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해 맞이 글 = 120년 전 을사년을 바라보며
작성자
민관기
작성일
2025-01-05 00:26
조회
479
120년 전 을사년 바라보며! 2025년 새 해 인사와 더불어!!
새 해 하늘의 축복이 깃드시길 소망합니다!!!
<끝까지 보시면 더 좋습니다.> <짧게 요약한 글이라 의문의 여지있습니다.>
*. ‘영화 하얼빈’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도 느덜이 한 말이다.
ㅡ. 그 때 조선을 정한론에 따라 병탄하려 미국과 프랑스에게 제국주의 약탈과 침략을 위한 국제법 등을 전수받은 섬의 좆받이 오랑캐들은 자신들의 화산, 지진, 홍수, 해일 등의 자연재해에 진저리가 나 안전한 대륙을 반도를 통해 도모키로 했다. 하여, 대가리가 터지게 공부한건 인정한다.
그 대가리에서 나온 것이 상대의 약점울 치는 것인데, 그것이 조선의 최대 반정부 세력이 대원군 새력이며, 농민이자 동학도들인 것을 간파했다.
하여, 왜적들은 동학집단 안에 간첩울 침투시켜 "우리 나라 썩었어! 갈아 엎어야 해!를 입에 달고 사니 "그래 우리는 썩었어. 근본적으로 갈아엎어야 해"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반부패ㅡ정부투쟁을 한 것이 동학혁명의 또 다른 본질이다.
왜놈들은 이렇게 갈등과 대결을 최고조로 부추켜 놓고 자신들의 병력을 개입시켜 반정부투쟁후 반왜투쟁시 거병한 조선의 빛의 아비들을 학살+하였다.
[+. 녹두는 처음에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었다가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명하여 양이와 왜놈들의 동태를 보고하라. 지시하였다, 곧, 동학도들은 이렇게 보고를 하였다.
“왜놈들의 병원에선 조선사람을 치료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 양이들은 조선인을 치료해줄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아이들만을 위한 병원을 세워 무료로 치료를 해줍니다.” 라고 보고했다. 하여, 전봉준은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었다가 척양을 빼고 척왜의 기치만을 들고 거병하였다. 녹두에게 보고된 병원이 지금의 동대문언덕에 있엇던 동대문부인병원이며, 여기로부터 이대 의대와 부속 병원과 고려대 의대와 부속 병원의 기초가 되었고, 이 병원에서 로제타 홀의 사적이 알려졌다. 이들은 평소에 환자들을 치료하며 2,000여년 전 이스라엘에 예수라는 분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려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는 말씀을 예배라는 것을 통해 하여 왔엇다. 하지만, 이 말을 이해하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
어느 날 화재로 손가락이 붙은 15세의 소녀가 왔다. 혼인할 때가 다 되어 한의로는 고칠 수가 없자 부모가 뭐라도 방법이 있을까? 하여 동대문부인병원을 찾은 것이다. 로제타는 그 손을 고치려면 환자의 엉덩이나 넙적다리 살을 떼어내 붙이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자, 그들이나 조선인들은 아무도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로제타는 아무 말없이 자신의 넙적다리 살을 떼어내 수술을 하여 그 소녀의 손을 고쳤다. 이에 조선인들은 경악을 금치못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대신하여 죽거나 희생할 수도 있구나. 를 지금 목격한 것이다.
그 후로 동대문교회, 상동교회, 정동교회 등 병원이 있는 교회들은 교인들이 폭발하기 시작해 20여 만의 한양 인구중 3교회와 기타 20여 교회에 2만 여명이 출석하고 그 수배의 사람들이 병원을 이용하고 후일 쟈녀들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 로제타 홀의 사적은 조선인들에게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왔다. 교회에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희생을 하거나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일하는 기독교 전통이 되었다. 의거전과 독립군 그리고 광복군에 교인들의 대거 참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지 김상옥, 나석주, 김익상, 백야 김좌진, 오동진, 김원봉, 지정천, 윤동주, 이육사, 주기철, 유관순, 남자현, 안경신, 최용신, 최인규, 등 수 천 기독교인 그 들... 아마도 이는 고래에 순장정신이나 제정일치시대에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죽는 전통의 부활일지 모른다.]
우리는 3~5만?이 학살당했고 왜놈은 3명이 죽었다. 죽창과 화승총 그리고 캐털링 기관총 전투의 결말은 뻔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의 국력은 왜적들의 의도대로 처절하게 갉아먹혔다.
거사의 패전후 피체되어 처형 전 녹두 전봉준은 깨닫고 고백했다.
"내가 오판했다" 고 .. 국민계몽과 실력양성이 전무한 가운데 전민항쟁은 오류였다는 것을...
