신비주의이다. 전자는 인격성의 부정이며, 후자는 인격성의 긍정이다.⑥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이란 단순히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참가한 신비한 연합을 요약하는 것으로, 그의 감정과 의지와 이성의 전 삶이 그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빈센트(Vincent)는 그리스도인이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마치 새가 공기 중에, 물고기가 수중에, 나무뿌리가 토양 속에 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골 1:2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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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trans. by W. Montgomery(London: Adam & Charles Black, 1956), pp. 122-124.
4) A. Deissmann, Paul, trans. by W. E. Wilson(Peter Smith, 1972), p. 139.
5) Ibid., p.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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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는 휘페레플레오나센(ὑπερεπλεόνασεν)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 외에 사용된 곳이 없다. 이 말은 ‘더하다’, ‘점점 더하다’, ‘풍성하다’, ‘풍부하다’를 뜻하는 플레오나조(πλεονάζω)에 ‘그 이상으로’의 뜻인 휘페르(ὑπέρ)를 덧붙여 뜻을 강하게 한 것으로 바울이 종종 쓰는 수법이다.
바울은 넘치는 감격으로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하였다. 원문에는 “이 말씀은 신실하고,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πιστὸς ὁ λόγος καὶ πάσης ἀποδοχής ἄξιος)로 되어 있다.
미쁘다……이 말이여(πιστὸς ὁ λόγος)는 목회서신에만 나오는 표현으로(딤전 3:1, 4:9, 딤후 2:11, 딛 3:8) ‘신실하도다 이 말씀이여’, 또는 ‘신뢰할 만하도다 이 말씀이여’, 또는 ‘이 말씀은 신실하다’ 등으로 번역된다. 특히, 이 구절과 4:9에서는 보편타당성을 뜻하는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 첨가되어 더욱 강조적인 성격을 띤다.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는 신실한 말씀의 내용에 대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표현은 곧 복음의 핵심이다(참조: 마 1:21, 요 1:9, 3:16, 19, 6:14, 10:36, 11:27, 12:46 등). 디벨리우스(M. Dibelius)는 “이 구절은 복음서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라기보다는 교회 전승의 문구들을 전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다 죄인(하마르톨루스, ἁμαρτωλοὺς: 1:9의 주석을 보라.)이지만(롬 3:9-18), 자기가 죄인인 줄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힘입어 구원받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 사람의 구주이시지만, 특별히 믿는 사람들의 구주이시다(딤전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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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Ibid., pp. 150-151. 참조: A. Schweitzer, op. cit., pp. 373-374. 윤리적인 면을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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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임하셨다는 표현은 “본래 선재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쉽게 그 사상과 연결될 수는 있다(요 3:17)”(M. Dibelius). 실상, 이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선재를 전제하는 것이다(롬 1:3, 8:3, 고전 8:6, 고후 8:9, 빌 2:6-8, 골 1:15-17). 바울은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해 갈라디아서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이라고 설명하였다.
불트만(R. Bultmann)은 “바울은 예수께서 인간이 되셨고, 지상에 사셨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갖는다.”⑦라고 하지만, 실제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전 구원 과정의 근본적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를 주장하고 있다(엡 1:4, 3:11, 골 1:26, 벧전1:10-11. 참조: 요 1:1, 8:58). 이 점에 대해,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교리는 형이상학적 명상이라기보다는 구속의 평범한 사실들로부터 얻어진 확증적 추론이다.”⑧라고 올바르게 설명하고 있다.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본래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J. Calvin)⑨ 신의 영적인 영광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사셨다(A. Deissmann).⑩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에 대해,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가장 완전히 계시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즉,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셨다(골 1:15).”⑪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이란 그분의 성육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완전하게 계시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선재하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 바르트(K. Barth)는 “처음이요 마지막인 영원하며 타락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영역으로부터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⑫라고 하였다. 이 사건, 즉 성육신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긍정이요, 역사 안에서의 구체적인 구원 행위의 효시이며, 인류의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이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셨다는 사실(빌 2:6-8)보다 더 큰 영광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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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 Bultmann, op. cit., p. 293.
8) J. S. Stewart, op. cit. p. 316.
9) J. T. McNeill, ed.,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rian Religion, Vol. 1, translated and indexed by L. Battles(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3, 6th. Rep.), p. 465.
10) A. Deissmann, op. cit., p. 236.
11) J. S. Stewart, op. cit., p. 303.
