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11-15(설교: 루디아로 복음을…)의 주경신학적 연구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5-01-12 21:31
조회
215
누가는 마게도냐를 향해 떠난 바울 일행에 대해, 【11】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라고 하였다.
드로아는 16:8의 주석을 보라.
사모드라게(Σαμοθρᾲκην)는 드로아와 네압볼리 중간이자 에게해 동북부 드라게 연안에서 40㎞ 남쪽에 있는, 동서로 긴 타원형의 모양인 헬라의 섬이다. 면적이 180㎢이고, 중앙에는 눈을 이고 있는 펭가리 산(Phengari: 표고 1,590m)이 우뚝 솟아 있어 항해자에게 좋은 목표가 되었다. 이 곳은 저녁에 바람이 자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배는 야간에 입항하였다.①
네압볼리(Νεάπολιν)는 마게도냐의 빌립보의 항구이며, 오늘날의 카발라(Kavalla)이다. 뒤라키움(Dyrrhachium)에서 동쪽으로 뻗은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의 종착역으로서 수륙 교통의 요충지이다.②
드로아에서 네압볼리까지는 해로로 250㎞인데(E. Haenchen), 드로아에서 배를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간 것은 순풍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반대 방향으로 5일 걸려서 온다(20:6).
배로 네압볼리로 간 바울 일행에 대해, 누가는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라고 하였다.
빌립보(Φιλίππους)는 {트레이시(Thrace)의 접경에 자리잡은 마게도냐 서부의 주요한 도시이었다(16:12). 이 도시는 본래 작은 샘들이 많았기 때문에 ‘작은 샘들’이란 뜻인 크레니데스(Krenides)라고 불렸었다. 그러나 주전 356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마게도냐의 왕인 필립 2세(Philip II: 주전 359-336)가 이 곳에 많은 사람을 새로 이주시키고, 도시를 확장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따라 이 곳을 필립(빌립보)이라고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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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A. J. Kinsella, “Samothrace” in ISBE, Vol. IV, p. 2675. E. W. Saunders, “Samothrace” in IDB, Vol. 4. pp. 197-198. E. Haenchen, R. Earle, 黑崎幸吉, 이상근.
2) 참조: M. N. Tod, “Neapolis” in ISBE, Vol. IV, p. 2126. F. Finegan, “Neapolis” in IDB, Vol. 3, pp. 527-528. E. Haenchen, R. Earle,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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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는 유럽에서 가장 좋은 전략지이었다. 즉, 트레이시(Thrace)의 국경에 가깝고 간기테스(Gangites: 현재의 안기테스) 강을 낀 평원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있으며, 북쪽은 평야, 남쪽은 늪지대로 둘러싸인 전략적 거점이었다. 또한, 빌립보에는 아시아와 유럽, 동과 서를 구분하는 구릉 지대가 있다. 이 구릉은 바로 빌립보 부근에서 산길을 내려오게 되어 있었으므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오는 사람들이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지역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필립 2세가 동서 도로를 지배하기 위해 빌립보를 건설했던 것이다.
주전 42년에 빌립보는 아우구수투스(Augustus)에 의해서 정복되어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저자의 「빌립보서」, pp. 26-28).
마게도냐 지경의 첫(프로테, πρώτη) 성이요는 {빌립보가 마게도냐 지방(province)의 수도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가 수도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빌립보가 마게도냐 제일 지역의 수도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암비볼리가 그 지역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밝혀진 사실은 프로테가 단순히 특정 도시에 부여되었던 명예로운 명칭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누가 역시 이런 의도로 이 명칭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사실상 빌립보는 그 지역의 유일한 식민지이었고, 또 군사적·상업적 중심지(동서양의 무역 통로)로서 마게도냐에서 제일 중요한 도시이었다. }(저자의 「빌립보서」, p. 29).
로마의 식민지 제도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로마는 점령한 지역이 군사적인 의미가 있을 때만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들이 취한 습관적인 방법은 300명가량의 노련한 병사와 처자들을 전략적 간선 도로의 중심지 되는 곳에 주둔시키는 것이다.