<약 3~5만?이 일부 특정지역인 호남과 충청지역의 빛아비들이 집중 학살당했고, 그에 따른 미망인, 유자녀, 아들 잃은 부모 등 최소한 약 20여 만명 이상의 유가족이 발생해 상황은 진실로 처참했다. 하여, 이 지역의 민족운동은 한 동안 생산력 극복을 위한 시한이 필요했다. 하여, 기미년 전민항쟁엔 그 참전 정도가 적었다가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약 30여 년 이상이 흘러서야 핵심운동 역량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녹두장군 어찌 생각하시오?>
때를 같이 해 러시아를 끌어들여 왜를 견제하여 국력신장의 도모를 택한 조선 정부의 전략을 또 다시 파탄내기위해 왜는 조선의 사실상의 외교전략 담당 최고 지도자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이등박문 내각의 결정에 따라 왜의 공사 삼포오루와 양아치 50여 명을 동원 을미사변으로 왜란을 발발시켰을 때 조선 정부는 전민항쟁울 택하지 않고 거병한 의병둘에게 마져 철군을 하라고 선유사를 파견하기까지 하여, 국력을 보전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조선 정부는 의도는 좋았으나 오도된 판단의 동학의 반왜투쟁으로 약화된 국력을 만회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 현실적인 선택이 구미제국과의 더욱 강력한 연대와 개방 개화 정책 일환인 미주의 개신교, 서구의 천주교, 러사아의 정교회 등에도 전면적인 선교허락이 이뤄져 교회 ㅡ 성당, 병원, 학교의 전국화와 이의 영향받은 근대 민족학교(계정 민영환 태극학교, 백야 김좌진 호명학교, 안동의 협동 학교 둥)들이 수 천개 생기고 정부는 국민교육령으로 이를 촉진시켰다
이 때 한양에 교동초와 미동초, 효제초 등이 개교한 것이다.>
대외 정책인 외교와 그에 따른 종교정책 그리고 교육정책과 중요 핵심인 대청 정책으로부터의 독립정책인 독립문 건립, 독립신문 발행, 독립협회 지지와 공원의 조성 등으로 확장시키며, 조선을 황제국으로 격상시키며, 자주자강하여 국권을 수호-회복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장기항전을 준비하는 민족의 대응이었다.>
이는, 1895년 ~ 1897년, 춘생문 사건 실패, 아관으로의 파천, 명성황후 장례, 대한제국 선포와 광범위하고 강력한 광무개혁의 추진(청의 견제로 대부분? 실패)과 더불어 매우 획기적인 정책 즉, 외국으로 조선인 인력을 수출하는 정책이 이뤄졌다. 이것이 1902~6? 하와이 노동이민이며 정부는 수민원을 설치하고 계정 민영환을 총재로 선임해 이를 관장케 했으며, 약 7,500여 명 후에 사진 신부들 포함 약 1만명 이상?의 인력을 송출하여 외화벌이를 단행했고, 이 인력 수출 수익으로 영국제 중고 군함울 도입(장기적으로 민족운동의 재정기지 확보)했다. 이 인력 송출엔 미 감리회 선교사(감리교신학교 교장)존스가 적극 협력하여 자신의 교인들 즉, 제물포, 강화와 교동 섬, 황해도 그리고 평양지역 등 약 3,500여 명과 여기에 동포들의 심령상의 문제를 돌보게하기 위해 남/여 전도사 현순, 홍승하, 백헬렌 등이 지도자로 이주 갈 수있도록 적극 주선하여 후일 미주 독립운동기지가 굳건히 건설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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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의문 ㅡ "영화 하얼빈의 어이없는 대사"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
이 때 왜의 집중적인 대조선 전략이 조선 황제국 비하 전략이다.
이등박문은 망극하게도
"임금님은 오줌싸개, 왕비는 **년"이란 서동요를 철없는 아이들애게 눈깔사탕 주며 노래부르게 만둘었다.
그런 것에 무지한 이들이 가스라이팅 당하기 시작해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차리고 이등박문과 금서룡 등의 왜적들 그리고 그들의 충직한 개놈 이병도와 이기백 둥의 식민 매국 사학자들에게 정신 고문당해 정신 착란 상태가 지금이다. 어리석은 왕이란 말은 정신 착란의 언어이다.
<오늘의 의문의 말 어리석은 왕은 이등박문을 처형한 도마 안중근의 뚯이 아니며, 안 의사는 도리어 대정이 명치를 살해하고 등극했다. 라고 법정에서 사실을 일갈하여 왜의 대노를 사 시신마져도 유족에게 인도되지 못하는 비극을 산 것이다. 사형 집행후 시신이 인도되지 못하고 지금껏 찾지 못하는 유일한 예이다. 왜? 천황을 건드리는 자는 즈덜 나름으로 용서를 안한다.>
다른 예)
1. 천황연호 거부자 몽양 여운형 재산 강탈했다.
2. 부모를 죽인 천황을 저주한 유관순 열사의 빛몸을 찢어죽이다.
3. 완벽한 천황숭배 거부자 최인규 사형후 유골 아무데나 버림 등
지금까지도 자기 나라의 아비와 어미였던 왕과 왕비가 비하 천시당하며 왜적들에 의해 시해와 독살로 참변 당한 사실에 대해 무감각하며, 오로지 나라를 잃게 한 망국의 무눙한 군주인양 하는 철없는 언행들이 있다.
ㅡ. 병인박해와 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그리고 부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뚫고 이룬 개화와 개방의 임금님과 왕비님의 국가발전전략위한 결단을 강력 예찬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뚫고 일어서 빛이 빛됨을 이루어가는 민족을 스스로 찬하해야 하며, 당시의 한계와 문제는 해결해야할 의제였을 뿐이다.
"강화도 조약이 강제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민족은 이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 후 공리공론에 빠진 유학의 대안을 찾고자 고심하던 혁명선비들이 있엇으며, 이미 200여 년전인 1600년대부터 청나라를 통해 서학과 실학 그리고 양명학을 접했고, 이들이 영*정조기 실학과 양명학을 융성시키고 천주학을 발전시켜 천부인권의 사상을 옛 민족의 정체성과 연관되게 발전시키고 삶에 체화하기 시작했으나, 정조임금의 1800년 사후 순/헌/철종기의 민란의 세기를 지나는 동안 이 기운이 한 순간에 사라졌는가? 했더니 지하에 흐르던 지하수처럼 다시 분출하여 수운 최제우의 동학 천지인 사상으로 꽃피우고 있엇으며, 이 실학과 양명학의 실리와 실천이 천주학 그리고 동학이 새로운 신문명의 신종교인 미국의 개신교인 감리회와 장로교가 만나 또 다시 새로운 천부인권의 민족종교로 거듭나 우리의 민주공화정부를 수립하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모두는 모두에게 원료였다. 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의 핵심 지도자가 광물황제와 명성황후이다.
