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2:13-17(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문제)의 주경신학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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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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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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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마 22:15-22, 눅 20:20-26>
그닐카(J. Gnilka, 하권, p. 202)는 “단화의 서두를 개정했는데, 어떻게 개정했는지는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불트만(R. Bultmann)은 “13절을 마가의 편집 서두로 보면, 전체는 통일적으로 구상되고, 탁월하게 형성된 ‘아포프테그마’(주 198을 보라.)이다. 이것을 교회의 작품으로 생각할 근거는 없다.”①라고 하였고, 또한 “이미 구전으로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②라고 하였다. 山口 昇은 “이 전승의 역사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다.
마가는 이 단화를 【13】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로 시작한다.
저희는 예수님의 권위 문제로 따지다가 실패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11:27의 주석을 보라). 그들은 악의를 성취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끈질기게 시도하였다. 이제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었다.
책잡으려 하여는 아그류오(ἀγρεύω)의 부정 과거(기동상의) 능동태 가정법 삼인칭 복수인 아그류소시(ἀγρεύσωσι)이다. 물고기를 잡거나 짐승을 사냥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비열하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사냥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선민의 지도자들인 교권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도 모르고, 오히려 그분의 말씀을 사냥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바리새인(2:16의 주석을 보라.)과 헤롯당(3:6의 주석을 보라.)의 야합은 전에도 있었다(3:6).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선택되어 파견된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해, 마가는 【14】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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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R. Bultmann, op. cit., p. 28. 그러나 “로마이어는 ‘라삐적인 방식에 따른 가르침의 대화’라고 한다”(in J. Gnilka, 하권, p. 202, 주 4).
2) R. Bultmann, op. cit., p.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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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여(디다스칼레, διδάσκαλε)는 아주 적합한 호칭이었다. 복음 전도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4:38, 5:35, 9:17, 38, 10:17, 20, 35, 요 3:5 등). 사실상, 예수님 자신도 가르치시는 일이 자신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임을 말씀하셨다(14:49. 참조: 마 26:55, 눅 21:37, 요 18:2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이시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요 1:18, 3:34, 8:28, 12:49).
심부름꾼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해 아는 바를 말하였다.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그들이 제시할 질문이 진지하고 성의 있는 질문인 듯이 가장하려는 외식의 발언이다”(마경일). 뒤에서는 예수님을 책잡아 제거하기 위해 온갖 증오와 저주를 말하던 입술이, 앞에서는 놀라운 아첨의 입술이 된 것을 볼 때, 야고보의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약 3:10)를 연상하게 된다.
이상근 님은 “‘참되시고······참으로’는 하나님의 속성이었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다(행 10:34).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말이다. 반대당들도 이와 같은 사실을 은근히 인정했던 것이다.”라고 하는데, 앞부분의 설명은 타당하나,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했다고 하는 뒷 부분의 설명은 옳지 않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찬사조차도 도전적이고, 책잡으려는 의도라고 바르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실과 공평무사 그리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것을 꼬투리 삼아 어떻게든 자기들의 질문에 긍정이나 부정의 어느 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 점은 그들이 책잡으러 왔다는 것과 15절의 “예수께서 그 외식을 아시고”로도 뒷받침된다.
외모로 보지의 원문(βλέπεις εἰς πρόσωπον ἀνθρώπων)은 직역하면 ‘사람의 얼굴, 또는 사람의 탈을 본다’이다(참조: 레 19:5, 신 10:17, 욥 34:19, 대하 19:17, 잠 24:23, 행 10:34, 엡 6:9, 골 3:25, 약 2:9). 그러므로 이 말은 사람을 대할 때에 인간의 영혼이나 인격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외적 조건들인 종족, 성, 재산의 다소, 지위의 높고 낮음, 지식의 유무 등으로 차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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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죄 중 하나는, 인간을 그 자신으로가 아닌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데 있다. 이러한 세상적 판단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문제에 소홀하거나 무관심하게 되고, 또한 자신의 성장보다는 자신의 것들을 갖추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부수적인 것들 때문에 본질을 상실해 버린 인간의 비극이 매우 큰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들처럼 인간의 외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 중심에 있다(삼상 16:7). 시편 기자는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 51:6)라고 하였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다(빌 22:5).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인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비천한 모양(종의 형체: 빌 2:7③)으로 오셨고, 세리와 창기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병약한 자들의 벗이 되셨으며, 가장 흉측한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운명하셨다.
