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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신학도 수련에서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에 관한 귀한 글

작성자
장운양
작성일
2021-02-18 11:31
조회
692
이주헌 목사님의 귀하고 반갑고 흐믓한 글을 접하고 함께 나누고자 감리교소식란에 옮겨 봅니다 .
이주헌 목사님 참 고맙습니다. 조만간 제가 따스한 밥 한끼 대접하겠습니다. 목원 이호운 목사님 이원규 교수님으로 이어지는 기감의 신학교육의 역사는 정말 소중한 보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

언젠가부터 야곱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 어김없이 얍복 강가에서의 야곱의 심정을 떠올리게 되었다. 절박함과 두려움 속에서 그는 홀로 얍복 강가에 있었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때 한 사람이 나타났고, 야곱은 그와 씨름한다. 야곱은 그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고 축복해 달라고 떼를 쓴다. 그 끈질김에 그 사람은 항복하고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며 사라진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예전 생각이 났다.

군(軍)에서 12월초 전역한 후에 내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경험은 IMF로 부도난 우리집이었다. 그 때부터 어렵고 힘든 상황이 많이 왔었다. 특히 신학교 2학년에 복학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갈림길에 섰다. 돈을 벌 것이냐? 아니면 복학할 것이냐?

친척 어르신 한 분은 부모를 도와야지 어떻게 공부를 계속하려고 하느냐는 핀잔을 주셨지만, 나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어차피 내가 도와드리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2학년 1학기는 문제가 없었다. 군대 가기 전에 미리 등록를 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두 번째 학기부터는 참 어렵고 힘든 일들이 다가왔다. 가난한 신학생의 주머니는 금새 빈털터리가 되었고 2학기 등록금을 마련할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절박함을 아셨을까? 하나님은 모교회를 통해서 100만원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러나 문제는 나머지 금액을 마련 할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분활납부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학기 중간고사까지 시간을 끌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마련이 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풀뿌리라도 잡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마냥 흘러가서 분할납부 시한의 마지막 날까지 갔다.

130여만원 중에 100만원은 있는데 나머지가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풀뿌리 잡는 심정으로 그 당시 교무처장 교수님께 편지 한 통을 썼다. '꼭 학년말에 갚을테니 받아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곤란한 말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어떤 수단과 방법도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100만원을 들고 교무처에 갔다. 교무처장 교수님이 안 계셔서 교무실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꼭 학기 끝날 때까지 내겠다고 하며, 납부를 시도했다. 딱했는지 받아주었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 순간 연락이 왔다. 교무처인데 교무처장 이원규 교수님이 찾으신다는 것이다. 아직 한 번도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던 교수님이기에 낯설었다. 그리고 "행정적으로 안되네!" 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불안감으로 뛰는 가슴을 부여 잡고 교수실로 향했다. 교수님을 만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우선 백만원을 받아 주시면 학년말까지 나머지 금액을 내겠습니다.”

그 때였다. 교수님은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시더니, "모자란 등록금을 이것으로 내게" 하며 부족한 금액을 주셨다. 순간 얼어붙어 있었던 나는 어벙벙한 상태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며 받았다. 그 날 나는, 분할납부 마지막 날에 등록금을 다 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빌려주셨다는 생각을 했던 나는 어떻게든 갚겠다고 생각하고 얼마 뒤에 십만원을 들고 교무처에 갔다. 교수님께 감사하다고, 나머지는 다음 달에 갚겠다는 편지를 쓰고 돈을 맡겼다. 그날 오후 다시 전화가 왔다.

"이주헌 군, 걱정말게. 나머지는 이주헌 군 장학금으로 생각하게"

그 후로도 이원규 교수님과 친해질 시간은 없었기에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남았지만 내 마음의 한 구석에는 잊지 못할 은혜로 남아 있다.

절박함 속에서 만난 이원규 교수님은 마치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만난 한 사내와 같은 여운으로 내게 남아서 내 삶의 어떤 전환점처럼 작용하고 있다.

