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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

Author
최세창
Date
2024-09-05 19:07
Views
1407


<야고보서 4:11-12>

11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1. 시작하는 말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이 정확한지 그른지도 모른 채, 서로 비방하거나 판단하면서도, 그런 말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불행을 초래하는가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없고, 책임 의식도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기독교인들에게 피차에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좇아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과 거듭남, 자유와 평화, 성결한 삶과 영생의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입니다. 그런 기독교인들이 피차에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율법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사람은, 그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자인 것입니다.

2. 비방하는 자나 판단하는 자

그 하나님의 율법 중 율법은 사랑의 법이 아닙니까? 마태복음 22:37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같은 기독교인들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자입니다.

“비방하지”의 헬라어 카타라레이테(καταλαλείτε)는, 말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거나 해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바클레이(W. Barclay)는 “현재 그곳에 없기 때문에 변명할 수 없는 사람을 비방하고, 모욕하며, 중상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판단하는”의 헬라어 크리논(κρίνων)은 단순히 비평하는 정도가 아니라, 남에 대해 결정적으로 단정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깁슨(E. C. S. Gibson)은 “야고보는 거칠고 트집만 잡는 비판을 염두에 둔 것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취지는, 그곳에 없기 때문에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없는 사람에 대해 상처를 입히거나, 불명예스럽게 단정하거나, 인격 모독을 하는 말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과 야고보 사도가 판단하지 말라고 한 말씀은 어려운 문제를 초래합니다. ‘남에 대한 판단이라는 판단은 다 하지 말라는 것인가? 해야 할 판단이 있고, 해서는 안 될 판단이 있다는 것인가, 해야 할 판단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고린도전서 6:2을 보면,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6에는,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라고 했습니다.

포티트(G. Poteat)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않고 인생을 살 수 있는가? 다른 사람과 관계할 때, 그들의 성격이나 능력들을 비평적으로 평할 수 없는 것인가? 그와 같이 필요한 식별이 비난받아야 하는가? 더욱이, 저자인 야고보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금하고 있는 비난을 하고 있지 않는가? 예를 들면, 불충실한 피조물들, 죄인들, 이중 마음을 가진 사람들 등이 있다. 주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처럼, 야고보 사도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도덕적인 평가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석했습니다.

남을 판단해야 할 때는, 자기자신을 척도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이나 비판의 척도는 사람들의 뜻이나 생각이 아닌, 주 하나님의 뜻이나 생각에 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판단이나 비판은 보편타당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같은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사람들에 대한 판단이나 비판은, 그들의 유익과 덕을 위한 사랑에 이끌려야 합니다.

미국 여배우인 안젤리카 휴스턴은, 까다로운 감독으로 소문났던 아버지 존 휴스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아버지는 일상생활에서도 적당히 넘어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고호를 싫어한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당장 고호의 대표적인 그림과 함께 고호가 싫은 이유를 논리적으로 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답을 못하자 아버지는 “사물을 절대 경솔히 판단해서는 안 된다.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편견을 갖는 태도야말로 가장 나쁜 것이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칼빈(J. Calvin)은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의 방향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태어날 때부터의 병폐가 있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이런 병폐를 버리고, 우리는 주 예수님의 지체로서 주 예수님의 사랑의 법을 따라 판단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이런 판단과 비판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이 동기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과 바울 사도와 야고보 사도가 금한 것은 위장된 우월감에서, 또는 우월감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기자신을 척도 삼아서, 또는 그릇된 지식과 정보를 척도 삼아서 남을 정죄하고 파괴하는 악의에 가득 찬 판단과 비방입니다. 이런 판단이나 비판이나 비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좌절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목숨을 끊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쉽지는 않지만, 그런 판단이나 비판이나 비방에 대해 초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 남의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기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미국 연예인 조지 클루니는, “아버지는 늘 제게 ‘사람들이 네게 대해 좋게 평을 한다고 해서 네가 꼭 그렇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너를 아주 심하게 헐뜯고 비난할 때라도 네가 꼭 그처럼 나쁜 놈만은 아니란 걸 기억해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이 말씀은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겪는 많은 어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설립한 바울 사도가,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을 가짜라고 하는 그 고린도 교인들의 비방에 대해 한 말씀이 고린도전서 4:3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또 주 예수님의 종이요 사도로서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식의 판단이라면,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말 귀를 기울여 받아들여야 할 판단은, 주 하나님의 판단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야고보 사도는 악의로 왜곡한 것을 척도로 삼는 비방이나 비판은 물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나 그릇된 지식이나 정보를 척도로 삼는 판단이나 비방을 금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첫째, 남을 비방하는 것은 곧 사랑의 법을 비방하는 것이고, 남을 판단하는 것은 사랑의 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땅히 사랑의 법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법을 어김으로써 그들 자신을 사랑의 법 위에 두는 교만 가운데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멋대로 사랑의 법을 지키거나 거역하고, 생략하거나 왜곡함으로써 사랑의 법을 재판하는 오만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야고보는 비방이나 판단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입법자와 재판자는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뿐이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너희가 누구관대 감히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절대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없애 버릴 사람도 없고, 논박할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선과 악이 뒤바뀌기도 하는 세상의 모든 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종속되어야만 인간을 위한 법으로서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의미에서, 유일한 입법자이신 하나님은 또한 유일한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의 재판권은 당신의 절대성과 창조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진정한 입법자시며 재판장이시므로, 하나님의 법을 어겨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을 빼앗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참람된 행위인 비방이나 판단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야고보 사도는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인 네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처럼 정확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3.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과 뒤섞여 살면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비방하거나 비판하거나 판단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기자신을 척도로 삼아 판단을 하거나, 그릇된 지식과 정보를 척도로 삼아 비판을 하거나, 악의로 왜곡한 것을 척도로 삼아 비방과 판단을 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언행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그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그 율법의 재판자가 되는 오만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비방과 비판과 판단이 필요할 때에는, 반드시 유일한 입법자이시며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척도로 삼고, 나쁜 동기와 목적이 아닌 사랑의 동기와 목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설교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7권/ 기타 다수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Total Reply 2

  • 2024-09-06 17:18

    아멘.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해지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공유합니다.