12) K.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p.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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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방법은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이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는 “처녀 탄생”⑬을 암시하는 것(E. Huxtable)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처럼 인간성을 지니고 탄생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참조: 창 3:15).⑭}(갈 4:4의 주석).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으로 탄생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유대인들과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인 보편적인 양심의 법의 지배 아래 있는 이방인들을 위해 법 아래 오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아들을 보내신 목적에 대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5)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신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는 것(3:13의 주석을 보라.)과 속량하신 자들에게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아들의 명분이란 곧 양자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들에 대한 주님의 구원의 사랑을 말한 바울은 이제 그 사랑과 관련하여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ὧν πρώτός εἰμι ἐγώ)라고 고백하고 있다. 즉, ‘죄인 중에 내가 첫째이었다.’가 아니라, ‘죄인 중에 내가 첫째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은 깊은 죄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딤전 1:13, 고전 15:9, 갈 1:13, 엡 3:8 등. 참조: 롬 5:20). 그가 자신을 비난하는 죄들은 도덕법에 대한 죄들이라기보다는(참조: 빌 3:6) 진리와 빛에 대한 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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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O. A. Peper, 성령, 처녀 탄생, 돈, 전경연·강한표·이상택 역(서울: 향린사, 1973), pp. 65-66. 요한과 바울은 처녀 탄생에 대해서는 분명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지나치게 평가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다 자주 예수님의 선재성을 말하고 있고, 두 사람 다 성육신에 내포된 중대한 문제를 착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꽉 다문 침묵은 처녀 탄생을 불신임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은 두 사도의 글에 꽤 많이 의존했던 2세기의 문필가들이 처녀 탄생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료해진다.
14) M. Luther, J. Calvin, R. T. Stamm, W. Hendriksen, E. F. Harrison, 黑崎幸吉, 윤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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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는 자신이 죄 사함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이었고, 또 죄인이라는 사실도 잊을 수 없었다. 위대한 인간들은 죄의식 때문에 의기소침하거나 자포자기하는 대신에, 오히려 올바른 삶을 위한 자극제로 삼는다. 실제로 죄의식이 가져다 주는 유익은 모든 교만을 막아 겸손케 하고, 감사의 의식을 갖게 하며, 죄인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가능케 하고, 또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한 보다 성실한 노력을 하게 하는 것이다.
보함(Z. W. Borham)은 늙은 청교도인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이 그 아들에게 썼던 편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목사의 일에 냉담해지려고 할 때와 안식일의 아침이 돌아와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아무런 놀라움도 느끼지 못하게 될 때, 또는 성찬식을 집전하려고 할 때에 내가 어떻게 하곤 했는지 너는 아느냐? 나는 언제나 내 과거의 죄를 하나 하나 회상하고는 깨뜨려진 겸허한 마음으로 늘 돌아올 수 있었고, 그런 후에 마치 처음 설교가 그랬던 것처럼, 죄 사함을 설교하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⑮
그러한 의미에서 “현대 교회의 최대의 위기는 바로 죄악감의 결핍에 있는 것이다”(이상근).
바울은 다시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중에 첫째였던 자신이 받은 은혜를 고백한다.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일체 오래 참으심(τήν ἅπασαν μακροθυμίαν)이란 ‘모든 참으심’, ‘완전한 인내’를 뜻한다. 이는 구약성경의 용어로 하나님의 관용으로 처형을 연기하는 것을 가리킨다(이상근).
{마크로튀미안(μακροθυμίαν)의 근원적 의미는 사람에 대해 참는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매우 참을성이 강하여 불쾌하거나 심술궂거나 잔인한 대우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가르칠 수도 없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특질을 가진 마음과 생각이다. 마크로튀미안은 사람에 대한 인내심과 신뢰와 희망을 결단코 잃지 않는 정신이다”(W. Barclay)}(골 1:11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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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in W. Barc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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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마크로튀미안은 인간의 속성일 뿐 아니라 신적 속성이다. 즉, 그것은 인간에게(고후 6:6, 갈 5:22, 엡 4:2, 골 3:12, 13, 딤후 4:2)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롬 2:4, 9:22) 그리고 그리스도께(딤전 1:16) 돌려지는 것이다.