출처 : 웨슬리안타임즈(http://www.kmcdaily.com)



전체 2

  • 2021-02-18 13:46

    이 호 운 (李浩雲, 1911. 5. 3~1969. 1. 24)
    목회자, 신학자, 교육가
    호는 ‘목원’(牧園)

    이호운은 평남 강동군 원탄면 상리에서 부친 이민조와 모친 최일구 사이에서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만주 용정의 영신중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여 1936년 3월 24일 졸업과 동시에 차경화와 결혼하고 동부연회 춘천지방 화천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 후 서부연회 해주지방 옹진으로 옮겨 마산구역을 담임하다가 옹진읍교회에서 시무하고 1939년 3월에 준회원에 허입하였으며 연회 해산 직전인 1941년 3월 9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친일 교단을 반대하는 의미로 옹진교회를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지사대학에서 청강하였다. 1942년 귀국하여 해방을 맞기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1945년 9월부터 평양 성화여학교(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교무주임으로 시무하였다. 이듬해 교회 측의 기념예배와 동시에 진행된 3.1절 기념대회에서 폭탄투척사건이 발생했는데 이호운 목사가 그 배후로 지목되어 일경에게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고 석방된 후 곧바로 월남하였다.
    월남하여 쿠퍼(K.E. Cooper) 선교사가 서울 충정로의 옛 여자신학교 건물에서 개설한 "보혜성경학원"에 교사로 참여하였고, 1947년 4월부터 서울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다가 미감리교에서 제공하는 십자군 장학금을 받고 1949년 9월 도미하여 에반스톤 개렛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51년 9월 달라스 소재 남감리교대학교 퍼킨스신학대학원 3학년에 전입하여 1952년 6월 졸업하였다.
    1952년 9월부터 1956년 9월까지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감리교사, 교리사, 교회인물사 등 교회사 관련 과목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남녀 서리 교역자와 신학을 공부하려는 평신도를 모아 신학을 가르친 전수과가 1953년 9월 21일 설치되자 과장으로 쿠퍼 목사와 함께 전수과를 담당하였다. 1956년 9월 대전신학원(현 목원대학교)의 교수로 전임하였고 1958년 4월 11일에는 목원대학 제2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농촌 목회자 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1968년 12월 15일 신경성 고혈압으로 뇌출혈을 일으켜 혼수상태로 세브란스병원에 누워 있다가 40일 만인 1969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목원대 내부 분규 등이 요인이 되었다). 1월 2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가졌다
    그는 이용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 은혜받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하였다. 이용도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30년 봄 간도 용정 부흥회에서였다. 그 후 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에 와서 몇 개월간 현저동 이용도 목사 집에 머물면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저도 주님을 위하여 몸 받치기를 원합니다. 평안과 영광과 칭찬을 요구하지 않사오며 주께서 지고 가는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골고다까지라도 가기를 원합니다. 옛 성도들이 졌던 십자가 지금 목사님이 지신 십자가를 저도 지려고 합니다. 오로지 저도 주님을 위하여 몸 받치렵니다. 주님 위하여 일하고 살고 죽기를 원합니다."(1932년 6월 25일 이용도 목사에게 보낸 편지)

    이러한 그의 약속대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농촌에 들어가 주님의 십자가를 졌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는 친일적인 어용교단이 들어서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훼손되는 일이 나타나자 신앙 양심을 버리지 않기 위해 목회를 그만두고 농촌에 묻혀 농사일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교역자 양성을 위한 후진 양성에 전념하게 된다. 이 후진 양성도 주님을 위한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다. 이것이 자신의 명예나 출세를 위한 길이 아님은 찬송시 355장 "부름받아 나선 이 몸"에 잘 나타나 있다. 1950년 개렛신학교 유학중 주님의 부르심에 복종하리라는 신앙고백으로 지은 이 찬송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지어진 찬송가로서 신학교에서는 교가처럼 불리던 것인데 1967년 개편찬송가에 수록되면서 일반에 보급되었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우리의 역사적 상황 속으로 보냄을 받은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주님 중심의 신앙체계"(민경배)를 표현한 이 찬송가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애창되고 있다. 그와 함께 목원대학에서 일했던 조석환 교수는 이호운 목사를 가리켜 "부름받은 몸이란 찬송가대로 사신 분"이라 했다.