고종임금님과 왕비님은 아버지 대원군의 천주교인 1860년대 병인박해시 8,000여 명에 대한 살해후 개화를 통해 쇄국을 물리치고, 1880년대 병원과 학교에 대한 선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1890년대 들어 직접 선교인 교회, 성당, 성경보급, 복음전도(복음전도사였엇던 상하이 임정 총리 이동휘는 '백만이 전도되면 이 민족은 독립을 이루리라' 했다.) 등에 대한 전면 허용과 독립문 건립, 독립신문 발행 등을 허용, 권장하여 민주민권, 자주자강의 기운울 불어넣는 황제의 의도와 활동과 대한매일신보 특허장 발급 등에 대한 미평가 그리고 을사늑결 전과 후인 1907년 헐버트 선교사와 상동감리교회 전덕기 목사, 우당 이회영 등이 모의 시작한 헤이그 특사 황제 파견 외교전쟁과 이준의 순국 그리고 후에 벌어진 황제 강제 퇴위, 대한제국 군대해산, 정미의병전쟁의 발발인 남대문 시가전ㅡ조선8도총군의 서울진공작전과 의병지이자 지결지 이천-제천의 민가 1,500여 호 방화, 의병진에 대한 황제의 밀지를 통한 의병전쟁의 망명을 포함한 국내외 독려 등이 이뤄지며, 해외에 건설되기 시작한 민족의 구국간성 양성 전략도 그 기반을 다져갔으며,
황제의 교육을 일으켜 우리를 도우라는 명을 받든 미국을 비롯한 캐나다, 호주의 선교사들은 강력한 국민계몽의 토대를 쌓고 개화 신문명 교육을 진행시켰고, 이 때 선교사들과 연합된 주시경, 박은식, 최병헌, 아펜젤러 등에 의한 한글보급(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성경 둥)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조선인 토착 지도자 양성의 일환으로 서울 감리회신학교, 평양 장로회산학교 등이 개교 활성화되며 캐나다인 선교사 하디에 의해 촉발된 민족 영적각성운동으로 정갈해진 정신을 갖게 된 청년들이 대거 신학교로 밀려들어 약 10~15여 년후 1919 기미년 민족대표 기독교 성직자 16명이 배출되며, 상하이 임정에 5명의 성직자 파견이나 감리회 장로회 성직자 150여 명의 투옥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 때의 성직자들을 2,000여 년 전 우리 민족에 있엇다가 소멸된 민족의 성지 소도 제사장의 근대적 부활이라 말해야 할까?
<3.1 독립선언 정보를 알고 있던 30여 만명중 단 1명의 밀고자도 없었던 것은 하디 선교사의 1903년부터 시작되어 1907년 꽃을 피운 민족 영적각성운동의 덕이다. 하디의 공로는 이것이 핵심이며 민족운동의 전반을 이 하늘정신으로 각성된 이들이 이끌었다. 이 정신의 핵심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곧, 자신 스스로가 신성을 가진 인간임을 깨닫고 그 동안의 막 산 죄를 통회하고 자복한 것이다. 나는 개돼지가 아니었구나!!! 내가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품은 자인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는 질문은 너무나 선연히 답이 나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황제와 황후의 의도 기획이었던 것이다. 사람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발전전략의 방향을 가졌던 것이다.
이 1919년 인류사 대사건은 1910년 경술왜란부터 구체적으로 배태되기 시작했다.
민족은 국권발전과 수호 회복울 위해 그리도 처절했엇다 그러나, 1910년 병탄 경술왜란후엔 웬일인지 조용했다
실제 아~ 이런 정도의 준비와 항쟁으로 민족의 사실적 자주와 독립이 불가함을 깨닫고 깊은 내적 준비에 둘어간 것이다.
개신교중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서술해 보면
전술한 국민교육령에 따른 국민교육의 기독교 선교 세력에 의한 전개와 한글보급운동의 강력 전개로 인한 민도의 폭발에 조선인 성직자의 본격 양성이라는 것에 민족의 결사적 바람이 조응하여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아래의 내용들이었다.
ㅡ. 만주에선 신민회의 무장 독립군 양성 결의와 혁신유림과의 연대로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석오 이동녕 일가 등이 신훙무관학교 설립 3,500여 명 양성.
ㅡ. 미주에서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 설립, 수 백, 수 천명의 군사훈련.
ㅡ. 미주에서 노백린 장군의 한미항공학교 설립. 23명의 항공사 양성 완료. 하고
=. 위의 세 세력은 모두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민회 세력들이 핵심이며, 아래도 그러하다.
본격적 독립군 장교 양성과 독립전쟁을 준비했고, 연해주, 만주, 간도, 몽골 등엔 동포가 수 백만 모여들었고. 위의 장교 진영은 죽창과 화승총에서 현대 체코제 기관총과 야포까지 갖추는 현대전 능력울 갖추게 되었다.
또한, 양성된 성직자들이 조선 8도와 만주, 몽골, 연해주 등으로 퍼지며 설립된 교회안에 교회학교가 기본 만들어지며
ㅡ. 국내에선 전국 교회에 노불선교사가 현순 목사를 파송하여 장년주일학교를 500여 곳 설립해 조직화룰 준비하고
ㅡ. 해석 손정도 목사는 애국 부훙성회를 통해 민족 영적각성운동후 민족 의식화를 더욱 고밀도화를 지도했다.
이로써, 1918년 준비가 정신적 의식화, 무장력, 조직력이 곧, 인재양성과 그 기반이 준비되었다 판단한 민족세력은
광무황제의 직접 지도하 독립전쟁을 실행키로 하고 베이징 방면에 동궁을 내탕금으로 마련하고, 이를 국내의 해석 손정도 목사, 국외의 우당 이회영 권사가 이 사업을 연통하며 관할하였다.
허나, 이를 눈치챈 왜적들에 의해 황제가 1919. 1.22 독살 붕어 승하하시자 민족은 피의 희생을 불사하는 국내/외 전면전을 준비하고 황제의 국상일에 거사 일정맞추고, 해외에는 민족정부 수립위해 지도자를 상하이로 파견하는 등의 준비를 마쳤다. 상하이로 간 민족 지도자는 성직자로서 손정도, 현순, 김병조, 이상만 목사와 여 전도사 정세화 등으로 노블 선교사가 미화 1만불 = 현 가치 100억원을 송금하여 이 자금으로 임정이 조직되었으며, 미주 등으로의 외교전략이 구사되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인류사를 가르는 대전환의 거사가 이뤄졌다. 7,500여 순국선열의 빛을 댓가로 통한의 민족정부 없는 세월을 뚫고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므로써 독립신문 보도와 신민회 강령 선택후 민족역사상 처음으로 민주 공화정의 민족정부를 건국했다.
이 때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일어나며 민족은 의병전과 의거전에서 만주의 독립군 전쟁과 더 강력한 국내 침투 전투적 의열전(한지 김상옥ㅡ종로서, 나석주ㅡ동양척식, 김익상ㅡ총독부, 여성 안경신ㅡ평양도청. 경찰서 등)과 해석 손정도 목사 영적 지도하의 오동진 장군이 광복군총영 조직원들과 국내 진공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이로서, 민족과 인류는 자주와 세계평화 인류복지를 위한 정신적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 자주는 선언됨으로서 이루어진 것이고, 결코 쟁취나 청원이 아니었으며, 선언이었으므로 독립의 축하 경축식이었다. 왜의 학살극은 남의 잔치에 피를 뿌린 것이었다.
