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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50-58(설교: 신령한 몸의 부활을…)의 주경신학적 연구

Author
최세창
Date
2025-04-18 19:12
Views
304
지금까지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여러모로 논증해 온 바울은, 이제는 마무리를 지으면서 죽음에 대한 영원한 승리의 환성을 지른다. “이는 저 로마서의 웅대한 교리편을 끝맺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36)라고 찬양하는 것과 좋은 대응이 된다. 확실히 대 신학자 바울은 또한 정열의 사람이었다”(이상근).
바울은 이 부분을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로 시작하고 있다.
형제들아는 1:10의 주석을 보라.
혈과 육, 즉 아담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우리의 육의 몸(마 16:17, 갈 1:16, 엡 6:12, 히 2:14)은 썩을 것이고 욕된 것이며 약한 것(15:42-44의 주석을 보라.)이므로, 부활 이후에 살 영원한 하나님 나라(6:9의 주석을 보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는, 이미 죽어서 썩어 버린 몸의 경우를 들어 같은 사상을 되풀이한 것이다. 예레미아스(Jeremias)는 이렇게 요약한다. “50절의 두 행은 한편으로 살과 피로 된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 분해가 일어난 시신들을 대조시키고 있다. 달리 말해서, 첫째 행은 내림 때까지 살아 있을 사람들을 가리키고, 둘째 행은 내림 이전에 죽을 사람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병행성은 동의어적이 아니라 종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50절의 의미는 이러하다. 살아 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현재의 상태대로-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는 없다.”① 이 해석은 재림 때까지 살아 있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과 재림 이전에 죽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 부분을 빼고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바울의 취지는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간에 현재의 우리의 몸은 천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A. Robertson and A. Plummer). 그러므로 천국에 적합하도록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하였다.
보라(이두, ἰδοὺ)는 주로 자신의 말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독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다(고후 5:17, 6:2, 9, 11:12, 14, 갈 1:20).
내가 너희에게 ‘비밀’(뮈스테리온, μυστήριον: 2:7의 주석을 보라.)을 말하노니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을 말한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다 ‘잠잘 것’(15:6의 주석을 보라.)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라는 것이다. 이 문장은 B, D3, K, P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P46 사본에는 “우리가 다 잠들지는 않을 것이지만 모두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로 되어 있고; א, A, C, G, 33 사본 등에는 “우리는 모두 잠들 것이지만 다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로 되어 있고; D* 사본에는 “우리가 모두 살아날 것이지만 다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로 되어 있다.②
바레트(C. K. Barrett)는 “P46 사본은 부주의하게 부정어를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비판하였고, 핫지(C. Hodge)는 A, C, F, G, D* 사본들에 대해 “사도가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성경 필경사들의 시도들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본들이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지 않으므로 굳이 본문에서 벗어날 필요가 전혀 없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개역 한글판 성경처럼 읽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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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C. K. Barrett.
2)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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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읽을 경우에 따르는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다에 대한 해석이다. 핫지(C. Hodge)는 “독일과 영국의 현대 주석가들은 바울이 그 자신과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강림 때까지 생존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기대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라고 소개하면서 그들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다라는 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신자들을 망라한다.③ 이 말을 그 시대의 사람들로 제한시킬 수 있는 것이 표현 형식이나 문맥에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바울은 살전 4:15에서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라고 올바른 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바울이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다고 믿고 기대하기는 했지만(16:22, 빌 4:5, 딤후 4:8. 참조: 벧전 4:7, 약 5:8), 그 때를 정확하게 안 것은 아니었다(마 24:36, 행 1:7 등). 따라서, 그가 자신과 동시대인들의 생전에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단언할 리가 없다. 그는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바울은 이미 동시대의 교인들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11:30, 살전 4:13, 14).
앞 구절로부터 뒤따르는 바울의 취지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살아 있을 성도이든 죽어 있을 성도이든 간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백성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뜻을 전하거나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출 19:13, 16-19, 시 47:5, 사 27:13, 슥 9:14) 마지막 나팔에(살전 4:16, 마 24:31, 계 1:10, 4:1, 8:2, 6, 13, 9:14, 욜 2:1, 습 1:16, 제4에스드라서 6:23) 순식간에 홀연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전능자의 놀라우신 솜씨”(J. Wesley)를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바울은 그 변화의 순서에 대해,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라고 하였다(살전 4:16-17).
먼저 죽은 성도들이 썩지 아니할 것, 즉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되고(15:42-44), 그 다음에 살아 있는 성도들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리라는 것이다. 바울은 50절 이하의 부활 또는 변화와 재림에 관한 주제를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서 더욱 자세하게 취급하였다.④
바울이 앞 구절의 이유(원문의 첫 부분에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53】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15:42, 44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변화 또는 부활을 옷을 입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즉,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옷을 바꾸어 입어도 사람은 그대로인 것처럼, 썩고 죽을 몸이 썩지 않고 죽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어도 자아는 동일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이사야 25:8(칠십인역)의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를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사망은 마지막 때의 성도들의 변화 또는 부활로 완전히 멸망하는 것이다(15:26).