대적자들의 말대로, 예수님은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관점으로 인간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항상 유의하며 살아야만 한다. 실제로 그렇게 산 대표적 인물로 바울을 들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은 종족과 성 그리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선교의 대상이었다.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다의 하나님의 도(τὴν ὁδὸν τού θεού)는 유대교적 율법 해석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들의 실천적 생활을 율법의 정신에 따라 규제하려는 가르침이다(J. Gnilka, 하권, p. 203).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행위의 방도, 즉 백성들이 사고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W. Hendriksen)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말은 주님 예수께서 가르치시는바 그 자신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복음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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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자의 빌립보서 2:5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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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들은 교활한 속셈을 드러내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204)는 “이 문제는 주후 6년, 헤롯의 무능한 아들 아켈라오(Archelaos)가 퇴위되고, 코포니우스(Coponius)가 로마 총독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유대 지방에서 제기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예수께 한 질문의 간교한 의도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가이사(Καίσαρι: 최초의 로마 황제의 이름이었는데 ‘황제’의 뜻으로 사용됨) 곧 로마 황제에게 바친 이 세(켄손, κήνσον)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 세금(켄손, κήνσον)은 “14세부터 65세까지의 모든 남자와 12세부터 65세까지의 모든 여자에게 부과된 인두세이었으며, 액수는 1데나리온(denarius: 로마의 은화로 로마 병정의 하루 급료, 또는 농원 자유 노동자의 하루 임금)으로”(W. Barclay) “일 년에 한 번 내는 것이었다”(F. C. Grant). 특히, “이 인두세는 로마 제국의 국고로 바로 들어갔다”(W. Hendriksen).
세금으로 바쳐지는 로마 은화(데나리온)에는 “모든 신성을 자신에게 돌리며, 정치적인 면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 있어서까지도 최고의 권위(최고의 제사장)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황제[가이사]의 상이 새겨져 있었고, 또한 그 세금이 유대인들에게 속국 백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에, 세금 납부④는 자유를 애호하는 경건한 많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었다”(W. Hendriksen).
특히, 바리새인들에게서 반발이 더 심했던 반면에, 헤롯당은 대체로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그 밖에 유다(Judas)를 중심으로 갈릴리인들 사이에 일어난 젤롯당(열성당) 운동은 신학적 문제로 삼았다”(J. Gnilka, 하권, p. 204). 이 점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코포니우스가 재직할 때, 유다라는 사람이 ‘로마인들에게 세금을 바치고, 하나님 외에 어떤 유한한 통치자를 인정하는 것은 반역죄라고 선언함으로써,’ 갈릴리 주민들에게 로마에 반항할 것을 촉구하였다.”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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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W. Barclay: 부과된 실제의 세금에는 인두세 외에도 지조와 소득세가 있었다. 지조(地租)는 모든 곡물의 10분의 1과 포도주와 과일의 5분의 1을 바치는 세금이었다. 일부는 현물로, 일부는 돈으로 냈다. 소득세는 수입의 100분의 1을 바치는 세금이었다(마가복음의 주석).
5) W. Hendriksen: 유대 전쟁사, II, 117-118과 유대 고대사, XVIII, 1-10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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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배경 때문에, 예수님이 긍정을 하시든지 부정을 하시든지 곤경에 처하시게 되어 있었다.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신학적인 문제와 함께 일반 백성들에게서 나쁜 평판을 얻게 되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몰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과 정면 충돌이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헤롯당과 충돌이 된다.
