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2:20-22(설교: 배교의 결과)의 주경신학적 연구)
Author
최세창
Date
2024-12-09 21:11
Views
707
이 부분은 지금까지 논해 온 가짜 교사들의 죄악 생활, 즉 배교에 대한 가혹한 경고조의 결론이다.
베드로는 【20】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라고 하였다.
이 경고가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분명한데, 직접적으로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인가에 대해서는 (1) 일반 교인들이라는 설(“Zahn”,① R. C. H. Lenski, S. W. Paine), (2) 가짜 교사들에게 유혹을 받고 있는 교인들이라는 설,② (3) 가짜 교사들이라는 설,③ (4) 가짜 교사들과 그들에게 유혹을 받고 있는 교인들이라는 설(C. R. Erdman) 등이 있다.
블럼(E. A. Blum)은 (1) 저희가 가리키는 가능성 있는 말 중 거짓 교사들이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점(19절), (2) 접속사 γάρ(가르)가 20절에 있는데(εἰ γάρ, 에이 가르: ‘왜냐하면 만일’), 이것은 논리적으로 20절을 19절과 연결시켜 준다는 점, (3) 19절의 “이긴 자”(헤테타이, ἥττηται)는 의미상 20절의 “이김을 당하면”(헤토타이, ἡττωται: 개역 한글판 성경에는 “지면”으로 번역됨.)과 연결된다는 점, 그리고 (4) 2장의 전체적인 주제는 거짓 교사라고 하는 점 등을 들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1:11의 주석을 보라.)를 ‘앎으로’(1:2의 주석을 보라.)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 귀신의 비유(마 12:43-45)를 연상시킨다(참조: 히 6:4-6, 10:26-27).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黑崎幸吉.
2) J. Wesley, J. A. Bengel, “Fronmller”(in B. C. Caffin, C. Bigg, “Strachan”(in 이상근), A. E. Barnett, J. N. D. Kelly, 박윤선, 김철손.
3) J. Calvin, H. Alford, “Meyer”(in 黑崎幸吉), M. Henry, “Mayor”(in A. T. Robertson), W. Schrage, W. Barclay, B. C. Caffin, R. Tuck, E. A. Blum, M. Green, C. S. Ball, M. Bentley, D. H. Wheaton, 黑崎幸吉, 이상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짜 교사들을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진리를 알고 믿은 교인들이, 다시금 세상의 죄악 속에 얽매이고 지면 믿기 이전 상태보다 더 나쁠 것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입술로는 여전히 하나님을 시인할지 모르나, 그들의 행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각양 좋은 하나님의 은사들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이므로 믿기 전보다 더 나쁜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디도서 1:16에는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라고 하였고, 마태복음 10:33에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배도의 결과가 도를 알고 믿기 이전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는 이유(원문의 21절 첫 부분에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21】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라고 보충 설명을 하고 있다.
의의 도(τὴν ὁδὸν τής δικιοσύνης) 곧 의의 길은 2:2의 “진리의 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가리키는데, 특히 실천적인 면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강조하는 면에서 사용된 것이다.
거룩한(하기아스, ἁγίασ: 벧전 1:2의 주석을 보라.) 명령의 명령은 엔톨레스(ἐντολής)인데, 켈리(J. N. D. Kelly)는 “단수로 모세 율법을 가리키기도 하고(마카비 4서 13:15, 16:24, 롬 7:8-12, 히 12:18, 9:19), 또 단수나 복수형으로 쓰여 그리스도의 계명 내지는 그리스도의 계명들로 사용되기도 한다(요 13:34, 14:15, 21, 고전 14:37, 클레멘트 1서 13:3, 클레멘트 2서 3:4, 6:7 등).”라고 설명하고 있다.
슈라게(W. Schrage)는 “의의 길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와 유다교에서 기인한 것(참조: 욥 24:13, 잠 8:20, 21:16 등등)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의의 길과 전수된 거룩한 계명이라는 표현은 사도들에 의해 전수되어 의무화된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그리스도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를 의미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올바른 가르침(Orthodoxie: 진리의 길<2:2>)과 올바른 실천(Orthopraxie: 의의 길)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룩한 계명은 단순히 구약성서의 율법(롬 7:12)이나 사랑의 계명(요 13:34)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이고 사도적인 도덕 규정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전수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저버리는 것보다 아예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더 낫다.
끝으로, 베드로는 【22】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배도자들 특히, 가짜 교사들에 대한 경멸조의 비난이다. “저자는 전통적으로 불결과 경멸의 대상으로 함께 일컬어져 오던(예: 마 7:6) 동물인 개와 돼지의 구역질나는 습관에 대한 잘 알려진 속담을 인용한다”(J. N. D. Kelly).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라는 속담은 잠언 26:11의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를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베드로의 의도는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가 다시금 멸망에 이르는 옛 죄악 생활로 돌아간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는 속담에 대해, 비그(C. Bigg)는 “성경적인 것은 아니며, 또 히브리 자료에서 기인한 것 같지도 않다”라고 하였다. 켈리(J. N. D. Kelly)는 “당시의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아히카르의 이야기(Story of Ahikar, 8:18, Syriac에 나옴.)에 잘 예시되어 있다. ‘얘야, 너는 내게 있어서 마치 목욕을 한 다음에 진흙덩이를 보고는 내려가서 그 속에서 뒹굴었던 돼지 새끼 같았단다.’ 또, 다른 배경으로 SB Ⅲ, 773rhk TWNT Ⅲ, 1100-1103을 참조하라”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이 속담을 인용한 의도도 앞의 경우와 똑같은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야고보서․베드로전후서(서울: 글벗사, 2001, 3판 1쇄), pp. 592-595.
