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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9회 : 2. 인사([1:4-5) ※ 일곱 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0-08-13 19:48
조회
282
※ [요한계시록] 9회 : 2. 인사([1:4-5)

소개에 이은 “요한의 인사말의 서신 형식은 본서를 다른 모든 묵시 문학과 구별짓는다. 위경 중에는 그런 서신 형식의 인사말이 들어 있는 것이 없다. 요한은 신약의 서신들이 인사말을 쓰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실제의 역사적인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A. Johnson).
이 부분은 【4】[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로 시작된다.
[요한]은 1:1의 주석을 보라.
[아시아]는 본래 로마의 지배 하에 있는, 아나톨리아 고원에 이르는 소아시아의 서편 지역을 가리킨다(C. L. Morris). “현재의 터어키의 서쪽 부분”(A. Johnson)인 이 지역에 속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외에도 드로아(행 20:5), 골로새(골 1:2), 히에라볼리(골 4:13), 앗소(행 20:13-14), 아드라뭇데노(행 27:2), “마그네시아, 트랄레스”(G. E. Ladd, A. Johnson, W. Barclay)에도 교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앞의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이유는 [일곱 교회]가 처한 황제 예배와의 특별한 관계 때문(R. H. Mounce)이 아니라, 일곱이 거룩하고 완전한 수이기 때문이다.① 그러한 의미에서 이 [일곱 교회]는 역사상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다(Seiss②, A. Barnes, H. Kraft). 같은 의미에서 카이퍼(Kuyper)도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에서 일곱 가지 교회 형편을 보신다. 이 일곱 가지 교회 형편은 모든 시대와 모든 지방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③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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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offatt, Greijdanus”(in 박윤선), J. A. Bengel, H. Kraft, A. Plummer, P. E. Hughes, C. L. Morris, A. Johnson, G. E. Ladd, W. Barclay, 黑崎幸吉, 이상근, 박윤선, 김철손, 요한계시록.
2) in A. Johnson.
3) in 박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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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적으로도 이 일곱 교회가 있는 곳들은 “아시아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요충 지대를 이룬다. 그래서 지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교회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김철손)④.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의(참조: 출 3:14) 원문(ἀπὸ ὁ ὦν καὶ ὁ ἦν καὶ ὁ ἐρχόμενος)의 ἀπὸ(말미암아)는 소유격 명사와 함께 쓰이는 전치사인데, 하나님을 호칭하는 주격 명사(ὁ ὦν καὶ ὁ ἦν καὶ ὁ ἐρχόμενος)와 함께 쓰였다. 이와 같이 문법상 틀리는 표현 방법은 본서에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1:8, 4:8, 11:17, 16:5),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경외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⑤
특히, [장차 오실 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黑崎幸吉).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은 일곱 천사⑥가 아니라 성령을 의미한다.⑦ 스가랴 3:9, 4:10에서도 성령을 여호와의 일곱 눈으로 비유하였다(G. E. Ladd, 박윤선). 본문의 [일곱 영]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일곱 교회에 주신 성령이라고 하는데, [일곱]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살려 거룩하고 완전한 성령으로 보아야 한다.
이어서 요한은 【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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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철손, 요한계시록.
5) 참조: “Greijdanus”(in 박윤선), W. Barclay, C. L. Morris, A. Johnson, 박윤선, 강병도 편.
6) A. Clarke, “Andreas”(in H. Alford), R. H. Charles, R. H. Mounce, G. R. Beasley-Murray.