그들은 의기양양하여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이 경우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의표를 찌르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15】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외식함(휘포크리신, ὑπόκρισιν)은 7:6의 주석을 보라.
질문 자체만 보면, 예수님의 대답대로 순종하려는 것 같지만, 실은 순종할 마음도 순종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들의 속뜻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과 그들의 마음은 정반대이었다. 이 가증스런 위선을 아신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페이라제테, πειράζετε: 1:13의 주석을 보라.)라고 책망하시면서 세금을 낼 때 쓰는 로마 은화인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자신에게 보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그들의 주머니에서 그 은화가 나오도록 요구하신 것은, 그들이 이미 이 은화를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암암리에 그들에 대한 로마 황제의 권세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W. W. Wessel, W. Hendriksen). 게다가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세금을 바치고 있었다.
은화를 가져온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질문과 그들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 【16】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통치자인 티베리우스(Tiberius: 로마 제 2대 황제. 재위: 14-37년) 때에 나온 데나리온의 표면에는 월계관(신적인 신분의 상징)을 쓴 황제의 흉상이 있었고, ‘황제 티베리우스, 신적인 아우구스투스의 거룩한 아들’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이라는 글과 신들의 보좌에 앉은 황태후 리비아가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올림피아의 긴 홀이 있었고, 그 왼쪽에는 올리브나무의 가지가 있어서 그녀를 천상적인 평화의 화신으로 나타내고 있었다.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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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조: W. Barclay,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p. 2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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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화폐관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잘 설명하고 있다.
(1) 화폐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누구나 한 나라를 정복했을 때나 반란에 성공했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 그것만이 왕권과 권력의 최종적인 보증이었다.
(2) 화폐가 통용되는 곳에서는 주권이 잘 유지되었다. 어느 왕의 지배의 범위를 알려면, 그의 화폐가 통화로서 효력이 있는 지역을 알면 되었다.
(3) 화폐에는 왕의 흉상과 명각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왕의 소유물, 또는 그 개인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고대의 화폐관에 입각해 볼 때,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라고 질문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 의도를 알 리가 없는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 【17】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1) 우파에 속한 사람들은 반 젤롯당적으로 해석한다. 즉, 예수님은 이 대답으로써 혁명에 반대했다는 것이다(Jeremias, Theologie I, 220).⑦
(2) 좌파에 속한 사람들은 이 대답에 젤롯당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즉, 이 말씀은 황제의 머리에 있는 왕관을 내리치는 곤봉과도 같다는 것이다(H. Ibsen, Stauffer).⑧
(3) 세상의 의무는 이 세상의 지배자에게 하고, 하나님의 것인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⑨
(4) 세금을 시인하고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나, 단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한계가 설정된다. 모두가 복종해야 할 하나님이 분명하게 강조되어 있다. 결국은 국가도 인간도 다 하나님께 속하므로, 국가와 하나님의 요구가 상반될 경우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우선되어야 한다(참조: 딤전 2:1-6, 딛 3:1-2, 벧전 2:13-17. 특히, 저자의 롬 13:1-7의 주석을 보라).⑩
다수의 학자들의 견해인 (4)설이 가장 그럴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예수께서 로마 황제의 식민 통치나,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정당시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질문에 국한하여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이시며 평화의 주로 오셨고,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 후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그 대답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을 당황하게 만드셨으므로, 그들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길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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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in J. Gnilka, 하권, p. 206.
8) 상동.
9) E. P. Gould, E. Bickersteth, “Plummer”(in C. E. G. Swift), C. E. G. Swift, 米田豊.
10) J. A. Bengel, W. Hendriksen, W. Barclay, C. R. Erdman, W. L. Lane, E. Schweizer, R. A. C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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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마가복음(서울: 글벗사, 2006, 3판 1쇄), pp. 523-530.
