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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같은 자의 것인 하나님 나라(순수, 단순, 겸손 등이 아닌데...)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1-04-27 09:48
조회
609
<마가복음 10:13-16>

13사람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 시작하는 말

제가 전속 필진이었던 온맘닷컴의 유머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차를 타고 가던 남자가 물을 만났습니다. 물의 깊이를 몰라 망설이던 남자는 옆에 있던 한 자그마한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저 도랑이 깊으냐?” 아이가 “아니요. 아주 얕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자는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말을 믿고 그대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러나 차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겨우 물에서 나온 남자는 아이에게 화를 냈습니다. “이놈아! 깊지 않다더니 내 차가 통째로 가라앉았잖아! 어른을 놀려?” 그러자 자그마한 어린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습니다. “어, 이상하다! 아까는 오리 가슴밖에 안 차던데…”
물을 만한 사람에게 묻지 않고,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선행은 불행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교역자와 교인 사이에 벌어지면, 복과 화,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멸망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2.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

유대 아이들은 주로 회당에서 랍비에게 축복을 받았는데, 대개 랍비는 아이들을 축복할 때에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 왔습니다. 손을 대거나 말씀으로 치유와 축귀의 기적을 행하고,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다고 소문난 예수님의 축복 기도를 아이들에게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헬라어 파이디아(παιδία)는 여섯 살부터 열네 살까지의 아동을 뜻하는데, 누가복음에는 갓난아기를 뜻하는 브레페(βρέφη)로 되어 있습니다. 축복받을 아이의 나이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고려할 때, 갓난아기부터 14세 아동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데려온 것으로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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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에는 평소에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던 부모들도 자녀들을 데리고 산과 들, 고궁과 관광지, 극장과 운동장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혹은, 자녀들을 백화점에 데려가서 수십만 원짜리 게임기 같은 값비싼 선물도 해 줍니다. 자녀를 뒷바라지 하느라 식당 일이나 파출부 일을 하는 주부들도 있고, 자녀에게 값비싼 교육을 시키려고 부정축재를 하는 지도층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모들이 과거 어느 때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물질 사랑을 쏟고, 헌신적으로 돌보는데도 자녀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한마디로, 자녀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자녀 사랑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가장 큰 사랑은, 자녀를 주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부모는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자녀와 주 예수님의 만남을 도모해 주는 중개 역할을 잘하는 부모입니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iln)은 켄터키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성경을 링컨에게 읽어 주고, 자기도 읽으면서 신앙을 심어 주었습니다. 9살 때 그 어머니가 죽으면서, “아버지와 누나의 말을 잘 듣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라고 유언했습니다. 그 후에 계모가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계모도 링컨을 신앙으로 키웠습니다. 링컨의 전기를 쓴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링컨이 위대한 인물이 될 만한 조건을, 하나님은 한 가지도 주시지 않았다. 다만 링컨에게 빈곤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를 주셨다.”
예수님의 축복을 바라서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본 제자들은, 그 부모와 아이들을 꾸짖으면서 막았습니다. 딴은 그런 제자들의 행동에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들이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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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하는 위대한 예언자가 아이들로 인해 하시는 일에 방해를 받거나,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복음의 교훈은 아이들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는, 고대 사회의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상당히 낮은 신분에 속했고, 개체 인격이라기보다는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취급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아이들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부모나 어른들과 함께 오는 아이들을 막으면서, 그들 모두를 꾸짖는 제자들을 보시고는 분노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나름대로 주 예수님을 위한다고 하는 일이, 오히려 주 예수님의 분노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 예수님을 위하는 선의의 행위가 주 예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거나, 주 예수님의 분노를 초래하는 것이거나,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내 뜻은 물론, 내 선의라 하더라도, 다 유보하고, 창조주요 섭리자요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성육이신 주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잠언 3:6을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주 하나님을 인정하려면, 평소에 기도와 말씀에 착념해야 합니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심령에 충만히 채워 감으로써, 매양 생각하는 것이나 일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말씀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거든다고 하면서 주님을 분노케 해서야 되겠습니까?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뜻은 ‘우선적으로 어떻게 이성적 판단을 실천할 것인가?’에 집중되고, 주 예수님의 뜻은 ‘우선적으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성적 판단이 사람마다 다르고, 상반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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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는 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에게 분노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실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강림과 복음 선포로 본격화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므로,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는 말씀은 잘못 이해되고,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격으로 아이들의 순수함, 천진함, 단순함, 겸손, 정직성, 순종 등을 내세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아이들의 성장과 변화의 가능성을 내세우신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인간의 자격 조건 내지는 자격 요소로 이해하는 모든 견해는 다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 3:10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들의 무력함, 의존성을 내세우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 또는 영생이란 인간의 노력이나 힘이나 공로 등으로 얻거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모든 것을 성취해 놓으신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8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율법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유대교의 지도자로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전파하던 교인들을 핍박하고 잔해하다가,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 깨닫고 한 단언이라는 데 중대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라는 말씀이 그토록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잘못 알려진 이유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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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말씀을 종합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나 들어갈 자는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고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받들어 섬기거나, 받들어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받들지 않는 자”의 “받들지”는 오역입니다. 원어는 ‘받아들이다’를 의미하는 덱세타이(δέξηται)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가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거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힘이나 자격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임을 자각하고,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대로 행하며 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구원을 얻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죄인과 창기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충격적인 사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양심을 따른 행위이든 윤리적 행위이든 어떤 종교적 행위이든 율법 행위이든 간에, 인간의 힘이나 노력에 의해 구원받으려는 시도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메시아 약속을 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3. 맺음말