바울의 취지는 “내게 보이신 인내보다 더 큰 인내를 보이신 경우가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인내가 내게서처럼 전적으로 필요했던 죄인도 없었다”(H. D. M. Spence)라고 하는 것이다.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의 영생은 조엔 아이오니온(ζωὴν αἰώνιον)으로서 죽음(롬 6:22)과 멸망(갈 6:8)의 반대인 생명이다. 바울은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자가 받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음으로써 그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새사람의 “참 생명”(T. K. Abott)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생명은 과거와는 달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골 3:3. 참조: 요일 5:11-13). 다시 말하면, “그 생명은 실제적이고도 심오한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C. Vaughan, p. 172, A. Clarke)}(골 3:3의 주석).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이란 영적 지각과 영적 지식, 영적 판단과 영적 갈망, 영적 기쁨과 영적 능력 등을 소유한 자로서 성령을 좇아 영적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갈 5:16-17). 그는 여기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빌 3:20). 시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초월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으나 신령한 삶을 살며,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보존되어 있는 참 그리스도인을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생명은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되어 누릴 영원한 생명이므로, 세상에서 이 생명의 은혜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 생명을 부여하고(요 6:33-, 8:12, 20:31), 또 누리게 하시는 이는 절대적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다(요 1:4, 14:6, 행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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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M. Dibelius: D 사본에는 ἀθάτος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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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은 휘포튀포신(ὑποτύπωσιν)으로서 본래 개요 또는 완전한 그림과 대조되는 초벌 그림을 뜻하였다. 여기서 ‘모범’, ‘본’, ‘모형’, ‘표본’, ‘견본’ 등의 뜻을 갖게 되었다. 즉, 바울은 죄인이 경험할 수 있는 자비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설교가요 유례 없는 찬미가 작가였던 존 뉴톤(John Newton)은 ‘존 뉴톤 클레크(John Newton Clerk), 한때는 이교도였으며 아프리카의 노예였지만,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말미암아 보호받고 구속받고 용서받아서 오랜 세월 동안 멸망시키고자 힘을 다하던 바로 그 신앙을 설교하도록 임명받았다.’라는 내용의 비문을 직접 만들었다.”(W. Barclay).
끝으로,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가를 돌린다. 【17】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이와 비슷한 영광의 찬가는 6:16, 디모데후서 4:18, 로마서 11:36, 16:27, 갈라디아서 1:5, 에베소서 3:21, 빌립보서 4:20 등에도 나타난다.
만세의 왕(τῷ βασιλεί τών αἰώνων)은 이곳과 요한계시록 6:10에만 보이지만, 칠십인역에는 자주 나타나는 히브리식 표현이다(출 15:18, 삼상 13:13, 시 9:7, 28:10, 73:12, 144:13, 145:10. 또, 토비트서 13:6, 10).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를 포함하는 영원을 지배하시는 ‘영원하신 왕’이시라는 뜻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145:13)라고 하였다.
만세의 왕에 대해 바울은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히브리 사상에 근거한 기독교 신관이다”(W. Hendriksen).
썩지 아니하고는 아프타르토(ἀφθάρτῳ)⑯로서 ‘멸하지 않는’(롬 1:23), ‘죽지 않는’ 등을 의미한다. 즉, 영원토록 불변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이지 아니하고는 아오라토(ἀοράρτῳ)로서 하나님의 불가견성을 뜻하는 것이다(딤전 6:16, 요 1:18, 골 1:15, 히 11:27. 골 1:15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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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M. Dibelius: 대부분의 사본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K, P, L 사본 등에는 μόνῳ다음에 σοφῷ가 첨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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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W. Lock)은 “위의 두 속성은 헬라의 철학적 신 개념으로도 나타나고 있다.”라고 하였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은 모노 테오(μόνῳ θεῷ)⑰로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뜻하는 것이다(신 6:4, 5, 사 40:12-31, 롬 16:27, 고전 8:4, 5). 즉, 하나님은 다른 대상과 비교될 수 있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 존재이심을 시사하는 것이다.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의 존귀와 ‘영광’(1:11의 주석을 보라.)은 신약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다(롬 2:7, 10, 히 2:7, 벧전 1:7, 벧후 1:17, 계 4:9, 5:12, 13, 7:12, 21:26). 이 두 가지로 하나님께 영원히 돌리는 송영도 신약성경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께 부여하는 존귀와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존귀와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성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 빛나는 것으로 구원의 목적과 결부되어 있는 존귀와 영광이다.
세세토록(εἰς τούς αἰώνας τών αἰώνων)은 영원을 뜻하는 것이다. “영원에 대한 생각이란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더없이 기쁜 것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여지없는 위협이 될 뿐이다”(J. A. Bengel).
아멘(ἀμήν)은 {‘견고하다’, ‘신실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 어원에서 온 말이다(P. E. Hughes)}(고후 1:20의 주석).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서약’, ‘진술’, ‘선언’ 등을 확인할 때 사용하였는데(민 5:22, 왕상 1:36, 렘 28:6), 그것이 예배 때에 기도에 동의를 표하는 회중의 응답으로 발전한 것이다(시 106:48, 느 8:6, Ⅱ 에스드라서 15:13, 18:6, 계 5:14, 7:12, 19:4). 또, 보통 문장의 서두에서 ‘진실로’, ‘참으로’, ‘정말로’라는 뜻으로, 그리고 ‘찬양’ 등의 끝에 기원을 나타낼 때에 사용되기도 하였다(계 3:14).
