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조선감리회 합동 100주년
작성자
민관기
작성일
2020-12-06 14:57
조회
792
기독교조선감리회에서 중요한건 자치가 아니다.
그것은 합동이며, 통일이다. 분열의 기운을 합동과 화합으로 장식한 인류사에 빛나는 생/화학적 종교 결합의 예 아닌가?
그리고
이 합동과 미 감리교회는 한국을 독립국가로 인정의 문제.
이 두 사안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원했기에 북/남 감리회의 합동을 찬동한 것이며, 평소의 연합 활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한국의 독립국가화를 지지한 미 감리회와 선교사들은
미 정부도 버린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적극 오로지 대한의 독립을 통한 기독교 국가화의 길에 매진하였다.
그것도 미정부가 승인하기 20년전이다.
승인하고 같이 만들었다.
1926년 북/남감리교회는 합동전권연구방침위원회를 두어 합동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런건 그냥 실무적 절차일뿐.
북/남감리교회의 합동을 마치 작은 교단간의 합동의 역사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북감이 1885년, 남감이 1895년 내조선한 이래 이 교단의 모든 선교사들과 대한인 감리교인들은 황실과의 협력하 조선을 부국강병한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한 공동계획의 수립자들이다.
황제가 감리교인이었던 것과 아들을 웨슬리언대로 유학을 시킨것이며, 우당 이회영과 해석 손정도와 모의하여 황제로 하여금 북경방면 망명정부 수립기획과 외국인이로선 유일하게 3.1 혁명 기획에 참여한 노블 감리사는 상해임정 수립에 1만불 = 100억을 송금하여 임정을 조직케 했으며, 이를 위해 정동제일교회의 부담임 현순과 담임 해석을 책임자로 상해로 특파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이는 1905년 황제가 헐버트 목사를 울사늑약저지 특사로 워싱턴에 특파하고, 1907년 헤에그 특사로 3특사로 특사증을 주어 보내며 헐버트에겐 또 다른 특사증을 주어 활동케했던것과 이 후의 일을 맞추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독립운동은 정밀하게 돌아가는 하나의 정밀한 생명체적 유기체이다. 그냥 된것이나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 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인 연대와 소통의 산물이다.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인한 황제의 강제퇴위, 군대 해산, 정미전쟁 발발이 있던 때에 1907년 민족대부흥운동은 활화산처럼 타 올랐다. 아펜젤러의 사후였으며 스크랜턴은 해리스 친일 감독과 대결로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로 이 때의 감리교회는 노블 감리사가 선교 지휘자였다.
노블은 이렇게 필요와 능력에 따라 역량을 배치한다.
1. 하디와 최병헌은 교육역량으로 배치하여 민족부흥운동으로 영적으로 각성되어 감리회 신학교로 몰려드는 청년들을 민족지도자로 양성해내는 책임을 맡겼다. 이는 3.1 혁명에 감리회 목사들의 대부분 참여로 현실화되었다.
= 교육 인재 양성화
2. 존스에 의해 하와이로 홍승하와 함께 파견되어 미주 독립운동기지화의 조직적 초석을 닥고 온 현순 목사에게는 '장년주일학교 조직'의 책임을 주고 명함을 파주어 왜정의 감시와 탄압을 극복케할 무기를 주어 현순은 전국을 순회하며
교회마다 장년주일학교를 조직하므로 3.1 혁명시 조직 동원의 체계를 완수하여 경술왜란으로 멈춘 민족의 동맥을 유지/복원시켰다.
= 조직화
3. 민족의 여성과 학생 그리고 청년들은 빛을 품었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이 아니었다. 반드시 빛을 찾고야 말리라 견결히 의식화되었는데 이 목적을 위하여는 해석 손정도 목사가 투입되었고 그는 기필코 이 사명을 완수했다.
해석은 의식화의 임무를 맡았던 것인데, 해석은 일찌기 신민회 가입 이후 전덕기 목사의 기획특보격으로 활동하며
목회자의 중핵이고 데라우찌 암살모의, 무관학교 건설 등의 일에 관여하고 이는 이미 선진 인자들을 외부인 만주와 미주로 망명시켜 이미 실행중이었으며, 국내 남아있는 대부분의 역량을 더욱 민족의식으로 단련시키는 역할에 다름 아니었다. 영적 의식화의 민족적 의식화로의 전환 = 의식화
4. 전덕기 목사는 병을 얻어 병상에서 병상 목회를 통해 지휘를 하는 입장이었다.