이 후로 인류는 빛의 실체를 깨닫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이 기미년의 정신으로 빛화의 길을 가며 빛사람화 빛민족화 빛인류화되어 가고 있다.
이 와중에 별 일을 다 격는 민족과 인류들은 아직도 그 빛의 완수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다 아직도 완수되지 않았다. 올 을사년이 그 단단한 기초를 다시 다지는 한 해가 될 것이다. 하늘은 어쩌다 한 번씩 역사를 한꺼번에 거대하게 여의봉처럼 압축적으로 바뀌도록 섭리할 때가 있고 지금이 그 때이며, 우리가 흘리게 하는 피는 없는 3.1 독립축하와 1987년의 6월 민주화운동, 2016~17년의 촛불혁명 그리고 2024~25년 이 아름답고 강한 마음빛 혁명은 완수될 것이다.
다만, 그 와중에 근자의 세월호, 이태원, 오송, 채상병 사건 등과 명성황후 시해와 제암리 학살 사건, 위안부 소녀와 강제 징용과 학도병들의 혼령과 일본의 침략기 내 내 동학과 의병과 독립군/광복군과 3.1 순국선열 등으로 하늘나라의 빛혼으로 돌아가신 분 들.
특히, 이 세상에 빛으로 와서 빛으로 살다가 2024. 12.29 항공기 사고로 다시 빛으로 돌아가신 179위의 빛혼이 하늘나라와 그 곳에 머무르며 언젠가 성삼위의 뜻이 임하여 주님이 허하실 때 다시 이 땅으로의 부활생명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를 본다.
우리는 답해야 한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질문을 5,000여 만 국민들이 새 해 들자마자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혼의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안고 사는 성직자들의 몫이다.
*. 이 빛화를 거스르는 역사의 반동은 늘 있엇다. 너무 실망 절망하지 말자.
우리의 3.1 독립경축식의 선언서와 그 행동/결과로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운동, 이집트의 민족해방운동 등이 3.1 자주와 세계평화 인류복지 선언으로 인함이며, 이 후 인류의 정의 평화 투쟁의 진실로 모든 내용과 형식의 시원이다.
이를 이름하여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우리를 세계의 등불민족이라 언급했으나 보다 더 선명하게는 이를 "우리 민족으로 인한 인류의 빛화 ㅡ 하나님화라 일컫는다."
곧, 인류가 하늘과 성자의 성품을 닮아간다. 는 것이다.
2024와 2025의 마지막과 첫 날부터 5일을 지나며,
600여 년 안산에 살아오며 작은 글을 남긴다.
-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 안산서지방회 성안산형제들교회 담임 민관기 목사 -
010 3082 7004<뉘시든 의문은 질문주셔도 됩니다. 짧게 요약한 글이라 의문의 여지있음.>
ch6881@naver.com
*. 우리 민족은 명성황후 시해의 당사자인 일본이 시해의 범과를 인정하고 삼포오루를 비롯한 50여 명의 종범에게 실형을 내렸어도, 도마 안중근이 주범 이등박문을 처단하였고, 최후의 주범 천황에게 이봉창은 투탄을 하였고, 주범의 하수인들은 매헌 윤봉길이 홍커우 의거로 제거하였다.
또한, 왜는 제암리 학살을 인정하고 유가족을 노블 선교사의 강력 항의 조치이긴 하나 총독 하세가와가 직접 원호조치했으며, 양심적 일본인들은 제암리교회를 복원해주기 까지 했다.
헌데, 세월호, 이태원, 채상병 사건에서 너무도 이상하고 무도한 이들을 본다. 기본적으로 진상규명이 안된다. 심지어 어떤 건은 자신들을 음해하는 것이라는 기획설을 주장하며, 다른 사람에게 범과를 뒤짚어 씌운다. 이러니 유가족들이나 국민들은 이해가 안가니 특검을 하라고도 한다. 죽어라 거부한다. 이건 인간인가? 악마인가?? 대체 뭔지???
나를 비롯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성직자들은 이 사태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며, 이렇게 말이 안되는 방법으로 하늘나라로 돌아간 빛혼을 위무하며, 살아있는 유가족들이 이제 되었다. 더 이상 위로를 하지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위로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 마디 더하면 위의 일에 12. 3 국민 학살극이나 전쟁극을 준비한 이들에 대한 하늘의 명을 받은 사법 판단이 사형으로 선고되고 집행의 때가 될 때 민족은 어느 누구의 죽음이 걱정되서가 아니라, 죽음 후의 혼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대한민국의 수 없는 국민들에게 받을 것이며 이에 대한 답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특히, 어린아이나 청소년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이 때 사람들에게 혼의 구성, 혼의 실체, 혼의 존재, 혼의 인식, 혼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하여여만 하는 성직자들께선 지금 이 새 해 을사년 120년 전 민족의 수치를 면하기 위해 불철주야하던 이들을 생각하며 무엇을 준비하여야 할까?
“이등박문과 하세가와보다도 못한 자들은 나이나 부부나를 가리지 말고 관용과 용서없는 결기
의 집행을 하늘의 섭리로 보여야 한다.”
*. 한편,
1. 이등박문 : 민족의 철천지 원수 이등박문은 1909년 도마 안중근과 우덕순과 장로가 공동 저격 처단했다. 안 의사 유골을 찾는 문제는 남과 북 민족사와 인류사의 문제이다.
2. 이완용 : 또, 하나의 민족의 철천지 원수 완용이는 1909년 이재명 지사에 의해 단칼 저격 당했으나 가까스로 살아났고 평생 휴유증에 시달리다 뒈졌다. 이 후 시신은 용인에 뭍혔다가 민족의 단죄가 너무 심하자 후손이 파묘를 하였고, 이 때 완용이의 유일한 매국 증거인 ‘고 이완용 자작 지묘’란 나무판이 나왔을 때 이를 연구용이라 가져가 불에 태운건 매국 식민사학자 이병도이다. 이병도의 이 행위는 완용이의 유일한 직접 중거물을 없애므로서 후일 매국의 증거가 뭐냐 우길 심산으로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참으로 고약한 자이다.
3. 민족의 철전지 원수들을 차례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처단한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너무 오래 살아남았다가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백범 김구는 효창원에 안장되었으며 이 곳은 국립 현충원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4.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인한 4월혁명후 그 범과를 인정하고 자진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서거후 국내로 송환되어 가족장으로 국민들의 애도속에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5.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피로 학살극을 벌인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민족이 관용을 베푸는 뼈아픈 실수를 범했다. 이 놈의 유골은 현재도 갈 곳이 없다고 한다.
