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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6-18(설교: 빛들의 아버지께로서…)의 주경신학적 연구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5-01-31 10:01
조회
309
유혹을 받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핑계를 대지 말라고 한 야고보는, 【16】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라고 경계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ἀδελφοὶ μου ἀγαπητοί)는 주님 안에서 성도들을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을 표현하는 동시에 중요한 내용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기 위한 표현이다.
속지 말라는 메 플라나스테(μὴπλανάσθε)로서 “‘유랑하지 말라’, ‘길을 잃지 말라’, ‘잘못하지 말라’”(M. Henry), “‘속지 말라’, ‘실수하지 말라’”(E. C. S. Gibson), “‘잘못된 데 빠지지 말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黑崎幸吉)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잘못된 견해들에 빠지지 말고, 주 예수와 그분의 성령의 인도로 받은 것들인 진리의 표준에서 벗어나지 말라”(M. Henry)는 것이다.
야고보의 취지는 유혹 받은 것을 하나님께 핑계하는 사상에 대하여 속지 말라는 것이다.① 특히, 이스톤(B. S. Easton)은 “16절은 17-18절이 13-15절과 관계된다는 것을 의미해 준다. 즉, 자신이 하나님께 시험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속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는 오직 좋은 선물들만 오기 때문이다.”라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깁손(E. C. S. Gibson)과 윌리암즈(R. R. Williams) 그리고 黑崎幸吉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헨리(M. Henry)와 칼뱅(J. Calvin)은 “하나님은 어떤 악한 것의 창시자나 후원자가 아니며, 또한 그럴 리도 없다. 하나님은 선한 모든 것의 근원이며 창시자로 인정되어야만 한다.”라고 하였다.
결국 야고보는 유혹과 죄와 죽음을 만드는 선한 것의 창조자시며, 수여자이신 하나님께 돌리는 어리석은 사상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잘못된 사상에 속지 않으려면 말씀의 진리를 확고하게 붙잡아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요 14:16, 26, 16:13)으로 충만해져야 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되는 것이다(고전 2:10).
야고보는 속지 말아야 할 구체적인 이유를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17】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악과는 상관없는 분으로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다.
깁손(E. C. S. Gibson)은 “은사(도시스, δόσις)와 선물(도레마, δώρημα)은 구별되어야 한다. 즉, 모든 종류의 좋은 은사와 은사의 종류 중에 완전한 모든 것(Dean Scott)……그것들은 필로②에 의해 명백하게 구별되는데, 그는 후자는 전자에게서 결핍되어 있는 방대와 충만의 관념을 내포한다.”라고 하였다.
윌리암즈(R. R. Williams)와 박윤선 님은 “은사와 선물 사이에는 대조가 있다. 전자는 주시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고, 후자는 행위의 목적 또는 결과인 선물이다.”라고 하였다.
黑崎幸吉은 내용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좋은 은사는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이나, 선행을 하는 힘 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온전한 선물(은사)은 15절의 죄에 맞세워, “온전한”은 “죄가 장성한즉”의 “장성하다”와 같은 어원의 글자를 써서 거룩한 생활 또는 완전한 구원을 뜻한다고 하는 견해로, 15절의 죽음에 맞세우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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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A. Ward, 박윤선, 이상근.
2) 조선출 편, 기독교 대사전(서울: 기독교서회, 1972), p. 1117. 원 이름은 필론(주전 20년~주후 45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종교 철학자이며 저술가. LXX를 축자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신뢰하여 유일한 교서로 삼았다. 그의 저서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유대교의 본질을 역사적, 율법적, 철학적 관점에서 해명한바 주로 이교도에 대한 변증서이다. 둘째는 유대인들을 위한 주석서들로 율법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 내면적인 요소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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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온전한 선물(은사)을 완전한 구원 또는 거룩한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다. 여러 학자들이 은사와 선물을 상이한 의미로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특히 야고보에게서 은사와 선물이 뚜렷하게 의미의 차이를 드러낸다고 볼 수는 없다.
