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 받는 자들
Author
최세창
Date
2025-04-2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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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29-34>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1. 시작하는 말
죽은 다음의 내세의 생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현실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사람은 모든 수고와 노력과 결실이 죽는 순간에 허망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람되고 가치 있는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귀영화와 지혜의 대명사로 알려진 솔로몬 왕이 인생의 모든 면을 고찰한 것과 체험한 것을 써 놓은 성경이 전도서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무관한 모든 인생은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한 교인들의 부활의 보증이 된다고 했습니다.
2.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의 문제
고린도 교회에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부정하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들의 종교적 관례를 들어서 논박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은 주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세례를 알고, 주 예수님을 안 믿고 죽은 사람들이나 믿고 죽은 사람들의 내세의 생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의도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교인들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은, 죽은 사람들의 내세의 생을 믿기 때문이라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입니다. 죽음이 지옥의 멸망을 당하거나 구원 곧 천국의 영생을 누리는 전환점이라고 믿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관례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교인들이, 구원받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간다는 믿음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교인들 중에는 영혼불멸이나 육체의 부활, 또는 정의의 승리나 죽음에 대한 초월의식, 예수님은 죽었지만 제자들의 가슴속에 살아났다고 하는 신앙 사건으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은 교인들이 어떤 사상적 동기나, 어떤 실제적 동기로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받는 세례가 죽은 사람들에게 무슨 효력이 있다거나, 죽은 사람들을 부활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다만 바울 사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는 부활을 논증하는 데 필요한 요소에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는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무엇을 하겠느냐”의 헬라어 티 포이에수신(τί ποιήσουσιν)은 ‘무슨 소득이 있겠느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고, 더 이상 어떤 형태의 생도 없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 받는 사람들이 무슨 소득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생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3. 부활을 믿는 자의 날마다 죽는 생활
바울 사도는 자신을 비롯한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고, 또한 교인들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에,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동안 핍박자이었던 바울은 교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사도가 되었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느라 온갖 핍박과 환난을 당했습니다.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부활하시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된 죄 사함과 거듭남과 자유와 평화와 영생의 구원을 비롯한 모든 것도 헛것이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바울 사도가 핍박과 환난 등의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內村鑑三은 “우리들이 기꺼이 언제나 위험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부활의 대희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주전 106년부터 주전 43년까지 산 로마의 웅변가요 정치가요 철학자인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죽은 후의 영혼불멸을 믿는 것과 관련해서, “미래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기대가 말살된다면, 노동과 위험을 무릅쓰는 미친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육체만 멸하고 영혼은 멸하지 않는다고 하는 영혼불멸설만 제외하고, 나머지 내용은 받아들여도 좋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믿기 때문에,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교인들에게 복음으로 가르치고, 그들을 양육하는 일을 위해 죽을 위험에까지 처하기도 했습니다. 내적으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 위해서 자아를 죽이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실로, 바울 사도는 순교자적 삶을 살았고, 결국 순교했습니다.
그런 바울 사도가 순교의 각오로 행한 복음 선교의 삶을 자신의 의지와 능력의 결과라고 하지 않고,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이라고 고백한 것을 미루어 사도인 그의 겸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자신의 뜻을 죽이며 삽니까? 아직도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을 위해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죽이며 삽니까? 주님 안에서 성령을 좇아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의 의지를 죽이며 삽니까? 매사에 자아를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맹수와 같은 인간들에게서 핍박과 박해를 당한 사실을 말하면서, 그런 고통을 당한 것이 부활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므로, 복음으로 인한 모든 핍박과 환난을 견뎌 낸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4. 부활을 믿지 않는 자의 삶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바울 사도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향락적인 생활 태도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의 양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해야 100년에 불과하다. 그것도 천 명에 한 명도 어렵다. 설사 어떤 사람이 100년을 산다 하자.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사는 유년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년기가 그 반을 차지하므로 실제로 사는 것은 50년이다. 또, 환난과 질고 등의 고통을 당하는 기간이 많은데, 아마 절반은 될 것이니 결국 남는 기간은 25년이다. 또, 자는 시간도 필히 빼야 하므로 기껏해야 10여 년도 안 된다. 그러니 마음껏 즐기고, 죽음은 생각하지도 말고, 아예 잊어버리자. 그저 네 귀로, 네 눈으로, 네 코로, 네 입으로, 네 발로, 네 손으로, 네 몸으로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은 마음껏 하라.”
부활을 부정하고, 향락 생활을 권하는 자들에 대해 바울 사도는,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 사도의 경계는 부활을 부정하고, 관능적 삶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는 현대 교인들에게 매우 절실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 신앙을 가진 교인답게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 때에도, 이교도의 영향을 받거나, 혹은 이교도였던 옛사람의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부활을 부정하면서 방종한 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교인 아닌 교인들을 향해서 바울 사도는 깨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좇아 의를 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러한 명령을 하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교인 아닌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성적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현대 교인들처럼, 고린도인들과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지식과 지혜를 자랑했으나,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지자(知者)와 현자(賢者)가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부활을 부정하고, 향락 생활을 추구하면서도 바른 견해와 생활 태도라고 자부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의도였습니다.
5.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라도 죽음이 찾아오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갈 부활 신앙이 확고합니까? 로마서 8:11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이 내주한 교인들을 그 영으로 말미암아 부활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 확고한 부활 신앙으로 염려와 근심, 환난과 핍박,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주님께 받는 은혜와 복과 능력과 지혜로 복음 선교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설교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신약_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7권/ 기타 다수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