지옥으로 끄는 죄의 사함과 말씀을 순종해 사는 성결한 삶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구원에 있어서 어린아이들처럼, 무능하고 무력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대속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양육과 지도 아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 착념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양육과 지도를 따르는 생활을 할 때에, 우리의 신앙 인격과 생활을 통해서 자녀들도 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모두가 주님의 품에 안겨서, 주님의 축복하시는 안수기도를 받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설교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설교집 28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전체 6

  • 2021-04-27 11:16

    오늘도 감사합니다.
    제목을 통해 말씀하시되 어린 아이의 '순수, 단순, 겸손' 등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맺음말에 "어린아이들처럼, 무능하고 무력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대속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 하심 또한 매우 의미 있음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의문이란 이런 것입니다.
    1) 과연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음이라는 복음을 진실하게 믿을 수 있을까요?
    2) 또 그와 같이 단순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뜻을 진실로 믿을 수 있을까요?
    3) 또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진심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 놓을 수 있음일까요?

    어른이 됨으로 항상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그때는 그랬는데..... 그때는 이랬지... 라고 할 때 과연 성인이 된 사람들이 잃어버린 어린시절의 그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것이 순수함, 단순함, 그리고 겸손은 아닐까요?
    성인이 된 목사와 장로들 가운데 아직도 자신이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과 단순한 영혼과 겸손한 삶의 모습을 갖고 있음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외람되지만 최세창 글러버님은 어떠신지 묻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의 엉뚱함이 있습니다.
    그 엉뚱한은 깊은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오리 가슴밖에 차지않던데... 라고 하는 거짓말과 같은 이야기로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과연 그것이 진정 거짓말일까요? 어른이 보기엔 그것이 거짓말이라 생각할 수 있고 어른이 보기엔 어린 아이의 사악함이라 볼 수 있으며 어른이 보기엔 그것은 어른을 놀려 먹으려는 어린 아이의 장난처럼 보여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의 눈에는 그리 보였을 뿐 입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와의 대화는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단순함과 겸손을 이해하고 있었어야 했을 것 입니다.
    즉 “얘야, 저 도랑이 깊으냐?” 아이가 “아니요. 아주 얕아요.”, "그래? 넌 그것을 어떻게 아는데?", "아 그것은 조금 전에 오리들이 물 위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어요.", "아니 오리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넌 어떻게 물 속 깊이를 어찌 알 수 있음이니?", "아 그거요. 제가 보니까 물이 오리의 가슴 정도 밖에 차지 않더라구요. 그러니 물이 깊지 않을 거예요?"," 아 그렇구나! 그러면 너는 이 도랑을 오리처럼 건널 수 있니?", "아니요. 전 못 건너요.", "아니 왜? 물속 깊이가 오리 가슴 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헤헤헤 아저씬 바보예요? 오리에겐 그렇다는 것이지 우리 사람들에겐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아마 아저씨도 수영을 잘 하지 못하면 도랑에 빠져 죽을 수도 있을 거에요. 그러니 전 건너지 않을 거예요. 하하하 참 이상한 아저씨네...", "아 그렇구나! 아저씨가 좀 바보같은 질문을 네게 했구나! 그래 고마워...나도 너처럼 오리가 아니니 도랑에 들어가면 안되겠구나!", "네 맞아요. 아저씬 오리가 아니니 이 도랑을 오리처럼 건너려 한다면 죽을지도 몰라요. 오리에겐 얕은 물이지만 사람에겐 매우 깊을 거예요. 그러니 조심하세요!"라고 하였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어린 아이의 엉뚱함은 그 아이의 눈에만 보이는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잃어 버린 엉뚱함인데 이 엉뚱함이 곧 어린 아이들만이 볼 수 있는 또 다른 세상 입니다.
    순수하고 단순하도 겸손한 아이들만이 볼 수 있는 세상, 이것이 바로 동화의 세상일 수도 있고, 마법의 세상일 수도 있으며, 하늘을 날고 고래가 하늘을 날기도 하고, 차들이 땅속 깊은 곳으로 하늘 높은 곳으로 자유롭게 다니는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어린 아이들이 갖을 수 있는 상상력입니다. 그 상상령은 어른들이 볼 때는 매우 엉뚱한 표현이기도 하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기도 하며 비과학적인 상상력이기도 합니다.

