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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신학 대학교 MTU의 정체성

작성자
민관기
작성일
2020-11-20 07:39
조회
920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감신" 어지러움?


본인의 정체성을 알때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역사를 요약합니다.
1885년 내조선한 아펜젤러는 이 해 스크랜턴이 보내준 학생 고영필, 이겸라 두 학생으로 광무황제께서 하사하신 "배재학당"이란 교명과 "경천애인"이란 교훈으로 조선의 근대식 남성교육의 그 시작을 열었습니다.
당시 영/정조기 문화적 르네쌍스를 맞이한 조선은 1800년 정조 임금의 사후 순조, 헌종. 철종기를 지니며, 정순왕후의 섭정과 김가/조가의 세도정치가 극심하고 부패가 만연하여 매해 민란이 그치지 않는 민란의 세기를 지나오며, 광무황제께서 집권하신지 1866년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병자호란 이 후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 서구의 문물을 알기 시작했나 봅니다.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께선 다시 환국하실 때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전파하려 하셨으나, 불의에 일찍 서거하시는 바람에 본격적인 기독교 신앙 전파의 길은 멈추어졌으나, 서구의 문물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새로운 민족의 대안이 요구되어 너무 공리공론에 빠져 조국을 망쳐가는 지배층 중심의 성리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학풍을 갈구하는 이른바 서학의 유입에 따른 북학파와 실학의 대두와 그 열화와 같은 열풍 그리고 실학과 양명학과의 만남으로 조선은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개화혁명 선비들로 새롭게 진작되기 시작했습니다.
=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과 체계화 성호 이익은 양명학의 하곡 정제두와 교유하였고, 하곡의 강화 이주후 한국학을 양명학으로 연마한 조선의 선비들이 감리교회로 대거 개종하였다.
= 이건창, 이상설, 이회영, 정인보, 최병헌 등이 그들이며 여성으론 황애덕과 최용신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


그러던 중 일본이 먼저 미국에 의해 강제 개화를 당하자 명치유신을 단행하며 정한론을 주장하고 청과 조선을 침략하려는 야망을 이루려 의도적으로 일으킨 운요호사건으로 조일수호통상조규가 체결되었고, 조선도 그 시기와 절차 그리고 준비된 정도는 미약했으나, 어렵지만 개화의 길을 딛기 시작해 1866년 병인박해라는 최악의 천주교 박해 사건뒤에도 불구하고, 광무황제와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고, 개화를 국가발전전략의 일환으로 채택하여 받아들였고, 드디어 서구인 미국과 1882년 최초로 수교하였으며, 이에 따라 사전에 알고 있던 정보에 의거 조선에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대안은 없던 교육과 의료에 대한 선교윤허를 가우쳐가 부탁/파송한 맥클레이에게 그 인류 역사에 빛날 결단의 소식이 1884년 7월 3일에 내려졌던 것입니다.


이에 미 감리회 남여 선교부가 응하여 교육과 의료를 담당할 선교사로 아펜젤러, 스크랜턴 대부인 그리고 스크랜턴을 1885년 파송하게 되었던 것이고, 1885년 배재학당은 그렇게 탄생했고, 1887년 배재학당 안에 토착 전도인을 양성하려는 뜻으로 "신학"회를 설치한 것이 최초의 조선에서의 서구 학문과 신학의 시작이었다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스크랜턴 대부인은 명성황후께서 하사하신 교명 "이화학당"을 설치하여 최초의 국민적 여성교육시대를 여니 이와 더불어 협성부인학원을 열어 자신과 헐버트 목사, 하란사와 더불러 여성 전도인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남성과 여성에 대한 신학교육의 본류로 협성신학교와 협성여자신학교 그리고 이의 합동인 1930년 세계 최초 남여 공학대학인 "감리교회 신학교"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1887년. 남자 신학교는 아펜젤러의 시작으로 그의 사후 스크랜턴과 존스 그리고 하디, 케이블로 이어졌고,
1890년?. 여자 신학교는 스크랜턴 대부인과 헐버트, 하란사 그리고 알벗슨과 채핀으로 이어졌습니다.]




