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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물어오신 여섯번 째의 질문
2025-10-17 21:55
원형수
69414
이사야 6:1-10
[본문소개]
“이사야서가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한 마디로 요약하여, “그 이름들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이야기”라 말하고 싶습니다.
"이사야"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맏 아들은 ‘마헬살랄하스바스’이고, 둘째 아들은 ‘스알야숩’입니다. 우리가 이들의 이름의 뜻을 안다면 참으로 놀랍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이름 자체가 중요한 설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란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약탈이 빠르다", “멸망이 임박했다”는 뜻이고,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아버지가 갓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이렇게 지을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두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을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심정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였을까요? 그러므로 제가 “이사야서가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한 마디로 요약하여, “그 이름들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이야기”라 말하고 싶다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아들을 낳고, "멸망이 온다"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시대가 절박한 시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둘째 아들을 낳았을 때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희망을 담아 ‘스알야숩’, 곧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가족은 그 이름 자체가 살아있는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사야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말을 떠 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지만 이 이름을 우리 말로 풀어보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이 되니다. 그리고 큰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멸망이 임박했다야!” 라고 부르는 것으로 유다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깨닫게 되고, 둘째 아들 ‘스알야숩’을 부를 때마다, "남은 자가 돌아 오리라야!", “희망이 있다 야!”라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는 그 이름 자체가 설교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담고 있는 생생한 하나님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6장 전체는 ‘멸망’과 ‘남은 자’와 ‘돌아옴’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란 뜻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이고, 이사야서 66장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멧시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6장은 아주 특별한 장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세 가지 이상한 일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이상한 질문 "내가 누구를 보내며?"
첫 번째 이상한 점은 ‘소명의 위치’입니다.
이사야서는 다른 선지서들과 달리 6장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옵니다. 그러나 다른 선지서들은 한결같이 첫 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옵니다. 이사야서 다음의 책인 예레미야서를 보십시오. 예레미야서는 1장부터 부르심이 나옵니다. 예레미야서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렘 1:4)고 했습니다.
에스겔서도 보십시오.
1장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타납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더라"(겔 1:1)고 한 후, 3절에서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책을 다니엘서라든가, 호세아서라는가, 아모스, 요나서도 모두 첫 장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는 다릅니다.
1장에서 "패역한 자식들이로다... 온 몸에 상한 곳뿐이로다“ 2장에서 "그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는도다“ 3장에서 "내 백성을 학대하며 가난한 자의 얼굴을 짓밟는도다“ 4장에서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5장에서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라고 하는데, 5장에만 여섯 번이나 "화 있을진저"란 말이 반복됩니다. 그러고 나서야 6장에서 이사야의 소명이 나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 답은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처음 다섯 장을 보십시오. 창조(1-2장), 타락(3장), 살인(4장), 그리고 죄의 확산(5장)으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보면 처음 다섯 장이 하나님의 기대(1장), 배신(2장), 착취와 불의(3장), 죄의 만연(4장), 불신앙으로 인해 심판 받을 예루살렘의 참상(5장)으로 이루어 집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5-6)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이사야 6장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한탄하십니다. 이로 볼 때 이사야 6장은 창세기 6장의 재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홍수 직전의 그 절망, 그 한탄, 그 근심이 이사야 시대에 다시 반복된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두 번째 이상한 점은 하나님이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실 때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창 16:8)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왕상 19:9), 야곱이나(창 46:2), 모세나(출 3:4), 사무엘(삼상 3:10)을 찾으실 때도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혼잣말처럼, 독백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6:8)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런 걸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다의 운명이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창세기 6:7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 속에는 통곡과 한탄이 담긴 것인데, 그나마 소망도 담겼습니다.
창세기 6: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란 접속부사로서, ”앞의 내용과 다른 내용을 말할 때 쓰여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지었음을 한탄하시면서도 히망을 버리지 않으셨든 것은 노아를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6:7절에서 ”한탄하셨다“는 뜻은 "그래도 한 사람,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이런 의미가 담긴 희망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사야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마치 혼잣말처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6:8)라고 하신 것은 "제2의 노아"를 찾고 계신다는 뜻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유다의 상황은 어떤 지경이였을까요?