각처에선 물론 학교로는 누구, 경기도는 누구, 충청도는 누구, 평안도는 누구, 강원도는 누구 등 각 임무를 주었음은 물론이다.
이를 유기체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여, 1919년 3.1 혁명은 여하한 사람들에 의해 발발되며, 임정은 이의 자녀로 태어났고, 이에 함께 공동으로 일을 하여온 북감과 남감의 지도자들은 1895년 남감이 리드와 헨드릭스 감독인 내조선한 이래 함께 불철주야 경쟁하지 않으며 언제나 협력하여 온 전통을 이어 1926년에 합동연구방침위를 세웠던 것인데, 실상은 1919년에 그 방침은 결정이 되어 있다가 1926년에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중요한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미국은 가츠라=태프트 밀약으로 1905년에 체결하였고, 을사늑약도 그러하다.
하여, 미국은 서구 제국중 처음으로 공사관을 철수한다. 더욱 괘씸한건 유리완 수호통상조규를 맺어놓고 일본과는 이중밀약을 맺어놓고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딸 ㅕㅇ애인 앨리슬 한국에 파견하고 우린 초청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는 중에도 마치 우릴 위할 것인양 행동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 정부와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는 정부간의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에는 미정부가 아니라 미정부의 입장에 반하는 왜의 불교국화와 신도국화에 반대하여 기독교화하려는 치열한 투쟁이 왜와 미 선교사 사이에 벌어졋다는 것을 의미한다.
1905년 ~ 1945년.
이 40년의 간극에 미 북남 여/남 선교부가 있었다.
이들은 대한인들과 함께 민간 한미감리회동맹을 맺고 함께 왜에 대적하여 싸운다. 왜적의 눈에 보이는건 한국인만 보이지만 실제는 배후에 자신의 동맹국가인 미국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처치곤란한 이 눈의 가시에 왜는 35년간 눈을 찔려가며 살았다.
정리하면,
1905년 이 후 1907년 부터 실제적인 한미 정부간 동맹은 사라지고, 감리회를 종교동맹으로 한미관계는 유지되었던 바 이 동맹의 승전보가 1945년의 광복으로 나타남이다.
1940년 미선교사들의 강제출국은 왜가 멸망으로 가는 길목에 었던 해프닝이고, 광복후 다시 내한한 선교사들은 새대한민국 기독교국가 건설에 그 동안 준비되어 있던 감리교회 역량을 투입하고 6.25가 발발하자 먼저 선제적으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을 파병케하여 대한민국을 수호하게 하였던 것으로 1950년 한미군사동맹의 맹아였으며, 대한민국을 지켯으나 이젠 대한민국의 국격과 국력이 더하여 성장했으므로 미군의 존재에 대한 위치를 재조정 할 때가 되었고 이는 이미 의논되며 실행중이다.
하여,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성립은 1905년 이후 서로가 바래어 온 소망의 결집체이며, 이는 1931년 자치가 아닌 미 선교부가 파송하여 한국에 있던 여선교사 13명에 대한 목사안수로는 미감리회가 한국감리회와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 자치가 아닌 대등한 위치로 확인시킨 사건 여성목사 안수를 주목.
자치였는데, 미국의 여선교사들이 안수를 기독교조선감리회 에서 안수를 받는다?
이게 도대체 성립이 되는 논리가 아니다.
뭐 언제는 자치가 아니라, 억압이었는가?
언제나 대등했었고, 그들도 하루라도 서둘러 대한인의 상황이 나아지길 바라 감리교회 평신도나 목회자들을 쉼없이 인재를 발굴하여 미국이나 일본으로 유학보내 실력 양성에 나서게 했던 것이 아닌가?
언제 그들이 우릴 억압이나 구속했던 바도 없는데 자치네 독립이네 하는건 스스로의 위치/위상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좌요.