베드로는 【20】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라고 하였다.
이 경고가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분명한데, 직접적으로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인가에 대해서는 (1) 일반 교인들이라는 설(“Zahn”,① R. C. H. Lenski, S. W. Paine), (2) 가짜 교사들에게 유혹을 받고 있는 교인들이라는 설,② (3) 가짜 교사들이라는 설,③ (4) 가짜 교사들과 그들에게 유혹을 받고 있는 교인들이라는 설(C. R. Erdman) 등이 있다.
블럼(E. A. Blum)은 (1) 저희가 가리키는 가능성 있는 말 중 거짓 교사들이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점(19절), (2) 접속사 γάρ(가르)가 20절에 있는데(εἰ γάρ, 에이 가르: ‘왜냐하면 만일’), 이것은 논리적으로 20절을 19절과 연결시켜 준다는 점, (3) 19절의 “이긴 자”(헤테타이, ἥττηται)는 의미상 20절의 “이김을 당하면”(헤토타이, ἡττωται: 개역 한글판 성경에는 “지면”으로 번역됨.)과 연결된다는 점, 그리고 (4) 2장의 전체적인 주제는 거짓 교사라고 하는 점 등을 들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1:11의 주석을 보라.)를 ‘앎으로’(1:2의 주석을 보라.)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 귀신의 비유(마 12:43-45)를 연상시킨다(참조: 히 6:4-6, 10:26-27).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黑崎幸吉.
2) J. Wesley, J. A. Bengel, “Fronmller”(in B. C. Caffin, C. Bigg, “Strachan”(in 이상근), A. E. Barnett, J. N. D. Kelly, 박윤선, 김철손.
3) J. Calvin, H. Alford, “Meyer”(in 黑崎幸吉), M. Henry, “Mayor”(in A. T. Robertson), W. Schrage, W. Barclay, B. C. Caffin, R. Tuck, E. A. Blum, M. Green, C. S. Ball, M. Bentley, D. H. Wheaton, 黑崎幸吉, 이상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짜 교사들을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진리를 알고 믿은 교인들이, 다시금 세상의 죄악 속에 얽매이고 지면 믿기 이전 상태보다 더 나쁠 것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입술로는 여전히 하나님을 시인할지 모르나, 그들의 행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각양 좋은 하나님의 은사들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이므로 믿기 전보다 더 나쁜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디도서 1:16에는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라고 하였고, 마태복음 10:33에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배도의 결과가 도를 알고 믿기 이전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는 이유(원문의 21절 첫 부분에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21】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라고 보충 설명을 하고 있다.
의의 도(τὴν ὁδὸν τής δικιοσύνης) 곧 의의 길은 2:2의 “진리의 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가리키는데, 특히 실천적인 면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강조하는 면에서 사용된 것이다.
거룩한(하기아스, ἁγίασ: 벧전 1:2의 주석을 보라.) 명령의 명령은 엔톨레스(ἐντολής)인데, 켈리(J. N. D. Kelly)는 “단수로 모세 율법을 가리키기도 하고(마카비 4서 13:15, 16:24, 롬 7:8-12, 히 12:18, 9:19), 또 단수나 복수형으로 쓰여 그리스도의 계명 내지는 그리스도의 계명들로 사용되기도 한다(요 13:34, 14:15, 21, 고전 14:37, 클레멘트 1서 13:3, 클레멘트 2서 3:4, 6:7 등).”라고 설명하고 있다.
슈라게(W. Schrage)는 “의의 길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와 유다교에서 기인한 것(참조: 욥 24:13, 잠 8:20, 21:16 등등)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의의 길과 전수된 거룩한 계명이라는 표현은 사도들에 의해 전수되어 의무화된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그리스도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를 의미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올바른 가르침(Orthodoxie: 진리의 길<2:2>)과 올바른 실천(Orthopraxie: 의의 길)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룩한 계명은 단순히 구약성서의 율법(롬 7:12)이나 사랑의 계명(요 13:34)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이고 사도적인 도덕 규정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전수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저버리는 것보다 아예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더 낫다.
끝으로, 베드로는 【22】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배도자들 특히, 가짜 교사들에 대한 경멸조의 비난이다. “저자는 전통적으로 불결과 경멸의 대상으로 함께 일컬어져 오던(예: 마 7:6) 동물인 개와 돼지의 구역질나는 습관에 대한 잘 알려진 속담을 인용한다”(J. N. D. Kelly).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라는 속담은 잠언 26:11의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를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베드로의 의도는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가 다시금 멸망에 이르는 옛 죄악 생활로 돌아간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는 속담에 대해, 비그(C. Bigg)는 “성경적인 것은 아니며, 또 히브리 자료에서 기인한 것 같지도 않다”라고 하였다. 켈리(J. N. D. Kelly)는 “당시의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아히카르의 이야기(Story of Ahikar, 8:18, Syriac에 나옴.)에 잘 예시되어 있다. ‘얘야, 너는 내게 있어서 마치 목욕을 한 다음에 진흙덩이를 보고는 내려가서 그 속에서 뒹굴었던 돼지 새끼 같았단다.’ 또, 다른 배경으로 SB Ⅲ, 773rhk TWNT Ⅲ, 1100-1103을 참조하라”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이 속담을 인용한 의도도 앞의 경우와 똑같은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야고보서․베드로전후서(서울: 글벗사, 2001, 3판 1쇄), pp. 592-595.
아멘.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벧후 2:20-22의 주경신학적 연구를 보시고, "아멘.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