{쇠트겐(Schoettgen)은 이 말이 얼마나 미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입증하기 위하여 수많은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아멘을 말하는 자는 축복하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 “아멘을 말하는 자는 누구이든 그에게는 낙원의 문이 열리게 된다.” “아멘을 짧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날이 짧게 될 것이다. 반면에, 아멘을 분명하게 길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날이 길게 될 것이다.”}(고전 14:16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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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디모데전·후서·디도서·빌레몬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7
원문에는 내가 감사함은(카린 에코, χάριν ἔχω)이 첫머리에 있어 강조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어구는 바울 서신에서는 이곳과 디모데후서 1:3에만 사용되었는데, 대개의 경우에는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를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 사용된 카린(χάριν)은 문자적으로는 기뻐하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보다 더 강한 말이다. 따라서, ‘내가 기쁨에 넘쳐 감사함은’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나를 능하게 하신은 빌립보서 4:13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를 회상한 것 같다(딤후 2:1, 4:17, 행 9:22). 여기서의 기본적인 사고는 ‘사도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위한 능력을 주신’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결코 사도로서 행한 모든 능력을 자신의 인격이나 지혜나 노력의 소산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나를 능하게 하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1:2의 주석을 보라.)라고 밝혀 주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모든 능력을 자랑의 수단으로 삼는 대신에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는 감사하는 이유에 대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란 사실상 충성스럽지도 않고 신실하지도 못한 자신을 황공하게도 주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셨다는 뜻이다. 충성되지 않다고 하는 자를 충성되게 여기시고, 충성되다고 자처하는 자는 충성되지 않다고 하시며(마 25:21, 23), 또한 할 수 있다고 나설 때는 물리치시고, 할 수 없다고 물러설 때는 붙잡아 쓰시는 데(출 3장)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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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란 하나님께서 충성되게 여겨 주신 결과이다. 바울은 스스로 직분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직분을 맡겨 주신 주님께 그토록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한 사람 중에 바울만큼 자신의 직분에 대한 소명 의식이 투철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서신 첫머리에 자신이 하나님의 뜻, 또는 명령에 의해 사도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골 1:1, 딤전 1:1, 딤후 1:1. 단순히 사도나 종이라고 언급한 곳: 빌 1:1, 딛 1:1). 특히,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1:15-16)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핍박하던 시절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실상, 그의 출생과 성장 환경과 교육 등이 유대와 헬라 세계 양쪽에 다 익숙할 수 있었던 특이한 것이었는데, 이는 이방 사도의 사명을 맡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 수 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과오나 죄를 저지른 사람을 용서는 해도, 그의 과거의 죄나 과오 때문에 그에게 책임 있는 일을 맡기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을 용서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완성하도록 바울을 신임하여 직분을 맡기시기까지 하셨다.”라고 하였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는데, 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 자신의 인격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을 일꾼 되기에 충분케 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열정적인 사랑과 충성 때문이다.
직분은 디아코니안(διακονίαν)으로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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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자’, ‘일꾼’, ‘사자’, ‘사역자’(4:6, 마 20:26, 23:11, 막 10:43, 요 12:26, 롬 13:4, 16:1, 고전 3:5, 고후 3:6, 6:4, 11:15, 23, 엡 3:7, 6:21, 골 1:7, 23, 25, 4:7), ‘종’, ‘사환’, ‘하인’(마 22:13, 요 2:5, 9), ‘집사’(3:8, 12, 13, 빌 1:1) 등을 의미한다. 즉, 바울은 자신이 명예나 권위 또는 특권이 있는 직위로 임명되었다고 하는 대신에,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에게서 직분을 맡게 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자세로 일하였다.
(1) 자신의 직분을 자신의 능력에 따른 응분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2)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도구가 되도록 항상 노력하였다.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참조: 벧전 4:11)라고 했고,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고 하였다.
(3)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는 옥중에서도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라고 했고, 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라고 하였다.
(4) 상을 받기 위해 일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는 대로 상을 주실 것을 확신하였다(고전 3:8, 빌 3:14, 골 3:24).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곧 바리새인이었던 시절(빌 3:5)에 대해 【13】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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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방자는 블라스페몬(βλάσφημον)으로서 ‘하나님께 불경한 말을 하는 자’, ‘욕하는 자’, ‘악평하는 자’, ‘모독하는 자’ 등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이나 교리를 모독하는 자 곧 불경스런 말을 지껄이는 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얼레(R. Earle, p. 356)는 “아마도 이 말은 그가 새로운 종교 운동을 반대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의 이름을 저주했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제 그는 그것이 신성 모독이었음을 깨달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핍박자는 디오크텐(διώκτην)으로서 ‘각박히 따라가면서 괴롭히는 자’(이상근), ‘격렬하게 박해하는 자’를 뜻한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던 사실을 반복하여 고백하였다(행 22:2-21, 26:4-23, 고전 15:8-10, 갈 1:13, 23). 바리새인이었던 그는 유대교를 보호하려는 열의 때문에 기독교를 없애려고 결심하였던 것이다(빌 3:5, 6).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핍박자가 되도록 부추기기도 하였다(행 26:11).
