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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헌과 제천제일교회에 대하여 = 민족신학의 아버지.

작성자
민관기
작성일
2021-04-03 12:42
조회
743
충북연회원에게 드리는 글

[탁사 최병헌 빛이 되다]
생몰일 : 1858. 1. 26~1927. 5. 13

1. 나는 충북 제천출신이다. 1888년경 과거를 보았다 낙방한 후 감리교회 선교사 존스를 만나 어학 선생이 된 후 1893년 세례를 받고 전도사가 되었다. 1902년 목사안수를 받고 1914년까지 상동교회와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14년부터 서울과 인천지역의 감리교회 지도자인 감리사로 활동하다 은퇴하고. 1922년부터는 감신에서 교수로 1927년까지 하다 하늘빛이 되었다.

또한, 독립협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단체 활동과 신학월보, 성서번역 그리고 (서강교회)서강여학교 및 양로원의 설립 하였다. 그리고 나의 집에선 손기정 선수가 함께 살았다.
*. 나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07년 나의 고향 제천에 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안 믿어진다고? 그냥 믿기 바란다. 나 아니면 할 자가 없으니 말이오.

2. 나를 3단계로 구분해 볼 테니 잘 살펴 보시오.
*. 1902년과 14년까지 개교회 담임목회
*. 14년 이 후 감리사 시절
*. 22년부터 감신 교수 시절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나는 감리회 선교사들인 존스, 아펜젤러, 그리고 스크랜튼, 헐버트와 노블 하디가 주요 파트너였다.
1) 먼저 존스는 나의 어학 제자로 나를 예수께로 처음 인도한 분으로 우리 조국의 해외 독립운동 기지중 제일 안정된 미주 기지를 만들도록 안내해준 최고의 공로자이다.
*. 하와이 노동이민으로 대한인 7200여 명 이민시 현순, 홍승하 목사와 여전도사 파견하여 지도케 하여 결국 그 들이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자라났다. 자신의 교인 보냈다고 욕 무척 먹었다.

2) 아펜젤러는 내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성서번역작업을 함께 하므로써 대한인들이 언어생활과 문자생활을 완전히 통일시키는데 최고의 공로자라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아펜젤러는 배재안에 삼문출판사를 세워 한글 보급이 각종 문서를 통해 급속하게 이루어지게 하여 국민의 민도는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상승하였다. 민지의 폭발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이 민족운동의 기초 자양분이었고 아펜젤러는 본인의 나라처럼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 나라로 만들고 싶은 야망이 있었기에 독립신문에 민주공화정과 입헌군주제 그리고 절대군주제의 차이를 보도하므로 민주공화정 대통령제를 대한인들의 마음에 심기 시작했다.
이 일에 그런 열성을 다하던 아펜젤러는 1902년 불의로 사고로 순직했다.
나는 그가 담임하던 정동제일교회로 전임하여 왔다.
*. 언어와 문자생활의 일치화가 가져오는 현상
*. 민주공화정은
-. 독립신문 보도 후(1887년)
-. 신민회의 강령으로(1907년)
-. 상해 임정 정체로(1919년)
-. 대한민국 정체(1948년)로 결정되는 경로를 거쳐 60년만에 지금 우리에게 이다.

3) 나는 상동교회에 시무하던 때에 스크랜튼 선교사와 활동을 하였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스크랜튼 선교사는 실로 놀라운 능력을 가진이 이다. 알렌이 자신의 자금으로 병원을 운영하지 않고 국가에서 국왕이 주는 자금으로 병원을 유료양반의료로 운영하는데, 반해 스크랜튼은 자신의 자금으로 무료민중의료를 시행했다. 더구나 민중중의 민중인 여성과 어린아이만을 위한 전용병원인 보구여관을 운영하였으며, 서울과 지방의 선교사업을 총괄하고, 아현과 동대문, 평양, 원산에 까지 감리교회 의사를 파견하여 대한인들을 돌보고, 배재와 이화를 돌보고 감리교회 목회자 양성 사업인 신학회 책임, 성서번역 작업과 출판으로 대한인의 민지 발굴에 열성을 다하였다.
= 다만, 의사였였기에 환자들을 실제로 돌보아야 했기에 시간산으로 너무 부족하여 실제론 직책만 맡았고 실무는 타인(노블)이 하였다.