다만, 합동의 실제화가 좀 늦어졌던건 미국에서의 자신들의 상태인 남북전쟁시의 앙금을 다 걷어내지 못한 본국 미 북/남 감리회의 한계로 인함이지 우리의 문제는 전혀 아니었다는 점도 간과한것 같다.
재산/재정권은 안주고 자치만 시켯으니 반만 인정한것 아니냐는 바보들이 있다.
우린 사실상 아무도 인정하고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강제 침략을 당해 일본에게 있은것 없는 것 다 빼앗기고 있는 입장에서 재산/재정에 관한 권한을 주면 왜놈들이 무슨 짓으로 빼앗아 갈지 모르는데 그걸 그냥 너 먹어하고 넘겨주었으면 미 선교사들이 바보다.
미 북남 감리교회는 대한민국 건국의 공동 수행자이며 거룩한 친구들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할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임정을 국가로 승인만 해줬어도 그 승인을 받기 위해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싸우고 또 싸웟어도 이루어내지 못한 일의 공동수행자요 뜻을 같이 한 친구였다니 우린 이 친구에 대해 어찌 해야 하냐고 묻는 것이다.
기독교는 제국주의 첨병이라 축출해야 하는가? 아님, 도와줘서 고마우니 굽신 거려야 는가?
한미는 남북은 북미관계에 있어 곧, 남/북/미에 있어 한국감리교회와 미국감리교회는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답을 찾아야만 한다.
답 무엇?
분열되었던 미국의 북남 감리교회를 대한인들이 합동시켜 통일시켰다는 것.
=====================================================
민관기
이 글은 유은식 목사님의 글에 대한 답신입니다.
민관기
서울 경기는 자신이 감리사
강원도는 무스 선교사
충청도는 우리암 선교사
평양은 무어 선교사가 파송되어 있었다.
무스를 기억하세요.
이현석
사실, 엄청 어려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시면 ㅡ.ㅡ
민관기
어렵기보단 좀 무겁.
현종서
미선교사들은 시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달랐다. 미선교사들은 한국인을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사랑했다. 미 정치인들이 선교사들의 말을 안듣다가 일본의 하와이 공격을 당했던 것이다. 그 후로도 태평양 전쟁을 하면서 만은 미국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래를 선견하며 권고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권면을 잘 들어야 한다.1903 원산 부흥운동 1907년도 평양 부흥운동을 경험하면서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 성도들을 자기들과 다르지 않은 형제 자매로 인정하였던 것이고, 더 나아가 한국은 동양선교와 세게선교에 기여할 수 있는 선교의 동지로 보았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미국교회 다음으로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제일 많이 파송하고 있다. ( 한국과의 통상외교관계를 무시한 가츠라 테프트 밀약은 영적으로 무지한 미 대통령의 실수였다.)
민관기
2020-12-05 21:07
자치하고 싶어서 환장했었나?
미 감리회가 막 억압하니까 독립을 그렇게 소망했었나?
누가 구속이라도 했나?
그런게 아니다.
감리회가 북/남으로 갈라져 들어와 선교하니 선교역량에 집중이 잘 안되는 현상이 나타날것은 당연지사.
하여 북/감은 남/감에게 사역자 김흥순, 백헬렌 파송, 선교지 한국은행 자리 소개, 강원도, 개성, 해주 등을 선교구역으로 양보하고 신학교 공동운영 등을 하여 선교의 확장과 효율을 위한 필요가 요구되어 북/남감리교회의 합동을 1910년대부터 진작에 요구하였으나 미국 내의 상황에 따라 반대를 반복하다 1926년 합동방침연구위가 구성되어,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가 성립된 것일 뿐이지 무슨 1930년이 되어서야 비로서 없던 능력이 생겨서 교단이 합동한것이 아닌데...
게다가 제일 중요한 것은 자치가 아니라 합동이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고, 마치 무슨 누가 구속이라도 했나 왜 자치라는 말을 당치도 않게 선호하는지 모르겠다.
아니니까
지금까지의 세월동안 자치된줄로 알고 마치 미감리회가 한국감리회를 억압, 구속, 압박, 제국주의 참략 선봉, 정교분리로 민족의식 좀 먹음, 내세 편향으로 사회의 아편 등에서 벗어나 뭐가 된줄로 착각하게 만든 것.
아니, 근데 1930년 이후 뭐가 달라졌나요?
