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29-34(설교: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의 주경신학적 연구
Author
최세창
Date
2025-04-2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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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15:20-28)에서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된다는 것을 설명한 바울은, 여기서 갑자기 부활에 대한 논증으로 되돌아가 부활 신앙과 현실 생활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용은 15:19과 직결되고, 앞의 내용은 삽화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바울은 이 부분을,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로 시작하고 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οἱ βαπτιζόμενοι ὑπὲρ τών νεκρών)은 대단한 난해구로 수많은 해석이 있다. 로벋슨과 플루머(A. Robertson and A. Plummer)에 의하면, 호슬리(J. W. Horsley)는 36가지의 해석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 중에 중요한 해석들로 (1) 휘페르(ὑπὲρ)를 ‘~을 대신하여’로 해석하여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신자를 위해 산 자가 대신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① (2) 신자의 일반적인 세례로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는 세례라는 설(“Chrysostom”,② J. Calvin, 이상근), (3)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소망을 가지고 세례받은 자들’의 생략 구문이라는 설(A. Barnes), (4) 휘페르(ὑπὲρ)를 ‘~의 위에서’로 해석하여, 죽은 자들(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Luther, Ewald”,③ F. W. Grosheide), (5) 산 자가 죽은 자를 대신하는 습관을 좇아, 급사하는 바람에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을 대신하여 그의 무덤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Chrysostom, Ambrose),④ (6) 신자가 죽을 때에 살아 있는 자(가족)를 위해 기도하며 부탁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믿은 자들이 세례받는 것이라는 설(“Findlay”,⑤ A. Robertson and A. Plummer, 김용옥), (7) 죽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C. R. Erdman), (8) 물로 세례를 받지 아니하고, 순교함으로써 피의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눅 12:50, 막 10:38),⑥ (9) 죽은 성도의 몸을 물에 담그는, 세례 의식이 아닌 풍속이라는 설(Beza),⑦ (10) 병들어 거의 죽게 된 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라는 설(Holstein, Kling),⑧ (11) 새 신자가 입교하여, 이미 죽은 성도의 자리를 계승하여 세례받는 것이라는 설(Olshausen),⑨ (12) 고린도 교회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세례를 받은 것이라는 설(Atto),⑩ (13) 신자이었거나, 신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을 위해 신자가 대신 세례받는 것이거나, 혹은 신자가 되기 전에 죽은 가족들을 위한 가족들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설(G. D. Fee), (14) 모든 신자의 세례에 대한 일반적 상징으로써 고려하고 있는 것이며, 그 세례는 우리를 사망과 부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라는 설(A. Clarke, D. S. Metz, R. C. H. Lenski)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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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 Alford, “Meyer, Edward, De Wette, Stanley”(in 이상근), C. Hodge, T. C. Craig, W. Barclay, W. Carter, C. K. Barrett, W. F. Orr and J. A. Walther, p. 335, M. E. Thrall, “Parry”(in L. Morris), L. Morris, 內村鑑三.
2) in 이상근.
3) in 이상근. C. Hodge는 때때로 부활을 믿는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4) in J. Calvin.
5) in 김용옥.
6) “Godet, Flatt, Lightfoot”(in 이상근).
7) 상동.
8) 상동.
9) 상동.
10)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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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은 가장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터틀리안(Tertullian)은 초대 교회에서 이미 죽은 자를 대신하여 세례받은 사실이 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이교도들 사이에서만 행해졌을 것이다”(A. Robertson and A. Plummer).⑪ 또한, 대리 세례란 다른 성경적 근거가 없고, 신학적으로도 타당성이 없으므로 (1)설과 (5)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2)설과 (3)설은 부활을 부정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논증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아 타당성이 없다. (4)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휘페르(ὑπὲρ)가 ‘~의 위에서’로 쓰이지 않았다는 점과 그러한 관습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없다(C. K. Barrett, W. H. Mare, “H. A. W. Meyer”⑫)는 점을 미루어 받아들일 수 없다. (6)설부터 (12)설은 원문에 대한 비약적인 해석이거나 동떨어진 해석이다.
