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중요 성구 6회(마 3:11-12):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성령과 불 세례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6-03-29 09:44
조회
1550
이어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11】[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하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는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목적이 죄 사함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막 1:4)를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이](ὁ δὲ ὀπίσω μου)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세례 요한보다 나중이라는 뜻이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ἰσχυρότερός μου ἐστίν)는 세례 요한이 비교한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의 선포는 그 자신과 다른 인간과의 상대적 비교가 아니라,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절대적 비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은 주로 ‘본질적이며 본래적인 힘이 더 많다’를 의미하는 이스퀴로테로스(ἰσχυρότερός: 엡 6:10, 벧전 4:11)가 사용된 것으로도 뒷받침된다.
이 세례 요한의 말은 당시의 민중이 세례 요한을 혹시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눅 3:15)에 대한 단적인 부인이라는 점에서 뜻깊은 선포라 할 수 있다. 실상,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분명하게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언하였다(요 1:19-20). 그는 세상의 인기나 존경이나 추종에 대해 초연한 참 예언자이었고, 세상의 흐름과 반응에 상관없이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가 누가복음 3:6에는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되어 있고, 마가복음 1:7에는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되어 있다. “주인의 신[휘포데마타, ὑποδήματα: ‘샌들’, ‘위가 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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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가죽 신’]의 끈을 매고 풀며, 그 신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하급 노예가 하는 천한 일이었다”(R. Earle).①
세례 요한의 고백은, 그 자신은 오시는 그리스도께 비한다면 그분의 신발을 들거나 신발 끈을 푸는 노예의 자격조차 없다는 뜻이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의 숭앙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얼마나 겸손한 인물이며 자신을 아는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요 3:30).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라고 칭찬하신 까닭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칭찬인가 함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누구의 칭찬인가 함이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는 뒤이어 오실 메시아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 세례는 외적 형식이나, 성령 세례는 내적 변화이고; 물 세례는 인간적 의식이나, 성령 세례는 신적 의식이며; 물 세례는 예비적인 것이나, 성령 세례는 완전한 것이다. 물 세례는 죄를 떠날 것을 호소하는 도덕적 정화를 상징하나, 성령 세례는 구원과 심령 및 생활의 성결의 시작이다. 이는 성령의 내주에 의한 내‧외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부어지는 것은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사 44:3, 겔 36:25-27, 욜 2:28). 구약 위경의 「열두 족장의 유훈」 중의 레위 18장 11절에는 메시아가 성령을 준다고 하는 언급이 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함은 이와 같은 배경에 기초하고 있고,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고하는 것이었다”(山口 昇).}(막 1:9의 주석).
본래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신(야웨의 신, 또는 거룩한 성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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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Earle, 마태복음(비콘 성경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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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예언자, 사사, 군인, 왕, 심지어 일꾼 등에게 은사로 주어졌다(출 31:3, 삿 3:10, 6:34, 사 11:2, 42:1, 59:21, 61:1, 미 3:8).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것이며 제한적인 것이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성령 강림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획기적인 사건이 바로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 가량의 성도들에게 발생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다(행 1:15, 2:1-4).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의 [불](퓌리, πυρί) 또는 ‘불꽃’(살후 1:7)은 신(사 10:17. 비교: 계 1:14, 2:18, 19:12) 또는 신의 현현을 묘사하는 것이다(출 3:2, 사 29:6, 66:15, 단 7:9, 행 7:30). 특히, 불은 하나님의 심판과 파멸을 나타낼 때에 사용되었다(사 29:6, 31:9, 66:15, 16, 욜 1:19, 암 7:4, 겔 20:47, 습 1:18, 3:8, 말 3:2, 4:1). 데살로니가후서 1:7에는 최후 심판을 위해 주께서 불꽃 중에 재림하시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불은 정결의 관념을 나타내기도 하였다(슥 13:9, 사 6:6-7, 벧전 1:7). 특히, 이사야 4:4에서는 정결과 심판과 불이 연결되어 있다.