그것은 합동이며, 통일이다. 분열의 기운을 합동과 화합으로 장식한 인류사에 빛나는 생/화학적 종교 결합의 예 아닌가?
그리고
이 합동과 미 감리교회는 한국을 독립국가로 인정의 문제.
이 두 사안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원했기에 북/남 감리회의 합동을 찬동한 것이며, 평소의 연합 활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한국의 독립국가화를 지지한 미 감리회와 선교사들은
미 정부도 버린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적극 오로지 대한의 독립을 통한 기독교 국가화의 길에 매진하였다.
그것도 미정부가 승인하기 20년전이다.
승인하고 같이 만들었다.
1926년 북/남감리교회는 합동전권연구방침위원회를 두어 합동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런건 그냥 실무적 절차일뿐.
북/남감리교회의 합동을 마치 작은 교단간의 합동의 역사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북감이 1885년, 남감이 1895년 내조선한 이래 이 교단의 모든 선교사들과 대한인 감리교인들은 황실과의 협력하 조선을 부국강병한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한 공동계획의 수립자들이다.
황제가 감리교인이었던 것과 아들을 웨슬리언대로 유학을 시킨것이며, 우당 이회영과 해석 손정도와 모의하여 황제로 하여금 북경방면 망명정부 수립기획과 외국인이로선 유일하게 3.1 혁명 기획에 참여한 노블 감리사는 상해임정 수립에 1만불 = 100억을 송금하여 임정을 조직케 했으며, 이를 위해 정동제일교회의 부담임 현순과 담임 해석을 책임자로 상해로 특파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이는 1905년 황제가 헐버트 목사를 울사늑약저지 특사로 워싱턴에 특파하고, 1907년 헤에그 특사로 3특사로 특사증을 주어 보내며 헐버트에겐 또 다른 특사증을 주어 활동케했던것과 이 후의 일을 맞추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독립운동은 정밀하게 돌아가는 하나의 정밀한 생명체적 유기체이다. 그냥 된것이나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 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인 연대와 소통의 산물이다.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인한 황제의 강제퇴위, 군대 해산, 정미전쟁 발발이 있던 때에 1907년 민족대부흥운동은 활화산처럼 타 올랐다. 아펜젤러의 사후였으며 스크랜턴은 해리스 친일 감독과 대결로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로 이 때의 감리교회는 노블 감리사가 선교 지휘자였다.
노블은 이렇게 필요와 능력에 따라 역량을 배치한다.
1. 하디와 최병헌은 교육역량으로 배치하여 민족부흥운동으로 영적으로 각성되어 감리회 신학교로 몰려드는 청년들을 민족지도자로 양성해내는 책임을 맡겼다. 이는 3.1 혁명에 감리회 목사들의 대부분 참여로 현실화되었다.
= 교육 인재 양성화
2. 존스에 의해 하와이로 홍승하와 함께 파견되어 미주 독립운동기지화의 조직적 초석을 닥고 온 현순 목사에게는 '장년주일학교 조직'의 책임을 주고 명함을 파주어 왜정의 감시와 탄압을 극복케할 무기를 주어 현순은 전국을 순회하며
교회마다 장년주일학교를 조직하므로 3.1 혁명시 조직 동원의 체계를 완수하여 경술왜란으로 멈춘 민족의 동맥을 유지/복원시켰다.
= 조직화
3. 민족의 여성과 학생 그리고 청년들은 빛을 품었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이 아니었다. 반드시 빛을 찾고야 말리라 견결히 의식화되었는데 이 목적을 위하여는 해석 손정도 목사가 투입되었고 그는 기필코 이 사명을 완수했다.
해석은 의식화의 임무를 맡았던 것인데, 해석은 일찌기 신민회 가입 이후 전덕기 목사의 기획특보격으로 활동하며
목회자의 중핵이고 데라우찌 암살모의, 무관학교 건설 등의 일에 관여하고 이는 이미 선진 인자들을 외부인 만주와 미주로 망명시켜 이미 실행중이었으며, 국내 남아있는 대부분의 역량을 더욱 민족의식으로 단련시키는 역할에 다름 아니었다. 영적 의식화의 민족적 의식화로의 전환 = 의식화
4. 전덕기 목사는 병을 얻어 병상에서 병상 목회를 통해 지휘를 하는 입장이었다.
