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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란 무엇인가? 주 하나님의 종? 사람들의 목자? (롬 1:1)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0-07-18 10:21
조회
797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소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바울의 초기 서신에서 많이 사용된 것이고, 후기 서신에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칭호를 많이 썼다. 산데이와 헤들람(W. Sanday & A. C. Headlam)은 “엄밀하게 구별할 수는 없으나,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점점 고유 명사화하는 과정을 본다.”라고 하지만, 불트만(R. Bultmann)은 그것을 부정하면서 예수의 칭호로서 독특한 것은 주(큐리오스, κύριος)뿐이며, 이것이 더 포괄적인 칭호라고 하였다.1)
[예수](Ίησού)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와전이다. 이는 우리 주님의 이름이다(마 1:21, 막 1:1). 구약 시대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은 모세의 후계자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한 여호수아가 있고,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삼상 6:14, 18), 포로 귀환 후의 대제사장 여호수아(학 1:1, 12, 슥 3:1, 3, 4), 그리고 요시야 왕 때의 부윤이던 여호수아(왕하 23:8) 등이 있다.
예수님의 공무상의 칭호인 [그리스도](Χριστού)는 크리스마(χρίσμα: ‘기름 부음’<요일 2:20, 27>)의 파생어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 여기에 해당되었는데, 신약성경에서는 그 세 직능의 완성자로서의 예수님을 지시한다.
대개 예수는 그분의 인성을,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곤 하였다. “의식문적 문서들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이 결합된 칭호가 확증해 주듯이 이것은 원래의 메시아적 의미를 상기시켜 주는데, 설령 바울이 그런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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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R.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trans. by K. Grobel, Vol. I(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 1954),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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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Lietzmann in E. Ksemann. ) .2)
[종]은 둘로스(δούλος)로서 {과중한 부채에 의해, 전쟁의 포로가 됨으로써, 혹은 노예의 자녀로 출생함으로써 되는 것이다. 일단 노예가 되면 자력으로 해방되는 길은 없고, 다른 사람이 주인에게 몸값을 지불해 준 후에 놓아주어야만 해방될 수 있다. 여기에 죄의 종인(요 8:34) 인류의 모형적인 한 모습이 있고, 또 여기에 속죄의 교리의 배경이 있는 것이다.…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 있으며, 그에게 절대 순종하는 종의 신분에 요점을 두고 있다(이상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종이란 전혀 타의에 의해서 된 반면에,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란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한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응답한 결과로서 된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종(롬 1:1, 딤후 1:1, 2:24, 약 1:1, 벧전 2:6, 계 7:3)이란 절대 복종, 절대 겸손, 절대 충성의 의미를 갖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이란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내맡긴 자이며, 자신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에 의해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지배되는 자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자기가 있되 없는 것처럼 사는 자이다.
따라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몸을 바쳐 충성하며, 그 뜻에 복종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종에게는 큰 영광인 것이다. 이 영광스런 칭호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들, 즉 모세(왕상 8:56, 단 6장, 말 4:4), 여호수아(수 2:8, 민 14:24), 아브라함, 이삭, 야곱(신 9:27), 욥(1:8), 이사야 그리고 예언자들(암 3:7, 렘 7:25)에게 사용되었다. 포티트(G. Poteat)는 “인간은 그리스도(하나님)의 참된 종이 될 때에만 비로소 인간을 올바로 사랑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엡 2:1)에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므로(요 3:16, 4:10, 롬 5:6-8), 그분의 뜻을 따르는 종이 됨으로써만 참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그리스도)의 종이란 곧 사랑의 실존을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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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약 1:1의 주석).
하나님(그리스도)의 종이 그분에 의해 그리고 그분을 위해 사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모두 누구 또는 무엇인가의 종이다. 즉, 자신이나 권력, 또는 돈이나 명예, 또는 쾌락 등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살고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종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구 또는 무엇의 종이냐 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것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의 [사도]는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로서 일반적으로 ‘보냄받은 자’, ‘대리자’, ‘파송된 자’, ‘전권 대사’를 뜻하고, 또한 특수하게 예수님의 12제자 등을 가리킨다.
[사도]란 (1) 지상의 예수께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은 자(마 10:5, 28:29. 비교: 갈 1:1), (2)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 이 사실을 증거한 자(행 1:21, 22), (3)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자(요 14:26, 16:13, 고전 2:10), (4) 그러므로 그들의 권세는 지상에 있고(마 18:18, 20, 요 22:22-23), (5) 표적을 행하는 권능을 받았으며(행 2:43, 5:15), (6) 그들의 복음 전파의 범위는 우주적이었고 무제한이었다(고후 11:28).
사도란 칭호를 들은 이들은 12제자 외에도 바울과 바나바(행 14:4, 14), 실루아노와 디모데(살전 2:6) 등이 있다. 또한, {70제자들(눅 10:1)도 사도로 일컬어졌다는 기록이 있다(Irenaeus, Tertullian). 사도직은 초대 교회에서 가장 높은 직위이었다(엡 4:11, 고전 12:28). 본질적으로 사도의 직분은 그를 보내신 분의 위엄을 떠나서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A. J. Mason)}(살전 2:6의 주석).
킬케골은 천재와 사도를 잘 구별하였다. 천재가 되는 것은 그의 내재적 목적 때문인데, 그는 민중과 구별되며 천재임을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도는 전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초월적인 근거인 하나님의 권위를 입고 존재하며, 자기에게 배치되는 역리적 목적 때문에 사도로 만들어진다고 하였다(in 전경연).
[부르심을 받아(클레토스, κλητὸς)는 구약성경에 근거한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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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하란에서(롬 11:8, 창 12:1-12), 모세는 호렙산에서(출 3:1-12), 이사야는 성전에서(사 6:1-13), 아모스는 양치는 목장에서(암 7:5), 그리고 예레미야는 어머니의 태중에서(렘 1:5, 6) 소명을 받았다. 신약성경에 보면, 12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는 해변에서(마 4:18, 막 1:17), 마태는 세관에서(마 9:9, 막 2:4), 빌립은 길에서(요 1:43)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
모든 기독교인은 구원의 부르심을 받는 동시에 봉사의 소명을 받는다. 이 봉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의 은사를 부여하시는 것이다(고전 12:4-11).