나머지 (13설과 (14)설을 참조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세례’(1:13의 주석을 보라.)를 아는 신자가, 이미 죽은 자들-신자이든 불신자이든-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관례는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그러한 불멸을 믿는 신앙에 관련되는 것이다”(Berk., fn., ad loc.).⑬ 이 경우에 그들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신앙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 중에는 영혼 불멸이나 육체의 부활이나 환생 또는 관념(‘정의의 승리’, ‘죽음을 초월한 의식’. ‘신앙사건’)으로 이해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어떠한 사상적 동기나 어떠한 실제적 동기로 죽은 자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게 하는 효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미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 세례받는 것으로 인해 부활한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다만 그는 부활을 논증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요소에만 관심을 갖는다. 즉,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무엇을 하겠느냐(티 포이에수신, τί ποιήσουσιν)는 “‘그들이 무엇에 의지하겠느냐?’ 혹은 ‘그들이 무슨 소득이 있겠느냐?’를 의미할 수도 있다”(A. Robertson and A. Plummer). 또한, “그들이 자신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느냐?”(C. Hodge)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는 같은 의미를 강조하는 반문이다.
이어서 바울은 30절 이하에서 주로 자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부활의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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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 K. Barrett: Lietzmann은 Chrysostom의 다음의 구절을 인용한다. 어떤 세례 문답자가 그들(마르시온주의자들) 가운데서 죽을 때,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의 침대 밑에 감추고 죽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말을 걸고 그가 세례받기를 원하는지를 묻는다. 그 때에 그가 대답하지 않는 대신에 밑에 숨겨진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세례받기를 원한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그에게 세례를 준다.
C. K. Barrett는 “그리스의 종교적인 관습들에도 밀접한 전례들은 아니지만, 그러한 전례들이 있었다.…고린토도전서를 제외하면 이 같은 의식이 1세기의 50년대만큼 일찍이 행해졌다는 증거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의식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12) in W. H. Mare.
13) in D. S. Me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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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9:1, 15:8, 행 9:1-9, 22:6-16, 26:12-18), 주님의 사도가 되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곧 복음을 전파하느라고 겪은 핍박과 환난(4:9, 고후 1:8, 9, 4:10, 11:23-27, 롬 8:35-36, 골 1:24)을 가리키는 것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주님도 부활하시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주님의 생애와 죽음에서 성취된 모든 것도 헛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다(15:12-19의 주석을 보라).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그러한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기꺼이 언제나 위험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갱생(更生: 復活)의 대희망이 있기 때문이다”(內村鑑三).
키케로[Cicero: 주전 106-43년.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는 같은 말을 영혼의 불멸론에 응용하였다. “미래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기대가 말살된다면, 노동과 위험을 무릅쓰는 미친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⑭ 물론, “보상을 바라는 것은 덕행을 위한 가장 고상한 동기는 아니다. 그러나 보상을 바라는 것이 관능적인 쾌락이나 재정적 이익과 같은 저급한 것이 아니라면, 보상을 바라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비도덕적이 아니다”(A. Robertson and A. Plummer).
이어서 바울은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는 1:2의 주석을 보라.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카위케신, καύχησιν: 5:6의 주석을 보라.)을 두고는, ‘내가 너희를 확실히 자랑하고 기뻐하는 만큼’을 뜻한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의 결실인 교인들(교회)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였다(고후 1:14, 7:14, 빌 4:1, 살전 2:19). 그러므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단언한 것이다. 즉, 복음 선교와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을 위해서 언제나 외적으로는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고(4:9, 고후 1:8-9, 4:10, 11:23-27), 내적으로는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서 자아를 죽이는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갈 5:16-17. 참조: 9:16, 27). 실로 바울은 순교자적 삶을 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와 능력의 결과라고 하지 않고, 주 안에서 가진바라고 고백하는 데서 우리는 그의 사도로서의 겸손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그는 【32】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라고 하였다.
범인처럼은 3:3의 “사람을 따라”의 주석을 보라.
