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돌에 두 번 넘어진 아브라함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0-11-09 16:41
조회
868
(설교 동영상: 유튜브)
<창세기 20:1-7, 요한복음 12:6>
1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2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4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7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1. 시작하는 말
성령 충만한 목사도 실수나 잘못을 할 때가 있고, 통치자나 대가나 유능한 사람도 실수나 잘못을 할 때가 있고, 명장도 실수나 패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유한하고 부족한 피조물이므로 실수나 잘못, 실패나 패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남의 실수나 잘못, 실패와 패배에 대해 비방을 능사로 삼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실수나 잘못, 실패와 패배 때문에 자학하거나 자괴지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 걸려 넘어진 돌에 두 번, 세 번, 넘어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 걸려 넘어진 돌을 유념하여 두 번 다시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남이 걸려 넘어진 돌을 보고, 그 돌을 피하든지 뛰어넘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실수와 잘못, 그리고 도우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은 오래 살던 마므레를 떠나 그랄에 거주하면서 자기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는 바뀐 환경과 주변 정세에 관심을 가지면서, 아내를 탐내는 사람들로 인해 목숨과 재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이라도 살고,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비열한 생각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앙적 사고 대신에 이기적인 자기 위주와 자기본위의 사고를 하기 시작하니까, 사랑스러운 반려자가 가장 큰 위기의 조건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 단추도 다 잘못 끼우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자기 위주와 자기본위의 생각은 계속 잘못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에겐 논리적 사고요 합리적 생각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첫 단추가 둘째 단춧구멍에 잘못 끼워진 것을 못 보면, 그 아래는 순서대로 정확하게 끼워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칭조주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든 생각과 이념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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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아브라함에게는 위기도 없었고, 아내 사라가 변심한 것도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사라를 빼앗아 가려고 몰려온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자기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해 지레 겁을 먹은 것과 자기만 살아야 되겠다는 비열하고도 이기적인 생각이 심각한 불행을 초래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했어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았으므로, 자기만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라는 말을 들은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빼앗긴 아내를 생각하나, 머리를 쓴 자신을 생각하나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자기만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는 이기적인 자기 위주와 자기본위의 생각은 남들만 괴롭히는 게 아니라, 결국엔 자신까지도 번민과 모멸감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실수와 잘못, 그리고 그로 인한 번민과 고통은 두 번째입니다. 창세기 12:10 이하를 보면, 기근을 만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대신에, 애굽을 의지하려고 애굽에 들어가면서 아내 사라에게는 누이라고 하라고 시켰습니다. 결국 아내를 애굽 왕에게 빼앗겼다가, 아슬아슬한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되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같은 돌에 두 번이나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돌은 이기적인 자기 위주와 자기본위의 거짓되고 비열한 생각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믿음의 생각과 믿음의 행동이 절실할 때, 믿음이 아닌 자신만의 안전을 도모했고, 자신만의 이기적 생각과 판단을 따랐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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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것은, 같은 돌에 두 번 넘어진 것이 갑작스럽게 닥쳐서 벌어진 불상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평소에 계획한 대로 한 것입니다. 창세기 20:10 이하를 보면,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받은 사람이 어쩌면 이토록 이기적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겠다고 부르셨으면, 믿음의 조상다운 인격과 처신을 위해 자신을 교육하고 훈련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같은 돌에 두 번이나 넘어집니까?
근래에 우리나라에 대형 사고가 빈번히 발생해 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끔찍한 사고가 하늘과 땅과 지하와 바다에서 발생했습니다. 그것도 천재가 아닌 인재였다는 데에 더욱 애도와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대형 사고는 황금만능주의나 대충주의나 인명 경시 풍조나 안전 불감증이나 무책임이라는 같은 돌에 번번이 넘어진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현대인들이 반복해서 가장 많이 걸려 넘어지는 돌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던 주님의 제자단의 재무부장으로서 제자단의 돈을 몰래 훔치곤 하던 가룟 유다와 같은 물욕입니다.
아브라함은 같은 돌에 두 번이나 넘어지는 잘못을 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몹시 괴로워하며 참담해하는 아브라함을 즉시 돕지 않으셨습니다.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불신앙적인 비열한 생각과 이기적인 자기 위주와 자기본위의 생각의 워험성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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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그냥 내버려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괴로움이 극에 달한 밤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라를 데려간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셨습니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아직 사라와 관계하지 않은 아비멜렉은,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아비멜렉이, 자신의 순수한 동기와 무죄를 변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왕이 유혹에 넘어간 일에 책임이 있습니다.
