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2:4-10(설교: 하나님의 선물인…)의 주경신학적 연구
Author
최세창
Date
2025-03-0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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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기 이전의 모든 인간이 영적으로 죽었던 자요 사단의 지배를 받는 진노의 자녀이었음을 밝힌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신 일 곧 구원하신 일의 동기에 대해, 【4】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설명하고 있다.
긍휼이란 엘레오스(ἔλεος)로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마련하는 감정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자비를 뜻하기도 한다}(약 2:13의 주석). 본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이란 영원한 구원의 섭리(1:4의 주석을 보라.)에 의해서 멸망 가운데 있는 인류를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보내 주신 사랑의 행위를 의미한다(요일 4:10).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생명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동등성, 하늘 영광, 그리고 고귀하신 생명 모두가 희생 되었다는 것이다(빌 2:6-8).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희생된 사랑이야말로 영원과 우주를 포괄하는 큰 사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바울은 바로 이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는 2:1의 주석을 보라.
이 말씀은 “미래에 있을 영생”(F.B. Mayer)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현재적인 부활 생명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롬 6:11-14, 8:10-11, 갈 2:20, 골 2:13, 딤후 1:10 등). 발로우(G. Barlow)는 “참된 기독교인이란 산 자로서, 영적 지각과 영적 욕망, 영적 활동과 영적 기쁨, 그리고 영적 능력을 소유한 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영적 생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나며, 그와 일치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바울 자신도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라고 하였다.
바울은 구원받은 믿음의 사실에 대해 스스로 놀란 자처럼 이 한 구절, 즉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를 삽입하였다. “독자에게 특히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黑崎幸吉).
은혜(카리티, χάριτί)는 갈라디아서 1:3의 주석을 보라.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는 죄인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최고 최대의 은혜요, 그 밖의 모든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얻은 구원의 완성은 미래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노력 또는 선행에 의한 구원관이 자리할 틈이란 티끌만치도 없다. 인간은 다만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할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허물로 죽은 인간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는,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말씀으로 연결되고 있다.
함께 일으키사(쉬네게이렌, συνήγειρεν)와 함께…앉히시니(쉬네카티센, συνεκάθισεν)는 둘 다 과거의 사실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그분과 연합한 기독교인에게 발생한 사건이므로(5절의 주석을 보라.),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을 뿐만 아니라(골 2:12, 3:1),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혀진 것이다(빌 3:20). 다시 말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된 지체로서의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연합의 덕택으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혀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될 일이나 믿음으로 벌써 된 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혀진 것은 엄연한 믿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요 8:56, 삼상 1:18, 히 11:1-2). 그러므로 믿는 자는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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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3) 천국 시민으로서(빌 3:20),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의 표준과 하늘의 충동에 의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몸은 이 세상 한가운데 있지만, 그들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행동은 항상 하늘의 지혜와 능력으로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1:3의 주석을 보라.) 이러한 삶의 극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바울의 고백 속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셔서 하늘에 앉히신 목적에 대해 바울은,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비(크레스토테티, χρηστότητι)는 갈라디아서 5:22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그분을 통로로 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지시하고 있다(J. Calvin, W. G. Blaikie).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자비를 베풀어 주심으로써 그 ‘은혜’(2:5의 주석을 보라.)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지극히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히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시 103:17).①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원한 예시이다”(A. Martin).
이 구절은 2:5의 괄호 속에 있는 말씀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은 “신약에서 가장 훌륭한 복음의 요약이다”(W. H. Taylor).