새 해 하늘의 축복이 깃드시길 소망합니다!!!
<끝까지 보시면 더 좋습니다.> <짧게 요약한 글이라 의문의 여지있습니다.>
*. ‘영화 하얼빈’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도 느덜이 한 말이다.
ㅡ. 그 때 조선을 정한론에 따라 병탄하려 미국과 프랑스에게 제국주의 약탈과 침략을 위한 국제법 등을 전수받은 섬의 좆받이 오랑캐들은 자신들의 화산, 지진, 홍수, 해일 등의 자연재해에 진저리가 나 안전한 대륙을 반도를 통해 도모키로 했다. 하여, 대가리가 터지게 공부한건 인정한다.
그 대가리에서 나온 것이 상대의 약점울 치는 것인데, 그것이 조선의 최대 반정부 세력이 대원군 새력이며, 농민이자 동학도들인 것을 간파했다.
하여, 왜적들은 동학집단 안에 간첩울 침투시켜 "우리 나라 썩었어! 갈아 엎어야 해!를 입에 달고 사니 "그래 우리는 썩었어. 근본적으로 갈아엎어야 해"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반부패ㅡ정부투쟁을 한 것이 동학혁명의 또 다른 본질이다.
왜놈들은 이렇게 갈등과 대결을 최고조로 부추켜 놓고 자신들의 병력을 개입시켜 반정부투쟁후 반왜투쟁시 거병한 조선의 빛의 아비들을 학살+하였다.
[+. 녹두는 처음에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었다가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명하여 양이와 왜놈들의 동태를 보고하라. 지시하였다, 곧, 동학도들은 이렇게 보고를 하였다.
“왜놈들의 병원에선 조선사람을 치료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 양이들은 조선인을 치료해줄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아이들만을 위한 병원을 세워 무료로 치료를 해줍니다.” 라고 보고했다. 하여, 전봉준은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었다가 척양을 빼고 척왜의 기치만을 들고 거병하였다. 녹두에게 보고된 병원이 지금의 동대문언덕에 있엇던 동대문부인병원이며, 여기로부터 이대 의대와 부속 병원과 고려대 의대와 부속 병원의 기초가 되었고, 이 병원에서 로제타 홀의 사적이 알려졌다. 이들은 평소에 환자들을 치료하며 2,000여년 전 이스라엘에 예수라는 분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려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는 말씀을 예배라는 것을 통해 하여 왔엇다. 하지만, 이 말을 이해하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
어느 날 화재로 손가락이 붙은 15세의 소녀가 왔다. 혼인할 때가 다 되어 한의로는 고칠 수가 없자 부모가 뭐라도 방법이 있을까? 하여 동대문부인병원을 찾은 것이다. 로제타는 그 손을 고치려면 환자의 엉덩이나 넙적다리 살을 떼어내 붙이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자, 그들이나 조선인들은 아무도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로제타는 아무 말없이 자신의 넙적다리 살을 떼어내 수술을 하여 그 소녀의 손을 고쳤다. 이에 조선인들은 경악을 금치못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대신하여 죽거나 희생할 수도 있구나. 를 지금 목격한 것이다.
그 후로 동대문교회, 상동교회, 정동교회 등 병원이 있는 교회들은 교인들이 폭발하기 시작해 20여 만의 한양 인구중 3교회와 기타 20여 교회에 2만 여명이 출석하고 그 수배의 사람들이 병원을 이용하고 후일 쟈녀들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 로제타 홀의 사적은 조선인들에게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왔다. 교회에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희생을 하거나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일하는 기독교 전통이 되었다. 의거전과 독립군 그리고 광복군에 교인들의 대거 참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지 김상옥, 나석주, 김익상, 백야 김좌진, 오동진, 김원봉, 지정천, 윤동주, 이육사, 주기철, 유관순, 남자현, 안경신, 최용신, 최인규, 등 수 천 기독교인 그 들... 아마도 이는 고래에 순장정신이나 제정일치시대에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죽는 전통의 부활일지 모른다.]
우리는 3~5만?이 학살당했고 왜놈은 3명이 죽었다. 죽창과 화승총 그리고 캐털링 기관총 전투의 결말은 뻔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의 국력은 왜적들의 의도대로 처절하게 갉아먹혔다.
거사의 패전후 피체되어 처형 전 녹두 전봉준은 깨닫고 고백했다.
"내가 오판했다" 고 .. 국민계몽과 실력양성이 전무한 가운데 전민항쟁은 오류였다는 것을...