스크랜튼 선교사의 우리 민족에 특기할 공적은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근거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곳은 상동의 시장터로 대한의 민중들이 수다하여 전덕기와 같은 형제를 민족운동가로 키우더니 그곳에 수 천 수 만의 대한인들이 모여들게 하고(교회, 병원, 학교, 기관 등인 협성부인학원, 시병원, 신민회, 신흥무관학교, YMCA 등) 그 곳에 민족의 핵심 인자들을 숨겨 양성하는 그야말로 귀신도 모르게 왜정을 속이는 방법으로 민족운동을 촉진시켰다. 어떤 이유로 그는 스크랜튼은 상동교회를 사임하면서도 상동교회의 담임자가 전덕기 목사가 되게 하여 민족운동의 더 큰 진전을 도왔다.
*. 10년 늦게 들어온 조국의 형제교단 남감리회에 온정을 베풀어
-. 자신의 전도인 김흥순 보내주기
-. 선교지 한국은행 자리 알선.
-. 원산, 개성의 선교지 양보
-. 북남감리교회와 모든 사업에서 협력(신학교의 구성과 운영 등)
*. 양대인과 대한인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데 의료만한 것이 없다. 교육도 중요하지만 당장 아픈 이들을 치료하므로 얻은 대한인들의 호의는 대단한 것이었고, 심지어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도 양이들이 대한인을 무료로 치료하여 준다는 정보를 접하고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었다가 척양은 빼고 척왜의 기치만 든 것에서 스크랜튼의 공은 절대적이다. 곧, 한미민간동맹의 굳건한 기초를 제공했다. 민간동맹이 한미군사동맹화(6.25와 UN군 등)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긴 오해와 과도 다대하다.
결론은 우리가 감리교회 한미민간동맹의 사실 자체를 잊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냥 선교사가 복음전해주었으니 고마운 줄로만 알았던 과오이다. 너무 단순화해서 탈이었다.
그런 차원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 1905년 이 후 대한인은 1945년까지 공식적인 외교권을 가지고 외교권을 행사하진 못했다.
물론, 외교권을 잃었음과 왜적들의 침략이나 지배권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 어머니와 합동으로 달성이 교회 즉 구 상동교회를 건축하였다. 전덕기는 이를 바탕으로 교인을 2,300여 명까지 늘렸고, 대한민국 건국의 핵심 인사 거의 모두를 이곳을 통해 양성할 수있게 하였다.

4) 헐버트는 상동교회 시절 그가 협성부인학원의 교수와 YMCA설립과 초대 이사장을 하여 대한의 청년들의 웅지를 펼칠 기지를 건설하였다. 나와 전덕기 목사가 이에 협력하였다. 그리곤 동대문 교회의 담임으로 전임하여 가니 그 곳 또한 설립은 스크랜튼, 운영은 헐버트로 감리교회 선교 종합 타운이 완성되었다. 황제의 특사로 활동한 건 다 아는 바이고, 우리 민족의 승전 후인 1949년 승전일을 기념해 국빈으로 방문하였다가 서거하셨다.
*. 건국훈장 독립장과 금관문화훈장을 동시에 추서받은 유일한 인사이다.