이사야서 6:1절에 의하면 ”웃시야 왕이 죽던 헤에“라고 했습니다. 52년간 유다를 다스린 왕 웃시야는 앗수르의 위협 속에서 유다를 지켜낸 왕입니다. 그가 비록 말년에 교만하여 문둥병자가 되었지만 백성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왕이였는데, 그가 죽은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는 찢어지는 심정으로 성전을 찾았습니다. ”이제 유다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앗수르가 쳐들어오면 유다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근심하며 성전을 찾았을 때, 이사야가 그곳에서 하나닌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서 6:1-3절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그 위에 모시고 서 있는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1-3)
이사야는 그곳에서 무엇을 본 것입니까?
앗수르의 위협 속에서 유다를 지켜낸 웃시야 왕은 죽었지만, 그곳에서 참 왕이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본 것입니다. 지역 변방의 작은 왕이 아니라, 온 천하를 다스리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본 것입니다! 그 순간 이사야는 무릎을 꿇으며 부르짖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5)
그때 스랍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숯불을 가지고 날아와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말합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6:7) 그 순간은, 그 경험은 이애사야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였습니다.
이사야서를 읽어보십시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표현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이 표현은 겨우 7번 나옵니다: 시편에 3번, 예레미야에 2번, 열왕기하에 1번(이것도 이사야가 한 말) 그런데 이사야서에만 33번이나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 대한 통계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약 31회 나옵니다. 그 중 이사야서: 25-26번 (학자마다 집계 방식에 따라 차이) 다른 책들 곧 열왕기하 1번(19:22, 이것도 이사야의 말), 시편 3번 (71:22, 78:41, 89:18), 예레미야 2번 (50:29, 51:5), 이사야서에서는 1:4, 5:19, 5:24, 10:20, 12:6, 17:7, 29:19, 30:11, 30:12, 30:15, 31:1, 37:23, 41:14, 41:16, 41:20, 43:3, 43:14, 45:11, 47:4, 48:17, 49:7, 54:5, 55:5, 60:9, 60:14 등에 나옵니다.
왕이 죽던 날, 성전을 찾았을 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그 경험은 이사야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였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온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6:8)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이상한 점입니다.
지금까지 "어디", "여기"라는 말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던 단어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고,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고, 하갈에게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고, 엘리야에게는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즉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셨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묻자, 이번에는 이사야가 "여기"라고 답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여기’라는 이 단어는 단순한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라는 이 단어의 뜻은 "제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라 할 것입니다.
2. 이상한 사명: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라"
우리가 두 번째로 상고할 사항은 ‘이상한 사명’입니다.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자, 하나님의 말씀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6:9-10)
공동번역은 이 보다 더 직설적입니다.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 선지자에게 주시는 사명은 이렇습니다:
"가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가서 그들의 귀를 열게 하고" "가서 그들의 마음을 깨닫게 하라" 그런데 이사야에게는 정반대입니다: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라" "마음을 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까요?
이사야가 묻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도 너무 당황스러웠든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6:11)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겨져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6:11-12) 철저한 멸망입니다. 완전한 황폐입니다. 끝장을 내 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로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6:13) 그루터기! 나무가 잘려 나간 후 남는 것이 그루터기입니다. 그러나 그 그루터기 라도 살아 있으면 새 싹이 돋아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보여주신 구원 3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단계는 완전한 멸망처럼 보인 것입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 - "약탈이 빠르다")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당할 것이고, 성전은 불탈 것이며,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란 것이 제1단계입니다.
제2단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알야숩’,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루터기가 남아 거룩한 씨가 된다는 뜻입니다 70년이 지난 후 ‘그루터기’ 곧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3단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즉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이 있을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때 메시야가 오실 것이고, 하나님의 왕국이 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방법인가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철저하게 멸망시키신 후에야 새로 시작하신다는 것일까요? 출애굽기 19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5-6)는 것입니다.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8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사무엘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삼상 8:4-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7)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버리고 인간 왕을 택한 것입니다. 그 후로 이스라엘과 유다에는 수많은 왕들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서를 읽어보십시오.