7) A. Barnes, G. E. Ladd, H. Alford, M. Henry, J. A. Bengel, J. Wesley, R. Tuck., A. Plummer, W. Barclay, W. Hendriksen, R. H. Mounce, R. C. H. Lenski, A. Johnson, H. Kraft, P. E. Hughes, J. F. Walvoord, C. L. Morris,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김철손, 요한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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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이라는 삼중의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명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충성된 증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과 치유와 축귀 등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대한 충실한 증인의 삶이었다는 뜻이다(시 89:37, 사 55:4, 요 3:32-33. 18:37, 딤전 6:13). 한 마디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하나님의 현현이고(요 1:14, 18, 빌 2:7-8), 그분의 모든 언행은 하나님의 속성의 구현이었다(요 10:32).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이라(요 14:9)고 하셨고, 자신과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절정은 십자가에 못박혀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이다. 로마서 5:8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환난과 박해 아래 있던 일곱 교회 및 그 밖의 모든 교회들에게 위로가 되고, 충성스런 전도자들에게 격려가 된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ὁ προτότοκος)는 완전히 죽어 매장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을 의미한다(골 1:18, 행 26:23, 고전 15:20, 23). 이 사건은 구약성경의 예언(호 6:2, 시 16:10, 11, 17:15, 사 53:10, 54:7, 욘 2:10 등)의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최대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행 2:24, 32, 3:15, 4:10, 10:40, 13:33-37, 17:31, 롬 1:4, 고후 13:4, 갈 1:1).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소산이며 하나님의 손의 행위였다. 부활은 사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으며, 절대로 패배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능력의 완전하고도 결정적이며 논박할 수 없는 표명이었다.”⑧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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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W. Barclay,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기산 역(서울: 大韓基督敎書會, 1965), p.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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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였다.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우주의 섭리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것보다 더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할 수 있는 예는 없다. 이 외에도 바울은 부활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증인들을 열거하고 있다(고전 15:4-7).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의 역사인 동시에 그리스도 자신의 권세로 스스로 부활한 것이며(요 10:18), 또한 성령의 역사이셨다(롬 8:11).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 안에서 발생한 초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됨이 결정적으로 재확증된 것이다(롬 1:3-4, 14:8-9).
(2) 육체적 죽음의 신비에 대한 승리이며, 저주와 죄로부터의 영원한 구속의 표명이다(행 17:31). 따라서, 우리가 장차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 즉 영생에 대한 소망이 된 것이다(고전 15:20, 롬 5:21, 골 1:18. 죽은 자들의 부활: 고전 15:52, 살전 4:14, 16-17. 산 자들의 부활: 롬 4:24, 8:11, 고후 1:10, 13:4).
신령한 몸 곧 부활체의 성질에 대해, {마이어(F. B. Meyer)가 잘 설명하고 있다. 누가복음 및 그 밖의 복음서의 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인간의 경험이나 사상을 초월한 특이체였다. 무덤이 비게 된 것, 또 손발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으로는(요 20:27), 시체 그 자체가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엠마오로 가는 도중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눅 24:13-33), 또 마리아도 다른 제자들도 부활의 주를 오인하였다는 점에서 보면(요 20:14-16, 21:4), 생전의 육체와 꼭 동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문이 닫혀 있는데도 방에 들어오시고(요 19:19), 또는 방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리신 것(눅 24:31) 등을 보면 보통의 육체가 갖는 물질적 제한이나 제약을 받지 않음을 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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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그러나 음식물을 섭취하신 것, 말씀하신 것 등은 보통 육체와 동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체였다. 즉, 물질이면서도 우리들이 경험할 수 있는 물질과는 다르고, 영이면서도 단순한 영이 아니라 몸을 갖추고 있었으며, 마음대로 나타내고 마음대로 사라지시는, 시간 및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기이한 존재이셨다. 이것으로 우리는 부활체가 어떠한 것인지 희미하나마 상상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우리들은 이에 관하여 오늘날의 과학에 의한 증명을 기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제2의 창조―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자연체가 아니라, 영체였던 것이다.}(살전 1:10의 주석).
바울 자신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고 하면서(고전 15:42-43), 그 몸을 신령한 몸이라고 하였다(고전 15:44).
우리의 영생에 대한 소망은 단순히 미래에 성취될 것이 아니라, 부분적이기는 하나,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다(고후 5:17, 롬 7:4. 참조: 갈 2:20).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J. S. Stewart, J. A. T. Robinson).⑨
(3) 우리가 천국을 소유할 것에 대한 보증이다(고전 15:50, 골1:13).
그러므로 사도 시대에 있어서 부활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또한 모든 선교의 초점이 되었다.