5) 하디이다. 하디는 우리 민족의 영성운동을 이끈 이로 1907년부터 감신의 교수로 일하기 시작하였고 나는 목회직을 은퇴하고 22년부터 교수로 활동했다. 교장은 하디가 하였다.
나와 하디는 정말 열심히 감리교회 목사들을 민족운동가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각종 교과서나 학생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조달하여 애쓴 결과 감신을 졸업한 학생들은 한결같이 민족을 위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고 주님 나라건설에 매진하는 목회자로 성장하였다.
*. 지도자의 지도자를 양성한 지도자이다.
-. 원초 : 하나님
-. 초대 : 무스(남감리회 감독으로 하디의 영성운동 및 모든 활동을 돕고 지도하였다)
-. 2대 : 하디
-. 3대 : 감리회 목회자
-. 4대 : 목회자 지도받는 평신도 지도자
-. 5대 : 평신도 지도자 지도받는 평신도.
[반면, 북감리회 감독 해리스는 이등박문과 짜고 스크랜튼과 전덕기 등의 민족운동을 방해하고 박해하여, 스크랜튼과 노블의 탄핵을 받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무스와 해리스는 정반대이다]

6) 노블은 나를 상동과 정동의 목사로 서울과 인천을 관할하는 감리사로 또한 감신의 교수로 임명하여 내가 민족을 위한 그러한 활동을 하도록 판단한 영걸이다.
사람의 능력을 정말 잘 구분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또한, 제암리 학살 사건을 교인 노경태로부터 입수하고 스코필드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하고 본인은 하세가와(총독이라 불렸다)란 놈에게 강력 항의하여 제암리의 주민들을 구호하게 하였고, 목회자들의 목회와 생활 전반을 책임졌다. 장로교처럼 네비우스 정책이라 하여 교인들에게 헌금은 받아가며 돈 아낄려고 자신의 일을 떠넘기지 않았다. 그는 텃밭을 사주어 목회자 가족들이 일구어 부족한 식량을 대신하게 했다.
= 그 땅 어디 갔는지 모른다.

하여, 난 감리교회에 온 선교사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써진 재정의 총액이 얼마인가를 추적하고픈 욕망이 있다.


이 여섯 분이 내가 주요하게 관계하며 활동한 선교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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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활동과 3.1혁명 민족대표 미참여에 대해 기술한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른 특이한 이력이 하나 있다. 선유사이다. 황제는 나를 의병을 선유하라는 선유사로 임명했는데 이것은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 가서 이젠 의병활동을 그만하라는 역할이었다. 허나, 황제의 그러한 뜻은 왜적들의 뜻에 따른 것이었지 황제의 뜻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의병들에게 가서 해산을 권유하지 않고, 의병이 있는 어떤 곳으로 가 지금은 의병보다는 먼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배우고 갖추어서 싸워야 되지 않겠느냐는 애국계몽 연설이 주요 역할이었다. 실제로 의병들은 전력이 너무 열세여서 연해주와 만주로 이주하여 후일을 도모하였으며, 내 뜻은 일정하게 관철이 되었다. 나의 이 활동은 민족역량을 보존한 것이며, 이는 후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 그리고 독립군과 광복군의 자양분으로 작용하였다.
언제나 지혜롭게 민족은 대처하여야 한다는 관점을 내가 심어주었다.
*. 의병은 최신 주력 무기가 화승총인데 왜적들은 개털링 기관총이다. 이 기관총 2정인가에
동학농민군은 왜적 3명 죽이고 3만이 학살당했다. 이게 모야? 나는 이거 못하게 막은 거다.
*. 난 의병을 만난적이 없다. 실제 의병의 해산이 목적이 아니었고 애국계몽이 목적이며 의병들은 내 뜻을 따라주었다.
특히, 의암 유인석이나 운강 이강년 그리고 도마 안중근과 감리교회 장로 우덕순 등이다.
*. 광무황제는 공개적으론 나와 같은 개화인을 선유사를 파견하면서 밀서를 의병진에 보냈다.
의암 유인석에겐 정남대도독의 직책으로 운강 이강년에겐 도체찰사 즉 계엄사령관의 직책을 내림으로 의병을 독려하였다. 한 마디로 니들 맘대로 의병 모집하여 싸우라 하였다.
이는, 광무의 뜻은 의병의 해산이 실제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허나, 실제는 실제로 의병들은 장소만 바뀌었다 뿐으로 당장의 전투만 국내에서 연해주, 만주로 이거된 것뿐이다.
의병 = 독립군 = 광복군으로의 국내에서 국외로의 전환의 계기.
어차피 사실, 1913년 국내의 의병은 초토화작전으로 전멸되었다. 몇 명(아주 소수)은 남아 싸웠다 한다.
국내, 국외로 갔든 안갔든 왜적에 대한 의지가 변한건 아니다.


