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지지자들이 말하는 ‘포용’의 성경적 의미]

작성자
박온순
작성일
2021-04-29 22:35
조회
614
Ⅰ. 서론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들은 목사일지라도 단어를 선택함에 있어 인문학적인 접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퀴어축제에서 목사 가운을 입고 축도한 아무개는 그의 페북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혐오와 차별이 아닌 ⚫ 환대 ⚫ 포용⚫ 평등 ⚫ 존엄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이고 우리는 현 시점의 시대정신을 쥐고 있다. 우리가 옳고 그들의 생각이 후졌다 반드시 (후대에라도) 그 후진 생각은 바뀐다.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추후 한국교회는 이 일련의 일들을 부끄러운 역사로 기억하고 반성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후졌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으며 자신들은 시대정신을 쥐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면서 이 후진 생각은 후대에라도 바뀔 것이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오늘의 일들(동성애를 반대한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견이 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목사라는 이름으로 행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행하는 일들은 반 성경적이고 반 기독교적인 일탈로 밖에 볼 수 없다. 그 이유에 대한 것은 논지를 전개해 감에 있어 밝힐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사상들이 전통적인 기독교를 도전하고 있으나 이는 개인이거나 뜻을 같이하는 복수의 소견일 뿐 진리가 아니다. 진리가 아닌 인간의 소견은 그것이 ‘신학’이라는 그럴싸한 명제를 차용할지라도 얼마가지 않아 열매도 없이 세상만 시끄럽게 할 뿐 바람에 날리는 티끌과 같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수없이 보아 왔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종교사적으로 수 없이 스쳐 지나간 이단들의 사상이 그 좋은 예가 아니겠는가.

퀴어축제에서 축도한 아무개가 차용한 단어들을 살펴보자. '환대‘, ‘포용’, ‘평등’, ‘존엄’이라는 단어들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에 대한 개념을 1차 적으로 국어사전적인 의미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이는 성경적인 개념과 의미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단어를 차용하여 실현해보고자 하는 이의 저변의 의도는 이웃을 위한 좋은 마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는 의미에서 그 개념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인문학적인 개념을 포함하여 기록된 말씀대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인간이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주셨지를 살펴보고, 그 결국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자들과 확연히 다른 것임을 밝혀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포용의 개념

국어사전에서 ‘포용’에 대하여 “남을 너그럽게 감싸 주거나 받아들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포용’의 개념을 이해할 때 “동성애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충분히 반문할 만하다. 또한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의 성적취향에 대해 인정해 주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더 인격적인 것이 아닌가” 라고 일반인들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그렇게 이해하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겠으나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그러한 논리를 따르며 가르침과 방향을 교인들에게 제시한다면 이는 기독교의 이름을 빌어 사기를 치는 일이요, 많은 영혼을 유린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도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성경적인 기독교가 아니다.

모든 기구와 공동체 안에는 기준이 있다. 국가는 백성들의 안녕과 질서를 위하여 제정된 헌법이 있다. 그 헌법은 모든 판결의 중요한 가치와 기준으로서 법관은 어떤 사건을 판결함에 있어 법전을 가장 우선하여 연구하고 그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야 할 것이다. 생명을 다루는 의학은 어떠한가? 이제 갓 입학한 의대생이 의학사전을 무시하고 지도교수의 가르침도 무시하며 자기 마음대로 신체를 해부하고 수술하며 환자를 돌보겠다고 나서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는?

그런데 어떤 목사라는 자에게는 성경도, 성경을 근거로 한 공동체 안의 약속인 법(교리와 장정)도 없다. 자기가 했으면 그것이 법이고 진리인 냥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낯이 얼마나 두꺼운지 거룩하신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무지함에 대하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퀴어축제에 가서 목사의 가운을 입고 축도한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방송은 물론 기회만 있으면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떠들고 있다.

이 자에 의하면 그동안의 가치로 여겼던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자신은 신천지(?)를 발견한 개척 자 인 냥 뻔뻔하게 떠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노라니 역한 감정은 나만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도 기가 막혀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외면들 하고 계신 걸까?