    1.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따라 가오리니
    어느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2.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몸에 지닌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몸에 지닌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3. 존귀영광 모든권세 주님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그리고 〈감리교생활〉에 교회를 빛내는 인물들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소개된 사람들은 모두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이었다. (전금주 권사, 조기호 목사, 황영호 목사, 허태행 권사, 시율린 목사).
    박대선 총장이 장례식에서 조사를 통해 "이호운 학장은 꿈의 사람이었다"고 표현한 것처럼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꿈을 지닌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항상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 열정적이었고, 예언자처럼 교회의 부패상을 질타하기도 했다. "큰 교회 가려고 넘실거리는 너절한 목사가 되지 말고 꿈을 가진 그리고 신념 있는 목사가 되라"고 부탁하였다(김상봉 목사). 특히 농촌 목회에 대한 꿈을 학생들에게 심은 것으로 유명하다. 박봉배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포플라 나무를 심어 몇 년만 기다리면 얼마나 크게 자라고, 소를 키우면 얼마나 농촌이 발전할 수 있는가" 등으로 밤늦게까지 대화하였기에 "이대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한다.
    이러한 농촌에 대한 꿈은 목원대학으로 전임하면서 서서히 실현되었다. 그는 10년 후인 개교 10주년 기념행사 기념사에서 그 꿈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흙에 개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이상은 '복음을 흙에 개이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직자로 초연하고 성별된 사람들이라 해서 은근히 허세를 부리고 권위를 내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교역자를 기르기보다는 민중을 이해하고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친구와 일꾼을 기르렵니다."(1964. 5. 5)

    위의 기념사에 나타난 것처럼 그의 사상은 "꿈(복음)을 흙 속에 민중과 함께 생활로 드러내는 것"(《목원신학 반세기의 발자취》, 88쪽)이었다. 이 꿈의 실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이호운 학장을 나는 "꿈을 가진 농촌운동가"로 표현하고 싶다. 그는 정말 목원의 개척자로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했다. "불도저"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굽힐 줄 모르는 용기로 학교행정을 처리하여 1965년에는 대학인가를 받아냈고, 수십만 평의 계족산을 확보하고 거기에 35만 주의 낙엽송과 각종 나무를 심었다. 성산목장, 실습농장을 가꾸어서 목원대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3년간 4백여 명의 교역자를 비롯하여 5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의 회고에서처럼 "마치 딸을 양육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성의를 학교를 위하여 시간과 지혜와 정력을 바쳤다. 그리고 학교가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했고 학교가 입을 피해를 보고 슬퍼했다. 학교는 나의 기쁨, 슬픔, 사랑이었다. 학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으며 학교가 나의 재산, 나의 영광이었다. 나에게는 다른 욕심은 없었다." ("학교를떠나는 마음", 〈대전신학보〉, 1968. 12)