헌데, 나보고 감리교회의 대표적 목사이면서 민족대표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비토하는 자들이 있던데, 그건 상식 밖의 말이다.

이것을 보자.
노블 선교사는 아펜젤러 사후 실제적인 감리교회의 선교를 총괄하는 지휘자였다. 그것은 역량에 따른 역할의 배치였다. 아펜젤러는 사후였고 스크랜튼은 의료선교로 정말 무척 바빳다. 그가 무엇을 따로 섬세하게 책임진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으며 사실상 직책들은 겉으로 가지고 있던 격이고 실제 사무는 노블이 감당했던 점이 간과된 것이다. 겉만 보고 판단한 것이다.


노블 감리교회 선교 사령관은 역할을 이렇게 편재했다.
1. 하디 – 영성운동 후 교육
2. 올링거 – 문화 출판
3. 스크랜턴 의료라는 일은 다른 시간을 낼 수 없다는 특성이 있어.
총괄 지휘이나 직책만
4. 전덕기는 민족운동의 전면 지휘를 대한인 담당
5. 현순은 하디가 이루어 놓은 영성운동의 역량을 장년주일학교 조직으로 총화하는 일
6. 손정도는 1차 신민회의 결의로 이루어진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차 지원차 만주 선교 파견후 피체 투옥되었다가 전국 영성부흥사로 임명되어 하디의 영성운동으로 정갈한 빛으로 거듭난 대한인들을 민족영성으로 더 고밀도화 고도화시키는 일에 종사하도록 배치되어 현순 목사가 조직해 놓은 이들을 민족영성으로 무장시켯다.
7. 신학교를 배출한 목회자들 각 지역에 배치
8. 나는 감리사. 내 임무는 교회를 관리

이 영성과 조직 그리고 교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3.1 혁명의 준비했던 것이다.

이렇게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역할 상황에서
나는 서울지역과 인천 지역의 모든 교회를 지도하는 감리사이니 어느 세월에 한 곳에 집중하여 민족대표로 서명 할 수 없었던 것이지 내가 무슨 겁이 많아 피햇거나 한게 아니오.
그리고 아닌게 아니라, 내가 지도한 지역의 교회들이 한결같이 독립운동에 떨쳐 일어나지 않았소. 내가 놀지 않고 민족지도자들의 의식화 조직화를 온전히 바르게 햇다는 증거요.
그리고 솔직히 내가 62세로 나이가 좀 많았소. 그리고 손정도 목사가 민족대표로 서명하지 않음은 1911년 피체되어 지독한 고문으로 몸이 편치 않앗기에 말린 것으로 보면 나도 나이도 그렇고 또 역할이 활동보다는 관리이고 교육, 출판, 번역 분야였기에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이오. 나는 노블에 의해 이렇게 역할이 편재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민족대표로 참여할 감리교회 목사들은 차고도 넘쳤소.
수원종로교회의 김세환의 활동으로 증명하는 바이오. 김세환은 서울 이남 경기지역과 충청 지역 감리교회 민족운동의 책임자로 경기권의 목사 전부에게서 민족대표 서명을 받았으나 서울에서 대표 서명자가 다 채워졌다는 소식에 인장을 찍은 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은 민족대표인양 서울과 경기의 운동을 지도하여 33인과 더불어 48인의 반열에 들었고 2020년 3월 대한민국 보훈처 지정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어 현양된 바 있소.
*. 이 김세환의 행동은 장로교의 길목사와는 정반대로 대별되는 행위인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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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내 고향 제천의 슬픈 이야기를 하려하오.
때는 1907년이었소.
1905년부터 을사늑결로 민족의 외교권을 강탈해간 왜적들은 나머지 국권을 피탈하려 혈안이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저지하고자 온 힘을 다해 싸웠소. 그 해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어온 때로 민족에겐 하나의 희망이었소. 황제의 특사로 자신의 본국에 파견되어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대한의 독립을 위해 애쓴 헐버트 목사는 헤이그의 새 소식을 전하였고, 이를 접한 전덕기 목사, 양기탁, 이회영은 상동교회에서 밀의하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황제께 추천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세 특사는 헐버트와 헤이그에서의 그러한 일을 했던 거요. 그런데 이 외교투쟁은 왜적들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이준은 해외에서 자결하는 일이 벌어지고 이가 국내에 보도되자 적들은 우리 황제를 겁박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등극시키며 군대는 해산시키며, 박승환 대령이 자결하자 군대 해산에 응하지 않은 병사들이 서울시가전을 벌이니 대한은 전쟁터로 변하오.