더욱 가관인 것은 그를 앞세워 떠들어 대는 이들이다. 선배랍시고 스승이랍시고 기회는 이때다 싶어 성경을 기준으로 삼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을 온갖 악한 말들로 매도하며 자기들 안에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에 대하여 심히 궁금한 것이 있다. 이들은 도대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하여 무엇이라 설교를 하고 삶으로 살아내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기독교는 인간의 어떤 사상이나 가치를 절대화 하는 종교가 아니다. 비록 “신학”이라는 거창한 명제 하에 이루어지는 일이라 할지라도 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버리고 자기의 소견을 절대화 한다면 이는 이단사상일 수밖에 없다.

“남을 감싸주고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것은 좋은 것이나 이러한 이론과 주장은 꼭 기독교가 아니어도 세분화된 인문학에서 얼마든지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노력을 하였어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방법에 의하여 해결할 수 있도록, 진정한 ‘포용’은 물론 ‘수용’과 있는 그대로 ‘용납’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 ‘용납’을 넘어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초청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내게 하는 능력을 힘입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며, 성경을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목사의 이름으로 그러한 진리를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그러한 일을 감당할 것이 아니라면, 왜 목사가 되었을까? 세상에서 해결하지 못해 교회(목사)를 찾아 온 이들에게 또 다시 인문학적인 방법으로 인도하려 하였다면 왜 목사가 되었는지 그 의도가 참으로 궁금하다. 차라리 다른 직업을 선택하였더라면 누군가 전도해 주어 자신의 영혼이나마 구원 받을 기회라도 있었을 것인데.

2. 예수님이 행하신 ‘포용’의 사례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과 본체와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죄인일지라도 “용납”하시나 선행하신 것이 있다.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시고 포용하셨으나 먼저 하신 일이 있다는 말이다. 그 사례를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논지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1) 찾아 가셨다

예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세상에 계신 분(요1:1-3, 8:58; 골1:13-17)으로서 사람의 모든 행사를 알고 계신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 세상에 오셔서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살 수 밖에 없는 여인을 찾아가셨다. 성경은 이 여인이 살고 있는 지역을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요4:5a)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여인은 출생 시 부터 유대인에게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사마리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선택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그 거룩하시고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시더니 모든 이들이 비루하다고 여기는 그 여인을 찾아가셨다.

2) 결핍을 직면하게 하셨다.

이 여인은 늘 목마름 속에 살던 여인이다.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현재의 남편도 정상적인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요4:17-18)

다섯 명의 남성과 사랑에 빠져봤으나 떳떳하지 못한 사랑, 그 모든 사랑을 버리고 현재의 남자를 선택하였으나 여전히 드러낼 수 없는 관계, 어쩌면 이러한 관계는 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동성애자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당당하게 사랑하지 못하고 숨어 사랑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모든 상황과 환경을 직면하게 하셨다. 직면해야만 치유가 일어나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들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동성애에 빠져 있는 이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면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성경에도 없는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변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못할 일이 없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동성애도 하나님이 창조 하신 것이다"라고 하니 세상에 어떤 이단이 동성애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가. 그리고는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며, 반동성애의 입장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방법대로 동성애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별 한다”, “혐오 한다”라는 자의적인 해석으로 동성애자들과의 관계를 오히려 이간질 하고 있다.

3) 온전히 수용하셨다.

예수님은 수가 성 여인이 자신의 실존적 상황을 볼 수 있도록 “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명하신다. 이 여인에게 있어 남편이라는 존재는 있으나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는 존재요, 기쁨을 주는 존재인 것 같으나 혹독한 대가 지불을 해야만 하는 존재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남편”이라는 숨기고 싶은 존재를 건드린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폐쇄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근원을 알고 계셨으며 여인의 고통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신 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또한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은밀히 행해지는 일들에 대하여 해결이 되어야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너무도 잘 아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사랑자체이신 그분의 성품에 의한 것이다. 비난하거나 정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없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정죄하실 수 있고 죄인인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정죄하실 자격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정죄가 목적이 아니라,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영원히 감추고 싶은 수치를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삶을 살아내기를 열망하게 된다. 진리의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까닭에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기를 바라는 거룩한 열망이 불타오르게 된다. 죄를 미워하고 악을 멀리하며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온전한 용납과 수용은 확실히 차원이 다르다. 그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경험한 그 은혜의 자리로 초청하여 온전한 치유를 받도록 돕고 싶은 것이다. 누리고 있는 자유함을 함께 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포용’은 내면의 고통을 간과하고 건드리지 않는다. 이것이 동성애를 지지하는 자들과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자들과의 간극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용’과 ‘용납’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되 자신의 내면에 움트고 있었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온전하게 하신다. 그 결과를 보자