    §약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 너는 누구이기에 (다른 믿음 형제의 악을) 판단하느냐? ❶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 ❷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 율법의 실행자(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❸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니 ⇒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 성도들은 최종적으로는 율법을 주시고 이를 가지고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 서야 하기에, ‘믿음 형제’ 간에 악을 놓고 율법을 기준으로 서로 비방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율법을 비방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며 ㉡인간은 율법의 실행자이며, 대신에 하나님 같은 재판자가 아니다.

    <형제들아> ☞ KJV에서 brethren이고, ❶이는 ‘믿음 형제’, 즉 성도를 대상으로 한다. ❷이는 신앙 초보자, 교인, 혹 교회와 무관한 네 이웃을 대상으로 하는 내용이 아니다. ❸야고보서는 약1:2 등 ‘형제들아’가 15회 등장하여 신앙이 성숙한 성도를 대상으로 쓴 내용이다. ❹ 야고보서에서 행함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칭한 것은 이에 대한 오해와 이해 부족에 기인한다. [신1:16 내가 그 때에 너희의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 ☞ 구약에서 ‘형제’는 피를 나눈 혈육지간 [사66:5] [사66:20] [렘7:15] [호13:15] [마1:2] [행1:14] [롬1:13] ☞ 형제는 성도들 [고전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성도들 [고전1:11,13] ☞ 형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고전10:1] [갈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 형제는 자유를 위하여 부름받음 [딤전1:4] [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 거룩함을 입은 자들 [약1:2]

    <비방하지 말라> KJV에서 “Speak not evil”이고 “악한 말을 하지 말라”다. 둘 간에 어감상에 차이가 있다. 참조로 KJV에 defame, blasphemy, reproach, 등 ‘비방’을 명백히 밝히는 표현이 따로 있다. [막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 이하 “악한 말을 할자가 없다.”이나, 개역개정은 이를 항상 비방으로 표현한다. [행23: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 유대인의 규칙 [벧후2:10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 [유1: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잘 알지 못하는데, 비방한다…. 인간사에서는 흔한 일이다.

    <율법의 준행자> [롬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율법을 행해야 [약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 율법을 실천하는 자 ⇒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음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 이 질문의 정답은? 하늘에 계신 창조주, 스스로 있는 분이시다. 율법을 주신 이도 심판하실 이도 구원을 주실 이도 심판으로 멸하실 이도 그 한 분뿐이시다. 단,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3권분립을 통해 권력을 분산하고 서로 견제하게 한다. 황제나 독재자가 있는 나라와 다르지만, 한편, 성경과 무관하게 탄생한 교회사의 주인공이라고 착각 중인 로마 카톨릭에는 통치하는 황제가 있는데, 만일 누가 교회에서 입법, 재판, 행정을 다 자기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다면 [계17:18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 그는 로마 카톨릭의 ‘황권’을 자기 신앙 모본으로 삼은 ‘땅의 왕’의 길이 아닌지 돌아보라. 성경에 이들의 역사적 등장과 이 땅에서 활동과 최종 퇴장이 요한계시록 17장 등 분명히 예언(계시)되어 있다.

    <입법자> ☞ KJV에 lawgiver이다. 개역개정에서 ‘규’, 입법자, 통치자, 율법을 세우신 이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관련 구절을 서로 찾기 게 어렵다. 더구나 ‘규’는 왕정 시대의 유물로, 현대 일반인이 이 의미와 배경 절차를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기독교의 율법과 심판, 말씀과 교리는, 심지어는 구원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내려 주셨고 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여기에 인간으로부터 시작한 게 아예 없다. [창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통치자 [민21:18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 하였더라 그들은 광야에서 맛다나에 이르렀고] ☞ 규는 (제왕의) 홀(笏); 왕권, 주권 상징 [신33:21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 입법자 [시60:7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my lawgiver’] ☞ 규 [시108:8] ☞ 규는 (제왕의) 홀(笏); 왕권, 주권 상징 [사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 율법을 세우신 이..

    <재판관> ☞ KJV에 ‘재판관’은 없으나, 개역 개정 12절에 의역해 임의로 추가했다. 이는 11절에 마찬가지로 ‘입법자’는 임의 추가했으며, 성경을 번역할 때 이런 방식의 임의로 하는 삭제, 추가, 변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어렵게 하고, 짝이나 관련 성경을 찾지 못하게 막는다.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눅6: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 구원과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은 안식일에도 해야, 안식을 준수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명령 [눅9:56 인자는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왔느니라.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 인자의 역할 [고전5: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유1:5]

    <이웃을 판단하느냐> KJV에 “judgest another”이고 “다른 이를 판단하느냐?”이고, 문장의 구조상 “형제를 판단하느냐?”이다. 개역 개정은 성도와 일반인을 다 포함하는 광범위한 표현인 ‘이웃’으로 되어 해석상 혼선을 부른다. 성경을 번역할 때 임의로 하는 삭제, 추가, 변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어렵게 하고, 짝이나 관련 성경을 찾지 못하게 막는다. [롬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인생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 [롬14:4]


    • 2024-09-06 19:34

      필자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목사님께서 주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해지시길 기도합니다. 본문에 대한 제 소견을 공유합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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