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여 성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5-01-18 13:34
조회
176
<마태복음 5:14-16>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시작하는 말
무수히 새해를 맞아도 묵은해의 연장으로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은 안 하고, 문제는 피하려 하고, 자기 성장에 대해 생각조차 없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 안 됩니다. 인격과 마음과 생각과 삶의 성장과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지 않으면, 새해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시편 51:10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시편 103:5에는,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2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했습니다.
2.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인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좇아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이 매우 영광스러운 신분임을 밝히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세상”의 헬라어 코스무(κόσμου)는 ‘우주’, ‘세상’, ‘모든 인간’, ‘단장’, ‘꾸밈’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 또는 ‘하나님과 대립되는 불신앙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빛”(포스, φώς)은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불트만(R. Bultmann)은 요한일서 1:5의 주석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에 대해, “그 문장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와 유다교, 그리고 희랍 사상과 영지주의에 있어서도 하느님, 하느님의 본질, 신적인 것의 영역 등을 빛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형태는 모두 다르더라도 그 기본적인 이해는 빛의 본질적 의미가 인간이 자신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리고 또한 자신의 영적인 생활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성결이란 점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빛은 일반적으로 구원, 특히 종말론적 구원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요일 2:8).”라고 했습니다.
“빛”은 주 하나님의 본질을 잘 묘사한 것으로 ‘존엄성과 영광’, ‘불변성’, ‘완전한 의와 진리’, “순수성”, “탁월한 거룩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그 모든 것을 내포하고 드러내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종으로서 멸망의 어둠에 속한 인간의 점과 흠과 죄악을 밝히 드러내 주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자로서의 당신을 밝히 계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살아가야 할 길을 밝히 비춰 주십니다. 불신앙과 죄로 어둠에 속한 인간의 지식이나 권력은 어둠을 물리칠 수 없고, 오직 빛만이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둠의 권세자인 사단은,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빛이 그대로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빛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에 속했다가 빛의 자녀가 되어 주 예수님의 나라에 속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빛 가운데 거하며 사랑과 의와 진리의 빛을 따라 행함으로써 날마다 새롭게 성결해지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으로 삼고 있습니까? 혹시나, 하나님과 무관한 우리의 지정의나 탐욕, 이념이나 사상, 풍조나 대세, 성공이나 실패, 죄악의 수단이나 방법을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시편 119:105을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으로 삼으면 성결해지고, 영적인 지혜가 심화되며 풍성해지고, 영력이 강해져서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진리와 자유의 빛을 세상에 더욱 밝게 비출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죄 사함과 중생과 자유와 평화와 성결한 삶과 영생의 구원을 얻은 우리는, 빛의 본질을 나눠받은 자들답게 더욱더 밝은 빛이 되어 하나님께 더욱더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빛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불행히도 일부 초대 교인들처럼, 겉은 그리스도인인데 속은 여전히 어둠에 속한 자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13:12 이하는, 로마의 교인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가 참으로 빛에 속한 자라는 증거가 뭡니까? 주 안에서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순종하는 우리의 언행을 통해서 가정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주변이 밝아지는 것이고, 직장이 밝아지는 것이고, 사회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나라가 밝아지고, 세상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동네”의 헬라어 폴리스(πόλις)는 ‘도시’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본받는 작은 빛인 우리의 언행은 어두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죄악 생활을 밝히 드러낼 것이고, 그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밝혀 줄 것입니다. 영생의 주님을 믿고 구원받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말”의 헬라어 모디온(μόδιον)은 원래 곡물을 재는 도량형기입니다. 십일조를 계산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유대의 가정에는 말 곧 모디온이 있었습니다. 나무 기둥에 불길이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혹은 불을 끄기 위해서 사람들은 모디온으로 등불을 덮었습니다. 이렇게 등불을 끄면 좋지 않은 연기가 났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빛이 되고,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와 복으로 출세하거나 성공했다가 빛의 역할을 하기는커녕, 야욕과 죄악의 모디온으로 덮어버리고, 매캐한 연기만 피우다가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어야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것처럼, 빛의 자녀인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주 예수님이 선포하시는바 그 자신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 또는 그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천국의 비밀은 널리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인격과 메시아로서의 생애와 복음 선교는, 그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널리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일하는 마음가짐과 생활은, 등불이신 주 예수님의 빛이 어두운 세상에 잘 비추어지게 하는 등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얄밉게 주님의 빛을 가로막는 교인들이 있고, 뻔뻔하게 주님의 빛을 가로막는 교인들이 있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느라 주님의 빛을 가로막는 교인들이 있고, 남의 교인을 자기가 다니는 교회로 유혹해 가느라 주님의 빛을 가로막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어느 복지 기관의 일부 직원들은, 장애아들을 상습적으로 괴롭히느라 주님의 빛을 가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라고 하신 성부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빛을 분여받은 자들답게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의 헬라어 칼라 에르가(καλὰ ἔργα)는 윤리적 규범이나 양심적 기준이나 율법에 합당하다는 의미에서 ‘선한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의미에서 ‘선한 일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빛인 교인들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을 도모해야 합니다. 잘되거나 행복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행실의 빛을 비추기는 비교적 쉽습니다. 잘 안 되거나 불행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행실의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합니다.
3.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분여받은 자들답게, 불행 중에도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꽃을 팔러 다니는 한 노부인이 있었습니다. 매우 낡은 옷을 입고, 몸도 매우 허약했지만 얼굴엔 언제나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어던 사람이 “할머니는 어째서 늘 그렇게 즐거우신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노부인은 “왜 즐겁지 않겠어요? 세상의 만물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요.”라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할머니는 어려움을 잘 견디시나 봅니다.”라고 했습니다. 노부인의 대답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지요. 말하자면 그때가 이 세상의 가장 암울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일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불행이 찾아 올 때마다 삼일만 참고 기다리면 모든 일이 나아지리라 믿는답니다.” (가난한 사람의 행복 부자의 고민)
그리스도의 복음 곧 주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진리와 자유의 빛을 밝히지 못할 상황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더욱더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며 순종하여 자신을 더욱 밝히고, 세상에 주님의 빛을 더욱 잘 비추시기 바랍니다.
설교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신약_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7권/ 기타 다수
아멘.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최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