그닐카(J. Gnilka, 하권, p. 202)는 “단화의 서두를 개정했는데, 어떻게 개정했는지는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불트만(R. Bultmann)은 “13절을 마가의 편집 서두로 보면, 전체는 통일적으로 구상되고, 탁월하게 형성된 ‘아포프테그마’(주 198을 보라.)이다. 이것을 교회의 작품으로 생각할 근거는 없다.”①라고 하였고, 또한 “이미 구전으로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②라고 하였다. 山口 昇은 “이 전승의 역사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다.
마가는 이 단화를 【13】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로 시작한다.
저희는 예수님의 권위 문제로 따지다가 실패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11:27의 주석을 보라). 그들은 악의를 성취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끈질기게 시도하였다. 이제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었다.
책잡으려 하여는 아그류오(ἀγρεύω)의 부정 과거(기동상의) 능동태 가정법 삼인칭 복수인 아그류소시(ἀγρεύσωσι)이다. 물고기를 잡거나 짐승을 사냥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비열하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사냥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선민의 지도자들인 교권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도 모르고, 오히려 그분의 말씀을 사냥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바리새인(2:16의 주석을 보라.)과 헤롯당(3:6의 주석을 보라.)의 야합은 전에도 있었다(3:6).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선택되어 파견된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해, 마가는 【14】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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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R. Bultmann, op. cit., p. 28. 그러나 “로마이어는 ‘라삐적인 방식에 따른 가르침의 대화’라고 한다”(in J. Gnilka, 하권, p. 202, 주 4).
2) R. Bultmann, op. cit., p.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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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여(디다스칼레, διδάσκαλε)는 아주 적합한 호칭이었다. 복음 전도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4:38, 5:35, 9:17, 38, 10:17, 20, 35, 요 3:5 등). 사실상, 예수님 자신도 가르치시는 일이 자신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임을 말씀하셨다(14:49. 참조: 마 26:55, 눅 21:37, 요 18:2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이시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요 1:18, 3:34, 8:28, 12:49).
심부름꾼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해 아는 바를 말하였다.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그들이 제시할 질문이 진지하고 성의 있는 질문인 듯이 가장하려는 외식의 발언이다”(마경일). 뒤에서는 예수님을 책잡아 제거하기 위해 온갖 증오와 저주를 말하던 입술이, 앞에서는 놀라운 아첨의 입술이 된 것을 볼 때, 야고보의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약 3:10)를 연상하게 된다.
이상근 님은 “‘참되시고······참으로’는 하나님의 속성이었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다(행 10:34).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말이다. 반대당들도 이와 같은 사실을 은근히 인정했던 것이다.”라고 하는데, 앞부분의 설명은 타당하나,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했다고 하는 뒷 부분의 설명은 옳지 않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찬사조차도 도전적이고, 책잡으려는 의도라고 바르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실과 공평무사 그리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것을 꼬투리 삼아 어떻게든 자기들의 질문에 긍정이나 부정의 어느 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 점은 그들이 책잡으러 왔다는 것과 15절의 “예수께서 그 외식을 아시고”로도 뒷받침된다.
외모로 보지의 원문(βλέπεις εἰς πρόσωπον ἀνθρώπων)은 직역하면 ‘사람의 얼굴, 또는 사람의 탈을 본다’이다(참조: 레 19:5, 신 10:17, 욥 34:19, 대하 19:17, 잠 24:23, 행 10:34, 엡 6:9, 골 3:25, 약 2:9). 그러므로 이 말은 사람을 대할 때에 인간의 영혼이나 인격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외적 조건들인 종족, 성, 재산의 다소, 지위의 높고 낮음, 지식의 유무 등으로 차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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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죄 중 하나는, 인간을 그 자신으로가 아닌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데 있다. 이러한 세상적 판단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문제에 소홀하거나 무관심하게 되고, 또한 자신의 성장보다는 자신의 것들을 갖추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부수적인 것들 때문에 본질을 상실해 버린 인간의 비극이 매우 큰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들처럼 인간의 외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 중심에 있다(삼상 16:7). 시편 기자는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 51:6)라고 하였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다(빌 22:5).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인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비천한 모양(종의 형체: 빌 2:7③)으로 오셨고, 세리와 창기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병약한 자들의 벗이 되셨으며, 가장 흉측한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운명하셨다.