에베소(저자의 「에베소서」의 총론을 보라.)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에 대해 문자적으로 맹수와 싸웠으나 기적적으로 구출된 사건을 말한 한 것이라는 설⑮과 맹수와 같은 사람들에게 받은 핍박과 박해를 말한 것이라는 설⑯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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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Cicero, Tues. Disp. 1:15”(in 이상근).
15) J. Calvin, A. Barnes. “Theodore, Ambrosiaster, Erasmus, Luther, Lightfoot, Godet”(in 이상근).
16) H. Alford, “Chrysostom, Tertullian”(in A. Clarke), T. T. Shore, “Beza, Grotius, De Wette, Meyer, Findlay”(in 이상근), J. Wesley, M. Henry, A. Clarke, C. Hodge, A. Robertson and A. Plummer, R. C. H. Lenski, F. W. Grosheide, W. Barclay, W. Carter, C. K. Barrett, D. S. Metz, M. E. Thrall, W. H. Mare, T. C. Craig, L. Morris, C. R. Erdman, S. L. Johnson, G. D. Fee, W. F. Orr and J. A. Walther, p. 338, 黑崎幸吉, 內村鑑三, 박윤선 김용옥,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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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를 지지하는 반즈(A. Barnes)는 “일반적으로 로마인들과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범죄자들로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과 싸우게 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러한 경우에 범죄자들이 도망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또 하나의 사형 선고 형식이다.…누가가 사도행전에 이 사건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실제의 사건이라는 생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단순한 침묵이란 반대는 아니다. 누가가 바울이 견뎌 낸 모든 위험을 다 기록할 계획을 세웠다고 추측할 이유가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바울이 견뎌 낸 여느 사건들도 기록한 누가가 그런 놀라운 사건이 있었는데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자연스럽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후자 곧 비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맹수와 싸워서 목숨을 건진 채, 도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바울이 에베소에 머문 것은 정황상으로 매우 부합되지만, 사도행전에는 그러한 싸움에 관한 언급이 없다.…바울이 자신의 많은 경험을 말하고 있는 고린도후서 11장에는 그러한 투쟁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셋째, 로마 시민은 투기장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지 않았다”(F. W. Grosheide). 넷째, “히브리와 그리스 문학에서는 바울과 그의 독자들에게 익숙했던 그러한 표현 형식을 사용하였다. 시편에서(22:12, 13, 20, 21) 하나님의 적들은 비슷하게 일컬어졌다.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크레테(그레데) 섬 사람들을 ‘악한 짐승들’이라고 불렀고(딛 1:12), 헤라크리투스(Heraclitus)는 에베소인들을 ‘맹수들’이라고 불렀다”(W. H. Mare). 다섯째, “이그나티우스, Ignatius)는 「로마서」 v. 1에서 (아마 바울로를 모방하여: 그는 사도를 칭찬하였고 고린도전서를 읽었었다.) 비유적으로 사용하였다. ‘시리아로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육지와 바다에서 나는 맹수와 싸우고 있었다.…열 마리 표범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열 마리의 표범이란 일 분대의 군인들을 의미한다’”(C. K. Barrett).
바울이 그 말을 비유적으로 썼다고 해서, 그가 겪은 핍박과 환난의 현실성과 심각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바울이 복음 선교 때문에 겪은 모든 고난은,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에게 던져지는 것보다 못할 것이 없다.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는, 바울이 현세에 국한된 기대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과 진배없는 생각이나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위험을 당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즉, 부활이 없다면,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므로 복음으로 인한 그 모든 핍박과 환난을 견뎌 낸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 22:13(칠십인역)을 인용한 것이다. 이러한 말은 성경 외에서도 발견된다. 다이스만(A. Deissmann)은 “당신들은 곧 끝 날 것이오. 그러니 맘 놓고 마십시오.”라고 기록된, 코스(Cos)의 제국 시대에 속한 크리소고누스의 묘비문을 인용하였다.⑰ 에피큐리안들로 대표되는 이러한 향락적인 생활 태도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러한 도덕적 태만에 대해, 바울은【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고 경고하고 있다.