구원을 얻었나니(세소스메노이, σεσωσμένοι)는 완료형 분사의 수동태이다. 구원은 미래에만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았고 계속해서 받고 있는 것이다(고전 1:18, 롬 5:9, 벧전 2:2. F. W. Beare). 이디(Eadie)는 이를 파선된 배에서 구조선으로 옮겨진 사람으로 비유하였다. 그의 완전한 구원인 육지는 아직 저 멀리 있으나 구원은 구조선에서 벌써 실현되었다는 것이다.②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편의 유일무이한 조건은 ‘은혜’(2:5의 주석을 보라.)이며, 인간 편의 유일무이한 조건은 은혜를 인한 믿음( 1:13의 주석을 보라.)이다. 이 점에 대해 렌스키(R. C. H. Lenski)는 “구원을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하여 초래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근원과 기원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죽은 자가 자신의 소생에 있어서 최소한의 노력도 할 수 없듯이 그의 영적인 죽음도 그 영적인 생명을 획득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기여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투토, τούτο)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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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Calvin, E. F. Scott, F. W. Beare, R. C. H. Lenski, A. Martin, H. Hendriksen, 黑崎幸吉, 이상근. 비교: T. K. Abott, “Harless, H. A. W. Meyer”(in 이상근), “Greijdanus, Salmond”(in A. Martin) 등은 재림 이후로 해석하나 적합하지 않다.
2)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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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③ (2) 구원,④ (3)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실⑤ 등의 견해가 있다. 믿음과 구원의 원천인 은혜가 선물과 같은 의미의 말이라는 점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는 말씀을 미루어 볼 때 (3)설이 가장 적합하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2:8 후반)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양심에 따른 선행이나 윤리적 행위 또는 율법 행위나 종교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모든 사상을 한마디로 배격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의 부당성은 원죄로 타락한 인간(롬 3:10-18, 5:12)의 양심이란 선악을 판단하기는 하나 선악의 절대적 법정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양심의 법과 하나님의 의지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사 55:8-9, 시 130:3)에 있다. 또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⑥을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기는커녕, 올바로 이해할 수도 없다는 점에 있다. 더욱 결정적인 증거는 양심과 율법과 종교가 있는 인간 세상에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 성취하시는 것은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인 것이다. 바울은 그 이유(원문에는 10절 첫 부분에 가르, γάρ가 있다.)를 【10】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만드신 바(포이에마, ποίημα)는 이곳 외에 로마서 1:20에만 나타나는 말로서 (1) 육적인 생명을 창조하신 것(Gregory of Nazianzus, Basil, Tertullian),⑦ (2) 육적 및 영적인 생명을 창조하신 것(“Pelagius”,⑧ “Bullinger”⑨), (3) 영적으로 중생케 하신 것 등의 해석이 있는데, 전후 문맥상 대부분의 학자들⑩처럼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5:1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 3:5, 갈라디아서 6:15, 디모데후서 1:10, 디도서 3:5 등을 들 수 있다.
바울은 더욱 자세하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이란 그리스도의 전 구원 사건(선재, 성육, 생애, 죽음, 부활, 승천)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도록 영적 생명을 얻게 된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선행이 구원의 요인이 아니라, 믿음 또는 구원의 결과라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듯이”(마 7:17) 선한 일을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약 2:18의 주석을 보라.)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신 목적이 들어 있다.
이 일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로 지음받은 일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천되었고, 또한 변천될 상대적인 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해 놓으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 주신 선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의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책임이기도 하다”(W. Hendriksen).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은 믿음 또는 신생에서 나온 선행일지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그 까닭은 그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는 말씀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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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rasmus, Beza”(in T. K. Abott), J. A. Bengel, “Grotius, Hodge”(in 이상근), C. H. Dodd, W. G. Blaikie, F. Foulkes, H. C. G. Moule, “Van Leeuwen”(in 박윤선).
4) J. Calvin, H. Alford, “Harless, H. A. W. Meyer, Eadie”(in 이상근), “Wuest”(in 박윤선), A. S. Wood.
5) J. Wesley, “Theophylact, Macknight”(in 이상근), W. H. Taylor, M. Henry, 黑崎幸吉, 윤성범.
6) 롬 7:12. 참조: J. S. Stewart, op. cit., p.109. R. Longenecker, The Ministry and Message of Paul(Michigan: Zondervan, 1973), p. 94.
7) in 이상근.
8) in T. K. Abott.
9) in 이상근.
10) J. Calvin, A. Clarke, T. K. Abott, “Salmond, Eadie”(in 이상근), M. Henry, E. F. Scott, R. P. Marti, H. C. G. Moule, F. F. Bruce, C. R. Erdman, F. Foulkes, G. H. P. Thompson, J. A. Allan, F. J. Dake, R. C. H. Lenski, G. Barlow(p. 158), A. S. Wood,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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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346-352.