각처에선 물론 학교로는 누구, 경기도는 누구, 충청도는 누구, 평안도는 누구, 강원도는 누구 등 각 임무를 주었음은 물론이다.
이를 유기체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여, 1919년 3.1 혁명은 여하한 사람들에 의해 발발되며, 임정은 이의 자녀로 태어났고, 이에 함께 공동으로 일을 하여온 북감과 남감의 지도자들은 1895년 남감이 리드와 헨드릭스 감독인 내조선한 이래 함께 불철주야 경쟁하지 않으며 언제나 협력하여 온 전통을 이어 1926년에 합동연구방침위를 세웠던 것인데, 실상은 1919년에 그 방침은 결정이 되어 있다가 1926년에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중요한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미국은 가츠라=태프트 밀약으로 1905년에 체결하였고, 을사늑약도 그러하다.
하여, 미국은 서구 제국중 처음으로 공사관을 철수한다. 더욱 괘씸한건 유리완 수호통상조규를 맺어놓고 일본과는 이중밀약을 맺어놓고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딸 ㅕㅇ애인 앨리슬 한국에 파견하고 우린 초청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는 중에도 마치 우릴 위할 것인양 행동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 정부와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는 정부간의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에는 미정부가 아니라 미정부의 입장에 반하는 왜의 불교국화와 신도국화에 반대하여 기독교화하려는 치열한 투쟁이 왜와 미 선교사 사이에 벌어졋다는 것을 의미한다.
1905년 ~ 1945년.
이 40년의 간극에 미 북남 여/남 선교부가 있었다.
이들은 대한인들과 함께 민간 한미감리회동맹을 맺고 함께 왜에 대적하여 싸운다. 왜적의 눈에 보이는건 한국인만 보이지만 실제는 배후에 자신의 동맹국가인 미국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처치곤란한 이 눈의 가시에 왜는 35년간 눈을 찔려가며 살았다.
정리하면,
1905년 이 후 1907년 부터 실제적인 한미 정부간 동맹은 사라지고, 감리회를 종교동맹으로 한미관계는 유지되었던 바 이 동맹의 승전보가 1945년의 광복으로 나타남이다.
1940년 미선교사들의 강제출국은 왜가 멸망으로 가는 길목에 었던 해프닝이고, 광복후 다시 내한한 선교사들은 새대한민국 기독교국가 건설에 그 동안 준비되어 있던 감리교회 역량을 투입하고 6.25가 발발하자 먼저 선제적으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을 파병케하여 대한민국을 수호하게 하였던 것으로 1950년 한미군사동맹의 맹아였으며, 대한민국을 지켯으나 이젠 대한민국의 국격과 국력이 더하여 성장했으므로 미군의 존재에 대한 위치를 재조정 할 때가 되었고 이는 이미 의논되며 실행중이다.
하여,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성립은 1905년 이후 서로가 바래어 온 소망의 결집체이며, 이는 1931년 자치가 아닌 미 선교부가 파송하여 한국에 있던 여선교사 13명에 대한 목사안수로는 미감리회가 한국감리회와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 자치가 아닌 대등한 위치로 확인시킨 사건 여성목사 안수를 주목.
자치였는데, 미국의 여선교사들이 안수를 기독교조선감리회 에서 안수를 받는다?
이게 도대체 성립이 되는 논리가 아니다.
뭐 언제는 자치가 아니라, 억압이었는가?
언제나 대등했었고, 그들도 하루라도 서둘러 대한인의 상황이 나아지길 바라 감리교회 평신도나 목회자들을 쉼없이 인재를 발굴하여 미국이나 일본으로 유학보내 실력 양성에 나서게 했던 것이 아닌가?
언제 그들이 우릴 억압이나 구속했던 바도 없는데 자치네 독립이네 하는건 스스로의 위치/위상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좌요.
다만, 합동의 실제화가 좀 늦어졌던건 미국에서의 자신들의 상태인 남북전쟁시의 앙금을 다 걷어내지 못한 본국 미 북/남 감리회의 한계로 인함이지 우리의 문제는 전혀 아니었다는 점도 간과한것 같다.
