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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노예를 위한 사랑의 간청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5-01-24 11:06
조회
187


<빌레몬서 1:8-14>

8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9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13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1. 시작하는 말

마태복음 24:14을 보면, 주 예수님의 강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인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라고 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모든 분야,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심지어 혈연관계인 가정에서마저, 사랑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가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가정도 바른 사랑이 아니라, 자녀를 위한 가짜 증명서를 함께 만들거나, 부정축재를 해 주는 등의 병적인 사랑일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 상호간의 본능적 감정이나, 이기적 사랑마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재산 문제로 인한 부자 갈등과 송사가 벌어지고, 형제자매의 반목과 송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녀가 대개 끌리는 감정으로 연애하다가 결혼을 하는데도, 그 어느 때보다 이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랑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2. 사랑을 위한 바울의 권리 유보

바울 사도는 노예제도가 합법적이며 정당시되던 시대에 노예인 오네시모, 그것도 사형감인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형제로 여기도록 온갖 애를 다 썼습니다.

바울 사도는 영의 아버지로서 빌레몬에게 거리낌 없이 목자의 권위를 내세워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에 사랑으로 간청했습니다. 빌레몬에게 거리낌 없이 명령하거나 강권할 수 있는 이유는, 빌레몬이 믿음이 좋고 사랑이 많은 모범적인 성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오네시모 역시 한때는 도망친 노예였지만, 복음을 전하다 갇힌 바울 사도의 전도를 받아서 주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인 성도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목자의 권위를 유보한 채,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나이가 많은데도 주 예수님을 위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서, 빌레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사형당할 수밖에 없는, 도망친 죄를 지은 비천한 노예인 오네시모를 감옥에서 복음을 통해 얻은 믿음의 아들로 여긴 놀라운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도망친 노예에 대한 바울 사도의 사랑은, 당시의 법과 정치‧경제‧사회 제도 및 질서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또, 바울 사도는 대세를 따르지 않고,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주 예수님을 본받아 복음을 좇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복음적 사랑은 세상의 법과 제도 및 질서를 누룩처럼, 근본적으로 와해시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 사도는 주인의 애완견보다 못한 재산에 불과했던 비천한 노예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노예들도 같은 하나님의 인격적 피조물이고, 주 예수님이 노예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신 것을 알고, 노예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아들로 여겨서 사랑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들이 사랑이 아닌 불법으로 살기 때문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법과 제도와 사회 관습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갖가지 형태의 음행을 하는 자들과 권력형 범죄자들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믿어 지옥으로 끄는 죄의 사함과 중생과 자유와 평화와 성결한 삶과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는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님은 그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압도하는 사랑의 구주이시고, 그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하십니다. 주 예수님은 믿는 우리를 통해 사랑을 드러내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지식과 지혜, 능력과 기술, 재물과 소유물 모두가 주 예수님의 사랑의 도구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도 몸도 행동도, 아니 우리 자신이 주 예수님의 사랑의 방편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스갯소리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잔뜩 기대를 걸고 앉았습니다. 잠시 후에 점쟁이가 “35세까지는 고생이 막심하겠소.” 하며, 혀까지 끌끌 찼습니다. 혀를 안 차도 낙담이 되는데, 혀까지 차니…심히 낙담한 젊은이가 좋은 생각이 났던지, “35세 이후는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점쟁이는 “35세 이후에는 고생에 익숙해져서 덜 고생스러울 겁니다.” 하며 딱한 듯이 쳐다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져서, 사랑을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랑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말세이기 때문에 오히려 작은 사랑도 더욱 절실한 것입니다.

3.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까닭

바울 사도는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노예인 오네시모가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갇힌 바울 사도의 복음 전도를 듣고, 회개하고 믿어 구원받은 교인이 된 후에는 바울 사도와 빌레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노예인 오네시모가 주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믿는 이제는 유익하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이제는, 정말 우리의 신앙 인격과 생활이 주님 안에서 교역자와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익하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들이나 교인들은, ‘아무리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랑할 소유가 없는 도망친 노예가 남들에게 무슨 유익이 된다고 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사랑할 마음만 간절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증세가 점차 악화되어서, 소년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14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힘든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소년은 차창을 통해 굶주린 채, 길거리에 누워 있는 노숙자들의 처량한 모습을 목도했습니다. 소년의 마음속에서 그들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소원이 일었습니다.

소년은 그 소원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도와주고 싶다는 답글들이 올라왔습니다. 급하게 빵 재료를 싣고 달려온 트럭들, 하던 일을 멈추고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달려온 이웃 주민들, 미국 전역에서 보내온 기부금 등 소년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수많은 도움의 손길이 답지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전달된 샌드위치 봉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해 브랜든!’ 브랜든은 소년의 이름이었습니다.

소년의 소원으로 만들어진 브랜든 샌드위치는, 2주 동안 미국 전역의 많은 노숙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침상에서 이 소식을 들은 브랜든은,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저는 이제 행복할 것 같아요.”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소년 브랜든은 엄마의 품속에서 무척 온화한 표정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네시모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노예 신세였지만, 주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유익한 존재로 변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죄나 잘못으로 불행을 당하면서도, 남을 탓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어떤 교인들은 불행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잘못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성도는 당한 불행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유익할 수 있는 길을 추구합니다. 그런 성도의 불행은, 그런 성도에게는 맥을 못 추는 것입니다.

남의 양을 훔친 죄로 이마에 ‘양 도둑’(Sheep Thief)의 약자인 ‘ST’라는 낙인을 받은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 중 한 사람은 모욕을 못 견뎌 외국에 가서 숨어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이마의 두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바람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비참하게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내가 양을 훔친 사실은 다른 곳으로 달아난다 해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여기 남아서 내 이웃과 내 자신에게 존경을 받을 길을 걷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해가 바뀌는 동안에 그는 정직하다는 평을 더해 갔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 그 곳을 지나던 낯선 사람이 이웃들에게 그의 이마에 새겨진 글자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아주 오래 전 이야깁니다. 나는 그 일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잘 안 나지만, 그 글자는 아마 ‘성자’(saint)의 약자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도망쳤기 때문에 사형당해야 마땅한 오네시모를 가리켜, 자기의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심복”의 헬라어 스플랑크나(σπλάχνα)는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과 자비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이 노예가 아닌 믿음의 형제로 여기고, 사랑할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옥살이를 하는 바울 사도는 빌레몬 대신에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시중들게 하고 싶어하면서도, 빌레몬의 자발적인 선의를 존중하여 오네시모를 돌려보낸다고 했습니다.

4.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종말이 더 가까워진 말세에는, 불법은 점점 더 성하고, 사랑은 점점 더 식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믿어 구원받은 우리는 사랑의 주 예수님과 영적으로 더욱더 굳게 연합해서, 주 예수님의 사랑의 도구요 방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모든 소유는, 주 예수님의 사랑의 도구요 방편이 될 때에 참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모든 소유는 우리를 떠나게 마련이므로, 주 예수님의 뜻대로 사랑의 도구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은 지 꽤 되었는데, 하나님과 목자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하며 유익한 존재로 살고 있습니까?


설교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신약_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7권/ 기타 다수



전체 2

  • 2025-01-26 21:06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 2025-01-27 10:18

      필자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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