긍휼이란 엘레오스(ἔλεος)로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마련하는 감정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자비를 뜻하기도 한다}(약 2:13의 주석). 본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이란 영원한 구원의 섭리(1:4의 주석을 보라.)에 의해서 멸망 가운데 있는 인류를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보내 주신 사랑의 행위를 의미한다(요일 4:10).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생명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동등성, 하늘 영광, 그리고 고귀하신 생명 모두가 희생 되었다는 것이다(빌 2:6-8).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희생된 사랑이야말로 영원과 우주를 포괄하는 큰 사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바울은 바로 이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는 2:1의 주석을 보라.
이 말씀은 “미래에 있을 영생”(F.B. Mayer)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현재적인 부활 생명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롬 6:11-14, 8:10-11, 갈 2:20, 골 2:13, 딤후 1:10 등). 발로우(G. Barlow)는 “참된 기독교인이란 산 자로서, 영적 지각과 영적 욕망, 영적 활동과 영적 기쁨, 그리고 영적 능력을 소유한 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영적 생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나며, 그와 일치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바울 자신도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라고 하였다.
바울은 구원받은 믿음의 사실에 대해 스스로 놀란 자처럼 이 한 구절, 즉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를 삽입하였다. “독자에게 특히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黑崎幸吉).
은혜(카리티, χάριτί)는 갈라디아서 1:3의 주석을 보라.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는 죄인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최고 최대의 은혜요, 그 밖의 모든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얻은 구원의 완성은 미래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노력 또는 선행에 의한 구원관이 자리할 틈이란 티끌만치도 없다. 인간은 다만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할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허물로 죽은 인간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는,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말씀으로 연결되고 있다.
함께 일으키사(쉬네게이렌, συνήγειρεν)와 함께…앉히시니(쉬네카티센, συνεκάθισεν)는 둘 다 과거의 사실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그분과 연합한 기독교인에게 발생한 사건이므로(5절의 주석을 보라.),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을 뿐만 아니라(골 2:12, 3:1),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혀진 것이다(빌 3:20). 다시 말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된 지체로서의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연합의 덕택으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혀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될 일이나 믿음으로 벌써 된 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혀진 것은 엄연한 믿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요 8:56, 삼상 1:18, 히 11:1-2). 그러므로 믿는 자는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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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3) 천국 시민으로서(빌 3:20),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의 표준과 하늘의 충동에 의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몸은 이 세상 한가운데 있지만, 그들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행동은 항상 하늘의 지혜와 능력으로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1:3의 주석을 보라.) 이러한 삶의 극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바울의 고백 속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셔서 하늘에 앉히신 목적에 대해 바울은,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비(크레스토테티, χρηστότητι)는 갈라디아서 5:22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그분을 통로로 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지시하고 있다(J. Calvin, W. G. Blaikie).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자비를 베풀어 주심으로써 그 ‘은혜’(2:5의 주석을 보라.)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지극히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히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시 103:17).①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원한 예시이다”(A. Martin).
이 구절은 2:5의 괄호 속에 있는 말씀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은 “신약에서 가장 훌륭한 복음의 요약이다”(W. H. Taylor).
구원을 얻었나니(세소스메노이, σεσωσμένοι)는 완료형 분사의 수동태이다. 구원은 미래에만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았고 계속해서 받고 있는 것이다(고전 1:18, 롬 5:9, 벧전 2:2. F. W. Beare). 이디(Eadie)는 이를 파선된 배에서 구조선으로 옮겨진 사람으로 비유하였다. 그의 완전한 구원인 육지는 아직 저 멀리 있으나 구원은 구조선에서 벌써 실현되었다는 것이다.②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편의 유일무이한 조건은 ‘은혜’(2:5의 주석을 보라.)이며, 인간 편의 유일무이한 조건은 은혜를 인한 믿음( 1:13의 주석을 보라.)이다. 이 점에 대해 렌스키(R. C. H. Lenski)는 “구원을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하여 초래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근원과 기원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죽은 자가 자신의 소생에 있어서 최소한의 노력도 할 수 없듯이 그의 영적인 죽음도 그 영적인 생명을 획득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기여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투토, τούτο)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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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Calvin, E. F. Scott, F. W. Beare, R. C. H. Lenski, A. Martin, H. Hendriksen, 黑崎幸吉, 이상근. 비교: T. K. Abott, “Harless, H. A. W. Meyer”(in 이상근), “Greijdanus, Salmond”(in A. Martin) 등은 재림 이후로 해석하나 적합하지 않다.