식민지는 광범위한 로마 제국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또한 전략적 중심지로 삼기 위하여 건설된 것이다. 식민지가 처음에는 이탈리아 안에 건설되었는데, 나중에는 로마 제국이 확장됨에 따라 제국 안 도처에 산재하게 되었다. 즉, 식민지의 기원은 군사적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로마 정부는 식민지로서의 영예를 바라고 충성을 다할 도시들에게도 식민지란 칭호를 부여하였다.
로마의 식민지에는 여러 가지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았다. 식민지 사람들의 이름은 로마 족속의 명부에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세금과 헌납금을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토지 소유권과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에는 자치권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자체 내의 행정관과 원로원이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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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주민들은 로마어를 사용하였고, 로마의 복장을 했으며, 또한 그 지방 장관들은 스스로 로마의 칭호(Praetor: 집정관. Lictor: 집정관 밑에서 일하는 관리)를 사용하면서 로마의 법과 의식을 똑같이 준수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로마의 식민지란 로마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 로마의 축소판 곧 소 로마라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점에 있어서 빌립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울 당시에 빌립보가 유명하게 된 것은 로마 식민지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지리적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로마 신작로(The Via Egnatia)가 이곳을 통과하였는데, 그 길은 이달리야 동해안에 있는 뒤라키움(Dyrrhachium) 항구로부터 에게(Aegean) 바닷가에 있는 네압볼리에까지 통하는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
브루투스와 캐시우스가 이 도시를 군사상 요새로 만들려다가 전쟁에 패한 후에, 이곳은 중요한 상업 도시로 발달되어서 각양 생활에 변화가 일어났다. 원동(遠東)과 로마 관할 아래 있는 유럽은 흥미 있는 연락을 갖게 되어 빌립보에도 각색 인종이 같이 살게 되었으며, 따라서 각종 철학, 종교, 미신 등이 성행하였다. 이곳 주민들이 종교에 얼마나 열중하였는가는 빌립보 근처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이 고고학적 자료는 소위 ‘신화의 박물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저자의 「빌립보서」, pp. 28-29).
빌립보 성에서 수일을 유하던 바울 일행에 대해, 누가는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라고 하였다.
안식일(13:14의 주석을 보라.)은 바울 일행이 빌립보 성에 도착한 후에 맞은 첫 번째 안식일이다.
우리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누가를 가리킨다.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는 그 곳에 회당이 없었거나, 있었는데 알지 못해서 조용히 예배도 드리고 결례도 행할 만한 장소를 찾으려고 문밖 간기테스(Gangites: 현재의 안기테스) 강가에 나가서 앉았다는 것이다.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모인 여인들에게 번갈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물론, 바울이 주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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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인 여인들은 안식일에 강가에 모였다는 점과 유대교에 입교하는 조건인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남자들보다 더 개종하기가 쉬웠다는 점과 그녀들과 함께 있었던 루디아가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이라는 점(14절) 등을 미루어 보아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들로 짐작된다”(R. Earle).
렌스키(R. C. H. Lenski)는 “아주 적은 수의 여인들이었지만, 바울은 이 보잘것없는 출발을 경시하지 않았다. 설교자는 가장 적은 수의 청중들이라도 경시하지 말아야 하고, 그토록 적은 수의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로 그 적은 수의 청중은 때때로 그 곳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은총으로 충만해지곤 한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마게도냐 부인들의 위치는 특별하였다고 한다. 부인의 요구로 한 일은 법률의 제재를 받지 않으며, 마게도냐의 이름은 모계로부터 받았다고 하며, 부인들은 개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부인들의 기념비까지 세워졌다는 것이다(Lightfoot).③
복음 선교의 결과에 대해, 누가는 【14】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라고 하였다.
두아디라(θυατείρων) 성은 소아시아의 서쪽이자 버가모의 동남쪽 60㎞ 헤르무스 강(R. Hermus: 터키 이름은 Gediz Chai)의 지류 리코스 강(R. Lycus: 터키 이름은 Gordes Chai)의 북방에 펼쳐져 있는 기름진 평야에 위치하며, 버가모와는 간선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고대의 루디아(Lydia) 지방의 성읍인데, 오늘날 터키의 성읍 아키사(Akhisar)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곳 외에 세 군데에 언급되었는데 모두 두아디라 교회에 관련되었다(계 1:11, 2:18, 24).