<약 3~5만?이 일부 특정지역인 호남과 충청지역의 빛아비들이 집중 학살당했고, 그에 따른 미망인, 유자녀, 아들 잃은 부모 등 최소한 약 20여 만명 이상의 유가족이 발생해 상황은 진실로 처참했다. 하여, 이 지역의 민족운동은 한 동안 생산력 극복을 위한 시한이 필요했다. 하여, 기미년 전민항쟁엔 그 참전 정도가 적었다가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약 30여 년 이상이 흘러서야 핵심운동 역량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녹두장군 어찌 생각하시오?>
때를 같이 해 러시아를 끌어들여 왜를 견제하여 국력신장의 도모를 택한 조선 정부의 전략을 또 다시 파탄내기위해 왜는 조선의 사실상의 외교전략 담당 최고 지도자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이등박문 내각의 결정에 따라 왜의 공사 삼포오루와 양아치 50여 명을 동원 을미사변으로 왜란을 발발시켰을 때 조선 정부는 전민항쟁울 택하지 않고 거병한 의병둘에게 마져 철군을 하라고 선유사를 파견하기까지 하여, 국력을 보전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조선 정부는 의도는 좋았으나 오도된 판단의 동학의 반왜투쟁으로 약화된 국력을 만회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 현실적인 선택이 구미제국과의 더욱 강력한 연대와 개방 개화 정책 일환인 미주의 개신교, 서구의 천주교, 러사아의 정교회 등에도 전면적인 선교허락이 이뤄져 교회 ㅡ 성당, 병원, 학교의 전국화와 이의 영향받은 근대 민족학교(계정 민영환 태극학교, 백야 김좌진 호명학교, 안동의 협동 학교 둥)들이 수 천개 생기고 정부는 국민교육령으로 이를 촉진시켰다
이 때 한양에 교동초와 미동초, 효제초 등이 개교한 것이다.>
대외 정책인 외교와 그에 따른 종교정책 그리고 교육정책과 중요 핵심인 대청 정책으로부터의 독립정책인 독립문 건립, 독립신문 발행, 독립협회 지지와 공원의 조성 등으로 확장시키며, 조선을 황제국으로 격상시키며, 자주자강하여 국권을 수호-회복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장기항전을 준비하는 민족의 대응이었다.>
이는, 1895년 ~ 1897년, 춘생문 사건 실패, 아관으로의 파천, 명성황후 장례, 대한제국 선포와 광범위하고 강력한 광무개혁의 추진(청의 견제로 대부분? 실패)과 더불어 매우 획기적인 정책 즉, 외국으로 조선인 인력을 수출하는 정책이 이뤄졌다. 이것이 1902~6? 하와이 노동이민이며 정부는 수민원을 설치하고 계정 민영환을 총재로 선임해 이를 관장케 했으며, 약 7,500여 명 후에 사진 신부들 포함 약 1만명 이상?의 인력을 송출하여 외화벌이를 단행했고, 이 인력 수출 수익으로 영국제 중고 군함울 도입(장기적으로 민족운동의 재정기지 확보)했다. 이 인력 송출엔 미 감리회 선교사(감리교신학교 교장)존스가 적극 협력하여 자신의 교인들 즉, 제물포, 강화와 교동 섬, 황해도 그리고 평양지역 등 약 3,500여 명과 여기에 동포들의 심령상의 문제를 돌보게하기 위해 남/여 전도사 현순, 홍승하, 백헬렌 등이 지도자로 이주 갈 수있도록 적극 주선하여 후일 미주 독립운동기지가 굳건히 건설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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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의문 ㅡ "영화 하얼빈의 어이없는 대사"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
이 때 왜의 집중적인 대조선 전략이 조선 황제국 비하 전략이다.
이등박문은 망극하게도
"임금님은 오줌싸개, 왕비는 **년"이란 서동요를 철없는 아이들애게 눈깔사탕 주며 노래부르게 만둘었다.
그런 것에 무지한 이들이 가스라이팅 당하기 시작해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차리고 이등박문과 금서룡 등의 왜적들 그리고 그들의 충직한 개놈 이병도와 이기백 둥의 식민 매국 사학자들에게 정신 고문당해 정신 착란 상태가 지금이다. 어리석은 왕이란 말은 정신 착란의 언어이다.
<오늘의 의문의 말 어리석은 왕은 이등박문을 처형한 도마 안중근의 뚯이 아니며, 안 의사는 도리어 대정이 명치를 살해하고 등극했다. 라고 법정에서 사실을 일갈하여 왜의 대노를 사 시신마져도 유족에게 인도되지 못하는 비극을 산 것이다. 사형 집행후 시신이 인도되지 못하고 지금껏 찾지 못하는 유일한 예이다. 왜? 천황을 건드리는 자는 즈덜 나름으로 용서를 안한다.>
다른 예)
1. 천황연호 거부자 몽양 여운형 재산 강탈했다.
2. 부모를 죽인 천황을 저주한 유관순 열사의 빛몸을 찢어죽이다.
3. 완벽한 천황숭배 거부자 최인규 사형후 유골 아무데나 버림 등
지금까지도 자기 나라의 아비와 어미였던 왕과 왕비가 비하 천시당하며 왜적들에 의해 시해와 독살로 참변 당한 사실에 대해 무감각하며, 오로지 나라를 잃게 한 망국의 무눙한 군주인양 하는 철없는 언행들이 있다.
ㅡ. 병인박해와 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그리고 부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뚫고 이룬 개화와 개방의 임금님과 왕비님의 국가발전전략위한 결단을 강력 예찬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뚫고 일어서 빛이 빛됨을 이루어가는 민족을 스스로 찬하해야 하며, 당시의 한계와 문제는 해결해야할 의제였을 뿐이다.
"강화도 조약이 강제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민족은 이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 후 공리공론에 빠진 유학의 대안을 찾고자 고심하던 혁명선비들이 있엇으며, 이미 200여 년전인 1600년대부터 청나라를 통해 서학과 실학 그리고 양명학을 접했고, 이들이 영*정조기 실학과 양명학을 융성시키고 천주학을 발전시켜 천부인권의 사상을 옛 민족의 정체성과 연관되게 발전시키고 삶에 체화하기 시작했으나, 정조임금의 1800년 사후 순/헌/철종기의 민란의 세기를 지나는 동안 이 기운이 한 순간에 사라졌는가? 했더니 지하에 흐르던 지하수처럼 다시 분출하여 수운 최제우의 동학 천지인 사상으로 꽃피우고 있엇으며, 이 실학과 양명학의 실리와 실천이 천주학 그리고 동학이 새로운 신문명의 신종교인 미국의 개신교인 감리회와 장로교가 만나 또 다시 새로운 천부인권의 민족종교로 거듭나 우리의 민주공화정부를 수립하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모두는 모두에게 원료였다. 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의 핵심 지도자가 광물황제와 명성황후이다.
고종임금님과 왕비님은 아버지 대원군의 천주교인 1860년대 병인박해시 8,000여 명에 대한 살해후 개화를 통해 쇄국을 물리치고, 1880년대 병원과 학교에 대한 선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1890년대 들어 직접 선교인 교회, 성당, 성경보급, 복음전도(복음전도사였엇던 상하이 임정 총리 이동휘는 '백만이 전도되면 이 민족은 독립을 이루리라' 했다.) 등에 대한 전면 허용과 독립문 건립, 독립신문 발행 등을 허용, 권장하여 민주민권, 자주자강의 기운울 불어넣는 황제의 의도와 활동과 대한매일신보 특허장 발급 등에 대한 미평가 그리고 을사늑결 전과 후인 1907년 헐버트 선교사와 상동감리교회 전덕기 목사, 우당 이회영 등이 모의 시작한 헤이그 특사 황제 파견 외교전쟁과 이준의 순국 그리고 후에 벌어진 황제 강제 퇴위, 대한제국 군대해산, 정미의병전쟁의 발발인 남대문 시가전ㅡ조선8도총군의 서울진공작전과 의병지이자 지결지 이천-제천의 민가 1,500여 호 방화, 의병진에 대한 황제의 밀지를 통한 의병전쟁의 망명을 포함한 국내외 독려 등이 이뤄지며, 해외에 건설되기 시작한 민족의 구국간성 양성 전략도 그 기반을 다져갔으며,
황제의 교육을 일으켜 우리를 도우라는 명을 받든 미국을 비롯한 캐나다, 호주의 선교사들은 강력한 국민계몽의 토대를 쌓고 개화 신문명 교육을 진행시켰고, 이 때 선교사들과 연합된 주시경, 박은식, 최병헌, 아펜젤러 등에 의한 한글보급(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성경 둥)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조선인 토착 지도자 양성의 일환으로 서울 감리회신학교, 평양 장로회산학교 등이 개교 활성화되며 캐나다인 선교사 하디에 의해 촉발된 민족 영적각성운동으로 정갈해진 정신을 갖게 된 청년들이 대거 신학교로 밀려들어 약 10~15여 년후 1919 기미년 민족대표 기독교 성직자 16명이 배출되며, 상하이 임정에 5명의 성직자 파견이나 감리회 장로회 성직자 150여 명의 투옥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 때의 성직자들을 2,000여 년 전 우리 민족에 있엇다가 소멸된 민족의 성지 소도 제사장의 근대적 부활이라 말해야 할까?