바로 그 때의 일이오.
대한 빛민족의 빛의 아비들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오. 정미의병전쟁. 아비들은 경기도 퇴각의병, 강원도 의병, 경상도 의병, 충청도 의병, 호남 의병 등 이북지역 의병을 제외한 이들이 제천으로 모여드오. 나의 고향 제천이 의병들의 총집결지로 피의 마지막 민족혁명전쟁을 준비하는 터가 된 것이오. 왜적들은 이를 간파하고 가만두지 않았소. 제천이 그러하다는 정보를 접한 적들은 제천의 모든 민가를 불태웠소. 빛아비인 의병들의 은신처이자 보급기지를 불태운 것이오.

그 때 불탄 민가가 700여 호. 약 5,000여 명이 될까 한 이들이 하루 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상태가 된거요.
여기는 수원 제암리같은 곳과 다르게 너무 먼 외진 시골이고 선교사들이 찾아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며, 허니, 어떻게 되었겟소.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왜적들은 불지르고 떠나고 우리 제천인들의 상황말이오. 이 상황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고 이의 결과가 어떻게 결론되어졋는 가는 앞으로 제천인들의 최소 50년을 가늠케 되는 엄청난 사건이오.
*. 제천은 각도로 부터 오는 길목이며 산세가 험하여 의병의 집결지로 적절했다. 허나, 제천에서 직접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으며, 약 1000여 명의 의병을 조사해보니 3명?(실은 더 되나 내가 아는 한의 이강년 의병진) 정도의 제천인이 있었다. 거의 순수하게 집결지였다는 말이고 의병의 주요 세력을 형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뜻?

이건 글보다는 말로 해야 더 실감이 나는데..
1. 집이 불에 탄 제천인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참화를 면하기 위해 도망을 쳤다. 제천, 영월, 단양 등으로 흩어졌고 그들을 받아줄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냥 산속을 헤매거나 구걸, 화전 등을 그러한 상태의 가족을 이끈 가장은 어떠하였을까?
= 가족이 안 상한걸 안도했으며, 가장은 그것 자체로 기본 의무는 한것이다. 근데 그 다음. 성질은 있는대로 납니다.


자신들이 의병에 참여한것도 아니고 의병들이 알아서 와있던 것 뿐이니 의병을 욕하자니 민족의 도리가 아닌 것 같고, 왜적들을 욕하자니 화를 입을 것 같고, 이래저래 엄청난 화가 그들 속에 내재되게 되었다. 그 화는 밖으로 향하지 않고 집안으로 향하였다.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둘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그냥 갑자기 화가 폭발해 아무나 때리고 부수고 욕하고 그런 일이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부수고 난리를 쳤다. 한 잔이라도 걸치는 날은 가족은 다 현장에서 도망가야 했다. 허나 가족은 아주 도망가진 안 았다. 잠시 그 폭력적 상황을 피했을 뿐,

이러한 현상은 모든 가정에 공통사항이었다.

2. 그 아내나 아들 자녀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왜 그러는지는 알고 이해도 한다. 얼마나 화가나면 저러실까 한다. 자신도 화가 나고 성질이 머리끝까지 나지만 참으나 다른곳에선 자신도 화를 참지 못하고 있는 화를 다 낸다.
이 때 까지도 화를 내는 이유를 서로간 알고 있었다.