그러므로 바울은 55절 이하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그리고 마지막 때에 서서, 【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죽음에 대한 영원한 승리를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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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 Wesley, J. A. Bengel, F. W. Grosheide, A. Barnes, R. C. H. Lenski, L. Morris.
4) 저자의 데살로니가전서 4:13-1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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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호세아 13:14의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를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사망은 원죄 이래 모든 인류 및 생물을 정복하는 절대적 승리자요 절대적 폭군이었다. 사망을 이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한번 결정적으로 패배를 당했던 사망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때에 완전히 멸망당한다. 따라서, 더 이상의 사망의 승리란 결단코 있을 수 없다. 또한, 더 이상의 사망의 쏘는 것-“전갈의 독침으로 비유”(C. Hodge)-도 결단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해 사는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닌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56】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사망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란 전갈의 독침과도 같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죄라는 뜻이다(창 2:17, 롬 5:12, 14, 17, 6:23).⑤
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로서 {원래 윤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활쏘기에서 나온 말로서 화살이 표적을 빗나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죄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이다. 죄란 가능성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원하시는바 일꾼으로서의 자기의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 최선의 아버지, 최선의 어머니, 최선의 아들, 최선의 딸이 되지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손과 눈과 마음과 두뇌의 은사를 사용하며 발전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죄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표적에서 빗나간 성향과 사상과 말 그리고 행위 등을 뜻하는 것이다}(엡 2:1의 주석).
죄의 ‘권능’(1:18의 “능력”의 주석을 보라.)은 율법이라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법(모세의 율법 포함)이 죄와 죽음에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인간의 범법 때문에 주어진(갈 3:19) 하나님의 율법이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으로(롬 7:12),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다(롬 3:20, 7:7, 13). 그 율법은 죄인의 범죄를 막을 힘이 없으며(롬 7:22-23), 오히려 죄를 짓도록 충동질한다(롬 7:7). 또한, 율법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으로(롬 7:13),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죄를 증가시키며(롬 5:20), 심지어 죄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롬 7:9-10). 이러한 율법의 역기능은 인간의 육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힘 때문이다(롬 7:11, 18, 23). 한 마디로 말해, 율법은 죄의 계기이며 죄의 힘이다.
죽음과 죄와 율법의 가공할 관계를 설명한 바울은, 【57】그러나(원문의 첫 부분에 데, δὲ가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로마서 7:25과 아주 흡사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속죄 제물로 운명하신바 죄에 대한 것이고(골 2:15), 율법의 저주에 대한 것이며(갈 3:13, 4:5), 그 결과인 죽음에 대한 것이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승리로 확정되었다.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승리는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자에게 계속해서 공유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망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롬 8:37, 고후 2:14).
끝으로, 바울은 애정 어린 호칭과 간곡한 권면으로 부활의 장을 마무리한다.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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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자의 로마서 5:12, 14, 17, 6:23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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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형제들아사랑하는(아가페토이, ἀγαπητοὶ)은 8:1의 주석을 보라.
견고하여는 헤드라이오이(ἑδραίοι)로서 건물이나 조직의 견고함을 의미한다(골 1:23, 요이 9). 여기서는 기독교적 의미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확고한 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흔들리지 말며는 아메타키네토이(ἀμετακίνητοι)로서 “이른바 그릇된 철학의 허울좋은 논박으로 인하여 동요되지 말라는 뜻이다”(C. Hodge). 당시의 교회는 부활을 부정하는 영혼 불멸 및 육체의 부활을 주장하는 사상들에 의해 동요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그와 같이 교인들도 장차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굳게 믿고, 어떠한 이설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항상 ‘주의 일’(참조: 3:13-, 9:1, 16:10) 곧 주님께서 관계하신 일과 주님께서 교인들에게 분부하신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후 11:23). 바울은 그러한 교인들의 ‘수고’(코포스, κόπος: 4:12의 주석을 보라.)가 ‘주 안에서’(1:2의 주석을 보라.) 헛되지 않은 줄을 안다고 하여(3:14), 자신의 권면을 더욱 강화하였다.
만일 주님께서 운명하신 것으로 끝나셨다면, 주님의 일이란 헛일이므로 그 일을 힘쓴 자들의 결과 역시 헛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여 현재도 역사하시는 분이므로 주님의 일에 힘쓰는 자들의 수고는 결단코 헛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보상 중 보상은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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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고린도전서(서울: 글벗사, 2001, 2판 1쇄), pp. 442-449.



Total Reply 2

  • 2025-04-20 19:17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 2025-04-22 08:20

      필자의 주경신학적 연구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시고,"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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