대적자들의 말대로, 예수님은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관점으로 인간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항상 유의하며 살아야만 한다. 실제로 그렇게 산 대표적 인물로 바울을 들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은 종족과 성 그리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선교의 대상이었다.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다의 하나님의 도(τὴν ὁδὸν τού θεού)는 유대교적 율법 해석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들의 실천적 생활을 율법의 정신에 따라 규제하려는 가르침이다(J. Gnilka, 하권, p. 203).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행위의 방도, 즉 백성들이 사고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W. Hendriksen)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말은 주님 예수께서 가르치시는바 그 자신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복음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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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자의 빌립보서 2:5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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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들은 교활한 속셈을 드러내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204)는 “이 문제는 주후 6년, 헤롯의 무능한 아들 아켈라오(Archelaos)가 퇴위되고, 코포니우스(Coponius)가 로마 총독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유대 지방에서 제기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예수께 한 질문의 간교한 의도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가이사(Καίσαρι: 최초의 로마 황제의 이름이었는데 ‘황제’의 뜻으로 사용됨) 곧 로마 황제에게 바친 이 세(켄손, κήνσον)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 세금(켄손, κήνσον)은 “14세부터 65세까지의 모든 남자와 12세부터 65세까지의 모든 여자에게 부과된 인두세이었으며, 액수는 1데나리온(denarius: 로마의 은화로 로마 병정의 하루 급료, 또는 농원 자유 노동자의 하루 임금)으로”(W. Barclay) “일 년에 한 번 내는 것이었다”(F. C. Grant). 특히, “이 인두세는 로마 제국의 국고로 바로 들어갔다”(W. Hendriksen).
세금으로 바쳐지는 로마 은화(데나리온)에는 “모든 신성을 자신에게 돌리며, 정치적인 면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 있어서까지도 최고의 권위(최고의 제사장)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황제[가이사]의 상이 새겨져 있었고, 또한 그 세금이 유대인들에게 속국 백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에, 세금 납부④는 자유를 애호하는 경건한 많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었다”(W. Hendriksen).
특히, 바리새인들에게서 반발이 더 심했던 반면에, 헤롯당은 대체로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그 밖에 유다(Judas)를 중심으로 갈릴리인들 사이에 일어난 젤롯당(열성당) 운동은 신학적 문제로 삼았다”(J. Gnilka, 하권, p. 204). 이 점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코포니우스가 재직할 때, 유다라는 사람이 ‘로마인들에게 세금을 바치고, 하나님 외에 어떤 유한한 통치자를 인정하는 것은 반역죄라고 선언함으로써,’ 갈릴리 주민들에게 로마에 반항할 것을 촉구하였다.”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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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W. Barclay: 부과된 실제의 세금에는 인두세 외에도 지조와 소득세가 있었다. 지조(地租)는 모든 곡물의 10분의 1과 포도주와 과일의 5분의 1을 바치는 세금이었다. 일부는 현물로, 일부는 돈으로 냈다. 소득세는 수입의 100분의 1을 바치는 세금이었다(마가복음의 주석).
5) W. Hendriksen: 유대 전쟁사, II, 117-118과 유대 고대사, XVIII, 1-10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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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배경 때문에, 예수님이 긍정을 하시든지 부정을 하시든지 곤경에 처하시게 되어 있었다.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신학적인 문제와 함께 일반 백성들에게서 나쁜 평판을 얻게 되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몰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과 정면 충돌이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헤롯당과 충돌이 된다.