<3.1 독립선언 정보를 알고 있던 30여 만명중 단 1명의 밀고자도 없었던 것은 하디 선교사의 1903년부터 시작되어 1907년 꽃을 피운 민족 영적각성운동의 덕이다. 하디의 공로는 이것이 핵심이며 민족운동의 전반을 이 하늘정신으로 각성된 이들이 이끌었다. 이 정신의 핵심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곧, 자신 스스로가 신성을 가진 인간임을 깨닫고 그 동안의 막 산 죄를 통회하고 자복한 것이다. 나는 개돼지가 아니었구나!!! 내가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품은 자인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는 질문은 너무나 선연히 답이 나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황제와 황후의 의도 기획이었던 것이다. 사람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발전전략의 방향을 가졌던 것이다.
이 1919년 인류사 대사건은 1910년 경술왜란부터 구체적으로 배태되기 시작했다.
민족은 국권발전과 수호 회복울 위해 그리도 처절했엇다 그러나, 1910년 병탄 경술왜란후엔 웬일인지 조용했다
실제 아~ 이런 정도의 준비와 항쟁으로 민족의 사실적 자주와 독립이 불가함을 깨닫고 깊은 내적 준비에 둘어간 것이다.
개신교중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서술해 보면
전술한 국민교육령에 따른 국민교육의 기독교 선교 세력에 의한 전개와 한글보급운동의 강력 전개로 인한 민도의 폭발에 조선인 성직자의 본격 양성이라는 것에 민족의 결사적 바람이 조응하여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아래의 내용들이었다.
ㅡ. 만주에선 신민회의 무장 독립군 양성 결의와 혁신유림과의 연대로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석오 이동녕 일가 등이 신훙무관학교 설립 3,500여 명 양성.
ㅡ. 미주에서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 설립, 수 백, 수 천명의 군사훈련.
ㅡ. 미주에서 노백린 장군의 한미항공학교 설립. 23명의 항공사 양성 완료. 하고
=. 위의 세 세력은 모두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민회 세력들이 핵심이며, 아래도 그러하다.
본격적 독립군 장교 양성과 독립전쟁을 준비했고, 연해주, 만주, 간도, 몽골 등엔 동포가 수 백만 모여들었고. 위의 장교 진영은 죽창과 화승총에서 현대 체코제 기관총과 야포까지 갖추는 현대전 능력울 갖추게 되었다.
또한, 양성된 성직자들이 조선 8도와 만주, 몽골, 연해주 등으로 퍼지며 설립된 교회안에 교회학교가 기본 만들어지며
ㅡ. 국내에선 전국 교회에 노불선교사가 현순 목사를 파송하여 장년주일학교를 500여 곳 설립해 조직화룰 준비하고
ㅡ. 해석 손정도 목사는 애국 부훙성회를 통해 민족 영적각성운동후 민족 의식화를 더욱 고밀도화를 지도했다.
이로써, 1918년 준비가 정신적 의식화, 무장력, 조직력이 곧, 인재양성과 그 기반이 준비되었다 판단한 민족세력은
광무황제의 직접 지도하 독립전쟁을 실행키로 하고 베이징 방면에 동궁을 내탕금으로 마련하고, 이를 국내의 해석 손정도 목사, 국외의 우당 이회영 권사가 이 사업을 연통하며 관할하였다.
허나, 이를 눈치챈 왜적들에 의해 황제가 1919. 1.22 독살 붕어 승하하시자 민족은 피의 희생을 불사하는 국내/외 전면전을 준비하고 황제의 국상일에 거사 일정맞추고, 해외에는 민족정부 수립위해 지도자를 상하이로 파견하는 등의 준비를 마쳤다. 상하이로 간 민족 지도자는 성직자로서 손정도, 현순, 김병조, 이상만 목사와 여 전도사 정세화 등으로 노블 선교사가 미화 1만불 = 현 가치 100억원을 송금하여 이 자금으로 임정이 조직되었으며, 미주 등으로의 외교전략이 구사되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인류사를 가르는 대전환의 거사가 이뤄졌다. 7,500여 순국선열의 빛을 댓가로 통한의 민족정부 없는 세월을 뚫고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므로써 독립신문 보도와 신민회 강령 선택후 민족역사상 처음으로 민주 공화정의 민족정부를 건국했다.
이 때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일어나며 민족은 의병전과 의거전에서 만주의 독립군 전쟁과 더 강력한 국내 침투 전투적 의열전(한지 김상옥ㅡ종로서, 나석주ㅡ동양척식, 김익상ㅡ총독부, 여성 안경신ㅡ평양도청. 경찰서 등)과 해석 손정도 목사 영적 지도하의 오동진 장군이 광복군총영 조직원들과 국내 진공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이로서, 민족과 인류는 자주와 세계평화 인류복지를 위한 정신적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 자주는 선언됨으로서 이루어진 것이고, 결코 쟁취나 청원이 아니었으며, 선언이었으므로 독립의 축하 경축식이었다. 왜의 학살극은 남의 잔치에 피를 뿌린 것이었다.
이 후로 인류는 빛의 실체를 깨닫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이 기미년의 정신으로 빛화의 길을 가며 빛사람화 빛민족화 빛인류화되어 가고 있다.