    ▶ 이호운 목사 약력

    1911년 5.3. 평남 강동군 원탄면 상리에서 출생
    1932년 3월 만주 용정 영신중학교를 졸업
    1930년 간도 용정 부흥회에서 이용도 목사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음
    1932년 4월 감리교신학교 입학
    1936년 3월 감리교신학교 졸업(차경화와 결혼)
    1936년 동부연회 춘천지방 화천교회를 담임
    서부연회 해주지방 옹진 마산구역, 옹진읍교회 시무
    1941년 3월 목사 안수
    1941년 9월 친일 교단을 반대하는 의미로 옹진교회를 사임,
    일본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수학
    1942년 귀국 후 해방을 맞기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음.
    1945년 9월 평양 성화여학교(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교감 시무
    1946년 서울 충정로 "보혜성경학원"에 교사로 참여
    1947년 4월 서울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교수로 활동
    1949년 9월 미국 에반스톤 개렛신학교 수학
    1951년 게렛신학교 유학 중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작사
    1951년 9월 미국 텍사스 달라스 남감리교대학교(SMU) 퍼킨스신학대학원
    3학년에 전입
    1952년 6월 남감리교대학 졸업 (B.D 학위 취득)
    1952년 9월 감리교신학교 교수 재직
    (감리교회사, 교리사, 교회 인물사 등 교회사 관련 과목 교수
    및 전수과 담당)
    1956년 9월 대전신학원(현 목원대학교)의 교수로 전임
    1958년 4월 목원대학 제2대 학장으로 취임 (농촌 목회자 양성에 집중)
    1960년 삼화중학교 이사장 피선
    1961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개최된 세계 감리교 제10차 3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
    1962년 대전 YMCA 이사장 피선
    1963년 말레이시아 포트 딕슨에서 개최된 아시아 감리교 대회 참석
    1964년 감리회 총리원 이사, 기독교서회 이사, 대전 보육대학 이사,
    감리교 대전 신학대학 학장 취임
    1967년 개편찬송가에 ‘부름 받아 나선 이 몸’(355장) 수록
    신학교육 및 목회사정 연구차 미국 감리교회와 교육계 시찰
    1968년 찬송가 편찬 위원회 위원, 중앙신학교 재단 이사장 피선
    1968년 12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남태평양 지역 복음 전도회 참석
    1969년 1월 25일 소천 (1월 2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

    ▶ 이호운 목사 주요저서 및 역서:

    《주기도문 연구 : 그 특색, 목적, 및 해설》E.F. 스칼, 대한기독교서회, 1953. (역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 H.F. 로울, 감리교 총리원, 1954. (역서)
    《푸른 초장, 웹박사 설교집》 L. Webb, 진리사, 1954. (역서)
    《개신교 입문》 J.H. Nichols, 진리사, 1955. (역서)
    《크리스마스 사료》이호운 편, 감리교총리원 교육국, 1956.
    《예언자 연구》존 페터슨, 한국기독교문화원, 1957. (역서)
    《기독교교육 원리》A. 빅토 머리, 대한기독교서회, 1957 (역서)
    《신교와 구교의 다른 점》아더 G. 레이놀드, 대한기독교서회, 1958. (역서)
    《주께 바친 생애- 쿠퍼 목사전》 이호운 저, 총리원교육국, 1960
    《개신교 원리》 이호운 저, 총리원 전도국, 1960.
    《시편 설교집》 해롤드 A. 보슬리, 감리교대전신학대 출판부, 1964. (역서)
    《그의 나라와 그의 생애- 양주삼 박사》 이호운 저, 감리교대전신학대 출판부, 1965
    《기도생활》 L. Webb, 감리교대전신학대 출판부, 1966. (역서)
    《한국교회 초기사》 이호운 저, 대한기독교서회, 1970

    ▶ 이호운 목사 연구 논문

    『이호운 목사의 농촌목회론 연구』
    탁현균,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석사학위논문, 1997)
    『이호운과 목원신학 - 이호운의 메시지 분석을 통한 목원신학 정체성 고찰』
    남재영,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석사학위 논문, 1999)
    『이호운 목사의 신학연구』
    원용철,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석사학위 논문, 2000)
    『이호운 목사의 영성에 관한 연구』
    김재훈,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석사학위 논문, 2001)

    ▶ 이호운 목사 관련 도서

    『牧園의 꿈 : 이호운목사 설교. 강연. 시집』
    감리교 대전신학대학 동문회 편, (감리교 대전신학대학, 1972)
    『牧園의 꿈․농촌선교 - 흙에 사람, 땅의 친구 이호운』
    전성성, (목원대학교 신학대학동문회 부설 농촌선교연구소, 2000)


  • 2021-02-18 19:58

    장 박사님 너무 귀한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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