포행자는 휘브리스텐(ὑβριστήν)으로서 ‘난폭한 자’, ‘거만한 자’를 뜻한다. 이 말의 동사는 악의를 품고 남을 경멸하며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롬 1:30). 바클레이(W. Barclay)는 “그는 거만하고 짐승과 같이 잔인무도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이다.……즉, 사람에게 잔인한 짓을 가해서 그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인간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실상, 바울은 교인들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행 22:4).
벤겔(J. A. Bengel)은 “첫째는 하나님께 대항한 것이고, 둘째는 다른 이들이 회개할까 걱정되어 거룩한 이들을 대항한 것이며, 셋째는 자신의 구원에 대항한 것이다.”라고 설명했지만, 반드시 그렇게 구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바울의 삼단 점층법으로 보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 록(W. Lock)은 “바울 사도가 흔히 사용하는 바와 같이, 이 점층법은 말에서부터 시작하여 율법에 의해 합리화 된 행동으로, 그 다음은 불법적인 폭행으로 진전되어 가는 상승적인 단계를 표현하는 용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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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엘레에텐, ἠλεήθην: 1:2의 주석을 보라.)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하였다. 그는 주님을 믿지 않은 것을 ‘무지’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살전 4:5, 엡 4:18, 행 17:23, 벧전 1:14). 이것은 그 당시의 다른 문헌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①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학문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경험적이거나 직관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다(고전 2:10, 요 14:26, 16:13).
아무튼, “저자가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해서 회심이 가지고 있는 은혜적 성격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바울로는 또한 은혜가 모든 계산과 기대를 초월할 정도로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G. Wetter)②.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14】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주의 은혜란 자기를 용서하시고, 게다가 사도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신의 주님을 향한 믿음(피스테오스, πίστεως: 1:2의 주석을 보라.)과 주님 및 인간을 향한 사랑(아가페스, ἀγάπης: 1:5의 주석을 보라.)에도 지극히 풍성하였다는 것이다.
바울의 독특한 표현인 그리스도 예수 안(ἐν χριστῷ Ἰησού), 또는 ‘그리스도 안’이란 그리스도와 성도의 영적 연합, 즉 신자가 그리스도께 접목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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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istides 17, 3; Justin Ap. Ⅰ. 12, 11; Athenagoras Suppl. 28, 2; Kerrgma Petr. 4; Act. Petr-p. 47, Lipsius.” in M. Dibelius.
2) in M. Dibel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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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바울은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와 함께’, 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A. Schweitzer).③ 또, “이 표현은 ‘성령 안에’와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A. Deissmann).④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며, 또 우리는 그분 안에서 복을 받아 누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안이야말로 신령한 복의 근원이요 통로요 영역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적 생활(지, 정, 의 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바울의 신비주의라고 한다. 그의 신비주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헬라적 신비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이 점에 대해 다이스만(A. Deissmann)이 잘 설명하고 있다.
(1) 전자는 반응 작용으로서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능동적 행위로서의 신비주의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해 오시는 것과 인간이 신에게 접근해 가는 것이다. 전자가 하나님의 선물 혹은 은혜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노력이 주도하는 신비주의이다.⑤
(2) 전자는 신비주의의 목적이 신과의 교제(communio)인 반면에, 후자는 일치(unio)이다. 즉, 하나님의 현존을 통한 인격의 성화와 인격의 상실이다. 전자가 신의 뜻을 향한 인간의 적응인 반면에, 후자는 신화(deification)이다. 사실상, 전자는 윤리적 열정주의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경건적 도취의 신비주의이다. 전자는 인격성의 부정이며, 후자는 인격성의 긍정이다.⑥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이란 단순히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참가한 신비한 연합을 요약하는 것으로, 그의 감정과 의지와 이성의 전 삶이 그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빈센트(Vincent)는 그리스도인이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마치 새가 공기 중에, 물고기가 수중에, 나무뿌리가 토양 속에 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골 1:2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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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trans. by W. Montgomery(London: Adam & Charles Black, 1956), pp. 122-124.
4) A. Deissmann, Paul, trans. by W. E. Wilson(Peter Smith, 1972), p. 139.