3. 허나, 할아버지, 아버지를 지나 손자 대에 와선 화를 내고 부수는 현상은 같은데 왜 도대체 저 사람이 저러는지 상대도 모르고 자신도 잘 모른다.
여러분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시나요?
*. 이러한 상태에서 나는 내 고향 제천에 교회를 설립했던 겁니다.
사실 무엇으로도 그 피해를 받은 바를 갚을 길은 없엇고 치유의 길도 전무하였습니다. 그냥 제천의 영혼들을 어떤식으로든 돌봐야 겠다는 생각 이 외에 아무 생각도 없던 겁니다.
1907년 제천제일교회의 설립.

[기도와 말씀 에배를 통해 그들은 아주 매우 서서히 치유되어 갔소. 온전하진 않으나 한 판 부수고 한 판 화내고 교회와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의 반복 이것은 제천 원주민 교인들만이 아는 그런거요.
이런 과거에서 오는 현상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 타 지역 사람들은 그 상태를 지금도 이해를 사실 못합니다.
뭔가 있는데 왜인진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지.
본인도 모르는데 남이 어찌 알것소.
참 이상한 것은 그런 와중에 감리교회 목사가 되겠다고 제천지역의 학생들이 무척 많이 감신으로 몰려들었다는 사실이오. 이 분들과 대면하여 과거에 대해 대화를 찬찬히 나누다보면 그 실체에 접근하게 되려나?]

이것에서 착안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허니,
사실,
그 이 후에 이런 저런 이후로 제천으로 온 이들은 그 상황에 젖어들뿐.
그 쪽도 이 쪽도 아무 이유각 없어요.
이유를 내가 너에게 설명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 즉, 내가 너에게 내가 이런 이유를 설명을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니, 상대는 그냥 내가 이런데 니들은 나도 이유는 잘 모르긴 하지만 그냥 니들은 내 뜻을 따르라.
한데, 그 양상이 좀 너무 폭력(물리, 언어, 양상 등)적이라..
지금 2021년도 잘 몰라??? 도대체 왜???? 이 동네 사람들은 착한데 안 착하고 안 착한데 착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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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나는 충북연회원들에게 청원합니다.
1. 충북은 충절의 고장이고 3.1혁명에 7분의 민족대표를 배출한 곳입니다. 자랑스런 역사를 선양함은 물론이고, 1907년 그 피해속에 어쩔 수 없이 폭력적이 된 그 가정과 그러한 일을 겪는 제천인들을 위로하는 교회의 책임있는 최고의 추도예배를 드려주십시오. 간절히 부탁드려 마지 않습니다.
*. 예배시 피해자를 위한 기도와 가해자를 드러내 주십시오.
피해자의 가족을 찾으세요.
*. 당시 제천 700여 호 방화 책임을 대정천황에게 물어 주십시오.
*. 제암리 학살방화보다 그 죄를 적다 할 수없습니다.
*. 사람 29명 안 죽인것 말고는 700여 호 방화는 똑같으며 이는 전쟁범죄이므로 그 책임은 전범 천황에게 있습니다.
*. 일본의 양심세력과 연대하십시오.

2. 하며, 내 학문의 유지를 받들어 진정한 대한인으로 이 고장이 앞장서서 내가 최초 민족신학자가 된 것처럼 좌고우면하지 말고 미래세대를 위한 투자를 하여 주시길 간청합니다.
하여, 그들도 이 민족이 새로이 살아나가야 할 길에서 큰 공헌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3. 나와 더불어 함께 한 감리회 선교사들의 공적을 일일이 정리하여 건국훈장 추서를 청원하여 그들의 공이 역사에 길이 빛나도록 하여 감리교회 선교에 도움이 되길 바라고, 대한민국의 잘못된 반미사상도 바로잡아 주십시오. 미국 정부가 우리에게 잘못한 것과 민간인이 우리에게한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민간인 선교사들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 민족 해롭게 한 일이 없습니다.
감리회 선교사들 중 제국주의 첨병 노릇한 사람 진실로 아무도 없어요.
*. 이 내용은 외국인 선교사 다른 글로 증명하며 매우 중요합니다.