2)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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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③ (2) 구원,④ (3)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실⑤ 등의 견해가 있다. 믿음과 구원의 원천인 은혜가 선물과 같은 의미의 말이라는 점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는 말씀을 미루어 볼 때 (3)설이 가장 적합하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2:8 후반)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양심에 따른 선행이나 윤리적 행위 또는 율법 행위나 종교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모든 사상을 한마디로 배격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의 부당성은 원죄로 타락한 인간(롬 3:10-18, 5:12)의 양심이란 선악을 판단하기는 하나 선악의 절대적 법정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양심의 법과 하나님의 의지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사 55:8-9, 시 130:3)에 있다. 또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⑥을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기는커녕, 올바로 이해할 수도 없다는 점에 있다. 더욱 결정적인 증거는 양심과 율법과 종교가 있는 인간 세상에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 성취하시는 것은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인 것이다. 바울은 그 이유(원문에는 10절 첫 부분에 가르, γάρ가 있다.)를 【10】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만드신 바(포이에마, ποίημα)는 이곳 외에 로마서 1:20에만 나타나는 말로서 (1) 육적인 생명을 창조하신 것(Gregory of Nazianzus, Basil, Tertullian),⑦ (2) 육적 및 영적인 생명을 창조하신 것(“Pelagius”,⑧ “Bullinger”⑨), (3) 영적으로 중생케 하신 것 등의 해석이 있는데, 전후 문맥상 대부분의 학자들⑩처럼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5:1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 3:5, 갈라디아서 6:15, 디모데후서 1:10, 디도서 3:5 등을 들 수 있다.
바울은 더욱 자세하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이란 그리스도의 전 구원 사건(선재, 성육, 생애, 죽음, 부활, 승천)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도록 영적 생명을 얻게 된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선행이 구원의 요인이 아니라, 믿음 또는 구원의 결과라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듯이”(마 7:17) 선한 일을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약 2:18의 주석을 보라.)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신 목적이 들어 있다.
이 일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로 지음받은 일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천되었고, 또한 변천될 상대적인 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해 놓으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 주신 선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의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책임이기도 하다”(W. Hendriksen).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은 믿음 또는 신생에서 나온 선행일지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그 까닭은 그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는 말씀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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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rasmus, Beza”(in T. K. Abott), J. A. Bengel, “Grotius, Hodge”(in 이상근), C. H. Dodd, W. G. Blaikie, F. Foulkes, H. C. G. Moule, “Van Leeuwen”(in 박윤선).
4) J. Calvin, H. Alford, “Harless, H. A. W. Meyer, Eadie”(in 이상근), “Wuest”(in 박윤선), A. S. Wood.
5) J. Wesley, “Theophylact, Macknight”(in 이상근), W. H. Taylor, M. Henry, 黑崎幸吉, 윤성범.
6) 롬 7:12. 참조: J. S. Stewart, op. cit., p.109. R. Longenecker, The Ministry and Message of Paul(Michigan: Zondervan, 1973), p. 94.
7) in 이상근.
8) in T. K. Abott.
9) in 이상근.
10) J. Calvin, A. Clarke, T. K. Abott, “Salmond, Eadie”(in 이상근), M. Henry, E. F. Scott, R. P. Marti, H. C. G. Moule, F. F. Bruce, C. R. Erdman, F. Foulkes, G. H. P. Thompson, J. A. Allan, F. J. Dake, R. C. H. Lenski, G. Barlow(p. 158), A. S. Wood,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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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346-352.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주경신학적 연구에 관심을 보이시고,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