남들에게 유혹과 타락의 동기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노와 절망과 불신의 동기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증오와 살인의 동기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이나 즐거움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17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아비멜렉의 변명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 은혜는 지옥으로 끄는 죄를 사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죄악을 막아 주시는 은혜도 그에 못지않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인들로 온갖 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두심으로써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의인들의 범죄는 반드시 막아 주십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죄악을 막아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손길을 보고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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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의 범죄를 막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0:8을 보면, 혼비백산한 아비멜렉 왕이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신하를 불러 자초지종을 털어놓았고, 모든 신하가 두려워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돌려보내고, 미안한 마음에 후한 선물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의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시고, 그를 깨닫게 한 뒤에 도와주시고, 여전히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인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에 놀라운 의미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3. 맺음말
성령 충만한 목사도, 통치자나 유능한 사람도 실수나 잘못을 할 때가 있고, 명장도 실수나 패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유한하고 부족한 피조물이므로 실수나 잘못, 실패나 패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교만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실수나 실패 때문에 자학하거나 자괴지심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한 번 걸려 넘어진 돌에 두 번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유념해야 합니다. 한 번 걸려 넘어진 돌에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걸려 넘어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설령 반복해서 같은 돌에 넘어졌더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찾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으켜 주십니다.
설교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창세기 20:1-7, 요한복음 12:6>
1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2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4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7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1. 시작하는 말
성령 충만한 목사도 실수나 잘못을 할 때가 있고, 통치자나 대가나 유능한 사람도 실수나 잘못을 할 때가 있고, 명장도 실수나 패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유한하고 부족한 피조물이므로 실수나 잘못, 실패나 패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남의 실수나 잘못, 실패와 패배에 대해 비방을 능사로 삼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실수나 잘못, 실패와 패배 때문에 자학하거나 자괴지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 걸려 넘어진 돌에 두 번, 세 번, 넘어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 걸려 넘어진 돌을 유념하여 두 번 다시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남이 걸려 넘어진 돌을 보고, 그 돌을 피하든지 뛰어넘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실수와 잘못, 그리고 도우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은 오래 살던 마므레를 떠나 그랄에 거주하면서 자기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는 바뀐 환경과 주변 정세에 관심을 가지면서, 아내를 탐내는 사람들로 인해 목숨과 재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이라도 살고,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비열한 생각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앙적 사고 대신에 이기적인 자기 위주와 자기본위의 사고를 하기 시작하니까, 사랑스러운 반려자가 가장 큰 위기의 조건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 단추도 다 잘못 끼우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자기 위주와 자기본위의 생각은 계속 잘못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에겐 논리적 사고요 합리적 생각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첫 단추가 둘째 단춧구멍에 잘못 끼워진 것을 못 보면, 그 아래는 순서대로 정확하게 끼워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칭조주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든 생각과 이념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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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아브라함에게는 위기도 없었고, 아내 사라가 변심한 것도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사라를 빼앗아 가려고 몰려온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자기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해 지레 겁을 먹은 것과 자기만 살아야 되겠다는 비열하고도 이기적인 생각이 심각한 불행을 초래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했어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았으므로, 자기만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라는 말을 들은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빼앗긴 아내를 생각하나, 머리를 쓴 자신을 생각하나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자기만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는 이기적인 자기 위주와 자기본위의 생각은 남들만 괴롭히는 게 아니라, 결국엔 자신까지도 번민과 모멸감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실수와 잘못, 그리고 그로 인한 번민과 고통은 두 번째입니다. 창세기 12:10 이하를 보면, 기근을 만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대신에, 애굽을 의지하려고 애굽에 들어가면서 아내 사라에게는 누이라고 하라고 시켰습니다. 결국 아내를 애굽 왕에게 빼앗겼다가, 아슬아슬한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되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같은 돌에 두 번이나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돌은 이기적인 자기 위주와 자기본위의 거짓되고 비열한 생각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믿음의 생각과 믿음의 행동이 절실할 때, 믿음이 아닌 자신만의 안전을 도모했고, 자신만의 이기적 생각과 판단을 따랐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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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것은, 같은 돌에 두 번 넘어진 것이 갑작스럽게 닥쳐서 벌어진 불상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평소에 계획한 대로 한 것입니다. 창세기 20:10 이하를 보면,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받은 사람이 어쩌면 이토록 이기적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겠다고 부르셨으면, 믿음의 조상다운 인격과 처신을 위해 자신을 교육하고 훈련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같은 돌에 두 번이나 넘어집니까?