재산/재정권은 안주고 자치만 시켯으니 반만 인정한것 아니냐는 바보들이 있다.
우린 사실상 아무도 인정하고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강제 침략을 당해 일본에게 있은것 없는 것 다 빼앗기고 있는 입장에서 재산/재정에 관한 권한을 주면 왜놈들이 무슨 짓으로 빼앗아 갈지 모르는데 그걸 그냥 너 먹어하고 넘겨주었으면 미 선교사들이 바보다.
미 북남 감리교회는 대한민국 건국의 공동 수행자이며 거룩한 친구들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할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임정을 국가로 승인만 해줬어도 그 승인을 받기 위해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싸우고 또 싸웟어도 이루어내지 못한 일의 공동수행자요 뜻을 같이 한 친구였다니 우린 이 친구에 대해 어찌 해야 하냐고 묻는 것이다.
기독교는 제국주의 첨병이라 축출해야 하는가? 아님, 도와줘서 고마우니 굽신 거려야 는가?
한미는 남북은 북미관계에 있어 곧, 남/북/미에 있어 한국감리교회와 미국감리교회는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답을 찾아야만 한다.
답 무엇?
분열되었던 미국의 북남 감리교회를 대한인들이 합동시켜 통일시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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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기
이 글은 유은식 목사님의 글에 대한 답신입니다.
민관기
서울 경기는 자신이 감리사
강원도는 무스 선교사
충청도는 우리암 선교사
평양은 무어 선교사가 파송되어 있었다.
무스를 기억하세요.
이현석
사실, 엄청 어려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시면 ㅡ.ㅡ
민관기
어렵기보단 좀 무겁.
현종서
미선교사들은 시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달랐다. 미선교사들은 한국인을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사랑했다. 미 정치인들이 선교사들의 말을 안듣다가 일본의 하와이 공격을 당했던 것이다. 그 후로도 태평양 전쟁을 하면서 만은 미국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래를 선견하며 권고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권면을 잘 들어야 한다.1903 원산 부흥운동 1907년도 평양 부흥운동을 경험하면서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 성도들을 자기들과 다르지 않은 형제 자매로 인정하였던 것이고, 더 나아가 한국은 동양선교와 세게선교에 기여할 수 있는 선교의 동지로 보았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미국교회 다음으로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제일 많이 파송하고 있다. ( 한국과의 통상외교관계를 무시한 가츠라 테프트 밀약은 영적으로 무지한 미 대통령의 실수였다.)
민관기
2020-12-05 21:07
자치하고 싶어서 환장했었나?
미 감리회가 막 억압하니까 독립을 그렇게 소망했었나?
누가 구속이라도 했나?
그런게 아니다.
감리회가 북/남으로 갈라져 들어와 선교하니 선교역량에 집중이 잘 안되는 현상이 나타날것은 당연지사.
하여 북/감은 남/감에게 사역자 김흥순, 백헬렌 파송, 선교지 한국은행 자리 소개, 강원도, 개성, 해주 등을 선교구역으로 양보하고 신학교 공동운영 등을 하여 선교의 확장과 효율을 위한 필요가 요구되어 북/남감리교회의 합동을 1910년대부터 진작에 요구하였으나 미국 내의 상황에 따라 반대를 반복하다 1926년 합동방침연구위가 구성되어,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가 성립된 것일 뿐이지 무슨 1930년이 되어서야 비로서 없던 능력이 생겨서 교단이 합동한것이 아닌데...
게다가 제일 중요한 것은 자치가 아니라 합동이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고, 마치 무슨 누가 구속이라도 했나 왜 자치라는 말을 당치도 않게 선호하는지 모르겠다.
아니니까
지금까지의 세월동안 자치된줄로 알고 마치 미감리회가 한국감리회를 억압, 구속, 압박, 제국주의 참략 선봉, 정교분리로 민족의식 좀 먹음, 내세 편향으로 사회의 아편 등에서 벗어나 뭐가 된줄로 착각하게 만든 것.
아니, 근데 1930년 이후 뭐가 달라졌나요?
을 10년 앞두고가 제목이다.
의미를 쓰겠다.
댓글도 품앗이인데, 美친 犬이라서 댓글을 달아드리기도 어렵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