대체로 은사와 선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모든 선물들이라 할 수 있다.③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성의 빛을 주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이 이해력을(understanding)을 가능케 한다(욥 32:8). 그분은 또한 학식의 빛을 주신다. 자연에 관한 지식과 통치 기술들 그리고 모든 진보에 있어서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신적 계시의 빛은 더욱 직접적으로 위에서부터 온다. 믿음의 빛과 순결 그리고 모든 형태의 위로의 빛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외에 생명, 자유, 진리, 정의, 평화, 그리고 이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 등은 모두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사요 온전한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의 악과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세상의 악과 고통의 실재에 관한 난제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전혀 선하지 않으시거나, 아니면 전혀 능력이 없으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을 제거했어야만 하였다.”④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포티트(G. Poteat)는 “의심할 여지없이 생에는 어두운 면이 있다. 즉, 유혹과 죄와 고통과 고난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위해 악을 의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상에서의 신고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창조적 신고일 수 있다(참조: 롬 8:19). 또한, 악한 것은 선으로 변형될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지만, 그러한 것들의 근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앞에서(1:13-15의 주석) 언급한 바와 같이, 원죄란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인 자유와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오용함으로써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죄의 결과로 모든 죄악들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초래되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하나님께서는 본래 이러한 것들과는 무관하시며, 그분이 주시는 모든 것들은 선하다고 하는 것이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악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속박 아래 있는 인간(롬 5:12)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보내 주셨다(갈 4:4, 롬 8:3).
바르트(K. Barth)에 의하면 “아들의 보냄은 죄의 지배의 결과로서, 이 세상 인간에게 강제된 해결할 수 없는 마지막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⑤라고 하였다. 바로 이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심판하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사 중 은사이며, 선물 중 선물인 것이다. 이 진리를 터득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이야말로 모든 은사를 더욱 은사 되게 하며, 선물을 더욱 선물 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롬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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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조: J. Calvin, W. Barclay.
4) in G. Poteat.
5) K.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Trans. by E. C. Hoskyns(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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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시하여 모든 좋은 은사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한다.
헨리(M. Henry), 웨슬리(J. Wesley), 바클레이(W. Barclay), 이스톤(B. S. Easton), 깁손(E. C. S. Gibson), 박윤선 님, 이상근 님은 빛들의 아버지란 하늘의 물체들인 해와 달과 별의 창조주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스톤(B. S. Easton)은 이러한 자연적 빛이 영적 빛을 본 뜬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자연적 빛들에만 국한시키기보다는, 黑崎幸吉의 말대로 유형, 무형의 온갖 영광(창조된 천지, 천사, 구원받은 사람과 같음.)을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
빛들의 창조주인 하나님께서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이에 대해 黑崎幸吉은 “야고보가 사용하는 변화(파랄랄게, παραλλαγή)란 천체가 조석으로 그 빛을 변하는 데 적용하고, 회전하는(트로페스, τροπής)의 뜻은 하지, 동지와 같이 절기가 바뀜을 뜻하며, 이로써 그림자(아포스키아스마, ἀποσκίασμα)는 광선의 강약이 생김을 뜻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메이어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함은 다른 물체의 회전으로 인하여 받는 그림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기 밖에 있는 실존들의 변동으로 인하여 변하시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말 3:6, 히 13:8 참조).”라고 설명하고 있다.⑥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시다는 것이다(J. Wesley). 하나님은 비본질적 그림자가 아니라 영원한 실재다(R. A. Ward). 그분은 스스로 있는 자이다(출 3:14). 어느 무엇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제약받지 않는 자존자요 자족자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변화무쌍하여 신뢰할 수 없는 반면에, 모든 좋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은 한결같아서 얼마든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시다.
야고보에 의하면, 모든 빛들의 창조주인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모든 좋은 선물을 주시는 영원불변하신 분이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선물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는 데 있다. 【18】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최대의 은사요 선물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이미 밝혔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나서, 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이다.
조물이란 크티스마톤(κτισμάτων)이며 피조물들을 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우리를 그의 첫 열매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윌리암즈(R. R. Williams)는 첫 열매란 구약 성경에서 취한 표현 양식이라고 한다(신 18:4).