노랫말의 후렴처럼 계속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왕상 14:22, 15:26, 15:34, 16:19, 16:25, 16:30...)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왕상 15:34, 16:2, 16:7, 16:19, 16:26...) 아무도 완벽한 왕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삼상 13:14)라 불렸지만, 밧세바 사건을 보십시오. 간음하고, 은폐하고, 충직한 부하를 죽음 가운데 내몰았습니다. 솔로몬은 어떻습니까? 지혜의 왕이었지만, 백성들이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왕상 12:4) 명군이라 불린 웃시야도 교만하여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대하 26:16-21). 히스기야도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물을 자랑하으로 침범의 단초가 되었습니다(왕하 20:12-19).
이러한 왕정사는 인간 왕정사의 실패를 보여주는 왕정사인 것입니다.
“인간의 통치는 불완전하다.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왕만이 완전한 통치를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2편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6-7)
이사야 9:6-7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의 계획은 명확합니다. 인간 왕들을 통해 실패를 보여주시고, 그루터기 같은 남은 자를 남기심으로서, 그들을 통해 참 왕, 메시야를 보내신다는 계획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깨달은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구원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므낫세 왕 때 톱으로 켜져 죽어도 기꺼이 감수한 선지자였습니다 (히 11:37).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와 상급을 알았기 때문에 감수할 수 있었든 것입니다.
3. 계속되는 부르심: 익명의 이사야들
세 번째로 이사야서를 통해 발견된 이상한 점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계속 부르시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사야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사야서가 세 부분으로 나뉜다는 사실입니다. 1-39장의 시대적 배경은 8세기 (B.C. 739-701경)으로 봅니다. 앗수르가 위협하던 시대로서 웃시야, 아하스, 히스기야 왕 때로서 예루살렘이 앗수르 군대에 포위되던 때입니다.
40-55장은 6세기 (B.C. 550-538경)로서, 바벨론 포로 시대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등장하는 시대로서, "광야에 길을 예비하라"는 귀환의 메시지가 들리든 때입니다.
56-66장은 5세기 (B.C. 520-500경)로서,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 재건 시대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든 시대입니다.
이처럼 이사야서는 세 시대로 구분이 되고, 각 시대마다 200년 이상의 시간 간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200년을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이사야서는 최소한 두 명이거나, 세 명의 선지자들이 이사야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사야서는 한 사람의 저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 사람이 쓴 이사야서를 한 사람이 쓴 것처럼 하나로 묶었을까요?
여기에 큰 의문이 남습니다.
이사야서가 최소한 세 사람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 맞다면 사무엘 상하나, 열왕기 상하나, 역대기 상하처럼 이사야서도 상,중,하, 또는 상,하로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사람이 쓴 것처럼 한권의 책으로 묶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계속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사도행전을 보면 미완성으로 끝납니다. 사도행전은 모두 28장으로 끝나는데,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행 28:30-31)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되었는지,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순교한 것인지, 풀려난 것인지 아무런 설명없이 미완으로 끝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 답은 사도행전 1:8절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8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때까지 사도행전은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쓴 사도행전 1-12장이고, 바울이 쓴 사도행전 13-28장이고, 29장부터는 저와 여러분이 써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서도 마찬가집니다.
제3 이사야 뿐만 아니라 제4의 이사야, 제5의 이사야, 제6의 이야야가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이사야가 8세기,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난 그 이사야이고, 두 번째 익명의 이사야는 6세기 경 바벨론 포로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 그 이사야이고,세 번째 익명의 이사야는 5세기 경, 돌아온 자들, 그루터기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준 그 이사야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이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의 이사야를 찾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흥미로운 것은 이사야 36-39장입니다.
이 부분은 열왕기하 18:13-20:19와 거의 똑같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표절 수준입니다. 왜 이렇게 꼭 같은 내용을 복사판으로 기록한 것일까요? 이사야서 36-39장은 이사야서 전체의 다리 역할을 합니다. 1-39장(8세기)과 40-66장(6-5세기)을 연결시키는 ‘다리’ 인 것입니다.
이 다리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강할 때도 하나님이 주관하셨고, 바벨론이 강할 때도 하나님이 주관하셨고, 페르시아가 강할 때도 하나님이 주관하셨습니다.