4) 약함이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되었다.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이 분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과 다른 것을 느끼게 된다. 자신 안에 감추고 싶은 것들을 다 드러내게 하셨으나 수치를 유발하거나 정죄 감을 갖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분임을 믿게 된다. 그리고는 폐쇄적인 삶에서 감추고 싶었던 과거로부터 벗어나오게 된다.

이 여인은 자신의 과거를 전제 물로 삼아 생명을 구원하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그가 동네 사람들을 찾아 하는 말을 들어보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8-30)

3. 동성애를 지지하는 자들의 문제 점

위에서 살펴 본 바 예수님이 찾아가신 여인은 동성애에 빠져 있는 이들보다 더 나은 환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살던 인생은 세월이 갈수록 목마름은 더해만 갔고 그가 물을 길러 간 시간대가 정오(요4:6b)인 것을 보더라도 사람들과의 접촉을 거부하며 자기 세계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여인을 주님은 빛의 세계로 인도하신 것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자들은 동성애에 빠진 자들의 실상을 직면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눈을 가리는 가림 막 역할을 하고 있다. 볼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들은 그것을 ‘포용’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위장하고 있으나 겉에 쓴 글자만 ‘포용’일 뿐이지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로 올 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 있어 영원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자들이다.

심지어 목사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일이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치료받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야 하는데 동성애자들을 ‘환대’하고 ‘포용’한다는 미명하에 예수님의 이름을 차용할 뿐 오히려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필요하면 성경을 가차 없이 난도질 한다. 그러니 어찌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을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목사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아니더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적으로라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목사의 이름으로 그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사람을 만들어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양심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Ⅲ. 결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으로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 우리 피조물들과는 다른 분이시기에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며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예수님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악이 전혀 없으시며 거짓이 없으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예수님도 그러하시다. 또한 하나님은 그 능력이 무한하셔서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나 죄를 묵인하시는 분은 아니다.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기를 바라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인간 편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회개다. 회개란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 회개도 가능하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데 어찌 회개가 필요하겠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선물로 보내 주셨듯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셔야 내가 죄인인 것도 깨달아지고 성경의 말씀도 믿어지는 것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들은 그것이 죄라고 깨달아지기 까지 하나님의 이름이거나 예수님의 이름이거나 성경을 논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여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은 반 기독교적이며 반 성경적인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들로서 천국 문을 가로 막고 있어 나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어떤 이단들보다 더한 위험한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직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회개할 마음을 부어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가난한 심령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내 영혼의 실상을 보게 해달라고
식음을 전폐하고서라도 구해야 한다.

그리할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그 거룩한 소망을 들어 주실 것이다.

아직도 은혜가 풍성하신 우리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들에게
복된 만남이 있기를 소망하면서.

내 삶의 전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미말의 종 박온순이 ~
2021년 04월의 끝 날에.

전체 2

  • 2021-04-30 09:51
    목사님 슬퍼지네요
    같은 신학교에서 같은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더더군다나 우리들의 신앙적 최고의 교수님은 바로 예수님 이실텐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이렇게 다를수가 있을까요 정말 걱정입니다 얼마안가서 저들은 예수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할 자들이 아닌가 십습니다.

    • 2021-04-30 10:41
      맞습니다. 장로님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복음은 복잡한 것도 아닌데, 인간의 얕은 사고를 성경보다 우위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긴 까닭에 혼잡하게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더욱 잘 알 수 있는 도구로 주셨건만 헛된 사상을 설파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사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세상의 초등학문과 같은 지식으로 신묘막측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학교를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제가 어린시절 가정에서 부모(장로/권사)님으로 부터 성경을 배우지 않았다면 신학교에서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헛된 사상에 물들어 세상을 요란하게 하는 자의 반열에 수를 더하였을 것입니다.

      이 시대 살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음을 겸비하여 주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님이 심렴마다 임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신학생들마다, 목회자들마다, 성도들마다
      새로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
      장로님 이를 위해 기도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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