속지 말라는 6:9의 “미혹을 받지 말라”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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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in C. K. Bar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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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는, 아테네의 극작가 메난더의 희극 ‘타이스’(Mennander, Thais, B.C. 332년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통속적인 격언이기도 하므로, 타이스가 격언을 인용한 것인지, 타이스의 말이 격언이 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아무튼, 바울은 그 어느 하나를 인용한 것이다.
바울의 경고는 부활을 부정하고, 관능적 삶을 추구하는 이교도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고린도 교인들에게(5:10, 10:27)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그들의 생활을 본받느냐, 아니면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답게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본을 보이느냐 함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라고 하였다.
깨어는 에크네파테(ἐκνήφατε)로서 술 취한 상태나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인데, 부정 과거형으로 되어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는 과정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J. A. Bengel), 이교도의 영향을 받아 부활을 부정하며, 따라서 방종한 생활을 하는 교인들을 술 취한 자나 마비된 자로 비유하여 깨어나라고 명하는 것이다.
의(디카이오스, δικαίως)를 행하고는 “올바른 태도로 행하라는 뜻이다”(C. Hodge).
죄를 짓지 말라의 동사(하마르타네테, ἁμαρτάνετε)는 현재 명령법으로 표현된 것인데, 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 대해서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말이다. 즉, 부활을 부정함으로써 야기하고 있는 종교 및 도덕적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는 앞의 명령에 대한 이유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의 원문(ἀγνωσίαν γὰρ θεού τινες ἔχουσιν)을 직역하면,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가진 자들이 있기로’이다. 즉, 단순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자랑스럽게 소유하는 자들이 있다는 뜻으로 매우 강조적인 표현이다. 고린도인들 및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지식과 지혜를 자랑하였으나(1:5, 22),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부활을 부인하고(마 22:29, 막 12:24), 향락 생활을 추구하면서도 오히려 올바른 견해와 생활 태도를 가졌다고 자랑하였다. 바로 그러한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바울이 말한 것이다. 이 바울의 말 속에는 그러한 그들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사도적 사랑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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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고린도전서(서울: 글벗사, 2001, 2판 1쇄), pp. 422-430.
바울은 이 부분을,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로 시작하고 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οἱ βαπτιζόμενοι ὑπὲρ τών νεκρών)은 대단한 난해구로 수많은 해석이 있다. 로벋슨과 플루머(A. Robertson and A. Plummer)에 의하면, 호슬리(J. W. Horsley)는 36가지의 해석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 중에 중요한 해석들로 (1) 휘페르(ὑπὲρ)를 ‘~을 대신하여’로 해석하여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신자를 위해 산 자가 대신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① (2) 신자의 일반적인 세례로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는 세례라는 설(“Chrysostom”,② J. Calvin, 이상근), (3)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소망을 가지고 세례받은 자들’의 생략 구문이라는 설(A. Barnes), (4) 휘페르(ὑπὲρ)를 ‘~의 위에서’로 해석하여, 죽은 자들(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Luther, Ewald”,③ F. W. Grosheide), (5) 산 자가 죽은 자를 대신하는 습관을 좇아, 급사하는 바람에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을 대신하여 그의 무덤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Chrysostom, Ambrose),④ (6) 신자가 죽을 때에 살아 있는 자(가족)를 위해 기도하며 부탁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믿은 자들이 세례받는 것이라는 설(“Findlay”,⑤ A. Robertson and A. Plummer, 김용옥), (7) 죽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C. R. Erdman), (8) 물로 세례를 받지 아니하고, 순교함으로써 피의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눅 12:50, 막 10:38),⑥ (9) 죽은 성도의 몸을 물에 담그는, 세례 의식이 아닌 풍속이라는 설(Beza),⑦ (10) 병들어 거의 죽게 된 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라는 설(Holstein, Kling),⑧ (11) 새 신자가 입교하여, 이미 죽은 성도의 자리를 계승하여 세례받는 것이라는 설(Olshausen),⑨ (12) 고린도 교회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세례를 받은 것이라는 설(Atto),⑩ (13) 신자이었거나, 신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을 위해 신자가 대신 세례받는 것이거나, 혹은 신자가 되기 전에 죽은 가족들을 위한 가족들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설(G. D. Fee), (14) 모든 신자의 세례에 대한 일반적 상징으로써 고려하고 있는 것이며, 그 세례는 우리를 사망과 부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라는 설(A. Clarke, D. S. Metz, R. C. H. Lenski)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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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 Alford, “Meyer, Edward, De Wette, Stanley”(in 이상근), C. Hodge, T. C. Craig, W. Barclay, W. Carter, C. K. Barrett, W. F. Orr and J. A. Walther, p. 335, M. E. Thrall, “Parry”(in L. Morris), L. Morris, 內村鑑三.