5) Ibid., p.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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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는 휘페레플레오나센(ὑπερεπλεόνασεν)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 외에 사용된 곳이 없다. 이 말은 ‘더하다’, ‘점점 더하다’, ‘풍성하다’, ‘풍부하다’를 뜻하는 플레오나조(πλεονάζω)에 ‘그 이상으로’의 뜻인 휘페르(ὑπέρ)를 덧붙여 뜻을 강하게 한 것으로 바울이 종종 쓰는 수법이다.
바울은 넘치는 감격으로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하였다. 원문에는 “이 말씀은 신실하고,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πιστὸς ὁ λόγος καὶ πάσης ἀποδοχής ἄξιος)로 되어 있다.
미쁘다……이 말이여(πιστὸς ὁ λόγος)는 목회서신에만 나오는 표현으로(딤전 3:1, 4:9, 딤후 2:11, 딛 3:8) ‘신실하도다 이 말씀이여’, 또는 ‘신뢰할 만하도다 이 말씀이여’, 또는 ‘이 말씀은 신실하다’ 등으로 번역된다. 특히, 이 구절과 4:9에서는 보편타당성을 뜻하는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 첨가되어 더욱 강조적인 성격을 띤다.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는 신실한 말씀의 내용에 대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표현은 곧 복음의 핵심이다(참조: 마 1:21, 요 1:9, 3:16, 19, 6:14, 10:36, 11:27, 12:46 등). 디벨리우스(M. Dibelius)는 “이 구절은 복음서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라기보다는 교회 전승의 문구들을 전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다 죄인(하마르톨루스, ἁμαρτωλοὺς: 1:9의 주석을 보라.)이지만(롬 3:9-18), 자기가 죄인인 줄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힘입어 구원받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 사람의 구주이시지만, 특별히 믿는 사람들의 구주이시다(딤전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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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Ibid., pp. 150-151. 참조: A. Schweitzer, op. cit., pp. 373-374. 윤리적인 면을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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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임하셨다는 표현은 “본래 선재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쉽게 그 사상과 연결될 수는 있다(요 3:17)”(M. Dibelius). 실상, 이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선재를 전제하는 것이다(롬 1:3, 8:3, 고전 8:6, 고후 8:9, 빌 2:6-8, 골 1:15-17). 바울은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해 갈라디아서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이라고 설명하였다.
불트만(R. Bultmann)은 “바울은 예수께서 인간이 되셨고, 지상에 사셨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갖는다.”⑦라고 하지만, 실제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전 구원 과정의 근본적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를 주장하고 있다(엡 1:4, 3:11, 골 1:26, 벧전1:10-11. 참조: 요 1:1, 8:58). 이 점에 대해,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교리는 형이상학적 명상이라기보다는 구속의 평범한 사실들로부터 얻어진 확증적 추론이다.”⑧라고 올바르게 설명하고 있다.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본래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J. Calvin)⑨ 신의 영적인 영광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사셨다(A. Deissmann).⑩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에 대해,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가장 완전히 계시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즉,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셨다(골 1:15).”⑪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이란 그분의 성육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완전하게 계시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선재하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 바르트(K. Barth)는 “처음이요 마지막인 영원하며 타락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영역으로부터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⑫라고 하였다. 이 사건, 즉 성육신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긍정이요, 역사 안에서의 구체적인 구원 행위의 효시이며, 인류의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이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셨다는 사실(빌 2:6-8)보다 더 큰 영광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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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 Bultmann, op. cit., p. 293.
8) J. S. Stewart, op. cit. p. 316.
9) J. T. McNeill, ed.,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rian Religion, Vol. 1, translated and indexed by L. Battles(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3, 6th. Rep.), p. 465.
10) A. Deissmann, op. cit., p. 236.
11) J. S. Stewart, op. cit., p. 303.
12) K.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p.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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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방법은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이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는 “처녀 탄생”⑬을 암시하는 것(E. Huxtable)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처럼 인간성을 지니고 탄생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참조: 창 3:15).⑭}(갈 4:4의 주석).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으로 탄생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유대인들과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인 보편적인 양심의 법의 지배 아래 있는 이방인들을 위해 법 아래 오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아들을 보내신 목적에 대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5)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신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는 것(3:13의 주석을 보라.)과 속량하신 자들에게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아들의 명분이란 곧 양자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들에 대한 주님의 구원의 사랑을 말한 바울은 이제 그 사랑과 관련하여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ὧν πρώτός εἰμι ἐγώ)라고 고백하고 있다. 즉, ‘죄인 중에 내가 첫째이었다.’가 아니라, ‘죄인 중에 내가 첫째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은 깊은 죄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딤전 1:13, 고전 15:9, 갈 1:13, 엡 3:8 등. 참조: 롬 5:20). 그가 자신을 비난하는 죄들은 도덕법에 대한 죄들이라기보다는(참조: 빌 3:6) 진리와 빛에 대한 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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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O. A. Peper, 성령, 처녀 탄생, 돈, 전경연·강한표·이상택 역(서울: 향린사, 1973), pp. 65-66. 요한과 바울은 처녀 탄생에 대해서는 분명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지나치게 평가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다 자주 예수님의 선재성을 말하고 있고, 두 사람 다 성육신에 내포된 중대한 문제를 착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꽉 다문 침묵은 처녀 탄생을 불신임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은 두 사도의 글에 꽤 많이 의존했던 2세기의 문필가들이 처녀 탄생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료해진다.