이 희랍풍의 성읍은 셀레우커스 I세(Seleucus I: 주전 312-280)가 설립하여 마게도냐의 졸병들을 식민시키고, 또 유대인도 식민시켰다. 주전 190년에 셀레우커스 왕조의 지배가 끝난 다음에, 버가모 왕국이 주전 133년까지 지배하였고, 그 후에 로마가 통치하였다.
두아디라는 중요한 통상로가 있었기 때문에 상공업 도시로 발달하게 되었다. 두아디라에서 출토된 비문에 의하면, 여기에는 여러 가지 동업 조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구리 세공, 피혁 가공, 염색, 양모 방적, 아마포 등 업자의 조합이 있었다. 이 땅은 소아시아에 있어서 어느 성읍보다도 일찍 동업 조합이 조직되어 발전되었다고 한다.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는 두아디라에서 나는 꼭두서니의 뿌리로 물들인 자주 행상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루디아라는 이름의 한 여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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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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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색 옷감은 분명히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사치품이었다”(E. Haenchen). 따라서, “자주 장사는 대도시를 필요로 하였다. 우리는 루디아가 과부이었고, 두아디라에서 수입하여 빌립보에서 파는, 죽은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R. C. H. Lenski).
그 루디아가 바울의 복음 설교를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2:26의 주석을 보라.)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프로세케인, προσέχειν: 8:6의 주석을 보라.) 하셨다. 루디아는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이 된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의 개종에 대해, 누가는 【15】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라고 하였다.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는,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이 다 ‘세례’(1:5의 주석을 보라.)를 받고 바울 일행에게 간청했다는 것이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은 루디아가 세례를 베풀어 준 바울 일행에게 보은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루디아는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라고 간청만 한 것이 아니라, 강권하여 있게 하였다. 이로써 루디아의 집은 유럽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참조: 12:12, 고전 16:9, 골 4:15, 몬 2). 이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나중에 가장 아름다운 성도들과 교역자의 관계를 이루었다(저자의 「빌립보서」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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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 출처: 최세창, 사도행전(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443-449.
드로아는 16:8의 주석을 보라.
사모드라게(Σαμοθρᾲκην)는 드로아와 네압볼리 중간이자 에게해 동북부 드라게 연안에서 40㎞ 남쪽에 있는, 동서로 긴 타원형의 모양인 헬라의 섬이다. 면적이 180㎢이고, 중앙에는 눈을 이고 있는 펭가리 산(Phengari: 표고 1,590m)이 우뚝 솟아 있어 항해자에게 좋은 목표가 되었다. 이 곳은 저녁에 바람이 자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배는 야간에 입항하였다.①
네압볼리(Νεάπολιν)는 마게도냐의 빌립보의 항구이며, 오늘날의 카발라(Kavalla)이다. 뒤라키움(Dyrrhachium)에서 동쪽으로 뻗은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의 종착역으로서 수륙 교통의 요충지이다.②
드로아에서 네압볼리까지는 해로로 250㎞인데(E. Haenchen), 드로아에서 배를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간 것은 순풍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반대 방향으로 5일 걸려서 온다(20:6).
배로 네압볼리로 간 바울 일행에 대해, 누가는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라고 하였다.
빌립보(Φιλίππους)는 {트레이시(Thrace)의 접경에 자리잡은 마게도냐 서부의 주요한 도시이었다(16:12). 이 도시는 본래 작은 샘들이 많았기 때문에 ‘작은 샘들’이란 뜻인 크레니데스(Krenides)라고 불렸었다. 그러나 주전 356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마게도냐의 왕인 필립 2세(Philip II: 주전 359-336)가 이 곳에 많은 사람을 새로 이주시키고, 도시를 확장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따라 이 곳을 필립(빌립보)이라고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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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A. J. Kinsella, “Samothrace” in ISBE, Vol. IV, p. 2675. E. W. Saunders, “Samothrace” in IDB, Vol. 4. pp. 197-198. E. Haenchen, R. Earle, 黑崎幸吉, 이상근.