2) in 이상근.
3) in 이상근. C. Hodge는 때때로 부활을 믿는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4) in J. Calvin.
5) in 김용옥.
6) “Godet, Flatt, Lightfoot”(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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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상동.
9) 상동.
10)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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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은 가장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터틀리안(Tertullian)은 초대 교회에서 이미 죽은 자를 대신하여 세례받은 사실이 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이교도들 사이에서만 행해졌을 것이다”(A. Robertson and A. Plummer).⑪ 또한, 대리 세례란 다른 성경적 근거가 없고, 신학적으로도 타당성이 없으므로 (1)설과 (5)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2)설과 (3)설은 부활을 부정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논증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아 타당성이 없다. (4)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휘페르(ὑπὲρ)가 ‘~의 위에서’로 쓰이지 않았다는 점과 그러한 관습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없다(C. K. Barrett, W. H. Mare, “H. A. W. Meyer”⑫)는 점을 미루어 받아들일 수 없다. (6)설부터 (12)설은 원문에 대한 비약적인 해석이거나 동떨어진 해석이다.
나머지 (13설과 (14)설을 참조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세례’(1:13의 주석을 보라.)를 아는 신자가, 이미 죽은 자들-신자이든 불신자이든-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관례는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그러한 불멸을 믿는 신앙에 관련되는 것이다”(Berk., fn., ad loc.).⑬ 이 경우에 그들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신앙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 중에는 영혼 불멸이나 육체의 부활이나 환생 또는 관념(‘정의의 승리’, ‘죽음을 초월한 의식’. ‘신앙사건’)으로 이해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어떠한 사상적 동기나 어떠한 실제적 동기로 죽은 자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게 하는 효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미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 세례받는 것으로 인해 부활한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다만 그는 부활을 논증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요소에만 관심을 갖는다. 즉,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무엇을 하겠느냐(티 포이에수신, τί ποιήσουσιν)는 “‘그들이 무엇에 의지하겠느냐?’ 혹은 ‘그들이 무슨 소득이 있겠느냐?’를 의미할 수도 있다”(A. Robertson and A. Plummer). 또한, “그들이 자신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느냐?”(C. Hodge)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는 같은 의미를 강조하는 반문이다.
이어서 바울은 30절 이하에서 주로 자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부활의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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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 K. Barrett: Lietzmann은 Chrysostom의 다음의 구절을 인용한다. 어떤 세례 문답자가 그들(마르시온주의자들) 가운데서 죽을 때,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의 침대 밑에 감추고 죽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말을 걸고 그가 세례받기를 원하는지를 묻는다. 그 때에 그가 대답하지 않는 대신에 밑에 숨겨진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세례받기를 원한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그에게 세례를 준다.
C. K. Barrett는 “그리스의 종교적인 관습들에도 밀접한 전례들은 아니지만, 그러한 전례들이 있었다.…고린토도전서를 제외하면 이 같은 의식이 1세기의 50년대만큼 일찍이 행해졌다는 증거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의식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12) in W. H. Mare.
