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믿음의 증거: 믿음과 행위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5-02-10 19:22
조회
232
<야고보서 2:14-26>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이에 경에 이른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1. 시작하는 말
한때, 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뜨거운 선교 열심과 열정으로 놀라운 부흥을 초래한 한국 교회에 대해 세계 교회가 경이의 눈으로 바라본 때가 있었습니다. 놀라운 부흥의 주된 요인은 기복신앙적인 설교였습니다. 기복신앙과 행함 없는 믿음은, 교회에 대한 인식에 부정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실상, 한국 교회의 유례없는 수적‧재정적‧외형적 부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범죄가 증가했고, 범죄 연령이 어려졌고, 죄질은 더 악랄해졌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말세의 징조이므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외면해 버리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게다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한국 교회가 30여 년 전부터 침체 내지는 쇠퇴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종교적 열심과 열정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2. 고백뿐인 믿음과 구원받은 믿음의 증거인 행위
그 심각한 문제는 성령 충만한 야고보가 당시의 교인들에게서 발견하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구원받을 수 없다고까지 선언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씀은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로 시작됐습니다. 행함이 없는 고백뿐인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백뿐인 믿음의 사람은, 아무런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일을 감당할 능력이나 지혜를 얻지 못하고, 놀라운 은혜나 풍성한 복을 받지 못합니다. 성령의 은사들을 받지 못하고, 따라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지 못합니다.
이러한 엄청난 손실보다 더 크고 충격적인 손실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지옥으로 끄는 죄의 사함과 그로 인한 중생과 자유와 평화 그리고 말씀을 순종하는 성결한 삶과 천국 영생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도 “마태복음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믿음의 행위란 양심적 행위나, 어떤 종교적 행위나, 준법 행위나, 윤리‧도덕적 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행위의 동기와 내용과 목적이, 바로 주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 사도도 고린도전서 13:2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한 것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인지 구원받지 못할 믿음인지는, 말씀을 순종하는 사랑의 행위 여부로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믿음의 증거는 완전무결한 인격도 아니고, 완전무결한 행위도 아니고, 주 예수님의 사랑이 동기와 목적이 되는 행위입니다.
야고보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고백뿐인 믿음이 무익하고, 구원 능력이 없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생각만의 동정과 말로만의 사랑은 동정도 사랑도 아니므로,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태도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조롱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고백뿐인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을 공박했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어떤 주석가들은 “혹이”를 바울로 해석해서, 야고보가 바울을 행함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잘못 안 것으로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바울을 왜곡한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주장하고 있었던 어떤 사람들을 가리켜, “혹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상, 야고보와 바울의 견해는 같습니다. 두 사람 다 믿음에는 반드시 사랑이 동기와 목적인 믿음의 행위가 동반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표면적인 차이가 있다면, 바울은 믿음의 행위의 믿음을 강조했고,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5:6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바울과 야고보에게 있어서, 구원받은 믿음의 증거는 사랑의 행위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좇아 믿음으로 구원받으면 살인이나 간음 등 어떤 죄를 범해도, 다시는 멸망하지 않고 처벌만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죄를 범할 리가 없습니다. 설령, 실수로 그런 죄를 범했더라도, 다윗이나 베드로처럼 뼈를 깎는 회개를 하고, 다시금 주 하나님을 믿고 매달릴 것입니다.
만일에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면, 귀신들이 더 먼저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귀신들이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몰지각한 사람들보다 먼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고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귀신들의 믿음은, 엄밀히 말하면, 믿음이 아닌 관념적 지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귀적인 믿음과 성령을 좇은 믿음의 결정적 차이는, 순종의 행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 즉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모신 사람은 반드시 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로마서 8:14을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 곧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하여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친 믿음의 행위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는 복종의 행위는, 하나님을 믿는 놀라운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명령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산 채로 꽁꽁 묶어서 장작더미 위에 얹어 놓고서는 칼로 각을 뜨고, 불태워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어떻게 복종합니까? 우리 같으면 “하나님을 안 믿으면 안 믿었지 못합니다. 죽으면 죽었지 못합니다. 제물을 바치라면 몰라도, 백세에 얻은 이 아들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시오. 어떻게 제 손으로 자식에게 칼질을 하며 불태웁니까?”라고 거칠게 항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모든 고통을 억누르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복종했습니다. 하나님께 목숨까지, 아니 그 이상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맡겨 버리는 믿음에서 나온 행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놀라운 믿음의 행위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에 수양 한 마리를 주어 바치게 하여 열납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압니까? 창세기 22:12 후반을 보면,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일이나 소유나 목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중히 여기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죄로 더불어 살던 기생 라합의 이야기는 원래 여호수아 2:4 이하에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리고를 정복하려고 정탐꾼을 침투시켰습니다. 그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만 그 비밀이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라합의 기지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라합의 위험한 행동은, 율법 행위도 종교적 행위도 도덕적 행위도 감정적 행위도 아니었습니다. 종전까지 자신과 동족이 믿던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 행위였습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은 나라와 민족, 자신과 친척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로 입증됐습니다. 모두를 하나님께 맡기는 이유가 신앙고백으로 표현됐습니다.
여호수아 2:11을 보면,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사건과 이후의 하나님의 권능을 듣고, 상천하지에 진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믿게 됐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안 믿었다면 자신과 친척들의 목숨을 걸고, 두 정탐꾼을 숨겨 주는 행동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3.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좇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옥으로 끄는 죄의 사함과 그로 인한 중생과 자유와 평화 그리고 말씀을 순종하는 성결한 삶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믿음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송두리째 맡기고, 오로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신약_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7권/ 기타 다수
'믿음과 행위(약 2:14-26)의 주경신학적 연구'는 <믿음과 행위>, 혹은
<믿음과 행위(약 2:14-26)의 주경신학적 연구>를 검색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2021.03.29에 등록)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설교와 2021.03.29.에 등록한 주석에 대해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