특히, 바울이 “부르심을 받은 사도”(원문)라고 한 것은 자신의 다메섹 회심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붙잡아 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이는 그의 회심 사건이기도 하다.2) “바울의 회심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홀스텐(Holsten)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바울의 표현 형식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가시덤불 환상이나, 족장들이 특별한 지시를 받을 때에 들은 음성이나, 예언자들의 환상 등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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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 H. G. Thomas, Ministerial Life And Work(Michigan: Baker Book House, 1974), pp. 12-14. 하나님의 예언자,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는 일반적인 과정을 네 단계로 설명한다. (1) 하나님께 대한 인식은 죄의 자각을 초래한다. (2) 죄의 고백은 죄 사함을 받는다. (3) 하나님의 소명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4) 하나님의 위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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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되던 모양으로 기술되었고, 바울 자신도 황홀경에서의 경험을 여러 번 말했기 때문에(고후 12:2-4, 고전 14:6 등) 그런 해석도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H. J. Schoeps)3). 그러나 이 주장을 입증할 만한 뚜렷한 근거는 없다.
바울의 회심 기사들은 공통적으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행 9:1-9, 22:6-16, 26:12-18, 고전 9:1, 15:8).4) 바울의 회심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의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H. A. A. Kennedy).5) 이 말은 그리스도의 원수였던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사도)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바울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케네디(H. A. A. Kennedy)는 “바울이 그리스도로서 자신에게 나타나셨던 부활하신 주님을 묘사할 때, 그는 메시아에 관하여 공허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사실로서 끊임없이 지상 예수님께 대해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사용한다.”6)라고 하였다. 이 말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부활하신 구체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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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 J. Schoeps, Paul, trans. by H. Knight(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1), pp. 54-55.
4) R. C. H. Lenski: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것보다 더 영광스럽다.
5) H. A. A. Kennedy, The Theology of the Epistles(London: Duckworth, 1959), p. 55.
6) Ibid., p. 53. 롬 5:6, 고후 1:5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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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바울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옛 세대를 특징짓는 죄(롬 6:2)와 율법(롬 7:6, 갈 2:19)과 초등 학문(골 2:20)에 대해 죽었고, 또한 자기(고후 5:14)와 육체(갈 5:24) 그리고 세상(갈 6:14)에 대해 죽었으며, 따라서 이제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자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시는 것이다(갈 2:20). 한 마디로 말해, 옛 바울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란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알고 있던 이전의 모든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었고”(J. G. Machhen, J. S. Stewart),7) 또한 독특하게 그의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바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고, 전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의 사도직은 신적 권위를 갖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 자신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갈 1:1)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종 또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목적에 대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에 관한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8) 곧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복음이라는 뜻이다.
[복음]은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으로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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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J. G. 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Michigan: Eerdmans, 1973), p. 145. J. S. Stewart, A Man in Christ(London: Hodder and Stoughton), p. 127.
8) H. Alford, “H. A. W. Meyer”(in J. A. Bengel), J. A. Bengel, K. Barth, W. Sanday & A. C. Headlam, A. Barnes, 전경연,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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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에게 준 보상(Homer, W. Hendriksen, 마경일)과 전쟁에서의 좋은 소식(E. Schweizer)을 뜻하였고, 여기서 왕자의 출생이나 황제의 즉위의 고지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의 경우에는 하나님에게서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시된 인류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원뿐만 아니라, 그분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도 포함되는 것이다}(막 1:1의 주석).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죄와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철학 체계,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 그리고 어떤 생활양식의 형태에 대한 훌륭한 충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C. R. Erdman)}(갈 1:6의 주석).
{휴스(P. E. Hughes)는 “구약성경의 약속과 신약성경의 ‘복음’ 사이에는 참된 동질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를 내다보고 있었고, 후자는 약속된 것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을 선포하고 있다.”라고 하였다}(히 4:2의 주석).
[택정함을 입었으니]는 주격 단수 남성 완료 분사인 아포리스메노스(ἀφωρισμένος)로서 ‘구별하다’, ‘갈라내다’, ‘따로 두다’, ‘분리하다’(마 13:49, 25:32), ‘목적을 위해 분리하다’, ‘따로 세우다’(본절, 행 13:2, 갈 1:15), ‘파문하다’, ‘추방하다’(눅 6:22) 등을 뜻한다. 특히, {이 말은 “언제나 주어가 하나님이시므로 바울이 사도로 구별되었음을 의미한다” (M. Henry, 윤성범)}(갈 1:15의 주석).
그러므로 바울의 주장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사도로 성별하셨다는 것이다(갈 1:5, 렘 1:5, 10, 사 49:1). 이 일은 바울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에 의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르트(K. Barth)는 바울을 보다 고귀한 수준의 바리새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 각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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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역할을 부여받아 태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클레이(W. Barclay)도 “하나님께는 모든 인간을 위한 섭리가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도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자신의 목적과 뜻을 실현시키는 데 한 몫을 담당하도록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다. 그것은 큰 몫일 수도 있고 작은 몫일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갈 1:15의 주석). 따라서,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데에 전 생애를 투자하는 것이다. 이 일은 먼저 역사 속에서 은혜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출처: 최세창, 로마서(서울: 글벗사, 2000, 2판 1쇄), pp. 39-46.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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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8 10:47