13) in D. S. Me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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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9:1, 15:8, 행 9:1-9, 22:6-16, 26:12-18), 주님의 사도가 되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곧 복음을 전파하느라고 겪은 핍박과 환난(4:9, 고후 1:8, 9, 4:10, 11:23-27, 롬 8:35-36, 골 1:24)을 가리키는 것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주님도 부활하시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주님의 생애와 죽음에서 성취된 모든 것도 헛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다(15:12-19의 주석을 보라).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그러한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기꺼이 언제나 위험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갱생(更生: 復活)의 대희망이 있기 때문이다”(內村鑑三).
키케로[Cicero: 주전 106-43년.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는 같은 말을 영혼의 불멸론에 응용하였다. “미래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기대가 말살된다면, 노동과 위험을 무릅쓰는 미친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⑭ 물론, “보상을 바라는 것은 덕행을 위한 가장 고상한 동기는 아니다. 그러나 보상을 바라는 것이 관능적인 쾌락이나 재정적 이익과 같은 저급한 것이 아니라면, 보상을 바라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비도덕적이 아니다”(A. Robertson and A. Plummer).
이어서 바울은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는 1:2의 주석을 보라.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카위케신, καύχησιν: 5:6의 주석을 보라.)을 두고는, ‘내가 너희를 확실히 자랑하고 기뻐하는 만큼’을 뜻한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의 결실인 교인들(교회)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였다(고후 1:14, 7:14, 빌 4:1, 살전 2:19). 그러므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단언한 것이다. 즉, 복음 선교와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을 위해서 언제나 외적으로는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고(4:9, 고후 1:8-9, 4:10, 11:23-27), 내적으로는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서 자아를 죽이는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갈 5:16-17. 참조: 9:16, 27). 실로 바울은 순교자적 삶을 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와 능력의 결과라고 하지 않고, 주 안에서 가진바라고 고백하는 데서 우리는 그의 사도로서의 겸손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그는 【32】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라고 하였다.
범인처럼은 3:3의 “사람을 따라”의 주석을 보라.
에베소(저자의 「에베소서」의 총론을 보라.)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에 대해 문자적으로 맹수와 싸웠으나 기적적으로 구출된 사건을 말한 한 것이라는 설⑮과 맹수와 같은 사람들에게 받은 핍박과 박해를 말한 것이라는 설⑯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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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Cicero, Tues. Disp. 1:15”(in 이상근).
15) J. Calvin, A. Barnes. “Theodore, Ambrosiaster, Erasmus, Luther, Lightfoot, Godet”(in 이상근).
16) H. Alford, “Chrysostom, Tertullian”(in A. Clarke), T. T. Shore, “Beza, Grotius, De Wette, Meyer, Findlay”(in 이상근), J. Wesley, M. Henry, A. Clarke, C. Hodge, A. Robertson and A. Plummer, R. C. H. Lenski, F. W. Grosheide, W. Barclay, W. Carter, C. K. Barrett, D. S. Metz, M. E. Thrall, W. H. Mare, T. C. Craig, L. Morris, C. R. Erdman, S. L. Johnson, G. D. Fee, W. F. Orr and J. A. Walther, p. 338, 黑崎幸吉, 內村鑑三, 박윤선 김용옥,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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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를 지지하는 반즈(A. Barnes)는 “일반적으로 로마인들과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범죄자들로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과 싸우게 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러한 경우에 범죄자들이 도망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또 하나의 사형 선고 형식이다.…누가가 사도행전에 이 사건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실제의 사건이라는 생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단순한 침묵이란 반대는 아니다. 누가가 바울이 견뎌 낸 모든 위험을 다 기록할 계획을 세웠다고 추측할 이유가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바울이 견뎌 낸 여느 사건들도 기록한 누가가 그런 놀라운 사건이 있었는데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자연스럽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후자 곧 비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맹수와 싸워서 목숨을 건진 채, 도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바울이 에베소에 머문 것은 정황상으로 매우 부합되지만, 사도행전에는 그러한 싸움에 관한 언급이 없다.…바울이 자신의 많은 경험을 말하고 있는 고린도후서 11장에는 그러한 투쟁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셋째, 로마 시민은 투기장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지 않았다”(F. W. Grosheide). 넷째, “히브리와 그리스 문학에서는 바울과 그의 독자들에게 익숙했던 그러한 표현 형식을 사용하였다. 시편에서(22:12, 13, 20, 21) 하나님의 적들은 비슷하게 일컬어졌다.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크레테(그레데) 섬 사람들을 ‘악한 짐승들’이라고 불렀고(딛 1:12), 헤라크리투스(Heraclitus)는 에베소인들을 ‘맹수들’이라고 불렀다”(W. H. Mare). 다섯째, “이그나티우스, Ignatius)는 「로마서」 v. 1에서 (아마 바울로를 모방하여: 그는 사도를 칭찬하였고 고린도전서를 읽었었다.) 비유적으로 사용하였다. ‘시리아로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육지와 바다에서 나는 맹수와 싸우고 있었다.…열 마리 표범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열 마리의 표범이란 일 분대의 군인들을 의미한다’”(C. K. Barrett).
