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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커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

작성자
노재신
작성일
2021-02-26 16:21
조회
389

꽃 향기와 커피 향 중 무엇을 더 좋아하시나요?
이러한 질문은 사람 마다의 취향을 무시한 질문이기 때문에 무례한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심리 검사와 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커피 향보다 꽃 향을 좋아 한다고 우월할 것도 아니며 꽃 향을 커피 향보다 좋아 한다고 우월할 것도 아닙니다.

커피 향은 커피 향으로 좋은 것이고 꽃 향기는 꽃 향기로 좋은 것일 뿐입니다.
향기로 말하면 커피 향이나 꽃 향기나 같은 향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커피 향을 더 좋아 한다고 무시할 것이 아니며 꽃의 향기를 좋아한다고 무시 당할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꽃 향기라며 커피 향을 좋아 하는 사람을 주시하거나 비웃기도 합니다. 반대로 커피 향을 좋아 하는 사람은 꽃 향기를 좋아 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조롱할 지도 모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여기엔 편이 나뉘기 때문이라 생각을 합니다.
커피 향 편, 꽃 향기 편으로 나뉘어 서로 자신의 의견을 주고 받다 보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커피 향이나 꽃 향기를 좋아하는 편향적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동질감을 갖고 친밀성을 같습니다.
반면 다른 향을 좋아 한다 하면 이질감을 느끼게 됨으로 거리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서로 다른 두 향을 두고 논쟁을 버리다 보면 그 논쟁은 격화될 수밖에 없으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경향성에 만약 이권이 그 사이에 개입이 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 경향성은 더 두드러지게 되고 편향성을 넘어 이젠 적대감을 표현하게 되기도 합니다.

적대감은 단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이겨내야 한다는 공격적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일 것입니다.
공격성은 경쟁의식 입니다.
이 경쟁의식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존재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 경쟁심을 보였고 급기야 야곱의 축복을 두고 서로 다투는 공격성을 보였으며, 결국은 서로 한 형제(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수 없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형제입니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 친밀하고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숙명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누구보다 더 멀어지고 꺼려 질 뿐만 아니라 서로를 미워하고 심지어 죽이고 싶은 원수와 같은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에서와 야곱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부터 갖고 태어난 운명적인 불행관계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형제이면서 쌍둥이었던 에서와 야곱,
사실 이들은 서로 이름과 모습에서 많은 차이 점을 드러낸 이들이라 할 수 있지만 형제라는 관계와 쌍둥이라는 관계로 생각하여 본다면 에서는 또 다른 야곱이었으며, 야곱은 또 다른 에서 임에 분명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 하나 였습니다.
나오는 순서에 따라 형(에서)과 동생(야곱)으로 정해졌을 뿐입니다.
만약 이 순서가 바뀌었다면 야곱이 형이 될 수도 있었고 에서가 동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은 에서가 형이 되게 하였고 야곱은 동생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세속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에서가 형으로 태어나고 야곱이 동생으로 태어나게 되었으나 후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형인 에서가 동생인 야곱을 섬겨야 하는 삶이 되어야 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에서와 야곱이 다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에 대하여 세상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운명적으로 그리 결정된 것이고 성경적으로 표현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습니다.

형이 동생을 섬기는 것은 순리로 보이지 않습니다.
동생이 형을 섬기며 형의 말을 동생이 들어야 하는 것이 순리처럼 보입니다.
왜 이 순리가 역리가 되고 역리처럼 보이는 것이 순리가 되었을까?
여기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한 것이 있다면 해석과 이해는 여럿일 수 있으나 사건은 오직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하나의 사건(실)을 이루셨습니다.
그 사건(실)이 경우에 맞지 않음처럼 보일 수도 있고 순리를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그 사건(실)을 사건(실)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건(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자신들의 의견과 자신들의 이해 차이로 만들어진 편향 때문에 서로 무시하고 다투고 싸우며 경쟁을 통해 적대한다고 하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에서가 형으로 태어났고 야곱이 동생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형이 동생을 섬겨야 만 했다는 사실(건)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러한 일들에 있어선 서로 이견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선 자신의 생각과 뜻이 있으며 자신의 이해와 해석이 좀 다르다 하여도 그대로 받아 들여야만 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순종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복종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신앙의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며,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을 그리스도의 마땅한 모습으로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복종하려 하지 않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는 신앙인 또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커피는 커피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꽃은 꽃 자체의 모습이 있습니다.
커피가 꽃처럼 되어서는 안되고 꽃이 커피 처럼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커피에겐 커피의 향이 나야 하고 꽃에선 꽃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커피에게서 꽃의 향기를 구한다면 뭔가 잘 못된 것입니다. 그와 같이 꽃에서 커피의 향을 구한다면 그 또한 잘 못입니다.