이 와중에 별 일을 다 격는 민족과 인류들은 아직도 그 빛의 완수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다 아직도 완수되지 않았다. 올 을사년이 그 단단한 기초를 다시 다지는 한 해가 될 것이다. 하늘은 어쩌다 한 번씩 역사를 한꺼번에 거대하게 여의봉처럼 압축적으로 바뀌도록 섭리할 때가 있고 지금이 그 때이며, 우리가 흘리게 하는 피는 없는 3.1 독립축하와 1987년의 6월 민주화운동, 2016~17년의 촛불혁명 그리고 2024~25년 이 아름답고 강한 마음빛 혁명은 완수될 것이다.
다만, 그 와중에 근자의 세월호, 이태원, 오송, 채상병 사건 등과 명성황후 시해와 제암리 학살 사건, 위안부 소녀와 강제 징용과 학도병들의 혼령과 일본의 침략기 내 내 동학과 의병과 독립군/광복군과 3.1 순국선열 등으로 하늘나라의 빛혼으로 돌아가신 분 들.
특히, 이 세상에 빛으로 와서 빛으로 살다가 2024. 12.29 항공기 사고로 다시 빛으로 돌아가신 179위의 빛혼이 하늘나라와 그 곳에 머무르며 언젠가 성삼위의 뜻이 임하여 주님이 허하실 때 다시 이 땅으로의 부활생명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를 본다.
우리는 답해야 한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질문을 5,000여 만 국민들이 새 해 들자마자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혼의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안고 사는 성직자들의 몫이다.
*. 이 빛화를 거스르는 역사의 반동은 늘 있엇다. 너무 실망 절망하지 말자.
우리의 3.1 독립경축식의 선언서와 그 행동/결과로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운동, 이집트의 민족해방운동 등이 3.1 자주와 세계평화 인류복지 선언으로 인함이며, 이 후 인류의 정의 평화 투쟁의 진실로 모든 내용과 형식의 시원이다.
이를 이름하여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우리를 세계의 등불민족이라 언급했으나 보다 더 선명하게는 이를 "우리 민족으로 인한 인류의 빛화 ㅡ 하나님화라 일컫는다."
곧, 인류가 하늘과 성자의 성품을 닮아간다. 는 것이다.
2024와 2025의 마지막과 첫 날부터 5일을 지나며,
600여 년 안산에 살아오며 작은 글을 남긴다.
-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 안산서지방회 성안산형제들교회 담임 민관기 목사 -
010 3082 7004<뉘시든 의문은 질문주셔도 됩니다. 짧게 요약한 글이라 의문의 여지있음.>
ch6881@naver.com
*. 우리 민족은 명성황후 시해의 당사자인 일본이 시해의 범과를 인정하고 삼포오루를 비롯한 50여 명의 종범에게 실형을 내렸어도, 도마 안중근이 주범 이등박문을 처단하였고, 최후의 주범 천황에게 이봉창은 투탄을 하였고, 주범의 하수인들은 매헌 윤봉길이 홍커우 의거로 제거하였다.
또한, 왜는 제암리 학살을 인정하고 유가족을 노블 선교사의 강력 항의 조치이긴 하나 총독 하세가와가 직접 원호조치했으며, 양심적 일본인들은 제암리교회를 복원해주기 까지 했다.
헌데, 세월호, 이태원, 채상병 사건에서 너무도 이상하고 무도한 이들을 본다. 기본적으로 진상규명이 안된다. 심지어 어떤 건은 자신들을 음해하는 것이라는 기획설을 주장하며, 다른 사람에게 범과를 뒤짚어 씌운다. 이러니 유가족들이나 국민들은 이해가 안가니 특검을 하라고도 한다. 죽어라 거부한다. 이건 인간인가? 악마인가?? 대체 뭔지???
나를 비롯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성직자들은 이 사태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며, 이렇게 말이 안되는 방법으로 하늘나라로 돌아간 빛혼을 위무하며, 살아있는 유가족들이 이제 되었다. 더 이상 위로를 하지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위로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 마디 더하면 위의 일에 12. 3 국민 학살극이나 전쟁극을 준비한 이들에 대한 하늘의 명을 받은 사법 판단이 사형으로 선고되고 집행의 때가 될 때 민족은 어느 누구의 죽음이 걱정되서가 아니라, 죽음 후의 혼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대한민국의 수 없는 국민들에게 받을 것이며 이에 대한 답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특히, 어린아이나 청소년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이 때 사람들에게 혼의 구성, 혼의 실체, 혼의 존재, 혼의 인식, 혼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하여여만 하는 성직자들께선 지금 이 새 해 을사년 120년 전 민족의 수치를 면하기 위해 불철주야하던 이들을 생각하며 무엇을 준비하여야 할까?
“이등박문과 하세가와보다도 못한 자들은 나이나 부부나를 가리지 말고 관용과 용서없는 결기
의 집행을 하늘의 섭리로 보여야 한다.”
*. 한편,
1. 이등박문 : 민족의 철천지 원수 이등박문은 1909년 도마 안중근과 우덕순과 장로가 공동 저격 처단했다. 안 의사 유골을 찾는 문제는 남과 북 민족사와 인류사의 문제이다.
2. 이완용 : 또, 하나의 민족의 철천지 원수 완용이는 1909년 이재명 지사에 의해 단칼 저격 당했으나 가까스로 살아났고 평생 휴유증에 시달리다 뒈졌다. 이 후 시신은 용인에 뭍혔다가 민족의 단죄가 너무 심하자 후손이 파묘를 하였고, 이 때 완용이의 유일한 매국 증거인 ‘고 이완용 자작 지묘’란 나무판이 나왔을 때 이를 연구용이라 가져가 불에 태운건 매국 식민사학자 이병도이다. 이병도의 이 행위는 완용이의 유일한 직접 중거물을 없애므로서 후일 매국의 증거가 뭐냐 우길 심산으로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참으로 고약한 자이다.
3. 민족의 철전지 원수들을 차례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처단한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너무 오래 살아남았다가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백범 김구는 효창원에 안장되었으며 이 곳은 국립 현충원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4.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인한 4월혁명후 그 범과를 인정하고 자진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서거후 국내로 송환되어 가족장으로 국민들의 애도속에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5.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피로 학살극을 벌인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민족이 관용을 베푸는 뼈아픈 실수를 범했다. 이 놈의 유골은 현재도 갈 곳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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