감신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특기하며 유일무이하여 앞으로 이러한 비슷한 업적을 남기는 예가 없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 미 감리회의 선비 선교사들과 조선의 준비되어 있었던 개화혁명 선비와의 만남은 필연이었으었으며, 하나님의 준비된 섭리입니다.
*. 우린 어둠과 무지의 민족이 아니었고 본디 빛이었으나 빛임을 잊고 살다가 빛이 빛임을 깨닫게 되어 회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전면화된 사건이 무스와 하디의 민족영성운동입니다. 이 사건으로 빛화된 민족의 청년들이 새빛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감신에 입학하였던 것입니다. 하디는 무스의 지도로 민족영성운동을 1907년까지 이끌다가 1907년부터 1924년까지 감신의 교수와 교장이 되어 청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빛다림시켰습니다.
이로 배출된 주역들이 3.1 혁명의 지도자들입니다.

무식쟁이가 공부하여 갑자기 선비가 된것이 아닙니다.


1. 2000여 년전 우리 민족사에서 사라진 소도의 부활이며, 새로운 학문으로 무장한 선비 제사장의 부활입니다.
= 협성 남여신학교의 입학 자격은 고등보통학교 및 전문학교 이상자이었습니다.
= 지금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타 종파의 신학교는 "무학됨"이었습니다.
= 사실 우리가 좀 지나친 기초 학력을 요구한 측면도 있습니다.
= 고등보통학교가 있어야 가고 엥간해선 갈수도 없으니 지원자가 1년에 20여 명이면 제일 많은 해였답니다.
=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설령있어도 고생길이 뻔한 신학교를 고학력자가 오는건 웬만한 결단으론 쉽지 않았고, 대함민국 고학력 인텔리들이 감리교회의 목회자인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2. 대한민국 역사상 일본의 침략기엔 유일한 민족대학이었습니다.
= 일본의 침략기 대학령에 따른 대학은 감신과 경성제대만 있었습니다.
= 경성제대는 매국대학입니다.


3. 대한민국 대학중 유일하게 독립 유공자를 배출하였습니다.
= 대학이 2개밖에 없고 경성제대는 매국대학이니 당연합니다.
= 현 대학들은 당시 모두 전문학교령에 따른 학교들입니다.


4.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영문으로만 학문하는 "영문신학과"가 존재했습니다.
= 1935년 갬블도서관이 화재로 소실되어 모든 사료가 불에 탓습니다.
= 한글, 한문, 일본어, 히브리어, 희랍어, 독일어와 함께 7개 언어를 학습했습니다.
= 장*회 신학생이 우리도 감신처럼 영어가르쳐 주세요라고 요청했다가 "학생 마귀가 들었냐"는 힐난을 받았습니다.
타 종교나 교단은 한국인의 영민화를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우민화 교육정책을 철저히 시행했습니다.
= 감리회 선교사들은 어찌하면 한국인들을 하루라도 서둘러 실력있는 한국인으로 양성할 것인가가 항상적 관심사였고, 타종교나 교단은 전혀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여, 해방후 미군정의 고문단은 거의 다 감리교인으로 이루어짐은 당연합니다. 일단 언어가 소통되고 기독교 마인드로 숙련되어 있었고, 선교사들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 요즘은 대한민국이 평준화되어 종교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능력이 대등합니다. 이렇게 대등하게 만드는 길을 허락하고 만드는데에도 감리교회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현 대한민국과 같은 개방화와 선진화는 타 종교와 타 교파들의 마인드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 제 1공화국 정/부통령의 모든 당/낙선자가 감리교인 입니다.
이승만, 이시영, 신익희, 조병옥, 조봉암, 신흥우, 김성수, 이기붕 등


5. 남여 공학 대학의 최초 설립이라는 남녀평등 시대를 연 진정한 선각자입니다.
= 더구나 1931년 기독교조선감리회가 조직된지 1년 후엔 "여성 목사 안수"라는 인류 역사 최초이자 최후의 업적을 세웠습니다.
이는 그 때만 있었고 앞으로도 벌이지지 않을 인류사의 대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선교국의 선교사들이 피선교국의 감독앞에 무릎 꿇어 안수받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인 여선교사들은 진정으로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하였고, 평생을 봉사하다가 조선인 앞에 무릎끓어 성직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인류애에 입각한 인류평등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대한인의 우수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빛민족성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선비는 선비를 알아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이를 기리기리 기려야 합니다.