    # 정말 주 하나님의 종이라면, 목회하는 교회가 후한 대접을 하고, 모든 교인이 환호와 갈채를 보내면서 계속 시무하라고 해도, 주인이신 주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야 하고 ; 목회하는 교회가 박대를 하고 모든 교인이 떠나라고 해도 주인이신 주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서 계속 목회하라고 하시면 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신념이나 기호에 따라 떠나거나 안 떠나는 것은 주인 노릇이지, 주 하나님의 종노릇이 아니다.

    # 주인이신 주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간음이나 성폭행이나 성추행이나 동성애나 수간이나 음란 등을 행하거나 옹호하거나 지지하지 말아야 하고, 권력 또는 교권의 종노릇을 하거나 아부하지 말아야 하고, 그 잘못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주 하나님의 뜻에 의거해서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 하나님의 종임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등등을 포함하는 온 우주는 주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다.


  • 2020-07-18 11:15

    # 주 하나님의 종이 편견과 편파가 아닌 균형적 사고요 신앙적(신학적) 사고를 갖춰 가려면, 사람들이 말하는 진보와 보수와 중도 입장의 주석서들과 신학서들을 섭렵해야 하고, 중요한 문제나 사건에 대해서는 진보와 보수와 중도의 신문과 방송 등을 섭렵해야 한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은 더욱 고착시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바뀌거나 깨진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발전적 변화와 성장의 모습이다.

    # 주 하나님의 종의 종노릇 중 종노릇이란 자기 지식이나 경험이나 신념이나 사상이나 이념 등등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함으로써 주 하나님의 복음을 보다 깊이, 보다 폭넒게 깨달으면서 가르치고 전하여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모두가 보다 더 밝은 빛을 발하고, 보다 더 강력한 소금 역할을 할 것이다.


  • 2020-07-18 18:08

    주 하나님의 종이요 사람들, 특히 교인들의 목자인 목사는 제사장의 반열인 제사장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의 반열이다. 하나님의 성육이신 주 예수님은 제사장들이 존재하며 일하고 있는 때에 그들과 상관없는 어부나 세리 등을 제자로 선택하여 당신의 복음의 사도로 삼으셨다. 한마디로, 제사장은 율법의 일꾼이고, 목사는 복음의 일꾼이다. 목사는 기름부음의 대상인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의 완성 그 이상인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일꾼이다.


  • 2020-07-19 08:42

    종은 주인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종이 그 주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한다면, 그는 이미 종이 아니고 자기세계의 주인이거나 자기종교의 교주입니다. 안타깝지만 교회 안에서도 이런 분들을 종종보게 됩니다.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좋게하고 대신에 사람들에게 좋게 하지 않고,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 주님의 종이 맞습니다.


    • 2020-07-19 17:10

      필자의 주석에 공감하시고, 관련하여 의견을 표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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