4. 내 영향으로 민족운동에 나선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공 또한 일일이 발굴 조사하여 정부에 건국훈장 추서를 청원하여 주십시오.
얼마나 서운하겠습니까? 그 고생이 함께 했는데 왜 자기만 빼느냐고요.

5. 여기에 관계되는 모든 이들의 유족들에게도 나의 이 서신을 전해주시고 모두 함께 예배하는 감격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그리곤 관계되는 유족들을 유족회로 모이게 하여 서로의 신앙정분을 나누게 주선해 주세요.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내 자랑입니다.
1. 신학서적을 발간하므로 그 자료를 통해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양성되었다는 것입니다.

2. 감리교회 선교사들과 협력구도를 잘 하여 민족운동이 성장하게 도았습니다.

3. 서울, 인천 등의 민족운동 세력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충심으로 도왔습니다.

4. 제천제일교회를 설립하므로 충격적 상황의 제천인을 위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5. 황제의 명으로 선유사가 되어 민족운동 역량을 보전하고 바른 방향의 민족운동을 지도했습니다. 장로교인으로 타 지역 선유사인 송**은 의병들의 박해를 받았으나 나는 의병들의 항의를 받은 적이 없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아마 송**은 의병들을 이해하는 투가 아니라 황제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 해산하라 황제의 명이시다라는 명령조여서 그러지 않았을까 합니다.
황제는 의병을 독려(1905~7)하였고 후일 독립군 진영(1918~19년)이 실력을 키워 실제 독립을 이룰 역량(신흥무관의 장교급 무력 수 천과 수 박만의 동포)다는 정무정보에 1918~19년 북경방면 망명정부를 기획한 국내 신민회 영수 손정도, 국외 신민회 영수 이회영 밀통해 내탕금을 내려 동굼을 마련하였다.
= 의병 독려와 선유는 모순되지만 실제는 의병은 현존핬고 나는 실제는 의병의 해산을 독려하지 않았고, 애국계몽을 독려했고, 실제 전투력를 해산하지 않고 연해주 만주 이거하여 해외 독립군화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6. 교육을 담당하여 감리교회 목회자를 민족운동 지도자로 배출하였습니다.

7. 독립협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 활동에 참여하여 이 단체가 민족운동 선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도록 기초를 세웠습니다.
= 독립협회나 황성기독교청년회 설명도 부지 하~세월이다.

8. 이 모든 역량들은 하나로 결집되어 결국 내가 아펜젤러와 추구했던 민주공화정은 완성되었는데, 나는 이 일에 언제나^^ 간접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9. 감리회 협성신학교의 작명에 참여했습니다. 상동과 정동 그리고 존스, 아펜젤러, 스크랜튼, 하디, 무스 등 당시 감리교회를 지도하던 이들과 함께 활동했고, 한학과 양명학에 정통한 내가 선교사들의 뜻인 북남감리교회의 연합 신학기관인 유니온을 한문어로 협성이라 한 것입니다.
*. 협성 남녀 신학교를 통해 배출된 독립 유공자가 50여 명입니다.

10. 나의 호 탁사는 내가 지은 것입니다. 우리 집에 탁사정이란 정자가 있었고, 사실상 나를 능가할 한학자나 신학자가 감리교회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내 호는 내가 지은 것. 궁금해 하길래 밝히는 겁니다.

11, 손기정 선수를 내 집에서 기거시키며 그를 민족 최고의 빛 전사로 자라게 하는데 기여했습니다.