6. 선비 목회자들과 선비 평신도가 대한민국을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설하였습니다.


7. 협성 여자 신학교의 채핀과 황애덕에 의해 "농촌지도사업과"가 설치되어 단 두명의 학생을 놓고 대학교수 10여 명이 빛으로 수련시켜낸것은 민족사에 길이남을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들이 최용신과 김노득입니다.
이 농촌지도사업과의 전통을 잇기 위해 대전 감신, 곧, 목원대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압니다. 도익서, 이호운, 도인권.


8. 1903년 수원에 이하영 목사에 의해 명명되고 스크랜턴 대부인에 의해 설립된 "삼일학원"이 협성대학교입니다.
= 이하영 목사는 수원의 유학자로 신앙을 받아들인 혁명선비로 3일만에 내 가 이 성을 다시 세우리라, 내가 3일만에 부활하리란 성경의 묵시적 말씀을 학원의 이름으로 지으신 것이며, 동시에 수원종로교회의 설립자입니다.
= 이하영 목사는 진남포 교회(손정도목사 시무, 김구 주석 청년회 총무 활동) 담임시 3.1 혁명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습니다. 현 감독회장인 이철 목사가 시무하던 강릉중앙교회 담임도 역임했습니다. 이하영 목사의 아내 이그레이스는 남편이 투옥시 아버지와 다른 식사를 할 수 없다며 콩밥과 짠지만 자녀들과 먹었답니다.



간략히 살펴보았고 함께 한 몇 개의 사례를 듭니다.
*. 명성황후 외치 담당, 광무황제 내치 담당으로 선교윤허의 실체적 당사자는 명성황후이다.
윤허 발표는 황제가 하고, 맥클레이에게 전달은 김옥균이 하였고, 윤허장은 없었으며, 맥클레이 내조선 10일만에 선교윤허가 내려졌다는 것은 이미 미리 준비하고 있었단 뜻이다.
*. 배재학당, 시병원은 광무황제, 이화학당, 보구녀관은 명성황후 황실명 하사

1. 황실과 국민에게 철저히 복무한 충군애국의 감리교회
= 대군주폐하 탄신축하예배, 명성황후 추모예배
= 황제의 우리가 추진하는 독립협회 지지, 독립신문 발행, 독립문 건설 후원
= 신민회의 기관지 대한매일신보 특허 : 베델
= 아관에서의 파천을 요구하여 관철


2. 전덕기, 이회영, 양기탁과 헐버트의 모의로 광무황제께 주청하여 이상설, 이준, 이위종 헤이그 특사 파견
= 1907년에 이미 미 연합감리교회 목사 윤병구 존재 : 헤이그 특사 이준 서거 추도예배 거행
청년들은 1905년 민영환 지사를 따라 1907년 이준 열사를 따라 민족을 위해 예수의 고난을 삶으로 실제화시켜 죽기살기로 결심하였다. 하여, 의거자로 장인환, 전명운, 안중근, 우덕순, 김상옥, 나석주, 김익상, 김원봉, 조문기 등이고, 여성으론 남자현, 안경신, 박차정 등의 무장지사를 여성으로선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유일하게 배출했다.


3. 헐버트 목사에게 황제는 을사늑약 저지 책임 미국 특사로 임명했고, 비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쓸 내탕금을 맡기심
= 헐버트에게만 인출이 하락된 5만원, 상해 덕국 도이췌방크에 입금하였으나, 일본이 몰래 인출해갔다.