핍박을 당하는 교인들, 특히 순교할 교인들에게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고전 15:2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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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J. S. Stewart, A Man in Christ(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64), p. 186. J. A. T. Robinson, Paul's Joy in Christ(Michigan: Baker, 1970), p. 49. 참조: A. Sche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trans. by W. Montgomery(London: Adam & Charles Black. 1965), p. 98. 신자는 부활의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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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승천하여(행 1:9-10)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마 22:44, 26:64, 막 16:9, 행 2:25, 35, 7:55-56, 롬 8:34, 골 3:1, 히 1:3, 13, 8:1, 10:13, 벧전 3:22)는 현재 요한 사도에게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증거하시는 것이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ὁ ἄρχων τών βασιλέων τής γής)은 ‘땅의 왕들의 통치자’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김철손 님은 “부활‧승천한 그리스도가 현실적으로 로마 황제의 권력을 완전히 제압한다기보다는 부활‧승천하셔서 천상의 왕권을 장악하시고, 천상 천하의 모든 악의 세력을 무찌르며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신앙 고백적 칭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⑩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2)라고 하였고, 바울도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라고 하였고, 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10)라고 하여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천상천하의 주권적 지배자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말미암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는 세상이 아니라,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을 비는 것이다.
[은혜는 카리스(χάρις: 원문에는 4절에 있다.)이며, 헬라의 인사말이기도 하다.
{은혜](카리스, χάρις)는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일” (M. Henry),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R. T. Stamm), 그리고 “죄인인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 축복을 쏟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E. Huxtable) 등의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만으로는 아직 카리스(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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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카리스(은혜)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의미란 곧 “죄의 용서”(M. Luther, R. C. H. Lenski)이다. 하나님의 은혜 중 은혜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현된 속죄의 사랑이며(롬 5:7), 그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 특수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할 때, 일반적인 은혜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혜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누가복음 15:11 이하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에게서 많은 선물(은혜)을 받았으나 용서를 받지 못했다면 그 선물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죽음과 멸망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죄악의 사슬에서 구속받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일반적인 은혜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이 구속의 은혜야말로 모든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이다.}(갈 1:3의 주석).
[평강]은 에이레넨(εἰρήνην: 원문에는 4절에 있다.)으로서 히브리의 인사말이며, {“고전 헬라어에서는 적대적인 무리 사이의 휴전 혹은 적의의 해소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 그 낱말은 전쟁과 다툼에 반대되는 것,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회복된 올바른 관계, 마음의 평안 또는 고요 등을 의미한다”(C. L. Mitton).
이 [평강](화평)이 내적인 의미의 것이든 외적인 의미의 것이든 간에 근본적으로 “먼저 죄를 용서받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 까닭은 율법이 죄 때문에 양심을 비난하고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다”(M. Luther). 그러므로 인간이 참된 내‧외적 평화를 얻으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평강은 은혜의 결과이다”(M. Henry, R. T. Stamm, R. C. H. Lenski). 따라서 은혜의 결과로서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예수께서 주시는 하늘의 평화이다(요 14:27).}(갈 1:3의 주석).
그러한 의미에서 요한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하는 것이다.
[죄]는 하마르티온(ἁμαρτιών: 복수형)이며, {“원래 윤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활쏘기에서 나온 말로서 화살이 표적을 빗나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죄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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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죄란 가능성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원하시는바 일꾼으로서의 자기의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 최선의 아버지, 최선의 어머니, 최선의 아들, 최선의 딸이 되지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손과 눈과 마음과 두뇌의 은사를 사용하며 발전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W. Barclay). 한 마디로 말해, 죄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표적에서 빗나간 성향과 사상과 말 그리고 행위 등을 뜻하는 것이다.}(엡 2:1의 주석).
[해방하시고]는 부정 과거 분사형인 뤼산티(λύσαντι)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심으로써 죄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신 공효(功效)를 의미하는 것이다(5:9, 마 20:28, 요 8:34-36, 갈 3:13, 딤전 2:6, 히 9:12, 벧전 1:18-19).

출처: 최세창, 요한계시록(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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