&. 총 정리하면 나의 존재는
[나는 감리교회 목사로서 감리교회 목사와 교인들을 민족운동에 나서게 한 민족/민주/민생 신학자이다.]
[헌데 나를 토착화 신학자라 하다. 토착화의 목적이 민족을 향함이면 민족신학이고, 토착화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뿐인데, 목적을 잃은 말이 토착화 신학으로 이것이 세월과 사람을 거치니 문화신학이나 예술신학이 되기까지 한다. 참으로 안타깝다. 다시금 나의 신학으로 전환시켜 민족의 정체성에 맞도록 민족/민주/민생 신학을 더욱 발전시켜 주십시오]


1. 이를 공적으로 정리하여 내가 현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했다는 점을 기려 건국훈장 추서를 대한민국 정부에 청원하여 주십시오.

2. 15년 전 탁사 최병헌 기념관을 제천시 정부에서 건립하려다가 중단이 되었는데, 이는 타종교에서 어찌 종교인의 기념시설을 세금으로 하느냐는 항의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내가 만일 건국훈장을 추서 받는다면 국가유공자가 되어 세금으로 나를 기념하고 교회의 민족운동에 대해서도 기리는 일이 당연한 일이 될것이니 내가 113여 년전 교회를 내 고향에 세운 뜻을 이제야 비로서 제대로 기여하게 되니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한 300억쯤 요구해 보시고, 연회가 직접 운영하는 방식을 택해 보는것이나, 재정 부담없이 하려면 제천기와 공동 운영위원회를 조직해 재정은 정부가 내게 하고 학술이나 행사 그리고 인사의 등용은 연회도 역할을 하는 방안이 있을 것이니 잘 협의해 보십시오.
*. 당진시에선 김대건 신부의 출신 동네라하여 600여 억을들여 기념시설을 한다하니 참고해 두시오.
태어나서 6살까지 살았을 뿐인데 무슨 활동을 한것도 아니고..

3. 이것과 충북의 독립운동을 포괄하는 기념관의 개념을 가져보십시오.
왜 니 네가 하냐 하면 감리교회가 지도기관이고 내가 그 지도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십시오.
사실상 천도교는 대중세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의견을 잘 따라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모으고 힘을 내시오 힘을.


요약합니다.
1. 나의 공기려 훈장 추서와 기념관 건립
2. 나와 관계된 인사 훈장 추서
3. 추도예배와 학문 발전
*. 나의 훈장 추서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오. 이것은 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나보다 나중에 활동한 전덕기, 현순, 손정도는 훈장을 받았으나, 내 이전에 있는 분들 즉, 선교사들과 김기범과 김창식 목사가 무훈 상태이니 일목요연하게 역사를 기리는 일이 잘 안 되는 것이오.
만일 내가 훈장을 받는다면 남녀 선교사들과 초대 목사 2분의 훈장 추서도 훨씬 수월할 것이니. 그럼 그냥 통으로 역사선양이 가능해지는 것이오.
추도예배를 드려도 “사랑의 사도 아펜젤러 추도예배”와 “독립유공자 아펜젤러 추도예배”하면 안 믿는 이들이 보기에 이건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랑의 사도면 그냥 우리 끼리 종교인으로 추도하는 것이지만, 독립 유공자는 국가 유공자로 정부의 보조금으로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사업의 위상에서 전혀 다른 면모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도 오고, 훈장의 등급에 따라 대통령의 조화도 옵니다. 매우 중요해 보이지 않나요?


이만 마칩니다.

2020년 8월에
이는 내가 직접 쓸 수가 없어 경기연회 안산서지방 성안산형제들교회 민관기 목사를 통해 대필하니 내가 하늘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 충북연회원들에게 드리는 것과 같은 서한이오.
나는 1927년 하늘로 왓으나 육신은 무거워서 못 가지고 와 금촌 묘원에 있다하오.
참고하시오.

그리고, 글투가 이랫다 저랫다 한건 이해하시오.
민목사도 이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오. 남의 경험인데 내가 하늘 사람 된지 93년 전인데 내 맘을 읽고 알아 글로 쓰는게 보통일은 아니오.
기타 내가 여기에 미처 말하지 못함은 민관기 목사에게 문의하시오.
010 3082 7004라 하니 참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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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준
2020-08-29 16:51
밑에서 8째줄 충청을 충북으로 수정 ㅎ

민관기
2020-08-29 17:00
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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