4. 황제 아들 이강과 감리회 여성 하란사의 파리강화회의 참가 파견
= 하란사는 감신과 이화의 교수, 황제의 여특사로 파견되었다가 배정자란 이등박문의 첩에 의해 독살당했다.
= 최초의 문학사,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 설치, 2대 남산현 교회, 3대 원주제일교회이다


5. 우당 이회영, 해석 손정도로 하여금 북경방면 망명정부 수립 기획
= 이 전에 백성들에게 지시하여 독립 운동케 했으나 직접 수행하시려 함
= 1919년 1월 22일 황제의 일본에 의한 독살 서거로 뜻을 이루지못함


6. 정동제일교회 변복후 출석
= 노블 감리사
= 황제의 유지를 잇기위한 민족은 3.1 혁명으로 애도하였고, 이에 상해에 임정을 건설하므로써 황제의 뜻을 이었습니다.
= 노블은 현순과 손정도 목사를 상해로 특파하며 미화 1만불 = 100억원을 주어 조직자금으로 사용케 했습니다.


7. 황제 아들 이강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 유학 보냄
= 하란사와 유학 동지

&. 감리교회가 민족 감리교회되게 하고, 인류에게 빛이 되게 하였던 원료는 어디로부터 왔나요?
하나님의 섭리로 준비되어 있던 선비들과 시대의 요구에 응한 광무와 명성의 결단 그리고 이에 응한 미 남여선교부와
초대 남여 선교사들과 조선의 선비들과의 만남으로 황실과 백성들이 함께 일구어낸 하나님의 걸작입니다.
= 인류의 등불이라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하였다.
등불이 아니라 빛이지만


이렇게 감신과 대한민국의 실체적 정체성인 황실과의 공고한 연대와 충성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과거를 보며, 과거를 바탕으로, 과거를 회복하여, 대한민국과 감리교회의 운명을 하나로 일체화시키는
민족교회 운동과 통일 운동 그리고 세계평화 운동으로 다시 새롭게 달려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감신과 더불어 거의 같은 시기부터 고락을 같이 해온 목원과 협성은 뭐가 다른것이 있나요?
물어볼것도 없이 함께 해야함입니다.
예전엔 서울 감신, 대전 감신, 수원 감신이라 했습니다.
감신, 목원, 협성의 앞에 자를 따 "감목협"이라고도 했고요.
신학생들은 감리교회 신학행 협의회 "감신협"이라 했었습니다.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
민족의 하나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열의 리더쉽으로 화합은 이룰 수 없기에 말입니다.


평안하세요^^



전체 6

  • 2020-11-20 10:37

    목사님 덕분에 감리교회 역사를 참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0-11-20 12:27

      그냥 과거를 좀 보았지요^^
      권사님을 처음 뵌지도 벌써 수 십만초가 지난 아득한 과거로군요.
      그 과거에 새롭게 움터나 새우라 불리던 것을 볶아서 지져서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참 맛있었습니다.

      어젠 고양에 있었습니다.


  • 2020-11-20 20:03

    도이췌방크 → 도이체뱅크

    MTU를 네이버 검색했는데,
    MTU 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최대 전송 단위(Maximum transmission unit) 미쓰비시UFJ파이낸셜 그룹의 NYSE 코드

    무식하단 소리 듣지 않으려고, MTU 엄청 검색했습니다.
    다음부턴 이러지 마세요!


    • 2020-11-20 22:03

      도이체(췌)라고도 쓰고 방크라고 씀.
      엠티유는 감리교 신학 대학교 출신들만 알고 있는 영무 이니셜이어서 그냥 쓴거랍니다.
      엠티유가 되기 전엔 엠티에스라 했었고요.
      엠티유든 엠티에스든 엠티유나 엠티에스 출신들도 자신의 출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
      합동류나 순복음류 어용신학을 마치 새로운 개혁신학인양 알고 사니 답답합니다 그려~


    • 2020-11-20 22:06

      그리고 엠티유의 뜻을 알려고 그리 힘을 들일 일도 없어요.
      엠티유 출신들도 잘 안 쓰고요. 다만, 엠티유 출신들은 엠티유가 뭔지는 알기에 감신인들이 좀 눈에 듸게하기 위해 쓴거랍니다.
      요즘 함부로 여기는 자들이 있어서요.


    • 2020-11-20 22:07

      사실 서울 감신은 서울 엠티유이고, 대전 감신는 대전 엠티유 그리고 수원 감신은 수원 엠티유인데
      그게 그건데 잘알지를 못하지요.
      잊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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