    전 이러한 상상력이 어린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상적인 세상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천국도 이런 상상력을 갖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순수함과 단순함 및 겸손을 갖은 자들만이 천국을 볼 수 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에 대하여 보다 더 정확히 표현을 한다면 성령의 감동을 따라 세상의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천국을 알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들의 것임이라"고 말입니다.

    이를 뒤짚어 생각해보면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의를 위해 핍박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심령이 가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리 가슴 만큼 물이 깊다고 함으로 어른들에게 "사악하다. 거짓말을 한다. 장난질이 심하다."고 핍박을 받게 됨입니다.
    그러니 인용하신 이야기의 끝에 “어, 이상하다! 아까는 오리 가슴밖에 안 차던데…”라고 하지 않고 "하하하 아저씬 바보 같아요. 오리에게 가슴 깊이라 하였음인데... 아저씨가 오리예요? 오리도 아닌데 왜 오리처럼 행동을 하려 하세요? 하하하"라고 하였을 겁니다.

    결국 “어, 이상하다! 아까는 오리 가슴밖에 안 차던데…”이라 표현을 한 것은 어른들을 놀리고 싶은 어른의 생각으로 만든 유머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니 그는 심령이 가난하지 않음일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사람들을 놀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음일 것이며, 자신에게 있는 천국을 그들에게도 전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통해 회심한 이들이 회복되어지는 어린 아이와 같은 은혜로운 마음이며 거듭난 자의 영혼(순수함, 단순함, 겸손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 글러브 입니다.


    • 2021-04-27 12:13

      필자의 설교에 관심을 보이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성경 본문에 대한 노재신 목사님의 설교나 주석을 소개하면 좋을 것입니다.


  • 2021-04-27 13:33

    귀한 말씀입니다.
    270만 대한민국 초등학생 중 이제 교회학교에 나오는 어린이 10% 시대...이들 중 거듭난 어린이, 예수님과 함께 사는 비밀을 간직한 어린이(골1:27)는 과연 몇명일까요? 그렇습니다. 미래가 암울하죠? 다시 복음으로 재건해야 합니다. 이름하여 <성경적 교회학교>, 코로나 종식되면 바로 다시 세우기 들어가야 합니다. 한국교회, 축복합니다.


    • 2021-04-27 13:54

      필자의 설교를 귀한 말씀으로 여기시고, 좋은 의견을 표하셔서 감사합니다.


  • 2021-04-30 11:45

    아멘..


    • 2021-04-30 12:50

      필자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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