2) 참조: M. N. Tod, “Neapolis” in ISBE, Vol. IV, p. 2126. F. Finegan, “Neapolis” in IDB, Vol. 3, pp. 527-528. E. Haenchen, R. Earle,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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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는 유럽에서 가장 좋은 전략지이었다. 즉, 트레이시(Thrace)의 국경에 가깝고 간기테스(Gangites: 현재의 안기테스
주전 42년에 빌립보는 아우구수투스(Augustus)에 의해서 정복되어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저자의 「빌립보서」, pp. 26-28).
마게도냐 지경의 첫(프로테, πρώτη) 성이요는 {빌립보가 마게도냐 지방(province)의 수도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가 수도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빌립보가 마게도냐 제일 지역의 수도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암비볼리가 그 지역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밝혀진 사실은 프로테가 단순히 특정 도시에 부여되었던 명예로운 명칭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누가 역시 이런 의도로 이 명칭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사실상 빌립보는 그 지역의 유일한 식민지이었고, 또 군사적·상업적 중심지(동서양의 무역 통로)로서 마게도냐에서 제일 중요한 도시이었다. }(저자의 「빌립보서」, p. 29).
로마의 식민지 제도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로마는 점령한 지역이 군사적인 의미가 있을 때만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들이 취한 습관적인 방법은 300명가량의 노련한 병사와 처자들을 전략적 간선 도로의 중심지 되는 곳에 주둔시키는 것이다.
식민지는 광범위한 로마 제국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또한 전략적 중심지로 삼기 위하여 건설된 것이다. 식민지가 처음에는 이탈리아 안에 건설되었는데, 나중에는 로마 제국이 확장됨에 따라 제국 안 도처에 산재하게 되었다. 즉, 식민지의 기원은 군사적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로마 정부는 식민지로서의 영예를 바라고 충성을 다할 도시들에게도 식민지란 칭호를 부여하였다.
로마의 식민지에는 여러 가지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았다. 식민지 사람들의 이름은 로마 족속의 명부에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세금과 헌납금을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토지 소유권과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에는 자치권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자체 내의 행정관과 원로원이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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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주민들은 로마어를 사용하였고, 로마의 복장을 했으며, 또한 그 지방 장관들은 스스로 로마의 칭호(Praetor: 집정관. Lictor: 집정관 밑에서 일하는 관리)를 사용하면서 로마의 법과 의식을 똑같이 준수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로마의 식민지란 로마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 로마의 축소판 곧 소 로마라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점에 있어서 빌립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울 당시에 빌립보가 유명하게 된 것은 로마 식민지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지리적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로마 신작로(The Via Egnatia)가 이곳을 통과하였는데, 그 길은 이달리야 동해안에 있는 뒤라키움(Dyrrhachium) 항구로부터 에게(Aegean) 바닷가에 있는 네압볼리에까지 통하는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
브루투스와 캐시우스가 이 도시를 군사상 요새로 만들려다가 전쟁에 패한 후에, 이곳은 중요한 상업 도시로 발달되어서 각양 생활에 변화가 일어났다. 원동(遠東)과 로마 관할 아래 있는 유럽은 흥미 있는 연락을 갖게 되어 빌립보에도 각색 인종이 같이 살게 되었으며, 따라서 각종 철학, 종교, 미신 등이 성행하였다. 이곳 주민들이 종교에 얼마나 열중하였는가는 빌립보 근처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이 고고학적 자료는 소위 ‘신화의 박물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저자의 「빌립보서」, pp. 28-29).
빌립보 성에서 수일을 유하던 바울 일행에 대해, 누가는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라고 하였다.
안식일(13:14의 주석을 보라.)은 바울 일행이 빌립보 성에 도착한 후에 맞은 첫 번째 안식일이다.