첫 열매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표적으로(R. R. Williams), 또는 감사에 넘친 제물로 바쳐 졌으며(W. Barclay), 또한 장차 올 추수의 약속이 되기도 하였다(C. R. Erdman). 이런 사실은 느헤미야 10:35에, “해마다 우리 토지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라는 말씀과 에스겔 20:40의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헌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는 말씀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첫 열매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의미에서 구약 성경의 첫 열매는 이스라엘을 지시하기도 하였다(렘 2:3. 참조: 출 4:22).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첫 열매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영적 후예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⑦ 바울이나 요한 역시 그리스도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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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in 박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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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켜 첫 열매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 재형성된 인간들임을 의미하는 것으로(J. Calvin), 하나님의 부분과 보화 그리고 더욱 특별한 소유로서(M. Henry)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黑崎幸吉).
黑崎幸吉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첫 열매라고 할 때, 그것은 ⑴ 장래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처음 그리스도인이 된 그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2) 또는 이를 장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인류 가운데서 뽑힌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지의 문제가 대두된다고 하면서 후자를 주장하고 있다. 후자를 주장하는 학자로 이상근 님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전자를 주장하는 학자들로는 후터(Huther)⑧와 알포드(H. Alford)를 들 수 있다.
첫 열매가 앞으로 열릴 모든 열매 중에 처음 익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후자라기보다는 전자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와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E. C. S. Gibson). 깁손(E. C. S. Gibson)은 “우리란 누구를 언급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하고는, 그 대답으로 “아마 본 서신이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앞서(1:1의 주석 참조.) 규명한 바와 같이, 당시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처음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어드만(C. R. Erdman)이 잘 설명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께 드리는 처음 익은 열매가 장차 올 추수의 약속이 됨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소유로서 장차 완성될 속량받은 인류의 보증이 되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참조: 롬 16:5).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첫 열매이시고, 그리스도인들은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이다(M. Henry, J. Wesley). 특히, 바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였다(고전 15:20, 23).
하나님께서 우리를 첫 열매가 되게 하신 것은 순전히 자기의 뜻을 좇아 하신 것이지(黑崎幸吉), 인간의 능력이나 기술 행위, 또는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B. S. Easton),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은총의 선택에 의해 우리를 낳아 첫 열매가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란 순전히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뤄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공적과 상관없다는 의미에서 대가가 아니라 은혜이다.
우리를 낳으시는 하나님의 방도란 진리의 말씀이다. 이상근 님은 “진리의 말씀이란 유대인들에게 더 익숙했던 율법을 가리키고 있다(1:25).”라고 하지만, 율법이 인간을 구원할 힘이 없다는 점을 보아, 오히려 복음을 지시하는 것⑨으로 보아야 한다.
복음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꾸어 말하면, 복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를 의미하며(C. R. Erdman), 동시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이시다. 바로 이 복음을 통해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이다. 바울도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참조: 벧전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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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M. Henry, B. S. Easton, C. R. Erdman, E. C. S. Gibson, R. R. Williams, 黑崎幸吉, 박윤선.
8) in 이상근.
9) M. Henry, J. Wesley, W. Barclay B. S. Easton, R. R. Williams, 黑崎幸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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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음이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여(참조: 살전 2:13)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며(W. Barclay, 黑崎幸吉),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첫 열매로서 하나님의 소유 곧 하나님의 ‘양자’(R. R. Williams)가 되는 것이다. 첫 열매로서의 그리스도인이란 앞으로 생길 많은 열매(그리스도인들)의 보증이기도 하다.
黑崎幸吉은 진리의 말씀 곧 복음으로 낳아지는 새 생명을 가리켜, “영원히 변함없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선하고 완전한 선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복음이야말로 인간에게 새 생명을 얻게 하며, 또한 거룩한 생활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독특한 사명을 발견하게 된다. 즉, 복음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복음 증거자들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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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야고보서․베드로전후서(서울: 글벗사, 2001, 3판 1쇄), pp. 81-89.



전체 2

  • 2025-02-03 00:12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 2025-02-03 12:35

      필자의 약 1:16-18의 주경신학적 연구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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