그들은 의기양양하여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이 경우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의표를 찌르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15】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외식함(휘포크리신, ὑπόκρισιν)은 7:6의 주석을 보라.
질문 자체만 보면, 예수님의 대답대로 순종하려는 것 같지만, 실은 순종할 마음도 순종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들의 속뜻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과 그들의 마음은 정반대이었다. 이 가증스런 위선을 아신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페이라제테, πειράζετε: 1:13의 주석을 보라.)라고 책망하시면서 세금을 낼 때 쓰는 로마 은화인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자신에게 보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그들의 주머니에서 그 은화가 나오도록 요구하신 것은, 그들이 이미 이 은화를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암암리에 그들에 대한 로마 황제의 권세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W. W. Wessel, W. Hendriksen). 게다가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세금을 바치고 있었다.
은화를 가져온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질문과 그들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 【16】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통치자인 티베리우스(Tiberius: 로마 제 2대 황제. 재위: 14-37년) 때에 나온 데나리온의 표면에는 월계관(신적인 신분의 상징)을 쓴 황제의 흉상이 있었고, ‘황제 티베리우스, 신적인 아우구스투스의 거룩한 아들’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이라는 글과 신들의 보좌에 앉은 황태후 리비아가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올림피아의 긴 홀이 있었고, 그 왼쪽에는 올리브나무의 가지가 있어서 그녀를 천상적인 평화의 화신으로 나타내고 있었다.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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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조: W. Barclay,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p. 2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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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화폐관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잘 설명하고 있다.
(1) 화폐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누구나 한 나라를 정복했을 때나 반란에 성공했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 그것만이 왕권과 권력의 최종적인 보증이었다.
(2) 화폐가 통용되는 곳에서는 주권이 잘 유지되었다. 어느 왕의 지배의 범위를 알려면, 그의 화폐가 통화로서 효력이 있는 지역을 알면 되었다.
(3) 화폐에는 왕의 흉상과 명각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왕의 소유물, 또는 그 개인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고대의 화폐관에 입각해 볼 때,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라고 질문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 의도를 알 리가 없는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 【17】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1) 우파에 속한 사람들은 반 젤롯당적으로 해석한다. 즉, 예수님은 이 대답으로써 혁명에 반대했다는 것이다(Jeremias, Theologie I, 220).⑦
(2) 좌파에 속한 사람들은 이 대답에 젤롯당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즉, 이 말씀은 황제의 머리에 있는 왕관을 내리치는 곤봉과도 같다는 것이다(H. Ibsen, Stauffer).⑧
(3) 세상의 의무는 이 세상의 지배자에게 하고, 하나님의 것인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⑨
(4) 세금을 시인하고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나, 단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한계가 설정된다. 모두가 복종해야 할 하나님이 분명하게 강조되어 있다. 결국은 국가도 인간도 다 하나님께 속하므로, 국가와 하나님의 요구가 상반될 경우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우선되어야 한다(참조: 딤전 2:1-6, 딛 3:1-2, 벧전 2:13-17. 특히, 저자의 롬 13:1-7의 주석을 보라).⑩
다수의 학자들의 견해인 (4)설이 가장 그럴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예수께서 로마 황제의 식민 통치나,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정당시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질문에 국한하여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이시며 평화의 주로 오셨고,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 후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그 대답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을 당황하게 만드셨으므로, 그들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길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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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in J. Gnilka, 하권, p. 206.
8) 상동.
9) E. P. Gould, E. Bickersteth, “Plummer”(in C. E. G. Swift), C. E. G. Swift, 米田豊.
10) J. A. Bengel, W. Hendriksen, W. Barclay, C. R. Erdman, W. L. Lane, E. Schweizer, R. A. C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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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마가복음(서울: 글벗사, 2006, 3판 1쇄), pp. 523-530.
아멘.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막 12:13-17(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문제)의 주경신학적 연구를 보시고,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