14) M. Luther, J. Calvin, R. T. Stamm, W. Hendriksen, E. F. Harrison, 黑崎幸吉, 윤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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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는 자신이 죄 사함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이었고, 또 죄인이라는 사실도 잊을 수 없었다. 위대한 인간들은 죄의식 때문에 의기소침하거나 자포자기하는 대신에, 오히려 올바른 삶을 위한 자극제로 삼는다. 실제로 죄의식이 가져다 주는 유익은 모든 교만을 막아 겸손케 하고, 감사의 의식을 갖게 하며, 죄인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가능케 하고, 또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한 보다 성실한 노력을 하게 하는 것이다.
보함(Z. W. Borham)은 늙은 청교도인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이 그 아들에게 썼던 편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목사의 일에 냉담해지려고 할 때와 안식일의 아침이 돌아와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아무런 놀라움도 느끼지 못하게 될 때, 또는 성찬식을 집전하려고 할 때에 내가 어떻게 하곤 했는지 너는 아느냐? 나는 언제나 내 과거의 죄를 하나 하나 회상하고는 깨뜨려진 겸허한 마음으로 늘 돌아올 수 있었고, 그런 후에 마치 처음 설교가 그랬던 것처럼, 죄 사함을 설교하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⑮
그러한 의미에서 “현대 교회의 최대의 위기는 바로 죄악감의 결핍에 있는 것이다”(이상근).
바울은 다시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중에 첫째였던 자신이 받은 은혜를 고백한다.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일체 오래 참으심(τήν ἅπασαν μακροθυμίαν)이란 ‘모든 참으심’, ‘완전한 인내’를 뜻한다. 이는 구약성경의 용어로 하나님의 관용으로 처형을 연기하는 것을 가리킨다(이상근).
{마크로튀미안(μακροθυμίαν)의 근원적 의미는 사람에 대해 참는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매우 참을성이 강하여 불쾌하거나 심술궂거나 잔인한 대우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가르칠 수도 없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특질을 가진 마음과 생각이다. 마크로튀미안은 사람에 대한 인내심과 신뢰와 희망을 결단코 잃지 않는 정신이다”(W. Barclay)}(골 1:11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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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in W. Barc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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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마크로튀미안은 인간의 속성일 뿐 아니라 신적 속성이다. 즉, 그것은 인간에게(고후 6:6, 갈 5:22, 엡 4:2, 골 3:12, 13, 딤후 4:2)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롬 2:4, 9:22) 그리고 그리스도께(딤전 1:16) 돌려지는 것이다.
바울의 취지는 “내게 보이신 인내보다 더 큰 인내를 보이신 경우가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인내가 내게서처럼 전적으로 필요했던 죄인도 없었다”(H. D. M. Spence)라고 하는 것이다.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의 영생은 조엔 아이오니온(ζωὴν αἰώνιον)으로서 죽음(롬 6:22)과 멸망(갈 6:8)의 반대인 생명이다. 바울은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자가 받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음으로써 그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새사람의 “참 생명”(T. K. Abott)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생명은 과거와는 달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골 3:3. 참조: 요일 5:11-13). 다시 말하면, “그 생명은 실제적이고도 심오한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C. Vaughan, p. 172, A. Clarke)}(골 3:3의 주석).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이란 영적 지각과 영적 지식, 영적 판단과 영적 갈망, 영적 기쁨과 영적 능력 등을 소유한 자로서 성령을 좇아 영적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갈 5:16-17). 그는 여기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빌 3:20). 시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초월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으나 신령한 삶을 살며,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보존되어 있는 참 그리스도인을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생명은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되어 누릴 영원한 생명이므로, 세상에서 이 생명의 은혜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 생명을 부여하고(요 6:33-, 8:12, 20:31), 또 누리게 하시는 이는 절대적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다(요 1:4, 14:6, 행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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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M. Dibelius: D 사본에는 ἀθάτος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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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은 휘포튀포신(ὑποτύπωσιν)으로서 본래 개요 또는 완전한 그림과 대조되는 초벌 그림을 뜻하였다. 여기서 ‘모범’, ‘본’, ‘모형’, ‘표본’, ‘견본’ 등의 뜻을 갖게 되었다. 즉, 바울은 죄인이 경험할 수 있는 자비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설교가요 유례 없는 찬미가 작가였던 존 뉴톤(John Newton)은 ‘존 뉴톤 클레크(John Newton Clerk), 한때는 이교도였으며 아프리카의 노예였지만,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말미암아 보호받고 구속받고 용서받아서 오랜 세월 동안 멸망시키고자 힘을 다하던 바로 그 신앙을 설교하도록 임명받았다.’라는 내용의 비문을 직접 만들었다.”(W. Barclay).