커피에게서 커피의 향이 나는 것이 잘 못이 아니라 꽃에게서 꽃의 향기가 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커피에게서 꽃의 향기를 구하거나 꽃에게서 커피의 향을 기대하는 그 사람이 잘 못인 것입니다.
이 잘못은 결국 죄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그리스도인)인은 예수님이 보이신 삶의 모습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를 받아 들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신앙인) 다움 입니다.
그리스도인 다움은 예수님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을 비난하거나 비판을 한다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더 잘 알기 위한 수단이나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으려 하거나 예수님을 버리려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시작은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으나 그 나중은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부인하는 자리에 서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은 이단이 되거나 사이비가 되어 있을 것(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되고 싶습니까?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하지 않거나 부인하거나 예수님이 아닌 또 다른 그 누군가를 그리스도(구원자)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 예수님을 정면으로 보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전방향 예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예수님의 측변을 보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측방향 예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명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뒷보습을 보고 있는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후방향 예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 그리스도를 말하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선 한 예수님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한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방이등 후방이든 측방이든 결국은 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음임을 서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이들이 서로 다르게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임을 알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들어보면 압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예수님을 말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한 분인 예수님을 말하고 있음을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그러기에 한 예수님을 보고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면 서로 간에 공명이 있습니다. 그 공명은 울림이며 이 울림은 거룩한 영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로 진짜와 가짜를 분별케 하는 '분별의 영'이 되시기도 합니다.

커피와 꽃은 분명 다르게 향기를 드러냅니다.
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향기를 발합니다. 이것이 꽃의 특성이며 이것이 꽃 다움 입니다.
커피는 그 자체로는 향이 없습니다. 다만 바리스타의 정성스런 가공의 과정을 거치면 그 어떤 꽃보다 강한 향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커피의 특성이며 이것이 커피 다움 입니다.

절대로 커피는 꽃과 싸우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절대로 꽃은 커피와도 다투지 않습니다.
비록 커피 향에 의해 꽃의 향이 감추인다 하여도 커피와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커피가 꽃의 향기를 누르고 온 방안 가득 채운다 하여도 우쭐해 하며 꽃을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커피가 말을 한다면 이 모든 것은 바리스타의 은혜라 할 것입니다.
만약 꽃이 말을 한다면 이 모든 것이 창조주의 뜻이니 억울하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꽃을 무엇보다 아름답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꽃을 보고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커피를 무엇보다 커피를 좋아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은 생커피를 통해 바리스타(그리스도)의 은혜를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꽃과 커피 속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통해 진실한 믿음의 사람은 그 속에서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삶 속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통해 진실한 믿음의 사람은 그 속에서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속에 아주 비밀스럽게 보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있습니다.
이 것을 복음이라 말하고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 말을 하며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감리회는 지금 무엇을 드러내고 있음입니까?
서로 다름으로 인해 갈등하고 다투고 싸우고 미워하고 조롱하고 비웃는 것으로 끝을 보인다면 더 이상 감리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

커피와 꽃이 다르지만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자랑하지 않으며 서로 무시하거나 비웃지 않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진실한 믿음의 사람(감리회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전체 2

  • 2021-02-27 20:18

    사진 퍼갑니다. ^^


    • 2021-02-27 21:14

      그 사진 퍼가려면 제게 보내주신 목사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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