이사야 10:15를 보십시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뽐내겠느냐"
도구는 도구일 뿐입니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에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믿음 없는 자들이 오히려 교회를 비판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순교 신앙이 없습니다. 부활 신앙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확신 조차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힘을 일었다는 것은 말씀의 권위가 상실되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권위를 잃을 때, 세상이 더 크게 소리칩니다. 교회가 거룩을 잃을 때, 세상이 교회를 심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눅 19:40)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침묵할 때,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라도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드러내십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우리가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4. 맺는 말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세상은 여전히 어둡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교회는 힘을 잃고, 신자들은 빛을 잃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묻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물음에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요나의 길과 이사야의 길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앞에 두 길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 그러나 요나는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왜일까요? 니느웨가 회개할까봐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실까봐 싫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생각, 자기 계획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었을 때 주저없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 수 있었을까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예루살렘 거리를 다녔습니다(20장). 자녀들에게 예언적 이름을 지어,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살아있는 설교가 되게 했습니다. 임박한 심판을 외쳤고, 동시에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 마침내 므낫세 왕 때 톱으로 켜져 순교 당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았든 것입니다. 사이비가 아닌 진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은 사이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배를 불리는 거짓 선지자, 권력과 결탁하여 진리를 왜곡하는 종교 지도자, 십자가 없이 영광만 추구하는 신앙인, 이런 사이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진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라고 부르짖은 사람, 자기 죄를 고백하는 사람, 숯불의 정결함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압도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33번 고백한 사람, 평생 그 감격을 잊지 못한 사람, 그 거룩함 앞에 무릎 꿇은 사람, 자기를 철저히 부인한 사람입니다 3년 동안 벗은 몸으로 다닌 사람, 자기 자녀에게까지 예언적 이름을 지은 사람, 순교를 각오한 사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아는 사람입니다. 멸망 후 남은 자의 귀환을 본 사람, 그루터기에서 새 싹을 본 사람, 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예언한 사람, 온 몸으로 믿음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말만 하지 않고 삶으로 증거한 사람, 가정이 설교가 된 사람,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에 대한 저와 여러분의 답은 무엇일까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대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침묵해야 할가요? 아니면 "나는 못 갑니다"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해야 합니까? 다만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라고 대답하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 앞에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처럼 벗은 몸으로 다녀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사야처럼 조롱당할 수도 있고, 순교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뵙는 기쁨,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나는 감격,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아는 특권, 죽음도 두렵지 않은 담대함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에게 조용히 반문해 봅시다!
저와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웃시야 왕이 죽던 날, 성전에서 이사야가 경험한 그 만남을 경험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은 적이 있습니까? 숯불이 입술에 닿아 "네 죄가 사함 받았느니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십니까? 단순히 교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나의 자리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진정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일까요?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 뜻을 모르고 일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자기 목적을 위한 밥벌이에 불과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오늘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라고 고백했듯이,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숯불로 우리 자신의 죄를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의 대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그룹 나눔 자료]
나눔을 위한 질문
1. 체험 나눔: "내가 본 하나님은 누구신가?"
2. 관점의 전환: "누구의 눈으로 볼 것인가?"
3. 이름의 메시지: "우리 삶은 무엇을 말하는가?"
4. 그루터기의 소망: "끝이 아니다"
5. 계속되는 부르심: "나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삶의 적용을 위한 질문
1. 만남의 질문: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만났는가?"
2. 관점의 질문: "나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가?"
3. 응답의 질문: "무엇이 나를 막고 있는가?"(예: 두려움, 핑계, 집착, 불신, 교만, 상처 등)
4. 증인의 질문: "내 삶은 무엇을 증거하는가?"
5. 그루터기의 질문: "내 삶의 그루터기는 무엇인가?"
묵상을 위한 주제
1. 거룩: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2. 회개: 나의 입술과 마음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라.
3. 부르심: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묻고 계신 질문은 무엇인가?
4. 순종: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자리 어디인가?
5. 소망: 심판 속에서도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라.
설교 메모
도입
이사야 가족 소개와 예언적 이름
세 가지 이상한 점 예고
1. 이상한 질문
왜 6장에 소명이?
창세기와의 연결
이름 없는 부르심의 의미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응답
2. 이상한 사명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라"의 충격
그루터기의 희망
하나님의 구원 3단계
인간 왕정 실패와 메시야 필요성
3. 이상한 소명(계속되는 부르심)
200년의 미스터리
사도행전의 미완성과 비교
제4, 제5의 이사야 필요
오늘날 교회의 위기
결론
요나의 길, 이사야의 길
사이비가 아닌 진짜
"우리 모두의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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