끝으로,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가를 돌린다. 【17】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이와 비슷한 영광의 찬가는 6:16, 디모데후서 4:18, 로마서 11:36, 16:27, 갈라디아서 1:5, 에베소서 3:21, 빌립보서 4:20 등에도 나타난다.
만세의 왕(τῷ βασιλεί τών αἰώνων)은 이곳과 요한계시록 6:10에만 보이지만, 칠십인역에는 자주 나타나는 히브리식 표현이다(출 15:18, 삼상 13:13, 시 9:7, 28:10, 73:12, 144:13, 145:10. 또, 토비트서 13:6, 10).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를 포함하는 영원을 지배하시는 ‘영원하신 왕’이시라는 뜻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145:13)라고 하였다.
만세의 왕에 대해 바울은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히브리 사상에 근거한 기독교 신관이다”(W. Hendriksen).
썩지 아니하고는 아프타르토(ἀφθάρτῳ)⑯로서 ‘멸하지 않는’(롬 1:23), ‘죽지 않는’ 등을 의미한다. 즉, 영원토록 불변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이지 아니하고는 아오라토(ἀοράρτῳ)로서 하나님의 불가견성을 뜻하는 것이다(딤전 6:16, 요 1:18, 골 1:15, 히 11:27. 골 1:15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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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M. Dibelius: 대부분의 사본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K, P, L 사본 등에는 μόνῳ다음에 σοφῷ가 첨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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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W. Lock)은 “위의 두 속성은 헬라의 철학적 신 개념으로도 나타나고 있다.”라고 하였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은 모노 테오(μόνῳ θεῷ)⑰로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뜻하는 것이다(신 6:4, 5, 사 40:12-31, 롬 16:27, 고전 8:4, 5). 즉, 하나님은 다른 대상과 비교될 수 있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 존재이심을 시사하는 것이다.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의 존귀와 ‘영광’(1:11의 주석을 보라.)은 신약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다(롬 2:7, 10, 히 2:7, 벧전 1:7, 벧후 1:17, 계 4:9, 5:12, 13, 7:12, 21:26). 이 두 가지로 하나님께 영원히 돌리는 송영도 신약성경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께 부여하는 존귀와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존귀와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성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 빛나는 것으로 구원의 목적과 결부되어 있는 존귀와 영광이다.
세세토록(εἰς τούς αἰώνας τών αἰώνων)은 영원을 뜻하는 것이다. “영원에 대한 생각이란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더없이 기쁜 것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여지없는 위협이 될 뿐이다”(J. A. Bengel).
아멘(ἀμήν)은 {‘견고하다’, ‘신실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 어원에서 온 말이다(P. E. Hughes)}(고후 1:20의 주석).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서약’, ‘진술’, ‘선언’ 등을 확인할 때 사용하였는데(민 5:22, 왕상 1:36, 렘 28:6), 그것이 예배 때에 기도에 동의를 표하는 회중의 응답으로 발전한 것이다(시 106:48, 느 8:6, Ⅱ 에스드라서 15:13, 18:6, 계 5:14, 7:12, 19:4). 또, 보통 문장의 서두에서 ‘진실로’, ‘참으로’, ‘정말로’라는 뜻으로, 그리고 ‘찬양’ 등의 끝에 기원을 나타낼 때에 사용되기도 하였다(계 3:14).
{쇠트겐(Schoettgen)은 이 말이 얼마나 미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입증하기 위하여 수많은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아멘을 말하는 자는 축복하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 “아멘을 말하는 자는 누구이든 그에게는 낙원의 문이 열리게 된다.” “아멘을 짧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날이 짧게 될 것이다. 반면에, 아멘을 분명하게 길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날이 길게 될 것이다.”}(고전 14:16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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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디모데전·후서·디도서·빌레몬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7
아멘.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디모데전서 1:12-17의 주경신학적 연구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