근래에 우리나라에 대형 사고가 빈번히 발생해 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끔찍한 사고가 하늘과 땅과 지하와 바다에서 발생했습니다. 그것도 천재가 아닌 인재였다는 데에 더욱 애도와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대형 사고는 황금만능주의나 대충주의나 인명 경시 풍조나 안전 불감증이나 무책임이라는 같은 돌에 번번이 넘어진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현대인들이 반복해서 가장 많이 걸려 넘어지는 돌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던 주님의 제자단의 재무부장으로서 제자단의 돈을 몰래 훔치곤 하던 가룟 유다와 같은 물욕입니다.
아브라함은 같은 돌에 두 번이나 넘어지는 잘못을 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몹시 괴로워하며 참담해하는 아브라함을 즉시 돕지 않으셨습니다.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불신앙적인 비열한 생각과 이기적인 자기 위주와 자기본위의 생각의 워험성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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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그냥 내버려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괴로움이 극에 달한 밤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라를 데려간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셨습니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아직 사라와 관계하지 않은 아비멜렉은,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아비멜렉이, 자신의 순수한 동기와 무죄를 변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왕이 유혹에 넘어간 일에 책임이 있습니다.
남들에게 유혹과 타락의 동기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노와 절망과 불신의 동기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증오와 살인의 동기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이나 즐거움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17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아비멜렉의 변명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 은혜는 지옥으로 끄는 죄를 사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죄악을 막아 주시는 은혜도 그에 못지않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인들로 온갖 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두심으로써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의인들의 범죄는 반드시 막아 주십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죄악을 막아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손길을 보고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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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의 범죄를 막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0:8을 보면, 혼비백산한 아비멜렉 왕이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신하를 불러 자초지종을 털어놓았고, 모든 신하가 두려워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돌려보내고, 미안한 마음에 후한 선물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의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시고, 그를 깨닫게 한 뒤에 도와주시고, 여전히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인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에 놀라운 의미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3. 맺음말
성령 충만한 목사도, 통치자나 유능한 사람도 실수나 잘못을 할 때가 있고, 명장도 실수나 패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유한하고 부족한 피조물이므로 실수나 잘못, 실패나 패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교만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실수나 실패 때문에 자학하거나 자괴지심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한 번 걸려 넘어진 돌에 두 번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유념해야 합니다. 한 번 걸려 넘어진 돌에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걸려 넘어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설령 반복해서 같은 돌에 넘어졌더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찾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으켜 주십니다.
설교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술주정뱅이가 반복해서 넘어지는 돌은 술 취함이고, 권력자가 반복해서 넘어지는 돌은 권력 남용이고, 거짓말쟁이가 반복해서 넘어지는 돌은 거짓말이고, 유력한 자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반복해서 넘어지는 돌은 교만이고, 학자와 신학자와 교수들이 반복해서 넘어지는 돌은 표절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반복해서 넘어지는 공통적인 돌은 탐심 곧 우상 숭배이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나 권력이나 돈이나 이념 등의 유무형의 것을 하나님처럼 믿고 섬기는 것이다. 그 목적은 탐심 충족이다.
마귀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또 마귀의 권세에 속한 자들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화인을 맞아 사라져 없습니다. 마귀는 지혜롭습니다. 지능은 그리 낮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귀에 권세에 속한 자들도 명철이 없습니다. 표절도 도적질입니다. 남의 노력을 훔치는거죠. 학위를 그럴싸한데, 그들이 학위를 복사에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걸 권장합니다. 탐심은 돈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눈에 보이지 않고 바라지도 않고요...
회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겁니다. 죄의 열매를 돌이키는 것과 차이가 있고, 회개 없이는 용서가 없는데, 이게 쉽지 않은거 같습니다.
필자의 설교에 관심을 보이시고, 관련하여 의견을 표하셔서 감사합니다.
감리교회의 감독 선거도 끝났고, 미국 대통령 선거도 끝났다. 모든 선거에서 사람들이 반복해서 넘어지는 돌은 여론 조작, 돈 살포, 학연과 지연 등의 파벌 조성, 못 지키거나 안 지킬 선심 공약, 감투 흥정, 부정 투표와 부정 개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