우리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누가를 가리킨다.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는 그 곳에 회당이 없었거나, 있었는데 알지 못해서 조용히 예배도 드리고 결례도 행할 만한 장소를 찾으려고 문밖 간기테스(Gangites: 현재의 안기테스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모인 여인들에게 번갈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물론, 바울이 주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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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인 여인들은 안식일에 강가에 모였다는 점과 유대교에 입교하는 조건인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남자들보다 더 개종하기가 쉬웠다는 점과 그녀들과 함께 있었던 루디아가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이라는 점(14절) 등을 미루어 보아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들로 짐작된다”(R. Earle).
렌스키(R. C. H. Lenski)는 “아주 적은 수의 여인들이었지만, 바울은 이 보잘것없는 출발을 경시하지 않았다. 설교자는 가장 적은 수의 청중들이라도 경시하지 말아야 하고, 그토록 적은 수의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로 그 적은 수의 청중은 때때로 그 곳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은총으로 충만해지곤 한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마게도냐 부인들의 위치는 특별하였다고 한다. 부인의 요구로 한 일은 법률의 제재를 받지 않으며, 마게도냐의 이름은 모계로부터 받았다고 하며, 부인들은 개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부인들의 기념비까지 세워졌다는 것이다(Lightfoot).③
복음 선교의 결과에 대해, 누가는 【14】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라고 하였다.
두아디라(θυατείρων) 성은 소아시아의 서쪽이자 버가모의 동남쪽 60㎞ 헤르무스 강(R. Hermus: 터키 이름은 Gediz Chai)의 지류 리코스 강(R. Lycus: 터키 이름은 Gordes Chai)의 북방에 펼쳐져 있는 기름진 평야에 위치하며, 버가모와는 간선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고대의 루디아(Lydia) 지방의 성읍인데, 오늘날 터키의 성읍 아키사(Akhisar)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곳 외에 세 군데에 언급되었는데 모두 두아디라 교회에 관련되었다(계 1:11, 2:18, 24).
이 희랍풍의 성읍은 셀레우커스 I세(Seleucus I: 주전 312-280)가 설립하여 마게도냐의 졸병들을 식민시키고, 또 유대인도 식민시켰다. 주전 190년에 셀레우커스 왕조의 지배가 끝난 다음에, 버가모 왕국이 주전 133년까지 지배하였고, 그 후에 로마가 통치하였다.
두아디라는 중요한 통상로가 있었기 때문에 상공업 도시로 발달하게 되었다. 두아디라에서 출토된 비문에 의하면, 여기에는 여러 가지 동업 조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구리 세공, 피혁 가공, 염색, 양모 방적, 아마포 등 업자의 조합이 있었다. 이 땅은 소아시아에 있어서 어느 성읍보다도 일찍 동업 조합이 조직되어 발전되었다고 한다.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는 두아디라에서 나는 꼭두서니의 뿌리로 물들인 자주 행상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루디아라는 이름의 한 여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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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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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색 옷감은 분명히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사치품이었다”(E. Haenchen). 따라서, “자주 장사는 대도시를 필요로 하였다. 우리는 루디아가 과부이었고, 두아디라에서 수입하여 빌립보에서 파는, 죽은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R. C. H. Lenski).
그 루디아가 바울의 복음 설교를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2:26의 주석을 보라.)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프로세케인, προσέχειν: 8:6의 주석을 보라.) 하셨다. 루디아는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이 된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의 개종에 대해, 누가는 【15】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라고 하였다.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는,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이 다 ‘세례’(1:5의 주석을 보라.)를 받고 바울 일행에게 간청했다는 것이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은 루디아가 세례를 베풀어 준 바울 일행에게 보은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루디아는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라고 간청만 한 것이 아니라, 강권하여 있게 하였다. 이로써 루디아의 집은 유럽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참조: 12:12, 고전 16:9, 골 4:15, 몬 2). 이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나중에 가장 아름다운 성도들과 교역자의 관계를 이루었다(저자의 「빌립보서」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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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 출처: 최세창, 사도행전(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443-449.
아멘.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
필자의 사도행전 16:11-15의 주경신학적 연구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목사님께서 주 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별도 게시물로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