바울이 그 말을 비유적으로 썼다고 해서, 그가 겪은 핍박과 환난의 현실성과 심각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바울이 복음 선교 때문에 겪은 모든 고난은,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에게 던져지는 것보다 못할 것이 없다.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는, 바울이 현세에 국한된 기대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과 진배없는 생각이나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위험을 당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즉, 부활이 없다면,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므로 복음으로 인한 그 모든 핍박과 환난을 견뎌 낸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 22:13(칠십인역)을 인용한 것이다. 이러한 말은 성경 외에서도 발견된다. 다이스만(A. Deissmann)은 “당신들은 곧 끝 날 것이오. 그러니 맘 놓고 마십시오.”라고 기록된, 코스(Cos)의 제국 시대에 속한 크리소고누스의 묘비문을 인용하였다.⑰ 에피큐리안들로 대표되는 이러한 향락적인 생활 태도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러한 도덕적 태만에 대해, 바울은【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고 경고하고 있다.
속지 말라는 6:9의 “미혹을 받지 말라”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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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in C. K. Bar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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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는, 아테네의 극작가 메난더의 희극 ‘타이스’(Mennander, Thais, B.C. 332년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통속적인 격언이기도 하므로, 타이스가 격언을 인용한 것인지, 타이스의 말이 격언이 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아무튼, 바울은 그 어느 하나를 인용한 것이다.
바울의 경고는 부활을 부정하고, 관능적 삶을 추구하는 이교도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고린도 교인들에게(5:10, 10:27)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그들의 생활을 본받느냐, 아니면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답게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본을 보이느냐 함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라고 하였다.
깨어는 에크네파테(ἐκνήφατε)로서 술 취한 상태나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인데, 부정 과거형으로 되어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는 과정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J. A. Bengel), 이교도의 영향을 받아 부활을 부정하며, 따라서 방종한 생활을 하는 교인들을 술 취한 자나 마비된 자로 비유하여 깨어나라고 명하는 것이다.
의(디카이오스, δικαίως)를 행하고는 “올바른 태도로 행하라는 뜻이다”(C. Hodge).
죄를 짓지 말라의 동사(하마르타네테, ἁμαρτάνετε)는 현재 명령법으로 표현된 것인데, 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 대해서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말이다. 즉, 부활을 부정함으로써 야기하고 있는 종교 및 도덕적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는 앞의 명령에 대한 이유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의 원문(ἀγνωσίαν γὰρ θεού τινες ἔχουσιν)을 직역하면,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가진 자들이 있기로’이다. 즉, 단순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자랑스럽게 소유하는 자들이 있다는 뜻으로 매우 강조적인 표현이다. 고린도인들 및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지식과 지혜를 자랑하였으나(1:5, 22),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부활을 부인하고(마 22:29, 막 12:24), 향락 생활을 추구하면서도 오히려 올바른 견해와 생활 태도를 가졌다고 자랑하였다. 바로 그러한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바울이 말한 것이다. 이 바울의 말 속에는 그러한 그들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사도적 사랑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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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고린도전서(서울: 글벗사, 2001, 2판 1쇄), pp. 422-430.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주경신학적 연구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