실로,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 16:16-17, 고전 12:3. 참조: 고전 12:9)은 성령의 세례를 통해 믿고 구원받아 성결해지지만, 믿지도 영접하지도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 것이다(요 3:18-19의 주석을 보라).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과 심판에 대해, 세례 요한은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선포하였다.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영접하는 자 곧 믿는 자는 구원하시고, 그렇지 않은 자는 심판하시는 것을 타작에 비유한 것이다(말 3:3, 4:1, 에녹서 62:2, 27, 63:10). 실상,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 자체가 심판이다. 사도 요한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라고 하였다.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년), pp. 129-132.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4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는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목적이 죄 사함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막 1:4)를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이](ὁ δὲ ὀπίσω μου)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세례 요한보다 나중이라는 뜻이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ἰσχυρότερός μου ἐστίν)는 세례 요한이 비교한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의 선포는 그 자신과 다른 인간과의 상대적 비교가 아니라,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절대적 비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은 주로 ‘본질적이며 본래적인 힘이 더 많다’를 의미하는 이스퀴로테로스(ἰσχυρότερός: 엡 6:10, 벧전 4:11)가 사용된 것으로도 뒷받침된다.
이 세례 요한의 말은 당시의 민중이 세례 요한을 혹시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눅 3:15)에 대한 단적인 부인이라는 점에서 뜻깊은 선포라 할 수 있다. 실상,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분명하게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언하였다(요 1:19-20). 그는 세상의 인기나 존경이나 추종에 대해 초연한 참 예언자이었고, 세상의 흐름과 반응에 상관없이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가 누가복음 3:6에는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되어 있고, 마가복음 1:7에는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되어 있다. “주인의 신[휘포데마타, ὑποδήματα: ‘샌들’, ‘위가 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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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가죽 신’]의 끈을 매고 풀며, 그 신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하급 노예가 하는 천한 일이었다”(R. Earle).①
세례 요한의 고백은, 그 자신은 오시는 그리스도께 비한다면 그분의 신발을 들거나 신발 끈을 푸는 노예의 자격조차 없다는 뜻이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의 숭앙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얼마나 겸손한 인물이며 자신을 아는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요 3:30).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라고 칭찬하신 까닭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칭찬인가 함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누구의 칭찬인가 함이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는 뒤이어 오실 메시아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 세례는 외적 형식이나, 성령 세례는 내적 변화이고; 물 세례는 인간적 의식이나, 성령 세례는 신적 의식이며; 물 세례는 예비적인 것이나, 성령 세례는 완전한 것이다. 물 세례는 죄를 떠날 것을 호소하는 도덕적 정화를 상징하나, 성령 세례는 구원과 심령 및 생활의 성결의 시작이다. 이는 성령의 내주에 의한 내‧외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부어지는 것은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사 44:3, 겔 36:25-27, 욜 2:28). 구약 위경의 「열두 족장의 유훈」 중의 레위 18장 11절에는 메시아가 성령을 준다고 하는 언급이 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함은 이와 같은 배경에 기초하고 있고,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고하는 것이었다”(山口 昇).}(막 1:9의 주석).
본래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신(야웨의 신, 또는 거룩한 성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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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예언자, 사사, 군인, 왕, 심지어 일꾼 등에게 은사로 주어졌다(출 31:3, 삿 3:10, 6:34, 사 11:2, 42:1, 59:21, 61:1, 미 3:8).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것이며 제한적인 것이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성령 강림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획기적인 사건이 바로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 가량의 성도들에게 발생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다(행 1:15, 2:1-4).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의 [불](퓌리, πυρί) 또는 ‘불꽃’(살후 1:7)은 신(사 10:17. 비교: 계 1:14, 2:18, 19:12) 또는 신의 현현을 묘사하는 것이다(출 3:2, 사 29:6, 66:15, 단 7:9, 행 7:30). 특히, 불은 하나님의 심판과 파멸을 나타낼 때에 사용되었다(사 29:6, 31:9, 66:15, 16, 욜 1:19, 암 7:4, 겔 20:47, 습 1:18, 3:8, 말 3:2, 4:1). 데살로니가후서 1:7에는 최후 심판을 위해 주께서 불꽃 중에 재림하시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불은 정결의 관념을 나타내기도 하였다(슥 13:9, 사 6:6-7, 벧전 1:7). 특히, 이사야 4:4에서는 정결과 심판과 불이 연결되어 있다.
실로,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 16:16-17, 고전 12:3. 참조: 고전 12:9)은 성령의 세례를 통해 믿고 구원받아 성결해지지만, 믿지도 영접하지도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 것이다(요 3:18-19의 주석을 보라).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과 심판에 대해, 세례 요한은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선포하였다.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영접하는 자 곧 믿는 자는 구원하시고, 그렇지 않은 자는 심판하시는 것을 타작에 비유한 것이다(말 3:3, 4:1, 에녹서 62:2, 27, 63:10). 실상,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 자체가 심판이다. 사도 요한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라고 하였다.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년), pp. 129-132.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4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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