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께.
정치적 입장표명이나 감리회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의 글은 ‘자유게시판’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분 속 수레

Author
함창석
Date
2022-02-07 22:54
Views
2008

고분 속 수레

함창석

수 천년전경 고분 속에는 수레들이 그려져 있다
만주 벌판 한반도 전역에
수레바퀴를 활용한 흔적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 고분 속에는 화려한 수레가 그려져
그 시대의 상황을 알 수가 있다
전쟁이 나면 빠른 기동력을 보이는 것이 수레다
고대에도 길이 있었을 것이다
북반부 66도 지역에는 얼음길이었을 것이라
순록이 끄는 썰매가 대세였을 것이고
40-50도 지역에는 초원길이었을 것이라
아마도 말이 끄는 수레가 절대 다수였을 것이며
차마고도와 같이 산악 길도 있었을 것이니
노새나 사람이 등짐으로 날랐을 것이다
사막 길도 있었을 것이니
낙타가 모든 짐을 날랐을 것이다
적도를 벨트로 하는 지역은 해양이 주를 이루니
아마도 바닷길이 있었을 것이다
8천년전경 배가 남해 창녕에서 발견되었다
오늘날 한반도 이 땅에는 자동차 홍수가 났으니
세계적으로 수레를 활용한 차시대
자동차 강국이 되어 수출을 하고 있어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 산 차 굴러다니고 있다
흥미진진한 저들 수레가 고분 속에 있다

Sandol Method

수레는 기원전 3,500년 전 무렵 메소포타미아, 동유럽,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수레바퀴는 바퀴살이 없이 통나무를 원판으로 만들거나, 2〜3개의 나무판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따라서 매우 무거워 사용이 불편했다. 하지만 기원전 2,000년 무렵 나무 테두리에 바퀴살을 박아 바퀴의 가운데 부분을 비우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바퀴는 크게 가벼워졌다. 이렇듯 가벼워진 바퀴를 단 수레는 말, 당나귀 등을 동력원으로 삼아 빨리 움직일 수 있게 됨에 따라 활동도가 크게 높아졌다. 인간이 말에 재갈을 물려 사용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이지만, 초기에는 말을 직접 탈 수가 없었다. 인간은 말에게 수레를 매게 하면서, 말의 동력과 속도를 이용했다. 빨리 달리는 수레는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 달리는 말이 끄는 전차(War Chariot)는 고대 제국의 흥망을 좌우한 강력한 전쟁무기가 되었다. 수레는 인도, 아시아의 초원지대, 이집트, 중국 등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중북부 지역으로 널리 퍼져지면 세계사를 바꾸어왔다.(김용만, 수레 - 교통수단을 넘어 세계사를 바꾼 발명품, 한국의 생활사)

수레는 바퀴를 달아(대개 2륜 혹은 4륜) 굴러가게 만든 마차나 우차를 가리킨다.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때론 덮개가 씌워져 있었고, 말, 소 등이 끌었다. 사람이나 짐을 운반하는 운송 수단, 여행용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전쟁에 사용되는 수레는 ‘병거’로 불렸는데, 빠른 기동성 때문에 상대방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수레바퀴는 탈곡하는 농기구 타작하는 바퀴로도 사용되었다.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방앗간을 하셨다. 20마력짜리 풍년 기계방아는 현미, 정미, 정맥, 제분 등을 하였다. 그리고 5.16혁명 직후라 국가에서 지원한 대동 20마력짜리는 옥수수 대나 들 짚을 분쇄를 하여 가축사료를 만들었다. 그 때 곡식을 실어 나르는 우차가 2개나 있어 밤낮으로 먼 곳에서부터 방아 거리를 실어 날랐다. 가끔 학교에 갔다 오다 만나면 우리는 소가 끄는 우차에 올라 신나게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짐을 실은 우차 소가 힘이 무척 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5위권의 자동차 강국으로 성장했다. 우리가 이렇듯 자동차 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자동차 산업의 중요함을 알고 국가, 기업, 국민들이 힘을 모았기 때문이다. 과거 수레가 사용되지 않았던 아메리카 대륙에 오늘날 많은 자동차가 다니듯이, 수레와 그 후손인 자동차의 발전은 그 가치를 알고 이를 활용하려는 국가, 기업, 국민들의 의지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Total Reply 1

  • 2022-02-07 22:58

    개봉교 추억

    함창석

    봉산동 당간지주를 지나
    개봉교를 건너며
    남부시장 가는 길로
    금풍장 목욕탕이 있었으며
    앞으로는 좁은 하천이 흘렀으나
    훗날 복개공사로
    지금은 도로가 되어 있다

    원주초등학교 뒷담을 돌아
    창원창고 건물 옆으로
    좁은 길에도 하수구를 복개하여
    겨우겨우 빠져가며
    함석으로 만든 문이 있어
    집안까지 자가용이 들어갔다

    폐암투병 중에도
    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만드신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수년이 지났어도
    집은 그래도 있었지만

    도시재생사업 일환으로
    시청이 구입을 하여 주차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주택은 이미 철거하였고
    아들을 아껴주시던
    우리 아버지 흔적도 지워졌다

    자전거에 손자를 태우고
    퇴근길에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시던 아버지
    옛 모습만이 하늘에 그려졌지
    시내를 오고갈 때는
    우리 아버지가 그리워
    이곳을 가끔은 지나가게 되고나


Number Title Author Date Views
Notice 관리자 2014.10.22 122549
Notice 관리자 2010.12.29 118867
11961 장희숙 2022.02.28 1971
11960 최세창 2022.02.27 1975
11959 장희숙 2022.02.26 2416
11958 김성일 2022.02.26 2358
11957 박영규 2022.02.26 2420
11956 최세창 2022.02.26 2231
11955 함창석 2022.02.26 1808
11954 김성일 2022.02.25 2530
11953 박연훈 2022.02.25 2618
11952 박은영 2022.02.25 2290
11951 함창석 2022.02.24 2231
11950 엄재규 2022.02.24 101
11949 김성기 2022.02.24 1916
11948 오재영 2022.02.24 2300
11947 장희숙 2022.02.24 2044
11946 민관기 2022.02.24 1699
11945 김재탁 2022.02.24 2478
11944 홍일기 2022.02.24 2209
11943 이현석 2022.02.23 2149
11942 최세창 2022.02.23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